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하느님을 믿으라
바야흐로 선거철이 돌아왔다. 거리는 출마한 사람들의 얼굴과 캠페인이 담긴 플랜카드로 펄럭이고 선거운동원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한 표를 갈구하는 인사를 하느라 바쁘다. 평소에 잘하지 하는 생각으로 지나가는데 아마 교회에서 나온 듯 한 사람들이 나를 붙든다. 평소 많이 듣던 반공에 바탕을 둔 이념적인 이야기와 진보적 가치에 대한 불만이 확고부동한 확증 편향이 되어 나에게 쏟아진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은 6·25전쟁 당시 1950년 10월 황해도 신천군에서 민간인 3만 5천여 명이 희생된 '신천 대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신천 학살 사건은 북한 측에서는 미군이 저지른 악행으로서 선전되고 있으며, 남한에서는 한때 ‘반공 의거’로 부른 근대 민족사의 큰 아픔이기도 하다.
소설 『손님』은 전쟁이 끝나고 40여 년이 흘러 이산가족 상봉 사업의 하나로 고향 황해도를 방문하게 된 주인공 주요섭의 생각을 전통 굿의 형식을 빌려 망자들의 목소리로 진상을 밝히고 용서와 화해를 모색하는 이 땅의 서사이자 기억의 ‘굿판’이다.
작가는 평소 얼굴을 맞대고 공동체적 일상 속에서 감정과 행동을 공유하던 사람들이 50여일동안 서로를 처참하게 살육하는 장면을 그리며 그 이유를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은다. 그래서 황석영은 수 만 명의 민간인이 악귀가 되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학살이 벌어진 원인을 우리 전통사회에서 피하고 싶은 역병같은 천연두(마마)가 ‘손님’처럼 찾아와 갈등한 결과라고 보았다. 초빙 받지 않고 무조건 대문열고 밀고 들어온 서양의 치명적인 두 손님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이념’이다.
작가는 대학살의 원인과 진상이 반미와 반공과 같이 외세를 중심으로 접근하는 거대 서사의 일부로서만 이해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외부, 즉 미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은률과 신천, 재령 등과 같은 황해도 지역의 개신교도들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이념적 이해관계 충돌에 있다고 본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황해도의 지주들은 해방 후 소련군이 들어오고 토지개혁이 단행되자 입장이 역전된 머슴과 소작인들의 탄압을 받게 되어 졸지에 사회적 위상이 역전 되었다. 당시 가진 자들인 기독교도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인 사회주의자들이 토지 분배와 같은 개혁, 계급적 모순, 이념 갈등 등의 과정에서 이 사상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여 이분법적인 선악 구도로 몰고 가면서 그런 참극이 벌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곪아갔던 증오심은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빨갱이’에 대한 ‘십자군’의 응징의 형태로 폭발했던 것이다. 자기와 상대방을 절대적인 선과 악으로 이해함으로써 선의 이름으로 악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야만적인 사건이다.
한편 박찬주 같은 사람은 신천대학살을 면밀히 분석하며 특별히 기독교인이 잔인했다고 보진 않았다. 그는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유교적 문화에 억눌려 있던 하층민의 분노가 폭발하는 데 공산주의가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누구라도 자신의 기득권을 뺏으려는 세력을 적대시 할 텐데 그게 공산주의였기 때문에 기득권을 가졌던 기독교인이 공산주의를 싫어한 것 같다고 보았다. 당시 기독교가 기득권과 교집합을 이룬 반면 농촌빈민들은 기독교와 겹치는 부분이 적었기 때문이다.
황석영은 이 두 손님을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모습에 주목한다. 그는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리라. “나는 이 한반도의 주인이자 오랫동안 터를 잡고 마을공동체를 이루어 온 사람이다. 손님은 방문 목적을 분명히 하고 우리 마을의 규범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자부심과 역량이 부족하여 두 손님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과 냉전의 귀신들을 오늘날 우리의 삶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으로 존재한다. 화해의 문제를 서사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겨레가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는 한 조선인이라는 인식하에 화해와 용서가 전제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못한다고 본다. 한반도에 남아 있는 증오와 분열의 귀신들은 황석영이 주장하듯 한판의 지노귀굿으로 잠재우고 새로운 결단으로 화해와 상생의 시대로 나아가야한다. 화해와 상생의 토양은 문제의 본질을 끝까지 기억하는 가운데 역사에 대한 평면적 읽기를 거부하고 과거와 가감 없는 대화를 시도할 때 비로소 비옥해질 수 있을 것이다.
책속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대목이 있다. 박일랑(이치로)이 투박하고 거친 평안도 사투리로 일갈한 ‘조선으 하나님얼 믿어라야’라는 말이다. 이는 외부에서 온 손님의 영향에 휘청거리지 말고 내 식구, 우리 이웃, 한 민족을 먼저 생각하라는 민중의 질타이다. ‘우리 조선의 하나님을 먼저 믿으라’라는 말처럼 현재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는 말이 어디에 있을까? 다른 것은 모두 거울을 통해 보는 것 처럼 희미하였으나 너희 하나님을 먼저 찾으라는 이 말은 필자에게 시내산의 불꽃처럼 선명하게 타올랐다. '조선으 하나님얼 믿으라야’
마침 내일은 사전투표일이다. 현대판 정치적 축제이자 상생 굿판인 선거를 내려다보며 우리 조선의 하나님은 무어라 이야기하실까? 평안도 사투리 버전이다. “내래 모두들 투표 잘 하라우!”(2024년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