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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의 포스트모던적 경향
현대철학의 성격
현대 철학은 그 어느 시대보다 다양하고 다원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단 하나의 패러다임을 철학에 요구 한다는 것 자체가
비판과 반성을 생명으로 하는 철학 정신에 거슬린다고 본다면 다양한 목소리와 다양한 사고는 오히려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철학적 사유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까닭은 현실의 변화가 다양하고, 다양한 만큼 여러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철학은 예로부터 '경이' 또는 당혹감에서 시작한다고 하거니와, 당혹감은 현실의 변화와 인간 존재의 부조리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존재 부조리와 현실 문제에 놀라움이나 당혹감, 또는 때로는 분노조차 없다면 좀 더 철저한
철학적 사유가 형성될 수 없다. 한 시대의 철학적 사유가 다른 시대와 구별할 수 있는 문제 의식과 논리를 갖는 것도 현실 경험과
현실에 대한 반응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파악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이론적 노력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 현실을 바르게 평가하고 바르게 방향 설정을 해보고자
하는 실천적인 노력이 철학의 변화를 가져온다.
현대 철학이 다양하다고 해서 그것이 사유의 철저성을 외면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현대 철학은 어느 시대 보다 더 비판적이고
자기 반성에 있어 철저하다. 현대 서양철학의 주류를 형성했던 현상학, 철학적 해석학, 구조주의, 비판이론, 분석철학, 그리고
새로운 과학철학 등은 과학과 문화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해 그 어느 때 보다 강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해 주고 있고, 그것 못지
않게 철학 자체에 대해서, 그리고 이론적 사유 일반에 대해서 다시 새롭게 반성하고 있다.
그 결과, '상대주의', '지적 허무주의' 혹은 '철학의 종말'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다시 한번 검토하고 비판할 수 있는 지적 충격을 제공해 준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현대 철학의 흐름 가운데 특히 1960년 대 이후 강력한 운동으로 등장한 조류로는 철학적 해석학(한스 게오르그 가다머, 유르겐
하버마스, 뽈 리꾀르), 프랑스 '빠리의 철학'(미셀 푸꼬, 자끄 라깡, 엠마누엘 레비나스, 자끄 데리다, 질 들뢰즈, 쟝 프앙수아
리오타르,) 그리고 '새로운 과학철학'(마 이클 폴라니, 스티픈 툴민,토마스 쿤,임레 라카토스, 파울 파이어아벤트), '포스트 분석
철학'(리처드 로티,힐러리 퍼트남)을 들 수 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거의 자명한 것으로 수용했던 이성의 절대성, 자아의 명증성, 과학의 확실성, 언어의 도구성, 사실의
우위성 등에 대해서 이들은 매우 비판적이 되었다. 물론 여러 조류 사이에는 개별적인 이론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근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출현과 계몽주의의 확산으로 형성된 서양의 근,현대 문화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반성하고 전통
적인 지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뒤엎는 운동이란 점에서 이들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의 철학을 만일 포스트모더
니즘이란 이름으로 모두 포괄할 수 없다면, 적어도 포스트모던적 경향을 띤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던적 경향은 철학에만 고유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문화의 전반적인 현상이며 철학 보다는 오히려 현대 예술,
문학, 건축 등에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다.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 자체는 건축 분야에서 먼저 쓰이기 시작했고,
그 다음 문학에 정착되었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좁은 의미로 이해할 때 문학과 예술 안에서 일어난 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에서는 1970년대 말에 와서 몇몇 철학자들이 이 말을 쓰기 시작했고 데카르트 이후 계몽의 철학과 헤겔주의,
맑스주의, 실증주의 등 거대 이념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시대 의식이 반영된 말이 되었다. 철학적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티, 곧 데카르트 이후의 현대적 시대의 기획 이후의 시대와 문화와 관련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증주의 혹은 과학적 객관주의의 대안으로서 마이클 폴라니와 같은 과학철학자는 이미 1950년대 말 '비판 이후의 철학'(post-
critical philosophy)이란 말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이 표현을 그는 그의 책 '인격적 지식'의 부제로 달고 있다. 이것에 관해
폴라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붙인다.
"나는 이 책에 대해 '비판 이후의 철학'이라는 부제를 붙일 때 어떤 지적 전환점을 염두에 두었다. 비판적 운동은 지금은 거의
막다른 끝에 이른 듯 보이지만 인간 지성이 지탱한 것 가운데 아마도 가장 알찬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4,5세기는
중세적 우주를 서서히 파괴하거나 뒤덮으면서 이와 비슷한 기간 동안 지속했던 어떤 시대와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도덕
적 정신적 삶을 풍요하게 채워주었다. 기독교로 부터 물러받은 기름이 그리스적 합리주의의 산소에 맞닿을 때 맑은 불을 활활
태울 수 있었다. 하지만 연료가 다 떨어졌을 때 비판적 사고의 틀도 불타고 말았다".
폴라니가 뜻하는 '비판 이후'(post-critical)는 데카르트 이후 '모든 것에 대해서 의심하라'는 명제를 지적 준칙으로 삼은 비판적
전통이 이제는 끝났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내용으로 볼 때 이 말은 '포스트 모던'과 거의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티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제 서양 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퍼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존 레이치먼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는 "마치 토요타 자동차와 같아서 서로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고 조립된 다음 세계 도처
에서 팔리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진 국제적인 성격으로 인해 우리는 그것을 단지 서양에서 유행하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기 보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찾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현대 철학의 흐름을 '포스트모던적'이라고 규정할 때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현대철학은 과학과 기술이 현대 사회에 차지하고
있는 절대적 위치에 대하여 의심하고 세계의 의미 근원으로서의 인간 주체가 그렇게 절대적이 아님을 밝혀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현대철학은 크게 보아 두가지 방향에서 전통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하나는 객관주의 또는 실증주의로 대변되는 과학관에 대한 비판이요, 또 다른 하나는 주관주의 또는 주체에 대한 비판이다.
전자는 과학적 지식, 또는 과학적 합리성이 인간 존재를 궁극적으로 해명해 주리라는 기대에 대한 비판이요, 후자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의 주인이라는 생각에 대한 비판이다.
이 두가지 비판은 인식 영역에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로, 인간에 대해서는 반인본주의로 귀결한다.
객관주의 비판과 현대철학
근대 정신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과학적 합리주의라고 하겠다. 근대과학은 엄밀한 방법을 통해 실재 세계를 탐구하는 이론적인
작업임과, 동시에 미신과 편견으로 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실천적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과학적 합리성은 종교와
예술 등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과 달리 공공적, 객관적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수용되었고 모든 다른 종류의 합리성의 근거로 생각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르네 데카르트(1596-1650)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데카르트로
부터 시작된 근대적 합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점에서 반데카르르트적 정신을 그 기조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데카르트(1596-1650)는 서양철학에서 최초로 물질과 정신을 독립된 두 영역(실체)으로 분리하여 물질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정신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사유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물질에서 정신(혼)을 배제함으로써 물질(인간의 몸과 동물
의 몸을 포함하여)은 그 자체로 아무런 생명이 없는 일종의 기계요, 수학적.물리학적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데카르트의
물질과 정신의 분리는 자아 존재와 사유의 명증성으로 부터 물질 존재에 대한 지식, 즉 수학적 자연과학의 확실성을 보장하고,
다른 한편으로 물질과 다른 사유의 독자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결과 경험적인 차원에서 존재를 둘로 나누는 이원론이
초래되었고 그 이후 서양철학은 이 이원론에서 출발하여, 한편으로는 물질을 존재의 근원으로 보는 유물론과 정신을 존재의 근원
으로 보는 유심론적 철학 사이에 별로 승산없는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되게 되었다.
데카르트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과 더불어 방법론적 일원론(methodological monism)을 내세웠다. 이미 잘알려져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따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식 대상에 따라 인식 방법이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역설하였다.
자연학과 수학, 그리고 형이상학은 각각 감각적 대상, 양적 대상, 초월적 보편적 대상을 다룬다. 모든 인식은 지성을 통해 가능
하나 지성의 작동 방식은 대상에 따라 각각 다를 수 밖에 없다고 토마스는 보았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토마스의 방법 다원론에 반대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참된 학문에는 단 하나의 방법만이 있을 뿐이라고 역설
하였다. 빵을 굽는데는 빵굽는 기술이 밭을 가는 데는 밭가는 기술이 각각 따로 있지만, 학문(scientia)은 기술(ars)과 달리 육체
에 근거하기 보다 정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의 작용에 기초한 단 하나의 방법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리의
지성이 아무리 다른 대상에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마치 태양 빛에 대상에 따라 밝기가 달라질 수 없듯이 꼭 같은 방식으로 작동
한다고 믿었다. 정신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서는 '자연의 빛'이었다. 이 빛은 대상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제대로 쓰기만
하면 동일한 지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을 바탕으로 데카르트는 모든 학문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방법적 규칙을 제시하였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한 규칙은 내가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하지 아니한 것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성급한 판단이나
선입견(편견)을 전혀 허용하지 않고 명증적 인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선입견 또는 편견에 대한 거부는 곧 내
자신이 스스로 이성적으로 검토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이다. 전통을 통해 전수된 것, 기성인의 교육을
통해 배운 것, 이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비판적 이성을 신뢰했음을 뜻한다.
두번째 규칙은 검토하는 대상을 가능한 단순한 것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 규칙은 인식하기에 가장 쉬운 대상에서
부터 복잡한 것으로 차례로, 단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열거하고 전체를 한꺼
번에 통관해 볼 것을 규칙으로 제안한다.
사물에는 질서와 배열(ordo et dispositio)이 있기 때문에 사물을 탐구하는 정신의 작용에도 질서와 배열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여기에 반영되어 있다. 회의의 규칙, 분석의 규칙, 종합의 규칙, 열거와 통관의 규칙이라 부를 수 있는 이 네 규칙은 기하학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학문에는 어느 곳에나 적용시킬 수 있다고 데카르트는 믿었다.
데카르트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과 방법론적 일원론을 결합할 때 결국 계량적 자연과학적 방법을
정신의 영역에까지 적용하게 되고(18세기의 극단적인 데카르트주의자였던 라메트리와 19세기의 심리학이 그 경우이다) 방법에
대한 맹신주의를 낳게 된다. 이것은 후에 다른 철학적 운동과 결합하여 사실을 지식의 최종적 근거로 보는 실증주의와 과학적
지식은 개인의 주관과 선호, 개인적 이해와 편견 등과 무관하다고 보는 객관주의를 생성시키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데카르트 자신은 진리를 찾는 방법이 계량적이고, 관찰과 실험을 통한 검증적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감각적 경험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명증적인 직관을 토대삼아 그 직관으로부터 단계적으로 연역함으로써 진리에
이를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방법론적 일원론은 필연적으로 토대론(foundationalism)을 함축하고 있다. 이 토대는 데카
르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 자체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쉽게 치환될 수 있었고 그가 말한 방법도 계량적, 검증적 방법
으로 대치될 수 있었다. 하나의 형식적 구조가 형성되면 그 속에 담길 수 있는 내용은 쉽게 바뀔 수 있다.
현대 철학은 이러한 객관주의와 실증주의를 거부하는 점에서 반데카르트적 성격을 띤다. 우선 무엇보다도 객관주의와 실증주의
가 안고 있는 방법론적 일원론의 맹점을 지적한다. 현실을 탐구하는 데는 수학적,물리학적 방법만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일종
의 초월론적 방법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된 것이다.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 가다머의 해석학적 방법, 분석 철학의 언어분석적 방법
은 자연과학적 방법으로는 도무지 해명할 수 없는 인간의 의식과 사고, 역사와 언어, 이해의 문제, 미적 체험 등을 해명하기 위해
제안된 것이다. 그러나 파이어아벤트의 경우는 하나의 유효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방법 물신주의라고 비난한다.
방법론 자체를 거부하거나 혹은 경험을 초월해서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묻는 초월론적 방법을 추구하건 간에 중요한 것은
학문이 그 구조와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현실 자체가 다층적이고 다면적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의 방법으로 그것이 모두 드러
나리라는 생각을 상대화하게 된 것이다.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객관주의와 실증주의 비판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지금까지 과학의 토대로 생각된 '사실'의 개념이 문제시된 것이다. 이론 구성의
최종적 토대로 생각되던 '경험적 사실'이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 이론이나 세계관과 상관없이 그저
저렇게 따로 존재한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어떤 사실이라도 그것은 늘 '해석된 사실'이고 일정한 동기와 관심, 선입견과 기대
등에 의해 일정한 모습을 드러낼 뿐이라는 것이다. 포퍼의 경우, 경험적 사실은 이론의 토대가 아니라 이론을 반증하고 강화하는
비판적 기능을 가지고 있고, '기대'와 '추측'이 이론 구성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포퍼 자신은 사실상 방법
론적 일원론(그의 경우는 추측과 반박에 의한 비판적 방법 또는 시행 착오의 방법)을 고수했지만 경험적 사실이 이론 구성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탐구 행위 자체란 무수한 사실을 수집하여 그것에서 부터 이론을 추출하는 행위가
아니라 추측, 과감한 가설 등을 통해 끊임없이 수정, 진보해 가는 비판적 과정임을 보여준 점에서 공이 있었다.
쿤의 '패러다임'이나 핸슨의 '관찰의 이론 의존성'도 사실의 우위성을 거부하는 중요한 개념들이다. 물론, 실재론과 반실재론을
에워싼 논쟁이 현대 영미철학의 중요 쟁점 중의 하나이지만 어떤 경우라도 사실 혹은 실재가 언어, 개념적 도식, 해석의 틀, 관점
등을 매개하지 않고서는 인식 대상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공통적인 인식이라 하겠다. 이것을 극단적으로 밀고나가면 결국
상대주의에 이르게 된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파이어아벤트에게서 볼 수 있다. 파이어아벤트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제시된 모든 방법론이 하나같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어떤 방법론이라도 모두 그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지지될 수 있는 유일한
"규칙"은 "어떻게 해도 좋다"(Anything goes)"라는 것 뿐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쿤과 비슷하게 그는 이론간의 불가 공약성을
주장한다.
개념에 대한 의미와 해석, 그리고 그러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관찰 언명은 그것들이 발생하는 이론적 맥락에 의존해 있다.
어떤 경우에는 경쟁관계에 있는 두 이론의 근본 원리가 본질적인 측면에서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한 이론의 기본 개념은
다른 이론의 기본 개념으로 나타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이론은 어떤 관찰 언명도 공유하고 있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쟁적인 두 이론을 비교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파이어아벤트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이론의 비교를 가능케 하는 방법이 두가지 있다고 그는 생각
한다. 하나는, 비교되는 두 이론을 일련의 관찰 상황에 대질시키고, 각각의 경쟁 이론이 그 이론의 용어로 해석될 때, 이러한
상황과 양립 가능한 정도를 기록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그 이론이 연속적인가 비연속적인가, 정합적인가 비정합적인가, 대담한 추측인가 조심스러운 추측인가 하는
것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파이어아벤트는 결국 "남는 것은 심미적 판단, 취미에 의한 판단, 형이상학적 편견, 간단히
말하면 우리들의 주관적인 원망 뿐"이라고 함으로써, 이론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기준이 대립되는 상황에서는 불가 공약적인
이론들 간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주관적이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과학적 지식은 다른 분야의 지식에 비해 우월하다고 할 수
없다. 과학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합리성의 패러다임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이어아벤트는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 귀결할 수 밖에 없다. 방법론적 상대주의만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미국 공립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철폐했듯이 과학도 교조적으로 가르
치는 일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 하기까지 하였다.
폴라니의 경우는 훨씬 온건하다. 그는 매우 치밀한 연구를 통해 과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활동이란 삶의 현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그리고 우리의 신체적 조건과 지적 열망 등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인격적 참여'(personal commi
tment)의 행위임을 보여준다. 객관주의 또는 실증주의에서 보듯이 과학이 인격과 상관없는,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라 인격이 개입된 지식이라고 폴라니는 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 지식은 모두 주관적이라는 주장을 폴라니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인격적'(personal)이란 말과 '주관적'(subjective)란 말을 뒤섞여 쓰지 않는다. 그는 과학적 지식이란
한 공동체 속에서의 개인의 책임의식, 현실의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지적 열정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인격적 참여'에 관해서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격적 참여로 인해 우리의 이해가 주관적이 되지는 않는다. 파악과 이해는 자의적인 행위도 수동적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 타당성을 주장하는 책임적 행위이다. 그와 같은 인식은 숨은 현실과 접촉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이다. 인격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의 융합을 '인격적 지식'이라 부른 것이 합당한 것으로 보인다.
폴라니를 통해 우리는 과학의 객관성과 현실 관련성을 송두리채 팽개치지 않으면서도 인격과 상관이 없어야 곧 객관적이라고
보는 관점을 벗어날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은 가다머의 과학비판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과학철학과
관련해서 중요한 점을 많이 시사해 준다.
가다머에 따르면 근대 과학의 방법은 보편적임을 주장하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과학적 방법은 주체와 대상을 분리
하고 이론과 실천을 분리함으로써 인간의 의미 체험과 역사와 현실 감각을 과학의 영역에서 모두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과 달리 해석학은 과학적 방법에 일정한 자리를 부여하면서 자연 해석과 역사 경험 등 인간의 포괄적 경험을 중시한다. 이
경험을 가다머는 <해석학적 경험>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경험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미 그 속에 이해가 개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해는 여러 현상 가운데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공통되고 보편적인 현상이다. 인간은
사물과 달리 자신이 처한 세계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해석하고 이해하고 세계에 참여한다.
이렇게 보면 과학적 인식도 세계 안에 처해 있는 인간의 이해 방식의 하나이므로 인간의 보다 넓은 경험의 영역 안에 포섭된다.
이해는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 방식이고, 이런 의미에서 이해는 보편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성은 무시간적, 절대적 보편성과
확연히 구별된다. 인간의 지식은 본질적으로 우연적이고, 탄탄한 토대를 결여하고 있다. 가다머는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항상 관련되어 있는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이해라는 현상 자체는 보편적이지만, 그것은 항상 어떤 특정한 상황과
전통, 전이해(前理解)등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을 일컬어 <이해의 역사성>이라고 부른다. 이해의 역사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가다머는 사물을 판단하기 전에 우리가 미리 가진 판단(선입견), 전통, 권위 등을 들고 있다. 선입견, 전통, 권위는 이해를
방해하기 보다 오히려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것은 계몽의 철학을 통해 매도된 전통과 권위, 그리고 선입견을
복권시킨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역사성>을 이해의 가능 조건으로 내세움으로써 우리의 이해는 늘 역사와 시간을 통해
매개된다는 사실과, 유한한 시간과 상황 속에서도 이해의 주체는 한 개인의 주관성을 뛰어넘어 역사 속에 매개되는 보편적인
차원에 참여한다는 것을 가다머는 보여준다.
<이해의 역사성>을 통해 개별성과 우연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보편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은 <지평혼융>이란 개념과
<영향사>(또는 작용사)란 개념 속에도 나타난다. 가다머는 이해를 <다른이의 자리로 자신을 옮겨보는 것>(슐라이머허)또는
<다른이의 같이 느낌>(딜타이)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두 개의 다른 지평이 서로 뒤섞여 하나로 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
지평융합은 단순히 두 지평이 서로 뒤섞여 하나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크고 높은 <하나의 단일한 지평> 속에 두 지평이 함께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해는 단지 두 지평의 만남이 아니라 너와 나보다 크고 높은 지평을 함께 상승, 참여하는 것이다. <영향사>라는
개념도 역사와 전통, 텍스트에 대한 일정한 해석이 텍스트를 읽고 과거를 해석하는 사람의 의식에 이미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역사적 시점에서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사람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그는 보편적
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는 것이 된다. 역사성을 통해 형성된 이 보편적 질서가 이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가다머의 이론은
인문사회과학 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일에 개입할 수 밖에 없는 자연과학에도 해당된다.
현대철학의 흐름 속에서 사실과 가치의 엄격한 이원론이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이제 명백해졌다. 앞서 얘기한 폴라니,
파이어아벤트, 가다머 등 각각 다른 전통에 서있는 철학자들이 사실과 가치의 이원론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한결같이 지적한다.
어떤 사실도 가치를 통해 매개되고, 어떤 가치도 사실과 현실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폴라니는 자연과학적 지식과 경험
조차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사회및 학문 공동체 속에서 개인의 가치판단과 인격적 개입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암묵적인 지식', 지적 열정, 사회성, 신체적 숙련과 훈련, 믿음 등이 과학적 탐구의 필수조건임을 폴라니는 강조한다. 과학에서의
인격적 요소와 가치 배제는 결국 지적 자유를 위협하는 전체주의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어떤 방식
으로든 지식과 경험에서 인격성을 배제하는 것을 반대한다. 분석철학 전통에 있으면서도 자연주의를 비판하는 퍼트남의 경우
이것은 "사실은 가치 담지적이고 또한 가치도 사실 담지적"이라고 표현한다.
허버트 마르쿠제와 유르겐 하버마스의 경우는 사실과 가치의 이원론이 불가능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과학은 (과학기술을 포함하
여)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르쿠제는 가치 중립성을 주장한 막스 베버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술적 이성 개념 자체가 아마도 이데올로기적이다. 기술의 적용 뿐만 아니라 기술 자체가 (자연과 인간의) 지배요, 방법적,
과학적, 계산적 통제이다. 특수한 목적과 지배 관심이 '결과적으로' 그리고 외부로 부터 기술에 스며든 것이 아니다. 기술은
언제나 역사적, 사회적 기획이다."
하버마스도 마찬가지로 지식이란 언제나 일정한 관심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연과학은 기술적 관심에 의해, 역사
과학은 실천적 관심에 의해, 사회과학은 해방적 관심에 의해 주도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관심'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 지식은
없다. 여기서 '관심'이란 단지 무엇에 대해 마음을 두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이해(利害)에 대한 고려가 담겨있다. 지식을 추구
하는 행위는 '이해 관계없는 관조'(후설)가 아니라 언제나 이해 관계가 있다는 뜻이다.
현대철학, 특히 그 가운데서도 현대 과학철학과 철학적 해석학은 객관주의와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과학과 과학적 합리성이
인간의 삶 속에서 차지 하고 있는 위치에 관해 좀더 균형잡힌 모습을 보여주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과학과 과학적 합리성이
인격적 참여와 신념, 세계관을 배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정한 세계관이 늘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쿤의 경우는
과학 이론의 변화를 단지 몇개의 개념과 이론 수정에 그치지 않고 세계관의 변화로 보고 있다. 파이에아벤트나 마르쿠제처럼
과학과 과학 기술 자체를 곧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보고 있지만 이들의 입장을 모두 수용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과학과 과학 기술
에는 그와 같은 측면이 늘 도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이 단순히 주관적이지도 않고 단순히 객관적이지 않는,
근본적으로는 인격적인 참여에 의한 지식이라는 폴라니의 입장은 현실의 구조와 의미를 드러내고자 하는 지적 추구가 공동체
내에서의 책임적인 삶으로서 매우 의미있는 작업임을 보여주었다. 폴라니의 과학철학은 과학을 이데올로기로서의 닫힌 체계로
환원하기 보다는 과학을 오히려 열린 체계로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요컨데 현대철학은 과학적 지식의 절대성과 우월성 주장,
그리고 과학적 지식이란 세계관과 신념과 상관없이 엄밀한 관찰과 실험에 근거하는다는 귀납주의적 과학관, 그리고 과학과 과학
기술을 통한 인간의 무한한 진보에 대한 신뢰가 문제있음을 밝혀주었다고 하겠다.
주관주의 비판과 현대철학
현대 철학은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할 때도 반 데카르트적 경향을 띠고 있다. 데카르트는 지식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최종적인 근거점을 요구하였다. 데카르트는 이른바 '아르키메데스의 점'이라고 알려진 이 최종적인 근거를 사유
하는 자아에서 찾았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마치 삼각형은 세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증적
이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명증적이고 절대 근거인 자아 존재와 사유를 바탕으로 신존재와 물질 세계의 확실성을 확립하였다.
자아 존재와 자아의 사유를 통해서 지식의 확실성을 확보하고 세계를 근거지우려는 데카르트의 노력은 그 이후 자아중심적 주관
주의 전통을 형성하였다. 비록 데카르트 철학은 끊임없이 비판의 표적이 되긴 했지만 칸트와 피히테, 셸링과 헤겔 등으로 이어
졌고 그 정신은 20세기의 데카르트주의자라 할 수 있는 후설을 통해 계승되었다.
데카르트적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특징짓는 조건이 다름 아니라 자신과 스스로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책상, 컴퓨터, 책, 이와 같은 사물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자기와 스스로 관계할 수가 없다. 사물로서의 동일성을 지니지만
'자기'로서의 동일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통해 '자기'와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자기와 관계맺는 당사자를 일컬어 '자아' 또는 좀더 현대적인 용어로 '주체'라고 부른다.
현대 철학자 가운데서 후설을 제외한 현상학자들(하이데거, 메를로 뽕띠, 레비나스), 철학적 해석학자들(가다머, 리꾀르, 하버
마스, 아펠), 과학철학자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포퍼)는 자아 중심의 철학에 대해서 한결같이 비판적이다.
먼저 포퍼의 경우를 살펴보자. 포퍼를 검토해 본 결과 얻을 수 있는 소득은 자아 또는 주체에 대한 현대 유럽철학의 비판적 관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포퍼는 객관적인 지식이 심리적인 의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형성되는 제 3 의 세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이른바 '인식 주체가 없는 인식론'을 주창하였다. 전통적 인식론은 지식의 문제를 자아의 심적 작용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주관주의를 벗어날 수 없을 뿐더러 과학적 지식의 성장과 진보를 도무지 설명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인식
주체의 심적 작용에 근거를 두는 인식론에 대한 대안으로 포퍼는 제 3 의 이론을 제시한다.
첫째, 과학적 지식은 "내가 무엇을 안다"는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지식, 즉 의식의 상태나 행동하고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능력과
소질을 표시할 수 있는 그런 지식은 아니라는 것이다. 과학적 지식은 "내가 무엇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주관적 의식 상태가
아니라 문제들, 이론, 논증 등으로 구성된 지식이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식은 제 3세계적 지식이
아니라, 제 2세계 즉 '주관의 세계'에 속한 지식에 불과하다. 반면, "과학적 지식은 제 3의 세계, 즉 '객관적 이론, 객관적 문제,
객관적 논증의 세계에 속한다". 따라서 데카르트나 칸트 등이 주장하는 인식론은 과학적 지식을 설명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본다
("무관성 논제"). 포퍼는 객관적 의미의 지식은 인식자(인식 주체)가 없는 지식이라고 본다.
둘째, 과학적 문제, 문제 상황, 과학적 추측, 토론, 비판적 논증, 과학 학술지, 책, 실험, 실험 평가, '객관적 지식'의 자율적인 제
3 세계에 관해 연구하는 '인식주체가 없는 인식론'은 과학적 지식의 성격을 올바르게 규명할 수 있는 인식론이라는 주장이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과학적 추측이 참이다", "그들이 무엇을 '안다'(주관의 의미)", "무엇을 무엇이라고 '믿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무엇을 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연구 계획을 발전시킬 때 무슨 성과가 있을 것인지, 어떤 연구
결과가 객관적 지식의 세계를 보다 잘 드러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더 관심을 쏟는다.
셋째, 객관적 세계에 대해서 연구하는 객관적 인식론은 주관적 인식의 세계(제 2세계)를 이해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제3 세계에 대한 연구는 인간의 의식 세계가 어떠한가를 밝히는 데는 커다란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역으로 인간의 의식 세계를 연구한다고 해서 세계 3 의 존재나 정체가 해명되지는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세계 3 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면서도 마치 만들어진 거미줄이 거미에게 더 이상 의존하지 않듯이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 자율적으로 존재하며 우리의 심적 세계(세계 2)와 물리적 세계(세계 1)에 강한 영향을 준다. 과학적 지식은 세계 3 에 근거
하기 때문에 만일 지식에 오류가 있다면 그 오류는 연구자 자신의 심적 상태에서 오류가 아니라 세계 3 과 관련된 오류라고 본다.
과학자는 그들의 잘못된 이론을 제거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 대신 이론(잘못된 이론)을 죽게 한다. 그러나 지식을 제
2세계에 속한 것으로 보는 사람은 그의 잘못된 신념과 함께 망한다.
제 2세계적 관점에서 지식을 보면, 지식이라는 것은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과 도무지 뗄 수 없는 바로 그 주장하는 사람의 인격이
반영되고 그 사람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그 이론이 죽으면 나도 죽어야 한다. 그러나 제 3세계적 관점에서는 이론은 제
3세계에 속하는 것이고 일단 내가 만들어 낸 이론은 나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가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이론이 비판
당하고 수정당한다고 해서 제 2세계적 존재인 나 자신이 파괴되거나 망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포퍼는 실증주의의 귀납주의적 과학관을 깨뜨리는 일에 크게 공헌했지만 그 자신은 여전히 실증주의적 객관주의, 심지어 변증법
을 배제한 헤겔주의('객관적 정신의 세계')의 이념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본 폴라니의 입장과 대조를 이룬다.
포퍼가 인식 주체를 내세우는 인식론을 비판할 때 염두에 둔 '주관주의'는 심리학적 주관주의였다. 그의 '주체'도 심리상태를 갖는
개인적 주체이다.
하지만 현대 유럽 대륙철학자들, 그 가운데서도 현상학의 영향 아래 철학을 한 하이데거와 가다머 그리고 프랑스 빠리의 철학자들
(푸꼬, 라깡, 데리다, 리오타르, 리꾀르, 레비나스)은 개인적 심리적 의미의 주체가 아니라 세계의 근거로서, 세계를 떠받쳐주는
기체(substratum)로 해석된 주체(subjectum)를 거부한다. 기체로서의 주체는 이 세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신일 수도 있고,
데카르트 이후 독일 관념론(피히테, 셸링,헤겔), 후설의 현상학을 통해 절대화된 자아일수도 있다.
현대철학의 주체 비판은 암묵적으로 이 둘을 다같이 겨냥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들의 비판은 주체로서의 자아 뿐만 아니라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는 휴머니즘 자체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반인간주의'(Antihumanism)이란 이름을 얻기까지
하였다.
이른바 '후기 구조주의자' 혹은 '포스트 구조주의자'로 통칭되는 이들은 각각 다른 배경과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지만 반데카
르트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공통 분모를 찾을 수 있고, 가깝게는 후설의 자아론적 현상학적 철학에 대해 대항
하는 모습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현상학을 통해 철학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주체의 죽음'을 선언하는 현대 프랑스 철학은 후설을(물론 후설과 더불어 하이데거를)그 배경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정은 푸꼬나 데리다 보다 훨씬 온건한 레비나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면 후설은 무엇을 얘기하려고 했고
프랑스 철학자들의 어떤 점에 대해 그와 생각을 근본적으로 달리 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후설은 무엇보다도 엄밀학 으로서의 철학의 기초를 찾아나섰다. 이 기초는 말이나 이론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사태 자체'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이로부터 현상학을 특징짓는 표어인 '사태 자체로'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철학의 기초
는 그 자체 나타나고, 그 자체 스스로 드런내는 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설이 염두에 둔 '사태'란 모든 현실적인 것
의 궁극적 의미 근원으로 생각한 의식이었다. 의식은 물질적 대상 세계의 상대편에 놓여있는 세계 내재적인 데카르트적 의식이
아니라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즉 지향성을 본질로 하는 의식이며 이 의식을 통해서 비로소 그 무엇은 우리에게 의미있는 세계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른바 '객관적 세계'는 의식의 상관자로서 의식의 구성의 산물이며 초월적 의식을 떠나서는
'객관성'에 대한 논의 조차 불가능하다. 세계는 의식을 통해, 의식에 대해 그리고 의식 앞에 현존한다. "근원적으로 주어진 직관
만이 인식의 유일한 합법적 근거"라는 현상학적 원리가 말해주듯이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만이 현존하는 것으로 기술될 수
있다. 의식 앞에 대상이 현존하는 것은 역으로 의식이 대상 세계에 늘 현존한다는 뜻이다.
현존의 형식을 위해 시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시간은 전통 철학에서 고작해서 자연철학의 대상일 뿐 자아 또는 주체와 관련
해서 사유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베르그송은 이 점에서 예외라 하겠다. 더구나 시간은 영원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그 일시성과 잠정성으로 인해 인간 존재에 대해 위협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시간을 후설은 현상이 현상으로서 나타날 수
있는 조건으로 생각한다. 시간을 통해 현상되지 않는 것은 착각이나 환상일 뿐 현상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현상은 현재를 통해 포착되고 의미가 부여된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 지평 가운데 시간을 구성
하고 떠받쳐주는 것은 현재의 의식이라고 후설은 보았다. 아우구스 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후설은 과거는 현재의 기억(유지)이고,
미래는 현재의 기대(예상)이다. 초월적 주체는 늘 현재적이며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주체 속에 통합한다. 현존
하는 세계는 시간을 구성하는 초월적 주체에 대해 현존하며 초월적 주체를 떠나서는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초월적 주체는 세계의 유일한 의미 원천이며 세계의 근원이다.
후설의 '초월적 주체'의 개념에는 이론적 관심 뿐만 아니라 실천적,윤리적 관심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 해야한다.
이러한 관심은 자연주의와 역사주의 그리고 세계관 철학을 비판하면서 현상학적 이념을 보이고 있는 '로고스' 논문인 '엄밀학
으로서의 철학'(1911)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후설은 만일 자연주의가 이긴다면, 이성의 규범에 기초한 문화 자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연주의는 의식 뿐만 아니라 규범도 자연화하기 때문이다. 후설에 따르면 역사주의와 세계관 철학은 자연
주의의 변형에 불과하다. 이들은 규범 또는 이념을 정신으로 부터 근거 지우려기 하기 보다 경험적인 사실로 부터 근거지우려고
했기 때문에 <이념 또는 규범>을 결국 자연화 한다. 사실로 부터 규범을 얻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마치 '바위에서 물을 얻어내자
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자연주의와 역사주의 그리고 세계관 철학의 득세는 인류 문화에 커다란 위협으로 보였다. 따라서 현상학은 그것이 아무리 이론적
인 문제에 몰두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의미를 확인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철학임을 후설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철학은 <영원한 인간성의 작업을 위해 부름받은 선생>이고 철학자는 <인류의 공복>
(Function re der Menschheit)이라는 것이 후설의 일관된 신념이었다.
후설 자신이 종종 표명하고 있듯이 <엄밀학으로서의 철학>의 이념과 근본주의는 결국 '로고스에 따른 삶'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인에 의하면 인간의 삶은 '로곤 디도나이'(logon didonai), 즉 '근거 또는 이유를 제시
하는 삶'이어야 했고, 근거 또는 이유는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근거를 제시하는 삶이란 이론적 차원에서는 논리적 이유 또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며, 실천에서는 이유있는 행동, 스스로 책임지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이 점에서 후설은 철학을 '최종적인
자기책임에서 우러나온 학문'이란 표현을 가끔 쓰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스스로 책임지는 것,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곧
인간은 이론적 삶과 실천적 삶에서 다같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요구이다. 이러한 합리성의 요구를 후설은 유럽 문화와 유럽
인간성의 이념적인 뿌리로 보고 있고 현상학은 이와 같은 유럽 문화의 목표를 실현하는 도구로 생각했다.
푸꼬나 데리다 등 프랑스 철학자들이 후설의 '초월적 주체'에 대해서 갖는 어려움은 특히 언어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후설 자신
도 '논리연구'에서 이미 자아는 사유와 의식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말하는 주체임을 지적하였다. 스스로 자신을 지칭하는 언술
행위를 통해서 '지칭하는 자아'와 '지칭되는 자아'의 이원화가 생긴다. 바로 이 점과 관련해서 벵베니스트와 같은 언어학자는
'자아'란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언술 행위의 결과로 비로소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자아(주체)가 자아(주체)
로서 설 수 있는 것은 언어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에 언어가 주체의 가능조건 이라고 본다. 인간은 언어 안에서, 언어를 통
해서 비로소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언어를 통해 비로소 자아가 자아로서 구성된다면 자아 또는 주체가 모든 것에
앞서 존재하는 근원적 현실이라고 할 수 없다.
후설은 애초에 언어의 기본 단위를 이루는 단어는 의식 속에, 의식에 대하여 현존하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 또는 표현이라고 생각
한다. 이런 의미에서 단어나 단어를 조합한 진술은 사유하고 의식하는 주체의 산물이다. 적어도 원칙적으로 단어와 진술의 의미
를 사유 주체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몇 십년 뒤 '형식 및 초월 논리학'에서 후설은 언어를 사유의 '신체'로
보는 생각을 펼쳤다. 언어는 마치 우리의 신체처럼 의식에 대한 투명성을 잃고 애매성을 띨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유럽 학문의 위기'에서 후설은 인간과 언어와 세계, 이 세가지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얽혀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언어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언어라는 지평을 배경으로 해서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을 후설은 강조한다. 이와 같은 생각을
더 밀고 나가면 언어야 말로 세계와 인간, 주체성과 타자성, 동일성과 차이 의 가능조건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음성 언어 뿐만
아니라 문자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후설은 [기하학의 기원]('위기'의 부록)에서 매우 강조하고 있다. 피타고라스 정리와
같은 수학적 유산이 후세대에 전승될 수 있는 객관적 존재를 갖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면서 마침내 문자로 기록되어 텍스트
로 남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고 후설은 대답한다. 문자로 기록된 텍스트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이념적 대상에게 존속할
수 있는 신체를 부여해준다. 데리다의 '문자의 철학'이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대한 연구로 비롯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데리다는 후설 자신이 문자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주체의 '원초적 명증성', '생생한 현재'를 또다시 강조한 것에 대해서 후설
자신이 강조한 '문자'의 존재를 통해 후설 철학을 해체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문자는 생생한 기억을 방해하고 원초적 의미를 잃게
할 수 있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것으로 개인의 기억을 초월하는 집단적 기억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다. 더구나 문자없이는
학문도, 예술도, 심지어 종교도 가능하지 않다. 문자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보충이고, 현재 부재하는 것에 대한 대리자이다. 문자
는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초월적 주체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자로 쓰여진 텍스트도 주체에 의해 완벽하게
해독되지 않는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텍스트 자체가 여러 텍스트의 짜임이기 때문에 텍스트를 짠 사람에게조차 그것의 궁극적
의미를 귀속시킬 수가 없다. 이런 맥락 안에서 푸꼬와 데리다, 라깡은 '자아'는 세계의 근원 또는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관계와 언설, 욕망을 통해 생산된 생산물에 불과하다고 본다. 자아는 세계 이전에,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언설 속에서, 언설을 통해서 구성된 자아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푸꼬, 라깡, 데리다는 각각 '주체의 탈중심화', '주체의 도치'
또는 '형이상학의 해체'를 자신의 철학적 프로그램으로 삼는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차이 속에서만 성립하는) 언어는 말하는 주체의 기능이 아니다. (자기 동일성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동일성의 의식이기도 한)
주체는 언어 속에 기록되어 있는 언어의 기능이다.
주체란 이렇게 볼 때 언어의 기원이나 원천이 아니라 언어가 형성한 효과이고 언어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는 차이
와 연기,즉 차연(差延)의 체계로 보기 때문에 주체라고 부르는 것도 결국 차연의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란 '스스로 나누어지
면서 스스로 간격을 만들면서, 대기하면서 그리고 스스로 연기 시키면서 구성될 뿐'이다. 주체는 타자의 타자로서의 흔적에 지나
지 않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주체의 자율성과 우위성을 말할 수 없다. 철학적 맥락에서 보자면 푸꼬, 라깡, 데리다는 소쉬르와
벵베니스트 등의 구조 언어학과의 비판적 논의를 통해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사회, 경제적 관계)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본 맑스나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도덕적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존재 상승을 위한 힘에의 의지로 본 니체,
그리고 자아를 무의식의 소산으로 본 프로이트의 사상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자아(주체)가 근원적 존재가 아니라 파생적 존재요, 언어의 산물이라는 것은 자아가 말을 한다고 하지만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
의 주인은 아니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 인간을 사유하는 주체, 행동하는 주체, 말하는 주체로 생각해 왔지만 사유와
행동과 언어에 있어서 더이상 인간은 - 프로이트의 말을 빌면 -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다.' 언어의 의미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나
그가 부여한 의미에 의해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언어는 자아나 어떤 개인적인 주체를 떠나 사회적으로 결정되고 말하는 주체
는 그 관계의 그물 속에서 비로소 '자유롭게'말할 수 있다. 여기서 언어란 한 개인의 생각을 드러내거나 현실을 지칭하는 기호
체계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제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언어는 어떤 사회에서도 "금지와 허용, 수용과 배제의 체계"(푸꼬)를
형성한다. 언어는 사회 속에 작용하는 힘에의 의지와 떼어서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학 강단에서 강의를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은 강의를 할 수 없으며, 어떤 사람은 법정에서 변호인으로
설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겐 그것이 배제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언어 행위 배후에 자기 영역과 상관없는 사람은 배제하고 상관
있는 사람은 포함시키는 힘에의 의지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개인이란 이 힘의 그물, 말의 그물 속에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자에
불과하다고 푸꼬는 역설한다.
언어는 그 자체의 질서를 지니고 있고, 그 자체의 의미 그물을 형성한다는 생각은 한걸음 더 나아가 "현실 자체가 바로 말의 질서
에 속한 것"이라 보게 만든다. 데카르트는 사유 실험을 통해 의심이 가능한 모든 현실을 다 제거하고, 그 가운데서 사유 주체 즉
자아는 제거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자아는 제거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물과 신에 대한 관념의 담지자이며 신의
성실성에 대한 확신을 통해 사물 존재에 대한 확실한 인식에 도달하는 인식의 근본 토대이다. 실재하는 현실은 사유를 통해, 사유
앞에 현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나 라캉은, 현실은 데카르트가 생각한 것처럼 신이 부여한 질서나, 자연의 질서나 혹은 이성의
질서가 아니라 언어의 질서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언어를 제거해 버리면 인간에게 의미있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언어와 언어의 질서가 없다면 이 글도 있을 수 없고 이 글 뿐만 아니라 철학,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노동 그 어느 것도 존재
할 수 없다. 언어와 언어의 질서는 현실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며, 이런 의미의 말과 말의 질서는 어떤 형태의 주관적인 조건을 떠나
그 자체의 자율적인 체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세계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진 자가 아니라 '바닷가의
모래위에 그려진 얼굴처럼 사라질 존재'(푸꼬)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철학의 빛과 그늘
1960 년대 이후 최근 30년간의 현대 철학이 반(反)데카르트적 경향으로 흐르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은 현대 철학이 겨냥
하고 있는 철학적 운동의 목표가 데카르트로 상징되는 현대성의 문화(culture of modernity)를 극복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와 그 이후(혹은 그 이전의 르네상스 철학과 더불어) 계몽주의는 인간의 위치를 드높여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가져다
놓고 주변을 에워싼 자연을 세속화시킴으로써 자연을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도록 만들었다. 근대문화는 자연을 탐구하는 영역(과학)뿐만 아니라
개인 생활과 사회 생활에서도 편견과 선입견, 전통과 권위를 배격하고 합리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조정을 이상으로 삼았고, 그
결과 과학과 과학 기술의 진보, 물질적인 부의 축적, 보다 나은 생활 환경, 보다 많은 사람에게 주어진 사회적 평등과 자유가
가능하였다. 폴라니가 얘기하듯이 지난 4,5 세기 인류가 이룬 지적 성과는 세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전체로 부터의 개체의 소외, 전통과 문화와 역사로 부터의 단절, 자원 고갈과 환경 훼손, 그리고 보다 철저하고
조직적인 사회통제 등이 초래되었다.
이와 같은 흐름은 인간의 모든 사상이 그렇듯이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선 오늘날의 포스트모
던적 철학은 현대인이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신봉하던 과학과 이성의 정당성에 대해서 한번 회의해 볼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우리의 과학적 지식도 세계를 보는 하나의 관점이지 세계를 모조리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몽주의자들이 시도한
'선입견'의 추방은 인간의 실제 경험에 어울리지 않았다. 선입견은 어떤 종류의 인간 활동에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더 개방적이고 비판적인 태도임을 가다머는 보여주었다.
'비판이후의' 철학의 가능성을 모색한 폴라니가 보여준 것처럼 과학의 기초는 객관성이 아니라 '믿음'이고 '믿음의 틀'(fiduciary framework)이 없이는 과학적 지식이 성립되지 않는다. 파이어아벤트와 같은 상대주의자 혹은 다원주의자가 과학은 현대 사회
에서 하나의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는 것 조차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학교 교육이 창의성을 북돋아 주는 교육으로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보면 전혀 수긍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현대철학은 또한 자아의 절대성, 이성의 자율성 등을 비판함으로써 인간 주체가 세계의 근원이며 절대 주제자란 생각을 깨뜨리
는데 크게 공헌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포스트모던적 사고에 따르면 이성은 절대적 근원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합리화
하고 은폐하는 수단이다. 이성은 계급적 관심에 봉사하거나(맑스), 숨겨진 힘에의 의지를 은폐하거나(니체) 무의식적 사고의
표출을 왜곡한다(프로이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 보다는 훨씬 더 비합리적이며, 덜 도덕적이며 자기자신을 늘 감추는 존재이며, 이성적인 고려와 타인
에 대한 도덕적 책임 보다는 자신에게 닥칠 위험과 손해를 더 생각하는 존재이다.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모던적 철학은 데카르트
와 베이컨 이후 예컨데 홉스와 스피노자에게서 볼 수 있는 인간 욕망(존재 욕망, conatus essendi)을 거침없이 드러내어 주지
않았는가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실적 인간은 이성 보다는 정념(욕망)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 이들의 통찰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시민 사회의 정치철학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들과 현대 프랑스철학자들 사이에 만일 차이가 있다면 다름이 아니라 욕망의 정체를 기호와 텍스트의 관점
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욕망은 문화적 생산에 의해 얼마든지 증폭될 수 있고 대상을 달리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스쳐지날 수 없는 것은 어떤 초월적인 기준이나 믿음을 갖지 않을 경우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철학은 결국 허무
주의와 상대주의를 견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폐쇄된 생각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지만 문제는 '어디로'
향해 해방시켜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우상 파괴가 언제나 안고 있는 난점이다. 지금까지 금과옥조로 섬기던 이성과
자아가 그렇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란 사실을 발견한 지금 이제 어디서 시작하며 무엇에 관해서 의미있게 말할 수 있는가. 우상을
가능함을 보여준다.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세계의 유한성과 한계를 벗어난 초월이 가능하다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포스트모던적 상황과 명상서적 징후군
파괴했지만 그 자리에 다시 설 수 있는 참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도 과학도 확고한 발판을 제공해주지 않기 때문에 의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오직 인간의 욕망 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서 레비나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볼만 하다. 그는 세계 내에서의 인간의 존재는 홉스와 스피노자가 말하는 '존재
욕망'에 따라 살 수 밖에 없지만 사실상 이러한 삶을 가능케 해주는 다른 차원, 즉 나의 세계로 완전히 환원해 버릴 수 없는 타자
와의 관계가 포스트모던적 사고는 과학 비판과 인간 중심적 사고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종교에 유리한 지점을 제공해 줄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완전히 배격해 버려야 할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적 사고는 종교에 어떤 특별한 자리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과학, 주체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종교도 비판 표적
이 된다. 이것은 종교비판가들인 니체와 프로이드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라는 사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니체와 프로이트
의 종교비판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에 소개해야 할 필요가 없겠지만 기독교적 신 개념은 결국 투사에 불과했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초자연적인 실재로서의 신과 죄를 묻고 심판하며 용서해주는 신은 존재하지 않고, 신은 생존
하고자 하는 의지가 만들어 내었거나 초자아로 투사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종교적 욕구는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느 시대보다 의미에 대한 갈증과 추구는 더 절실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나와 분리된 신, 경험 세계 너머 저편에 있는 초자연적인 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최근 우리 주변에선, 특히 교육받은 지식인 층에서는 초월적인 신과 죄사함과 내세를 말하는 기독교 보다 내 속에서 신을 발견
하길 권유하는 동양 종교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포스트모던적 문화의 흐름과 관련해서 주목해 보아야 할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라즈니쉬의 '배콥'을 위시하여 바바 하리 다스의 '성자가 된 청소부', 크리슈나뮤티의 여러 서적등 인도종교에 근거한 서적 뿐만
아니라 사모아섬의 한 추장의 서구 문명 비판서인 '빠빠라기', 그리고 장자철학을우화적으로 재구성한 '나비의 꿈,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 등이 롱 베스트 셀러 목록에 들어 있다.
이와 같은 명상서적은 정치한 논리나 치밀한 구별과 분석 등을 아예 무시하고 논리와 언어의 세계를 초월하여 직접적인 삶의 의미
를 개개인이 스스로 체험할 것을 가르친다.
명상서적에 대한 관심은 구원을 갈구하는 '종교 현상'이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모든 종교, 혹은 의미의 담지자로서의 기존의 모든
사회 안의 의미체계가 몰락했음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삶을 이해하고 삶의 의미를 알고 싶지만 어떤 기존의 철학
이나 종교가 시원스레 답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삶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명상서적을 찾게되고 그곳에서
정신적 만족을 기대한다. 명상서적의 메세지가 삶에 구체적으로 옮겨지지 않은 채 생각의 차원에 머물 수 있지만, 이런 유의 책에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유가 그러한 것이다.
(강영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