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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장 프랑스에서의 종교 개혁
슈파이얼스의 항의와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앙 고백 후 여러 해 동안 투쟁과 암흑이 계속되었다. 내부의 분열로 인해 쇠약해졌을 뿐 아니라 강력한 적의 끈질긴 공격에 시달린 프로테스탄트주의는 파멸당할 운명에 처한 듯이 보였다.
https://youtu.be/ZEF9jW5WzZk
그러나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에 황제는 패배를 당하였다. 일생 동안 멸절시키고자 했던 교리를 그는 마침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단을 박멸하기 위하여 자기의 나라, 재산, 생명까지도 걸었다. 그러나 이제 군인들은 전쟁으로 피로해졌고, 국고는 바닥이 났으며, 국내 곳곳이 반란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그가 진압하고자 노력했던 개혁주의는 도처에서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다. 카알 5세는 그동안 절대자의 권능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으나 황제는 암흑을 깨뜨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의 목적은 성취되지 못하였다. 여러 해 동안의 전쟁으로 지친 황제는 퇴위하여 수도원으로 물러났다.
스위스에서도 많은 주(州)가 개혁주의를 받아들였으나 그렇지 않은 주들은 맹목적으로 로마 교회의 가르침을 고수하였다. 츠빙글리와 종교 개혁에 연합했던 많은 동지가 카펠(Cappel)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로마 교회가 승리하고 여러 곳에서 일찍이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과 당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다른 나라에서 개혁 사업을 수행할 일꾼들을 일으키셨다.
프랑스에서 최초로 빛을 깨달은 사람은 파리 대학의 교수인 러페브르(Lefevre)였다. 그는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열성이 있고 진실한 로마 교회 지지자였다. 그는 고대 문학을 연구하는 중에 성경에 마음이 끌렸고 그것을 몇몇 학생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성도와 순교자들의 역사 연구에 착수하여 상당한 진전이 보이자 성경에서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에서 진정한 성인들을 발견하였으나 그들은 로마 교회에서 성인의 목록으로 소개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는 교회에서 내세우는 인물들이 성경에 나타난 참된 성도들의 모습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교회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으며 그동안 하던 일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1512년, 아직 루터나 츠빙글리가 개혁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러페브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곧 오직 은혜로 의롭다 여기시고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구원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 “아아, 이 얼마나 놀라운 교환인가? 무죄한 분이 죄인으로 선고를 받고 죄인이 자유의 몸을 얻게 되다니! 축복받은 분이 저주를 받고 저주받은 자가 축복을 받는다. 생명의 임금이 죽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영광의 주께서 암흑 속에 묻히시고 허물과 죄밖에 모르는 자가 그 얼굴에 영광을 나타내게 된다.” 구원의 영광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한편 그는 또한 사람에게는 순종의 의무가 지워져 있음을 강조했다.
러페브르의 학생들 가운데 그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많은 학생이 있었는데 그들은 러페브르가 죽은 후에도 그의 뒤를 이어 진리를 계속해서 전하였다.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이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경건한 로마 교회 신자의 아들로서 그 자신도 열성적인 로마 교회 교인이었으며 교회를 반대하는 자는 모두 멸절시켜 버려야 한다는 열성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교황을 반대하는 말을 들을 때 나는 마치 사나운 이리처럼 이를 갈았다.”라고 후년에 말하였다. 그는 또한 성인 숭배에 매우 열심이었으므로 러페브르와 함께 파리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교회의 제단에서 예배하고, 예물을 드려 성당들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위가 그의 마음에 평안을 주지는 못하였다. 죄의식이 항상 그를 따라다녔으며 어떤 고행으로도 그것을 제거할 수가 없었다. 그때 러페브르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다.” “무죄한 분이 정죄를 받고 죄인이 놓임을 받는다.” “하늘의 문을 열고 음부의 문을 닫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파렐은 기쁜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였다. 그는 바울처럼 회개하였고 전통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주는 자유를 얻었다. “교황에게서 온전히 돌아서서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자 부르짖는 이리와 같이 살기등등했던 마음은 사라지고 흠 없고 유순한 어린양과 같이 되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러페브르는 자신의 제자들에게만 빛을 전했으나 파렐은 진리를 대중에게 전파하였다. 얼마 후에 고위 성직자인 모오(Meaux)의 감독이 그들과 연합하였다. 재능과 학식으로 높임을 받는 교수들도 복음을 전하는 그 일에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위로 궁중에서부터 아래로 노동자와 농부의 가정에 이르기까지 각 계급의 사람들이 복음의 옹호자가 되었다. 당시 프란시스 1세 왕의 누이까지도 개혁 신앙을 받아들였다. 개혁자들은 큰 희망을 가지고 프랑스가 복음화 되는 때를 고대하였다.
프랑스어 신약 성경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시련과 박해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폭풍에 대응할 만한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평화로운 시간이 잠시 주어졌고, 그동안에 개혁 사업은 신속히 발전하였다. 러페브르는 신약 성경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비텐베르크에서 발간되던 바로 그때에 프랑스어 신약 성경도 모오에서 출판되었다. 그 감독은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고 자신의 교구 안에 성경을 보급시켰고 마침내 모오의 농부들까지도 성경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갈증으로 죽어 가는 나그네가 생명의 샘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영혼들은 하늘의 기별을 받아들였다. 들판에서 일을 하는 농부들과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진리를 이야기함으로 매일의 노동을 기쁘게 수행하였다. 그들은 밤이면 술집에 가는 대신 이웃끼리 한집에 모여서 성경을 읽고 함께 기도하고 찬미를 불렀다. 곧 그들의 지역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비천한 계급인 농부들의 생활에서도 개혁과 향상으로 이끄는 거룩한 능력이 나타났다.
모오에서 밝혀진 빛은 멀리까지 전파되었고 회개하는 사람의 수가 매일 증가하였다. 한동안 국왕이 교회 성직자 대표단의 분노를 억눌러 왔으나 교황 측의 지도자들은 다시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어 화형주가 세워지고 많은 사람이 화형주의 불꽃으로 진리를 증거 하였다.
고난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 한 사람들은 비천하고 가난한 계급의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왕궁과 훌륭한 저택에 살면서도 재물과 지위 심지어 생명보다 진리를 더욱 가치 있게 여기는 당당한 이들이 있었다. 베르캥(Louis de Berquin)은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용감하고 예의 바른 기사였고, 학구열이 높고, 흠 없는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루터파의 교리를 특별히 증오하였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섭리로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고, 성경에서 “로마 교회의 교리가 아닌 루터의 교리”를 발견하고는 너무도 놀랐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온전히 복음 사업에 헌신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로마 교도들은 그를 이단자라 하여 투옥하였으나 국왕이 그를 석방시켜 주었다. 여러 해 동안 프란시스왕은 로마 교회와 개혁파 사이에서 방황하였다. 베르캥은 로마 교회의 당국자들에 의해 세 번이나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의 천재적 소질과 고결한 인품을 존경해 오던 왕은 그가 교권의 술책에 희생당하지 않도록 그럴 때마다 석방시켜 주었다. 베르캥은 프랑스에서 그를 위협하는 위험에 대해 여러 번 경고를 받았으며, 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망명한 사람들의 길을 따르라는 권유를 받았다.
담대한 베르캥
그러나 위험이 증가할수록 베르캥의 열심은 더욱더 강해졌다. 그는 한층 대담한 수단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진리를 옹호할 뿐 아니라 오류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의 가장 큰 반대자들은 국가에서 최고의 종교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파리 대학 신학부의 박사들과 수도승들이었다. 베르캥은 박사들의 저서 중에서 12개의 항목을 뽑아 그것들이 “성경에 위배되며 이단적인 것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왕에게 그 논쟁의 심판자가 되어 달라고 호소하였다.
왕은 거만한 수도승들의 자만심을 꺾어 줄 좋은 기회로 여기고 로마 교도들에게 성경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그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고문, 화형과 같은 일에만 익숙해 있었다. 이제 그들은 베르캥을 넘어뜨리기 위해 판 함정에 자신들이 빠지게 된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피할 길을 찾고자 하였다.
“마침 그때 어느 거리 모퉁이에 세워져 있던 성모상이 파손되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슬퍼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왕의 마음도 심히 동요되었다. “이 일은 베르캥이 가르친 교리의 결과이다. 이 루터당의 모의에 의하여 종교와 법률 그리고 왕위까지 전복되려고 한다.”라고 수도승들은 외쳤다.
베르캥은 다시 체포되었다. 마침 왕이 파리를 떠나 부재중이었으므로 수도승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그를 처치할 수 있게 되었다. 곧바로 개혁자 베르캥은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프란시스왕이 다시 그를 구할 수 없도록 사형은 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집행되었다. 정오에 베르캥은 사형장으로 끌려 나갔고 많은 군중이 그 사건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고귀한 가문 출신이면서 용감하고 훌륭했던 그 희생자를 놀라움으로 주목하였다. 경악, 분노, 조소, 강한 증오심이 그 주위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얼굴을 어둡게 하였으나 오직 한 사람의 얼굴에는 아무런 그늘이 없었다. 그 순교자는 오직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는 사실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베르캥의 용모는 하늘의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벨벳 망토와 윤이 나는 붉은 재킷 그리고 황금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만왕의 왕과 온 우주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믿음을 증거 하였다. 어떤 슬픈 흔적도 그의 기쁨을 가릴 수 없었다.
행렬이 군중으로 가득 찬 거리를 서서히 지나갈 때 사람들은 승리의 기쁨으로 충만한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사람은 성전에 앉아서 거룩한 사물을 조용히 명상하고 있는 사람과 같다.”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화형대에 묶인 베르캥
베르캥은 화형대에서 사람들을 향하여 몇 마디 말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도승들의 부르짖음과 군인들의 무기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로 인해 순교자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교회의 최고 권력자들은 1529년에 문화의 중심 도시 파리에서 “교수대에서 죽어 가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음으로 1793년 프랑스 혁명 당시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처럼 혐오스러운 모본을 따르게 되었다.” 베르캥은 교수형을 당하였고, 그의 시체는 불태워졌다.
모오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개혁파의 교사들은 다른 지방으로 피신했다. 러페브르는 독일로 갔고, 파렐은 고향인 동프랑스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빛을 전하였다. 그가 가르친 진리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자 그는 곧 마을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두루 다니면서 개인 집이나 외딴 목장 등에서 말씀을 가르쳤고 그가 소년 시절에 자주 다니던 숲속이나 동굴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사도 시대와 마찬가지로 박해는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빌 1:12)을 가져왔다. 파리와 모오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행 8:4)하였고, 진리의 빛은 프랑스의 먼 지방에까지 퍼져 나갔다.
칼뱅을 부르심
파리의 어느 학교에 고결한 삶과 지적 열성과 종교적인 헌신을 소유한 사려 깊고 침착한 한 청년이 있었다. 그의 천재성과 근면은 그 대학의 자랑이었으며 사람들은 칼뱅이 교회의 가장 뛰어난 옹호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하늘의 빛이 칼뱅을 둘러싸고 있던 스콜라 철학과 미신의 장벽을 뚫고 그에게 비치었다. 개혁파에 가담한 칼뱅의 사촌 올리베탄(Olivetan)이 파리에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때때로 만나서 당시 그리스도교국을 혼란케 하고 있던 문제들을 토론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인 올리베탄(Oliveta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교밖에 없다. 한 가지는 사람이 고안해 낸 것으로 그것은 의식(儀式)과 선한 행실을 통해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종교는 성경에 계시된 것으로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통하여 주어지는 구원을 바라보도록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칼뱅은 “나는 이 새 교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대는 내가 지금까지 오류 가운데 살아왔다고 생각하는가?”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홀로 자기 방에서 사촌의 말을 깊이 생각하는 중에 중보자 없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다. 성인들에게 드리는 기도, 선행, 교회의 의식 등 이 모든 것은 죄를 속하는 데 무력하였다. 고해성사와 고행이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는 없었다.
화형장의 증인
어느 날 칼뱅은 큰 광장에서 이단자가 화형 당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하였다. 극심한 죽음의 고통과 무서운 교회의 정죄 선고를 받고도 순교자는 믿음과 용기를 나타냈다. 그는 엄격하게 교회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도 오히려 절망과 암흑 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그 순교자와 비교해 보았다. 그는 이단자들이 그들의 믿음을 성경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연구하여 그들이 발견한 기쁨의 비밀을 찾아내고자 결심하였다.
마침내 그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이렇게 외쳤다. “오, 아버지! 그리스도의 희생은 당신의 진노를 그치게 하였고, 그분의 피는 나의 허물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나의 저주를 대신 졌고, 그분의 죽음은 나를 속량하였습니다. …당신은 나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예수님의 공로 외에는 어떤 공로도 혐오하여 외면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제 그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선천적으로 수줍음이 많았으므로 연구에 전념하길 원하였다. 그러나 친구들의 끈질긴 권유로 마침내 그는 공적인 성경 교사가 되기로 하였다. 그의 말은 마치 땅을 적시는 이슬과 같았다. 그는 파리를 떠나서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의 일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있던 마가레트 여왕의 보호 아래 있는 지방의 한 작은 도시에서 지내게 되었다. 칼뱅의 사업은 가정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가족들을 모아 성경을 읽어 주고, 구원의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복음의 기별을 들은 사람들은 그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그는 진리를 위한 두려움 없는 증인들을 길러 내기 위한 교회의 토대를 놓으면서 앞으로 전진하였다.
파리는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또 다른 초청을 받게 될 것이었다. 러페브르와 파렐의 호소는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그 기별이 이 큰 도시의 사람들에게 다시 전해져야 할 것이었다. 프란시스왕은 정치적 영향 때문에 아직 개혁주의에 대항하여 로마의 편에 완전히 가담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황제의 누이 마가레트는 파리에서 선포되는 개혁주의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그녀는 개혁파의 한 목사에게 파리의 여러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였다. 가톨릭교회 당국자들이 이 일을 금지하자 그녀는 왕궁을 개방하였다. 매일 말씀이 선포되었고 초청받은 수천 명의 사람이 그 집회에 참석했다.
왕은 시내의 두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집회를 열도록 명령하였다. 시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전에 경험하지 못한 감동을 받았다. 술 취함과 방탕함과 투쟁과 게으름이 절제와 순결과 질서와 근면으로 바뀌었다.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대다수의 백성이 이를 거절하였다. 교황의 세력은 다시 권세를 회복하는 데 성공하였고 다시금 교회는 폐쇄되고 화형대가 세워졌다.
칼뱅은 여전히 파리에 있었다. 당국자들은 마침내 그를 화형에 처하고자 하였다. 어느 날 친구들이 그에게로 급히 달려와서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관리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바로 그때 바깥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한순간도 지체할 수 없었다. 몇몇 친구가 문에 서서 관리들을 제지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급히 그 개혁자를 창문으로 달아 내렸다. 그는 개혁주의에 호의를 품고 있는 한 노동자의 집으로 들어가 그 집 주인의 의복을 얻어 입고 괭이를 어깨에 메고 길을 떠났다. 그는 남쪽으로 향하였고 마가레트 영지에서 다시 피난처를 찾았다.
칼뱅은 활동하지 않고 오랫동안 지낼 수 없었다. 박해의 폭풍이 잔잔해지자 그는 포티어(Poitiers)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대학도 있었고, 복음주의가 호평을 받고 있었다.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복음에 귀를 기울였다. 청중의 수가 늘어 가자 도시 변두리에서 모이는 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동굴을 집회 장소로 정하였는데 그곳은 나무와 바위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 그들은 이 격리된 장소에서 성경을 읽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이 처음으로 성만찬 예식을 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 작은 교회에서 몇 사람의 충실한 복음 전도자들이 외방으로 파견되었다.
칼뱅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으나 일할 수 있는 문들이 거의 닫힌 상태였다. 그는 마침내 독일로 가고자 결심하였다. 그가 프랑스를 가까스로 벗어나자마자 고난의 시간들이 개혁파들에게 엄습하였다.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들은 온 국민을 각성시키기 위해 로마 교회의 미신을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룻밤 사이에 미사를 공격하는 격문을 전국에 붙였다. 그러나 분별없는 열성만으로 행한 그 일은 로마 교도들에게 개혁자들이 나라의 안녕과 왕권을 위태롭게 하는 이단자들이라는 명분을 주었고, 그들의 완전한 박멸을 요구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게 되었다.
한 장의 격문이 왕궁 거실의 출입문에 붙어 있었다. 그 종이에는 로마 교회가 가르치는 미신을 신랄하게 공격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왕은 격노하여 이렇게 선포하였다. “루터당이라고 의심되는 자는 가차 없이 모두 체포하라. 나는 그들을 모두 멸할 것이다.” 왕은 이제 로마 교회의 편에 완전히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공포 시대
파리시에서도 루터파를 모두 체포하라는 조치가 즉시 취해졌다. 개혁파의 한 사람으로서 비밀 집회에 신자들을 모으는 일에 능숙했던 가난한 한 직공이 체포되었다. 그는 즉시 화형시킨다는 위협을 받고 교황 측의 특사들을 시내에 있는 모든 개신교도의 집으로 안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화염의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형제들을 배반하는 데 동의하였다. 왕실의 비밀 탐정인 모린(Morin)이 그 배반자를 데리고 조용하고 은밀하게 도시의 거리를 지나다녔다. 어떤 루터교도의 집에 이르자 그 배반자는 말없이 어떤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행렬은 정지하였고 군인들이 그 집으로 들이닥쳐 가족을 끌어내어 쇠사슬에 묶었으며 이어서 다시 새로운 포획물을 찾아서 그 무서운 행렬은 움직였다. “모린은 도시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하였다. …공포 시대였다.”
희생자들은 잔인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였다. 화형을 집행할 때 그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기 위하여 화력을 약하게 하라는 특별한 지시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승리자들처럼 죽었다. 그들의 충성은 변함이 없었으며, 그들의 평화스러운 얼굴에는 조금도 그늘이 없었다. 박해자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패배자라고 느꼈다. “파리의 시민들은 이 새로운 사상이 어떠한 종류의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었다. …순교자를 화형시키기 위하여 쌓아 올린 장작더미처럼 좋은 설교단은 없었다.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갈 때 그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난 평온한 기쁨, 타오르는 불길 속에 서 있는 그들의 영웅적 태도, 모욕에 대한 그들의 온유하고 관대한 용서 등은 사람들의 분노를 동정으로, 증오를 사랑으로 바꾸어 주었고, 저항할 수 없는 웅변으로 복음을 옹호하는 방편이 되었다.”
개신교도들은 정부를 전복시키고 왕을 암살하려 한다는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다. 죄 없는 개신교도들에게 가해진 가톨릭교회의 만행은 장차 그들이 받게 될 형벌의 무게를 쌓는 것이었다. 왕과 정부와 백성이 개혁자들에게 혐의를 씌운 그 일은 여러 세기 후에 무신론자들에 의해 가톨릭교회에 재현되었다. 가톨릭교회가 개혁주의를 핍박한 일로 인해 3백 년 후에 프랑스에 그처럼 비참한 재난이 초래되었던 것이다.
의심과 불신과 공포가 사회의 모든 계층에 편만하였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가운데 교양 있고 권세 있고 품성이 고결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루터파의 교리가 얼마나 깊이 스며들고 있었는지가 드러나게 되었다. 직공, 인쇄인, 학자, 대학 교수, 저술가 심지어 왕궁에서 시종 드는 사람들까지 많은 사람이 모습을 감추었다. 수많은 사람이 파리를 탈출하여 국외로 피신함으로써 그들이 개혁주의 신앙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음이 처음으로 드러났다. 교황의 지지자들은 그 이단자들이 자신들과 같이 지내면서도 전혀 의심을 받지 않고 지내 왔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놀랐다.
출판 금지령
프란시스 1세는 16세기 초에 일어난 문예 부흥 운동의 지지자였다. 그는 각 나라의 학자들을 자신의 궁전으로 모으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학문을 사랑한 그도 이단 박멸의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자 프랑스 전역에 출판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프란시스 1세는 지적 교양이 종교적 편견과 핍박을 방어해 주는 보호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입증해 주는 좋은 예증이 된다.
프랑스는 엄숙하고 공공연한 의식을 통해 개신교를 박멸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신부들은 개혁파들이 미사를 정죄함으로 높으신 하나님을 모욕한 것을 피로써 갚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535년 1월 21일 그 무서운 의식이 집행되도록 예정되었다. 모든 집의 대문 앞에는 거룩한 의식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횃불이 세워졌다. 날이 새기 전에 왕궁에서 행진 대열이 갖추어졌다.
“선두에는 각 교구의 깃발과 십자가가 서고, 그 뒤에는 시민들이 둘씩 짝을 지어 횃불을 들고 따라갔다. …성병(聖餠)은 파리의 감독이 가지고 갔는데 네 명의 왕족이 화려한 차양으로 그 위를 덮고 있었다. 왕은 그 성병의 뒤를 따랐다. 프란시스 1세는 그날 왕관과 왕복을 착용하지 않았다.” 그는 곳곳에 준비된 제단 앞에 이를 때마다 몸을 굽혀 꿇어 엎드렸는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더럽힌 죄악이나 자신의 손을 더럽힌 무죄한 자의 피 때문이 아니라 대담하게도 미사를 정죄한 그의 신하들의 무서운 죄 때문이었다.
그날 행사의 일환으로 왕은 감독이 거하는 저택의 넓은 방에서 국내의 고관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였다. 그는 얼굴에 슬픈 빛을 띠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웅변으로 그 나라에 닥친 “범죄와 모독과 슬픔과 치욕의 날”에 대해 깊이 탄식하였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를 멸망시키고자 위협하고 있는 그 파괴적인 이단을 박멸하는 데 있어서 모든 신하가 충성으로 조력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고, 회중도 벅찬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가톨릭교회를 위해 살고 가톨릭교회를 위해 죽겠습니다.”라고 외쳤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가 이미 나타났고, 프랑스는 그 은혜의 권능과 거룩함을 경험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하늘에서 온 빛에 이끌려 각 도시와 촌락이 그 빛으로 변화된 것을 목격했으면서도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고 빛보다 어둠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하늘에서 온 선물을 거절했으며, 악(惡)을 선(善)이라 하고 선(善)을 악(惡)이라 하면서 자아 기만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을 기만으로부터 구원해 주고, 그들의 영혼을 무죄한 피를 흘린 죄에서 구원해 줄 수 있는 빛을 그들은 고의로 거부하였다.
행렬이 다시 정돈되었다. “가까운 거리에 몇 사람의 개신교도를 산 채로 화형시킬 화형주들이 세워져 있었다. 왕이 가까이 접근하는 순간 행렬을 정지시키고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 뒤 그 처형 장면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희생자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다. 신앙을 취소하라는 요구를 받자 그중 한 사람이 “나는 오래전부터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전한 것과 성도들이 믿은 것만을 믿어 왔다. 나의 믿음은 음부의 모든 권세를 이기신 하나님을 확신하는 믿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행렬은 처형 장소마다 멈추었고 그때마다 화형식이 진행되었다. 마침내 그 행렬이 처음 출발했던 왕궁에 도착하자 군중은 해산하였고, 왕과 주교들은 그날의 행사에 매우 만족해하였다. 그들은 서로 축하를 나누며 이단을 완전히 진멸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프랑스에서는 평화의 복음이 거절당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었다. 프랑스가 개혁자들을 완전히 진멸하기로 한 그날로부터 258년이 지난 1793년 1월 21일에 또 하나의 행렬이 파리시를 통과하였다. “다시 왕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였고, 소동과 부르짖음이 일어났다. 또다시 많은 희생자를 요구하는 소리가 들렸고, 검은 단두대가 세워졌다. 그리고 무서운 사형 집행으로 그날의 끝을 맺었다. 루이 16세는 간수들과 사형 집행자들 사이에서 몸부림을 치며 단두대 앞으로 끌려갔고 칼날이 내려오기까지 붙들려 있었다. 마침내 잘려진 그의 머리는 단두대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피의 희생 제물이 된 것은 왕만이 아니었다. 피비린내 나는 공포 시대 동안에 그 근방에서 단두대에 의해 처형된 사람은 이천팔백 명이나 되었다.
종교 개혁은 세상 사람들에게 성경을 펴서 보여 주었다. 무한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늘의 원칙을 보여 주셨다. 프랑스는 하늘의 선물을 거절함으로 무정부 상태와 파멸의 씨를 뿌렸고 그 필연적인 결과로 혁명과 공포 시대를 초래하였다.
용감하고 열정적인 파렐은 고향을 떠나 스위스로 망명을 떠나 있었으나 그는 프랑스에서 진행되는 종교 개혁 사업에 지속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는 다른 망명자들의 도움을 받아 독일 개혁자들의 저서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고, 프랑스어 성경도 동시에 많이 출판하였다. 그 저서들은 문서 전도자들을 통하여 프랑스 국내에 널리 전해졌다.
파렐은 스위스에서 교사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한적한 교구로 가서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조심스럽게 성경의 진리를 소개함으로써 학생들을 통해 그 부모들에게 진리를 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몇몇 사람이 그의 가르침을 좇게 되었으나 신부들이 와서 그 사업을 방해하였고, 미신적인 시골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파렐의 활동을 반대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전파함으로 평화가 아니라 분쟁이 초래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신부들은 주장하였다.
파렐은 초기의 제자들처럼 이 성읍에서 박해를 만나면 저 성읍으로 피하였다. 그는 배고픔과 추위와 피곤을 무릅쓰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복음을 전하며 다녔는데 어디를 가든지 그의 생명은 위협을 받았다. 그는 시장에서 때로는 성전의 설교단에서 진리를 전하였다. 여러 번 폭도들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을 정도로 매를 맞기도 했다. 그럴지라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교회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던 도시들이 하나둘 차례로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파렐은 제네바에 개신교의 깃발이 꽂히기를 오랫동안 열망해 왔다. 진리가 전파된다면 그곳은 프랑스와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위한 종교 개혁의 중심지가 될 것이었다. 그는 그 목적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하였고 그 결과 주위의 많은 도시와 마을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동료 한 사람만을 데리고 제네바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두 번밖에 설교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신부들은 무기를 옷에 감춘 채 그를 교회 회의에 불러 죽이려고 하였다. 그 회의장 밖에는 격노한 폭도들이 곤봉과 검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었으며 만일 그가 회의 장소에서 피하여 도망하면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행정 관리들과 무장한 군대에 의하여 보호를 받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그는 동료와 함께 호수 건너편의 안전지대로 옮겨졌다. 이렇게 제네바를 복음화 하고자 한 그의 첫 번째 활동은 끝이 났다.
파렐의 뒤를 이어 택함을 받은 사람은 더욱 비천한 사람이었다. 그 젊은이는 너무도 볼품이 없었기 때문에 개혁 사업의 동료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냉담한 취급을 받았다. 파렐도 거절당한 곳에서 과연 그런 인물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매우 강하고 용감한 사람일지라도 피해 가고자 하는 그 성읍에서 너무도 빈약해 보이는 그와 같은 인물이 어떻게 견뎌 낼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 신다(고전 1:27).
교사 프로망
프로망(Froment)은 교사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친 진리를 아이들은 집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들이 성경 강의를 들으러 왔다. 신약 성경과 전도용 소책자들이 무료로 배부되었으며, 새 교리를 들으러 오지 않은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얼마 후에 그 전도자 역시 박해를 피해서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가르친 진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개혁 사업의 씨는 뿌려졌고, 전도자들은 돌아왔으며, 그들의 노력을 통하여 마침내 제네바에서 개신교 예배가 시작되었다.
칼뱅이 제네바에 들어갔을 때 제네바는 이미 개혁 사업을 선언한 후였다. 그는 바젤로 가기 위해 제네바를 거쳐 돌아가는 길을 택하였다.
파렐은 칼뱅의 방문에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하심을 느꼈다. 비록 제네바가 개혁주의의 신앙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곳에는 아직도 성취해야 할 큰 사업이 남아 있었다. 거듭남은 의회의 명령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으로 마음과 양심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제네바의 주민들은 로마 교회의 권력에서는 벗어났지만 로마 교회의 통치하에서 만연하던 악은 쉽사리 버리지 못하였다.
파렐은 칼뱅이 그 사업을 위하여 자기와 협력할 수 있는 사람임을 확신하였다. 파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청년 전도자에게 그곳에 머물러 일해 줄 것을 정중히 간청하였다. 그러나 칼뱅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 일을 사양하였다. 겁이 많고 평화를 사랑하는 칼뱅은 용감하고 독립심이 강하고 과격한 성질을 지닌 제네바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서 인쇄물을 통하여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회를 세워 나가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파렐의 엄숙한 권고가 하늘에서 온 소명처럼 느껴져 그는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손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를 붙들고 그가 피하고자 하는 그 장소에 억지로 주저앉게 한 것”처럼 느꼈다고 말하였다.
파문 소동
개혁 사업은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교황은 제네바에 대하여 파문 선고를 내렸고, 강대국들은 제네바를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왕들과 황제들까지도 강제로 굴복시키던 그 강력한 교황권의 권력에 이 작은 도시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개혁 사업의 초기의 승리는 지나갔다. 로마 교회는 개혁 사업을 진멸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세력들을 구축하였다. 교황권은 가장 잔인하고 사악하고 강력한 투사들로 구성된 제수이트당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양심도 버리고, 규정도 인정하지 않으며, 혈연관계도 배척한 채 오직 자신들의 조직 질서만을 추종하였다(부록 참조).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지지자들로 하여금 고난을 견디게 하고, 추위와 굶주림과 수고와 빈곤에도 낙담하지 않게 하며, 고문대와 감옥과 화형주 앞에서도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게 해 주었다. 반면에 제수이트당은 그 추종자들에게 광신적인 영감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온갖 위험을 견딜 수 있게 하고, 각종 기만의 무기로써 진리의 세력에 맞서도록 하였다. 그들은 어떤 큰 죄라도 범할 수 있었고, 어떤 악한 거짓도 행할 수 있었으며, 모든 위선과 속임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개신교를 전복시키고, 교황의 최상권을 재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룩한 의복을 입고 감옥과 병원을 방문하며 병자와 불쌍한 사람들에게 봉사하였는데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겉으로는 아무런 흠도 없어 보였으나 실상은 가장 사악하고 치명적인 의도를 감추고 있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 그 단체의 근본 원칙이었다. 이 원칙에 의하여 거짓말, 도적질, 거짓 증거, 암살 같은 것도 그것이 교회에 유익이 될 때는 칭찬받을 만한 일이 되었다. 제수이트 회원들은 여러 모양으로 가장하였는데 공직자가 되거나 왕의 고문관의 지위에 올라 나라의 정책을 세우는 일들을 하였다. 그들은 정탐을 위해 남의 종도 되었다. 또한 왕족들과 귀족들을 위한 대학들 그리고 평민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서 개신교 자녀들에게 가톨릭교회의 의식들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상들이 수고하고 피 흘려 얻은 자유를 그 자녀들이 등지고 말았다. 제수이트당은 신속하게 유럽 전역에 퍼졌으며 그들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가톨릭교회의 부흥이 뒤따랐다.
그들에게 더욱 큰 권력을 주기 위하여 종교 재판소를 다시 세우라는 교서가 내렸다.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무서운 재판소가 설치되었고, 대낮에는 너무 무서워서 차마 볼 수 없는 고문이 아무도 볼 수 없는 은밀한 감옥에서 반복하여 감행되었다. 많은 나라에서 국가의 꽃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 높은 교육을 받은 매우 지성적인 사람들, 경건하고 헌신적인 목사들, 부지런하고 애국적인 시민들, 탁월한 학자들, 천재적인 예술가들, 기술 있는 직공들이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씩 죽임을 당하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부록 참조).
개혁 사업의 승리
로마 교회는 종교 개혁의 빛을 꺼 버리고 암흑시대의 무지와 미신으로 다시 돌리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과 루터에 이은 고귀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개신교회는 무너지지 않았다. 개신교회의 힘은 왕족들의 호의나 권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가장 작고 무력한 나라들이 그 요새가 되었다. 강한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작은 도시 제네바, 스페인의 폭정에 항거하던 네덜란드, 황량하고 눈 덮인 스위스 등에서 종교 개혁은 승리를 거두었다.
칼뱅은 약 30년간 유럽 전역에 개혁 사업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행위와 가르침에 오류와 결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세계에 필요한 진리를 선포하고, 가톨릭교회의 거센 물결에 대항하여 개혁 교회의 원칙을 확고히 하고, 개혁 교회 안에 단순하고 순결한 삶을 증진시키기 위해 사용된 하나님의 도구였다.
개혁 교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제네바로부터 출판물들이 보급되고 교사들이 파견되었다. 각국에서 핍박받던 사람들은 제네바로부터 교훈과 격려를 기대하였다. 칼뱅의 도시 제네바는 쫓겨 다니던 서유럽 개혁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환영을 받고 따뜻한 보호를 받았다. 그들은 거기서 안식처를 얻었으며 그 도시는 그들의 기술과 학문과 신앙으로 혜택을 누렸다. 스코틀랜드의 용감한 개혁자 존 녹스, 영국의 청교도들,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개신교도들, 프랑스의 위그노 교도들은 모두 고국의 암흑을 밝히기 위하여 제네바에서 진리의 횃불을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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