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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 참아버님의 가계
가문의 전통
남평 문씨의 시조인 무성공(武成公) 문다성(文多省)은 서기 472년 2월에 오늘의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소재 장자연 인근의 큰 암석 위의 석함에서 탄강했는데, 그 석함에는 붉은색의 ‘글월 문(文)’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남평 문씨 족보를 보면, 신라시대의 자비왕이 몽시 가운데 ‘이 나라에 특별한 아기가 태어났으니 찾아라.’는 명을 받아서 남평에 있는 문암이라는 바위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찾아낸 데서부터 문씨 조상이 출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문다성은 진흥왕 때 보상 겸 대국사의 지위에 오른 뒤 용모가 단정한 사람들을 뽑아 풍월주(화랑도의 수장)라 부르고 효․충․의를 가르쳤다고 한다. 참아버님께서는 ‘남평 문씨는 전통적으로 양심적이며 절개가 있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무서운 고집을 가진 문중’이라면서 ‘팔도강산에서 우리 집을 찾아오는 이는 누구를 막론하고 후히 대접해 보내라.’는 집안 전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1 세계 사람들은 아버님의 핏줄이 어디에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찾습니다. 대한민국 역대 조상들이 희생한 터 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희생은 뭐냐 하면 썩는 것입니다. 썩는 데에 생명의 씨를 심으면 잘 자랍니다. 역사시대에 수난을 받고 고통을 받은 그 민족은 생명의 씨를 받아 무럭무럭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수난을 받은 지역에서는 성인이 출생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 의로운 주장, 의로운 나라, 의로운 주의가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2 아버님은 남평(南平) 문씨입니다. 남평은 말 그대로 남쪽의 평지를 의미합니다. 남쪽은 이상을 말합니다. 남쪽 나라에 평지를 이룰 수 있는 활동 무대, 자연 무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은 ‘글월 문(文)’자입니다. ‘글월 문’자를 보면 ‘또 우(又)’자 위에 점(’)을 올려놓아 제사상(文)과 같은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문씨는 제사장의 책임을 해야 됩니다. 제주(祭主)가 되어야 합니다.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리는 제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3 자기 조상들 가운데 나라의 충신이나 성인, 성자의 공적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그를 조상 중의 조상으로 모셔야 됩니다. 문극겸이라는 분은 고려시대에 무관과 문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화해를 붙이다가 객사했습니다. 문극겸 할아버지는 전통의 역사를 가려서 조선시대 500년 역사를 엮을 수 있는 다리를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목화씨를 중국에서 들여온 문익점 할아버지로부터 내가 23대권 내에 들어가 있습니다.
4 우리 집은 증조부가 이사 오셔서 정주에 살기 시작했는데, 집안에 가훈이 있습니다. 그 말씀인즉 ‘팔도 강산을 그리워하면서 팔도강산의 귀한 손님이 찾아오기를 바라며 오는 손님들을 정성껏 대접해라. 길을 지나가다가도 찾아오는 손님들을 정성껏 대접해라. 그러면 팔도강산의 복이 우리 문중에 찾아든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는 손님을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배후에 무엇이 달려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지극정성으로 대접해서 보내면 후대에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삼천리강토에서 찾아오는 복이기 때문에 그 복은 그러한 터전 위에서 만나게 되고, 그러한 터전을 통해서 복을 받았으니 또 삼천리반도를 넘어서 세계에 나누어 줄 수 있는 복이 몰려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5 내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에게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가훈이 있어서 집에 들락날락하는 사람을 절대 그냥 보내지 말고 언제나 대접해 보내라고 한 것입니다. 거지가 온다고 박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도 그랬습니다. 전통이 그렇습니다. 겨울에 거지가 찾아와서 밥을 달라고 하면 밥을 먹다가도 할머니나 어머니가 냉큼 나가는데, 준비를 안 하면 할아버지가 당신 밥상을 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대로 밥을 못 먹습니다. 거지에게 밥을 주고는 당신은 못 먹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세계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호남지방 영남지방 등 팔도강산의 사람들이 이북을 거쳐 중국으로 갈 때에는 국도로 가게 됩니다. 동네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가자고 하면 ‘저기에 가면 문씨네 집이 있는데 거기에 가서 자라.’라고 알려 줍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언제나 춘하추동 사시사철 사랑방이 비어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밥을 하는 우리 어머니가 일생 동안 시달린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팔도 사람에게 밥을 먹인 그 집안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팔도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후예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6 우리 집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내가 여덟 살쯤에 자다가 일어나면 모르는 사람들이 사랑방에 가득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밤에 잔치를 했습니다. 왜 모였느냐고 물어보면 귀엣말로 ‘독립군이 왔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천막 같은 데서 자고, 지붕도 올라 다니고, 담도 한 손만 짚고 넘어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밤참으로 국수를 해 주었습니다. 닭을 잡고 국수를 하는 것이 밥을 하는 것보다도 빠르고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주인이 못 먹더라도 그들에게 먹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 가훈이었습니다. 그러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7 참부모의 가문도 애국 충신의 역사적인 전통을 지녀야 됩니다. 우리 집안이 이상한 것이, 가족 가운데 누가 담배를 피우든가 술을 먹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난다는 것입니다. 술도 못 먹고 담배도 못 피웁니다. 또 가정의 전통이 훌륭한 것은 첩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부터 보더라도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최고의 신앙을 해왔습니다. 우리 종조부가 목사였는데 예언서에 대한 것을 통달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나 가족들도 기도하면 미래에 대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참아버님의 가족
남평 문씨가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충선공 문익점의 다섯 아들 중 3남 의안공(毅安公) 문중실(文中實)때부터였으며, 그중 의안공의 5세손인 문달(文達)이 평안북도 정주에 정착하였다. 참아버님의 고조부 문성학(文成學)은 의안공의 19세손이며, 정호 정기 정흘의 세 아들을 두었다. 그중 막내아들 문정흘이 바로 아버님의 증조부로서 상사리에 처음 터를 잡았다. 문정흘은 치국(致國) 신국(信國) 윤국(潤國)의 세 아들을 두었으며, 그 맏아들 문치국이 참아버님의 조부이다. 문치국은 참아버님에 대해 ‘이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인즉 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돕도록 하라.’고 일렀다. 문치국은 경우(慶裕:음 1893.7.11~1954.10.11) 경복(慶福) 경구(慶球) 등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고, 문경유 충부님은 연안 김씨 경계(慶繼:본명 周觀, 음 1888.10.15~1968.1.7) 충모님과 혼인하였다. 충모님은 정주 유지로서 독립운동과 오산학교 설립에도 도움을 준 부친 김백홍(金伯洪)과 모친 인동 장씨(張氏) 슬하 3남 2녀 중 맏따님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에 가장 많은 사람이 과거에 급제한 연안 김씨 집안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정결하고 기품 있게 성장하였다. 키가 크고 성격은 활달하고 정열적이며 참아버님의 재림노정에 완전히 모자협조의 섭리 기반을 이룬 희생적 삶을 살았다.
8 우리 가정은 증조부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때에 와서는 탕감을 받았습니다. 축복받은 후에는 탕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축복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탕감을 받았습니다. 열만한 축복을 받았으면 반드시 그만한 탕감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우리 가정에 상당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가산이 탕진되었고 인명 피해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혼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축복을 받으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은 그 가정을 사탄세계에 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탄세계에서 들이치는 것입니다. 3대에 걸쳐 탕감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9 옛날에 나 한 사람을 없애기 위해서 우리 가족에게는 믿기지 않는 여러 가지 영적 현상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환경 가운데 태어나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을 스스로 모두 해결해 나왔습니다. 물론 부모님도 있었고 친척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중 작은할아버지는 목사였는데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한문에도 능하고 중국 역사도 훤히 아는 분이었습니다. 또 평양신학교를 나와서 영어도 잘했습니다. 서양문명도 꿰뚫어볼 줄 아는 독립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정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문제를 나 혼자서 해결해 나왔습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 의논해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장래에 가고자 하는 그 길에 대해서는 부모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그 배후에 영적 현상으로 인해 일가족, 부모로부터 친족에까지 여러 가지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사탄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를 중심으로 가족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10 나는 3․1운동을 주도하던 한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종조부인 문윤국 할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우리 종조부로부터 ‘너는 할아버지보다 훌륭한 손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나를 참 사랑했습니다. 오산학교를 세운 그 배후에는 우리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11 우리 아버지로 말하면 법이 없이도 사실 분이었습니다. 만일 아버지가 어디에서 급하게 빚을 얻어 왔을 때에는 그 빚을 갚는다고 약속한 날에 이자까지 갚아 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분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 약속을 이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을 이행하는 데 있어서는 모범적인 분이었습니다.
12 우리 어머니가 아들딸 열셋을 낳았습니다. 내 위로 누나가 셋이나 됩니다. 아들로서는 내가 둘째입니다. 다섯이 죽고 나머지 여섯 딸과 두 아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아들을 키우다가 보내고 딸들도 키우다가 보낸 것입니다. 동생이 죽어서 그 관을 아버지가 갖다가 묻는데 우리 형님이 도울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책임지고 간단한 널을 짜서 죽은 동생을 넣고 어깨에다 메고 가서 묻은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떠나보내며 눈물짓고 있는데, 아버지는 혼자 묻고 돌아와서도 손을 안 씻었습니다. 사흘이 지나서야 손을 씻고 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아들을 묻고 손을 씻고 밥을 먹느냐고 말입니다. 그것을 보면 아버지는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조상의 유언을 법보다 무섭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13 우리 어머니는 후덕한 분이었습니다. 남자 같은 분으로 아주 무서운 성격이었지만 며느리 역할은 잘했습니다. 시아버지가 아침에 어디로 떠나겠다고 하면 거기에 맞춰서 새벽밥을 해 드렸습니다. 일생 동안 불평도 하지 않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가 어머니의 본을 많이 받았습니다.
14 내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습니다. 내가 혁명적인 기질이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학자입니다. 아버지는 무엇을 한번 들으면 요즘 컴퓨터와 같이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기억력이 좋았습니다. 창조력은 내가 우리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외할아버지도 그렇습니다. 혁명적인 소질이 많았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자기 동네에서 바다와 관계된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혁명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섯, 일곱, 여덟 살 때에 외할아버지 집에 가서 그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고기를 잡곤 했는데 그것을 얼마나 흥분하며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15 우리 어머니가 아기를 많이 낳았습니다. 열세 명을 낳았는데 어머니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재미재미 해도 다른 재미는 없더라. 아기를 낳아서 젖먹이고 키울 때의 그 이상 재미는 없더라. 늙어서 아기를 못 낳으니 매사에 재미없어 못살겠어.’라는 말을 했습니다. 어머니 얼굴을 보면 많은 수고를 하여 꺼칠해졌습니다. 갖은 풍상을 다 겪은 어머니의 얼굴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스러운 아기를 키우던 그 수고의 모습이 보기에 좋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려움과 희생을 동반하지만 그 희생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참사랑을 하게 되면 희생한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희생이 거름이 되고 비료가 되는 것입니다. 또 자기 살이 되고 뼈가 되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16 우리 형님은 동생인 나에 대해서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가인 입장에서 완전히 탕감할 수 있는 기대가 자연히 조성된 것입니다. 형님의 신앙은 철저했습니다. 6․25사변과 8․15해방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았습니다. 모든 어려운 문제를 영계의 지시를 통해 해결하는 신앙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형님은 역사상에 수많은 형이 있었고 수많은 동생이 있었지만 내 동생은 역사적인 동생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뭐라고 하면 절대적으로 따라주었습니다. 내가 평양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는 복귀섭리 도상에 있어서 크나큰 역사가 있었는데, 내가 부탁한 것은 보통 생각으로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형님은 이런저런 내용을 갖추어 동생을 위해 도왔습니다. 그 부탁이 아무리 어려운 것일지라도 그 일을 주저하지 않고 도와주는 형님이었습니다.
17 형님은 영계를 통하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형제관계는 어느 집이나 다 있고, 일족의 어느 누구나 종횡으로 관계되어 있지만, 형제 중에서 내 동생이 역사의 일등 동생이다.’라는 그것만은 알았습니다. 영계에서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님은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했습니다. 집을 팔라고 하면 집을 팔고, 소를 팔라고 하면 소를 팔고, 학비가 없다면 땅을 팔아서라도 대어 주려고 했지, 하나라도 반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가인 아벨을 복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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