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한 폭
감주렁 하나 뚝 꺾어 벽에다 건다
순간 감들이 누런 꽃으로 피어난다
방을 환하게 밝히는
저 화사한 꽃들,
방안은 온통 만개한 가을이다
이제부터 감은 가볍게 익어가리라
아래로 늘어뜨린 제 무게 접고
감들은 아주 달콤하게 익어가리라
한입 베어 물면 입안을 들쑤시던 떫은 맛,
이젠 보드라운 속살까지
온통 달콤한 물 넘쳐흘러
물렁한 홍시로 익어갈 것이다
감잎 말라 바스락거리면
꽃잎처럼 말라가는 감주렁 하나,
한참 쳐다보면
가을 햇살로 저무는 풍경 한 폭,
감 주렁주렁 매달린 감주렁엔
벌써 까치 부부 날아와
성긴 까치집 얹을 준비를 하고 있다
아궁이
시커먼 아궁이 배가 고픈지
아가리 딱 벌리고 있다
돼지족발 삶느라 무지막지 밀어 넣던
장작불의 열기도 사라진지 오래
장작의 유골만 허옇게 깔려 있다
불현듯 족발 냄새 그리워 장작불을 지폈더니
연기 한 줄기 향불처럼 희미하게 올라간다
멀리서 소방차 달려오는 소리 들린다
모처럼 족발이라도 뜯을까 했더니
불 맛만 보고 난 아궁이
그을음만 뒤집어썼다
벌촛날
벌초가 코앞이라 이발소에 갔다
이발소엔 예초기 소리 요란했다
주인이 세월에 방목된 풀들을 뭉텅뭉텅 쳐냈다
그래야 꽉 막힌 앞날이 훤히 뚫린다고
주인의 미소가 아지랑이처럼 너울거렸다
나도 모레면 고향에 내려가 예초기를 돌려야 한다
무덤을 뒤덮은 풀들을 쳐내고
갈고리로 봉분 덕덕 빗겨줘야 한다
살아생전 어머니 머릿결에 동백기름 발라
빗으로 빗겨주듯 해야 한다
그래야 저승길 환히 뚫린다고
틀니 내놓고 환영처럼 웃는 엄마가 떠올랐다
잠깐 졸고 났더니
풀머리 풀풀 날리는 머리가
봉분처럼 말쑥해졌다
외출
그녀는 우리 마을의 나팔꽃이었다
봄날이면 바람이 들어
나팔바지를 입고 밤 외출을 했다
나팔꽃이 빨간 주둥이를 펼치는
새벽녘에 집에 돌아왔다
나팔꽃 넝쿨이 휘감고 오르듯
먼길을 걸어 온 발바닥엔 물집이 잡혔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과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워낙 독종이라 기분이 틀어지면
바람 빠진 나팔 소리를 냈다
그녀의 거처는 음습한 지하 셋방
나팔꽃이 아침부터 립스틱 입술을
활짝 벌리고 있는데도
그녀는 늦잠에 취해 있었다
해방
얼마나 오지게 눈발 퍼 부었는지
비바람이 훑고 지나갔는지
동토는 온통 상처투성이다
산새 들새가 상처 지우려고
다습게 체온으로 녹여주지만
어림없다
한발 디딘 겨울이 물러날리 없다
겨울이 병풍처럼 막혀 있어도
희뿌연 빛이 번지고 있지 않더냐
언젠가는 다시 돋아날 새잎들
암흑을 열고 희망을 밀어 올리면
우리가 바라던 세상 저런 것 아니겠나
얼마 후면 들판을 때리던 비바람도 멎고
빗줄기 사정없이 뿌려주면
그까짓 동토야 금방 녹을 것을
해빙이 해방이 될 때처럼
저토록 따스한 세상이 또 올까
참고 참자
감나무에 새잎 씩씩하게 돋아날 때까지
싸구려
그대를 사랑하고 싶거든
빈 들판에 서 보아라
눈바람에 견딜 자 있으면 나와 보라
사랑도 이처럼 잔인한 것이니
사랑이란 말 함부로 내뱉지 마라
그러면 지친다, 너의 세월이
바쁘게 걸어가는 길이 힘겨워진다
그러니 사랑한다는 말 함부로 내뱉지 마라
사랑은 너희가 입맛대로 지껄이는
그런 싸구려가 아니다
방
손주들이 오면 놀던 방
그림책과 장난감 그래도 둔 채 침대를 들여놨더니
먼저 온 친손자 제 방이라고 우겨댄다
아직 발음도 시원찮은 네 살짜리 지안이
옆방에 갖다 놓은 제 사진도 세워 놓고
지안이 방이라고 써놓은 흰 종이를
문에다 붙여 놓았더니 얼굴에 웃음이 핀다
어제 제주도로 놀러간 세 살짜리 외손녀
지유가 돌아오면
어째서 제게 오빠 방이나며 우기며 싸우겠지
지안이 보다 발음이 확실한 지유
지안이보단 한 살 적어도 악악 소리 지르며
제 오빠를 틀어쥘 듯도 한데
손주들 와도 따로따로 왔으면 좋겠다
지안이가 오면 지안이 방이 되고
지유가 오면 지유 방이 되어
평화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아무리 그게 좋아도
그렇게 따로 만나다 보면
정이 메말라 질 것 같아
이것도 저것도 아닌데
큰일 났다
제주도로 떠난 지유 내일이면 돌아오는데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
별똥별
누군가 그랬다
우리 집에 자식들이 많은 것은
철로변에 사는 덕분이라고 그랬다
밤기차가 시도때도 없이 달려오면
둘이 똑같이 잠을 깼지만
할 일이라고는 멀뚱멀뚱
서로의 두 눈을 쳐다보는 일
별똥별이 불꽃 튀기듯
우리 서로 몸을 껴안고
이불 속으로 무너졌는데
바람결에 몸 섞는 옥수수 소리
왜 그리 살갑던지
심야에 몸 섞는 일이
더 불타는 사랑이었다
다글다글 옥수수 알들이 여물어가듯
당신 뱃속에서도 아기 씨 여물 날을 기다렸다
요양병원
요양병원 옆 교회당에 십자가가 붉다
밤이 되니 핏물처럼 번져 요양병원을 비추고 있다
바깥은 안온해도 안은 소리 없는 고통
떡 진 백발과 괭한 두 눈과
저승꽃 만발한 얼굴들이 줄 무덤처럼 누워
죽음의 시간을 재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밥 때마다 버릇처럼 일어나는 일
쪼글탱한 손으로 식판 받는 일
상한 잇몸으로 밥 씹다가 하염없이 조는 일
그러다가 오고가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일
먹고 자고 싸는 것이 어찌 갓난아기뿐이랴
수시로 기저귀를 갈아 치우는 간병인을 보면서
아, 나도 언젠가는 이곳에 와 줄 무덤으로 누울지 몰라
그런 생각 머리끝까지 미치면
생이란 부질없고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먹고 자고 싸고 먹고 하면서
쇠뿔
떡잎이 불끈 머리 쳐들고
흙을 밀어 올릴 때
황소도 씩씩거리며
대가리 쳐들고 걷는다
잠자리는 황소가 무섭지 않은지
쇠뿔 끝에 앉았다 날았다
장난을 치며 따라간다
무릎
엄마의 무릎이 그리워졌다
아이 때 베고 누웠던 무릎이 장작 같았지만
가쁜 숨소리는 자장가였다
어둔 눈으로 바느질을 하면서
방문 틈으로 스며드는 달빛 소리에
잠 깰까 두려워
엄마는 가만가만 바느질을 했다
눈을 살짝 뜨고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면
주름살 어지럽게 들어차 있고
그것들 하나씩 늘 때마다
모진 세월 붙잡고 싶었지만
달그림자만 수런수런 대나무를 흔들고 있다
숟가락
엄마는 들에 갈 때
문고리에 숟가락을 살짝 걸어 놓는다
문고리에서 쏙 빼면 그만이지만
엄마는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다
엄마는 불독보다 숟가락을 더 믿는다
숟가락의 힘을 주술처럼 믿는다
그래야 마음 편해지고
종일토록 밭에서 풀을 매도
집 걱정을 하지 않는다
엄마가 풀들과 전쟁을 벌이는 저녁에도
바람이 몰래 달려와
문고리에 꽂힌 숟가락을 흔들어 보는 것이다
감자꽃
이젠 됐구나 하고 감자 뿌리를 뽑았을 때
새끼들이 내 옷소매를 잡고 늘어지듯
감자알들 다글다글 딸려 나왔다
네 남매를 두었던 엄마
어릴 적 막내 누이 감자꽃처럼 지고
넷만 남아 뒤죽박죽 살다보니
차디찬 골방이 포근한 땅 속인 것을 알겠구나
감자를 심어 놓은 엄마는 멀리 떠났는데
뒤죽박죽 살아오던 네 남매
덩치 커져 세상에 나가 꽃 피울 준비를 하는구나
고양이
고양이가 배고픈 날은 냉장고 옆으로 온다
아내가 친정에 가거나
먼 도회로 구경 가 집을 비울 때
고양이는 오직 냉장고만 믿는다
냉장고에서 새어 나오는 모터 소리를
자장가처럼 여기며
냉장고 옆에 엎드려 입맛을 다신다
마당에서 띄어 놀며 마른 털
봄바람에 살랑살랑 넘기면 좋겠는데
할 일없어도 쩍쩍 하품만 해도 좋겠는데
고양이는 만사 귀찮은지
냉장고 옆에 꼼짝 않고 엎드려 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아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눈치다
제비
그는 밤이면 룸살롱으로 간다. 그를 기다리는 여자들은 낮부터 술에 취해 흔들거리고 립스틱 입술을 흰 와이셔츠에 문대며 손을 내민다. 쑥스럽게 잡은 손들이 붉은 조명발에 은빛 물결처럼 출렁인다. 날렵한 꽁지로 물을 찍어 날아오르듯 마음에 드는 여자들을 찍어 날렵하게 춤을 춘다. 촌사람들은 그가 춤바람으로 강남을 주름잡았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가끔 그의 엄마가 룸살롱에 찾아와 시골에서 살자고 애걸복걸했지만 되레 둥지를 없앤 아버지를 탓했다. 돌아갈 둥지가 없다며 제비처럼 재재거렸다.
민들레꽃
봄 한철 화관이 찬란했어도
늙으면 부질없는 짓이다.
금단추처럼 반짝였으나
노후는 초라하다
제 어미의 머리통에 붙어
애걸복걸 단맛 쓴맛 빨아대던 새끼들이
커가면서 미련 없이 떠나간다
허리통 푹 주저앉은 채
민대머리를 손처럼 흔드는
늙은 어머니
파리
저 놈은 전생에 노숙자였을 것이다
한 번도 씻지 않은
더러운 손을 버릇처럼 싹싹 비비며
밥 한 술 달라 앵앵거리는
날개에서 쉰내가 난다
한평생 쫓기고 살면서도 밥을 위해
빈 밥그릇 게걸스레 핥는
그놈의 입은 늘 허기졌다
할머니의 손사래를
장난처럼 여기는 저놈에게서
도대체 계절을 느낄 수가 없다
제사
뒤뜰에 일렁이는 단풍 그늘 보니
곧 제사가 다가오나 보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느낌으로 안다
올 아버지 제사에도
늙은 누나들은 오지 않으려나
단풍 필 때 온다고
손가락 굳게 걸던 맹세는 사라지고
나 혼자 촛불 켜고
무릎 끓는 날이 많았으니
서운함 불쑥불쑥 가슴을 찌른다 해도
단풍 그늘이 적막에 들면
돌아오는 제삿날이
그렇게 서운하지는 않겠다
홍시
감나무 가지에 손대지 마라
몇 해째 오지 않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 두었으니
기다림에 지쳐
속살 물러터진다 해도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새벽이면 집 뒤뜰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깨우던
까치 소리 아직도 귓속에 쟁쟁하다
그때 마침 골목을 지나가던 엿장수가
쟁강쟁강 치던 엿가위 소리를
까치 소리로 착각한 게 몇 번이다
그럴수록 그리움은 깊어
한 개 남은 홍시의 살갗엔
오글쪼글 주름이 깊다
아내의 등짝
아내가 내 앞에 등짝을 들이댄다
툭하면 체하는 아내
낮에 뭘 먹었는지 꺽꺽거린다
손바닥으로 두드리면 성이 차지 않은 듯
북채처럼 팍팍 두드려야 시원하다며
꺼억 트림을 한다
한동안 가슴속을 막고 있던 것들이
뚫렸을 때 나는 소리다
난 아내의 등을 두드리면서 알았다
평소엔 삶의 이면 같았던 등이
삶의 가장 불편한 자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북채로 북을 두드리듯 등을 쳐야
답답한 가슴이 풀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고서
고서의 책갈피를 열어 본다
오랫동안 책갈피에 숨어 있던 냄새가 딸려 나온다
고서도 몇 해를 묵으니 곰팡내로 찌들고
퀴퀴한 냄새에 젖어 있던 은행잎들 바싹 야위어간다
은행잎에 숨은 잎맥들 언제부터 물이 끊겼을까
폐경이 된 아내가 여자구실 못한다며
종일토록 넋 놓고 보름달을 쳐다보던 밤부터
은행잎은 아내처럼 야위어 갔으리라
만져보니 까칠한 아내의 살갗 같다
아내도 은행잎처럼 말라가면
절절했던 우리 사랑도 끝날 것 같아
갑자기 숨이 탁 막힐 때 있다
새벽이슬
새벽이슬이 영원하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속살이 보일만큼 반짝거려도
햇살 앞에선 속절없다
이슬방울 눈물처럼 떨어지면
땅은 풀 더미를 펴서 받아준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 사라지면
햇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로 숨어 버리고
땅속에 스며든 이슬은
꽃이 되어 피어난다
해바라기의 최후
고개 숙여 서 있다고
반성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것은
태양을 향한 무한한 숭배심
그걸 알고 있기에
해바라기는 늘 조심한다
사람들이 그의 모가지를 잘라
바깥에 효수하는 것은
구름 같은 뜬소문 때문이다
태양이 되고 싶어
누런 홍염을 활활 불태웠던 소문은
소문으로만 남겨두자
태양을 흉내 낸 자
결국엔 목이 잘렸지만
낫으로 처형되기 전에도
꼿꼿이 목을 쳐들지 않고
오직 태양만을 숭배했으니
피안
할아버지 고무신 한 짝
섬돌 위에서 단정하다
밤이 깊어도 방문은 열리지 않고
실성한 바람이 문짝을 흔들고 있다
하늘 한켠에 먹구름 번지더니 폭우가 쏟아졌다
섬돌 위로 물은 차오르고
휜 고무신 쪽배가 되어 대문 앞에서 넘실거리고 있다
곧 쪽배 떠날 시간 되었는데도
사랑방은 열리지 않았다
쪽배 타지 못하면 먼저 간 할멈 만나지 못하는데
피안 길 멀어 가다가다 지쳐
중간에서 되돌아와야 한다는 걸
할아버지는 아실려나
순간 섬칫한 기분 들어 방문 열어보니
흰 두루마기에 갓 쓴 할아버지
빈듯하게 관처럼 누워
하늘로 떠날 쪽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폭주족
팔 둥글게 벌려 핸들 감싼 오토바이가 근사하다
노랑머리에 까만 고무장갑, 까만 재킷
파이프까지 꼬나물고
엑셀을 세게 밟으니 폭풍 소리가 난다
8차선 도로가 훤하게 펼쳐진다
질주하던 승용차도 간 졸아붙어 주춤거리고
공룡 만한 화물차도 한쪽에 비켜선다
순찰차가 따라 오면 뒤바퀴 번쩍 쳐들고
미로 같은 골목을 서커스 하듯 달려간다
약 오른 순찰차 타이어 타는 냄새로 추격하면
노랑머리 두 팔 번쩍 쳐들고 괴성을 지른다
초음속으로 달려가는 길이
황천길이란 것을 아는 것일까
이렇게 오토바이를 껴안고 죽는 것도
치명적인 사랑이라고
노랑머리는 킬킬거리며 브레이크를 더 깊게 밟는다
짱돌 지퍼
폭염 들끓는 하늘아래
저수지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지난밤의 폭풍에 뒤척이던 포말은
낮잠에 빠져 잠잠해지고
버드나무 휘어진 그늘아래
아이들 몇 물수제비를 뜬다
잠 한 숨 늘어진 물을 깨우 듯
짱돌이 늘어진 물위를 찰방찰방 뛰어 간다
영락없다, 저 짱돌
낮잠이 훤히 열어놓은 아랫도리를
지퍼로 차르르 잠그는 모습이다
황홀
가뭄에 저수지가 메말랐다
뻔질나게 날아오던 물새도 등 돌리고
왕버들은 머리칼 풀어
오후의 고요를 헤젓는다
고추잠자리 한 쌍 공중혼례를 치르고 있다
한동안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황홀함이 극치에 닿았는지
고추잠자리 수줍어 온몸 붉어지고
나도 부끄러워
저수지 너머 먼 산을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