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암사의 풍경소리
전북 완주의 화암사가 내 마음의 절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단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깊은 산속에 들어앉은 아늑한 분위기도 그렇지만 절 부근에 활짝 피어나는 복수초와 얼레지 때문이었다. 화암사 못 미쳐 폐가 부근에 한 가족을 이룬 복수초와 화암사로 오르는 철계단 밑에 군락을 이룬 얼레지의 향연이 늘 그리움이 되어 나를 못살게 굴었다. 춘삼월이지만 쌀쌀한 바람이 앙칼지게 몰아치는 날, 부푼 가슴을 않고 야생화 기행길에 올랐다. 잔뜩 흐린 하늘은 꼭 소나기로 퍼부을 듯 음침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화암사 못 미쳐 폐가 앞에 차를 세운 시간은 11시경, 복수초 군락지가 있는 묵정밭위로 올라가보니 온통 복수초들의 세상이었다. 한겨울 내내 단단히 굳은 흙을 뚫고 불쑥 올라온 꽃대들이 꽃봉오리를 열고 마음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만개한 꽃들보다 중간쯤 벌어졌거나 막 터지기 일보직전의 꽃봉오리들이 많았다.
활짝 핀 복수초
고즈넉한 절, 화암사
대웅전 처마끝에 매달린 풍경, 물고기가 맑은 허공을 헤엄쳐 다니는 듯하다
반쯤 벌어진 꽃들은 그 모양이 금술잔처럼 보였다. 연한 순금을 입힌 술잔, 강한 바람결이 스치고 지나가도 쨍그랑 하고 금이 갈듯한 술잔에 가득 술을 따라 쭉 들이키면 말썽 많은 세상도 달라져 보일 것만 같았다. 나라가 망할 듯이 편을 갈라 싸움질 하는 정객들의 얼굴도 달라 보이고 희망조차 없이 내리막길로 달음질치는 세상도 부푼 희망으로 보일 것 같은 아쉬움, 꽃잎 하나 따 보고 싶었지만 아까워서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땅에서 올라온 꽃대들인데, 어떻게 한 겨울을 해쳐온 꽃들인데 실수하여 발에 밟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폐가에서의 즐거운 한 때
한참동안 복수초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니 점심 무렵이다. 일행들은 폐가에 짐을 풀고 점심때 먹을 먹거리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폐가 부근의 밭은 먹거리들로 지천이었다. 물오른 마늘들이 고랑을 따라 정갈하게 깔린 마늘밭 옆으로 밭 한 뙈기가 방치돼 있었는데 금방 땅을 뚫고 올라온 듯한 싱그러운 냉이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사람들은 밭에 들어가 냉이를 캤다. 뾰족한 막대기는 흙을 헤집어 냉이를 캐기에 좋은 도구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캔 냉이를 한데 모아 폐가로 들어갔다. 잡풀이 우후죽순으로 솟아오른 마당과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흙집이 여간 황량한 것이 아니었다.
폐가 풍경
냉이 캐는 사람들
마당에 차린 정갈한 식단
무너진 흙벽 속에 얼키설키 드러난 수수깡과 반쯤 부서진 쓰레트 지붕을 보면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 나올 듯 음침했다. 폐가의 주인은 왜 집을 버리고 떠났을까. 인적도 없는 외딴집에 병을 고치러 요양차 왔거나 아니면 햇살과 별을 벗 삼아 살림을 차렸다가 그 적막에 너무 숨이 막혀 황망히 그 자리를 뜬 것은 아니었을까. 자연 속에서 해먹는 밥맛은 꿀맛이었다. 집에서 싸온 도시락 반찬들과 방금 밭에서 캔 냉이로 무쳐놓은 냉이무침, 노릿노릿한 삼겹살이 한데 어울려 차려놓은 식단은 왕후장상의 밥상 부럽지 않았다. 황량한 폐가는 잠시나마 일행들이 떠들어대는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시끄러운 소리에 샘이 났는지 하늘에서 갑작스레 후둑후둑 가랑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면 큰일인데, 내가 늘 꿈처럼 그리워했던 화암사 행이 취소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날이 개이기 시작했다. 적막한 마당에 일행들이 따스한 체온과 목소리를 깔아놓고 추억으로 익길 바라면서 나오는 길엔 아직 꽃봉오리를 잔뜩 오므린 사철나무가 일행을 배웅하고 있었다.
화암사로 가는 길, 풍경소리와 새소리
폐가에서 산길을 따라 10분을 오르면 화암사 입구 주차장에 닿는다. 주차장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사진 마니아들이 타고 온 차들이 많이 주차되어 있다. 화암사로 오르는 산길 입구에는 화암사의 전설을 담은 안내판이 서있다. 복수초와 깊은 관계가 있어 화암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절, 그 바위에 핀 꽃이 바로 복수초란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화암사 입구 안내판에 매달린 풍경,
화암사 간판
안내판 위에는 굵은 글씨로 화암사란 간판이 붙어있고 그 옆에 매달린 풍경이 날쌔게 지나가는 바람결에 놀라 제 몸을 볶아대듯 청아한 소리를 낸다. 맑은 허공을 바다의 푸른 물결 삼아 노니는 한 마리의 물고기, 그러나 쇠줄에 매여 있어 자유롭지 못한 것이 탈이다. 세찬 바람결이 허공에 물살을 일으키지만 쇠줄에 매달린 물고기는 멀리가지 못하고 쉴 새 없이 풍경소리만 낸다. 어쩌면 종에 매달린 쇠물고기와 나는 이승에서 똑같은 운명을 타고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나에게 묶여진 숨 막히는 굴레를 벗고 자유로운 세상으로 줄달음치고 싶은 내 마음을 미친듯이 풍경소리를 내는 물고기는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입구에서 20분을 오르면 화암사에 닿는다. 계곡을 끼고 오르는 산길은 호젓해서 걷기에 제격이다. 산길 중간쯤 올라왔을까, 무거운 카메라를 옆에 끼고 걷는 한 사내와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웠다. 자신은 풍경 사진을 찍는 사람인데 인터넷에서 이 부근에 복수초와 노루귀꽃이 많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왔노라 했다.
철계단 아래에 피어있는 얼레지, 귀부인처럼 쪽진 머리를하고 있다
복수초는 저 아래 폐가 부근에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노루귀꽃은 처음이다. 노루귀꽃 대신 철 계단 밑에 얼레지 군락지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몇 발작 앞에 보이는 철 계단을 오르면 바로 화암사다. 바위를 끼고 있는 철계단 밑 얼레지 군락지들은 아직은 조용한 봄을 맞고 있다. 가녀린 꽃대 끝에 매달린 꽃봉오리들은 자줏빛 물이 들어 곧 터질 듯하다. 활짝 피려면 아마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할 것만 같다. 봄볕에 데워진 햇살이 바위를 타고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면 굳게 입을 닫고 있던 꽃봉오리들이 앞 다투어 시끄럽게 꽃잎을 열 것만 같다. 철계단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걸어놓은 글들이 눈에 띈다. 화암사를 본 소감과 시 몇 편을 읽으며 오르는 맛이 쏠쏠하다.
절주인도 없는 적막한 절
3년 만에 다시 온 화암사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의 주범은 바로 세월이다. 그 짧은 세월에도 만물은 늙고 병들어가는 것인가. 절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대웅전에 앉아계신 관세음보살도 물살처럼 흘러가는 세월을 막지 못했고 낡아가는 건물을 어쩌지 못하는 듯 그 아름답던 우화루가 삭막한 철 제물에 둘러싸여 보수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대웅전과 극락전에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곱게 칠한 단청은 벗겨져 빛깔과 선이 희미해졌고 부서진 처마엔 빗물받이가 걸레처럼 덧대있다. 화암사는 생각보다 인적이 드문 것이 장점이다. 아직은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탓도 있지만 주지 스님이나 보살, 안도현 시인이 말한 “깨끗한 개 두 마리”도 보이지 않아 절은 늘 적막 속에 파묻혀 있다. 환히 문이 열린 대웅전 안에는 중생 몇이 관세음보살 앞에 향불을 피우고 깊게 엎드려 절을 올리는 광경이 눈에 띈다. 소원을 비는 모습을 보니 애틋한 사연이 있는 듯하다.
복수초
그림자처럼 몰려오는 적막을 이겨내기가 벅찼던 것일까, 오손도손 어깨를 걸고 있는 절간들이 꽤 다정한 모습이다. 대웅전과 극락전, 적묵당, 우화루가 조화를 이뤄 빚어내는 고즈넉한 절간은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소리만 아니었다면 아마 적막에 짓눌려 숨도 쉬지 못했으리라.
세찬 바람결에 허공을 물살 치며 때리는 맑은 풍경소리를 들으며 절 뒤편 산등성이를 오른다. 산등성에서 내려다 본 절은 불명산 산자락에 안겨 있어 아늑하기 이를 데 없다. 화암사의 내력을 기록한 중창비도 이 산등성이에 있다.
절 뒷편에 쌓아놓은 기왓장
중창비에 보면 화암사는 고려 충렬왕 때 성달생이 중창하였다고 전한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그 후 중창을 하였는데 극락전과 우화루를 남겼다. 근래에 극락전이 하앙식 공포 구성 구조임이 발견되어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공포 구성은 백제 때의 목조 양식으로 일본과 중국에는 여러 동의 건물이 실존함으로써 건축 양식의 전래와 변천 과정을 살피는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이 산등성이에서 뻗어 오른 산길은 얼마 못가 산간도로와 합류한다. 화암사 입구 주차장에서 고불고불 절 뒤편까지 한없이 이어지는 산간도로다. 화암사를 오는데 힘이 부친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데 달팽이관처럼 구불거리며 내려가는 탓에 걸어 갈려니 족히 한 시간이 걸린다. 아직은 꽃이 피지 않는 산속,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진달래 꽃망울들이 터지는 날, 그 소리에 맞춰 화암사 철계단 아래 얼레지들도 환하게 꽃잎을 열고 귀부인처럼 자주빛 쪽진 머리를 빗어 넘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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