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골 석이
기억과 추억 사이/손바닥 동화
2005-12-25 16:12:15
밤나무골 석이
가을이 깊어지자 밤골은 무럭무럭 밤 익는 소리로 시끄러웠어요. 바람이 살짝 불어도 통통한 알밤들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어요.
낙엽이 깔린 풀 섶에는 온통 알밤투성이었어요.
울창하게 들어찬 밤나무 숲은 대낮에도 어둑어둑 했습니다.
그래서 산짐승들이 많았어요.
또한 산새들도 밤나무 가지 사이를 포르릉 날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어요. 밤나무 골에서 밤을 털고 있는 석이는 아주 신이 났어요.
장대로 나뭇가지를 후려칠 때마다 벌어진 밤송이에서 굵은 알밤들이 후드득 쏟아져 내렸어요.
석이는 밤을 잘 털었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탓으로 할아버지와 자주 밤을 털러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며칠 후면 추석이라 제사지낼 밤도 필요하고 또한 시장에 내다 팔아 몸이 아픈 엄마의 약값도 마련할 생각입니다. 오랫동안 신경통으로 고생을 하고 계시는 엄마는 제대로 병원을 다닌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방안 신세만 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보다 못한 석이는 어린 마음에 밤을 털어서라도 엄마의 약값을 마련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석이는 낙엽 위에 떨어진 알밤을 주어 자루에 주섬주섬 담았습니다.
아직 입이 덜 벌어진 밤송이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로 껍질을 까서 알밤을 꺼냈어요.
그렇지만 벌레 투성이 밤들이 많았어요.
올해 들어 공해가 부쩍 심해진 탓이었어요. 작년까지만 해도 밤나무 골은 알밤으로 풍성했어요.
한밤중에도 밤 터는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주먹만 한 알밤들이 반질반질 윤기가 흘렀어요. 그런데 올해는 달랐어요.
며칠을 두고 장마와 가뭄이 번갈아 계속되더니 속이 차지 않고 벌레를 먹거나 빈 껍질이 많았어요.
그래도 석이는 벌레 먹은 밤까지 모두 자루에 주워 담았어요.
금방 두 자루를 채웠습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서산에 걸렸어요.
석이는 밤 자루를 지게에 얹고 막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다람쥐가 밤나무 꼭대기에서 쪼르르 내려오더니 석이를 빤히 쳐다보았어요. 마치 석이가 원망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어요.“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어?”“그래.”석이가 묻는 말에 다람쥐는 잔뜩 볼이 부은 채 대꾸를 했어요.“무슨 일인데?”“보면 몰라?”“아, 이거 제사에 쓸 밤이야. 그리고 엄마 약값도 필요하고 해서…”“그렇다고 모조리 다 털어 가면 어떡해, 나도 먹고 살아야지.”“다른 밤나무도 많은데 뭘.”“너도 알다시피, 밤나무 골을 한번 쳐다봐, 도둑들이 밤을 다 털어 갔어. 그리고 떨어진 알밤들도 모두 벌레 투성이야.”석이는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울창한 밤나무들이 전부 털려 후줄근히 빈 가지만 남겨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낙엽 위에도 알밤 하나 눈에 띄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다람쥐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룩한 밤 자루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다람쥐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았어요. 석이는 자루를 풀었어요.
그리고는 다람쥐를 향해 알밤 몇 개를 던져 주었어요.“애걔걔, 겨우 이거야? ”“그거면 겨울을 충분히 지낼 수 있잖아.”“우리 집에 한번 가볼래?”다람쥐는 촐랑거리며 석이를 다람쥐 굴로 안내를 했어요.
그리고는 석이에게 굴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굴이 저렇게 좁은데 어떻게 들어가?”“그럼 거기서 안을 들여다보라고.”마침 그때 약한 햇살이 굴속을 비췄어요.
어둑하던 굴속이 희미해지더니 오종종 모여 있는 아기 다람쥐들이 보였어요. 대충 눈으로 세어 봐도 열 마리 정도는 될 것 같았어요.“아니, 이 많은 식구들을 어떻게…”석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산에서 굶고 있던 친구들을 내가 전부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어.”석이는 아예 한 자루를 통째로 다람쥐에게 던져 주었어요.
그때서야 다람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마저 남은 한 자루를 지게에 지고 끙끙 산길을 내려오는 석이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가벼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