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지역 의병
6월 이후, 전국에서 의병(義兵)과 의승군(義僧軍)이 일어나 왜군과 싸우고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만회할 수 있는 길이 트이고 10월에 진주목사 김시민(金始敏)은 군관민과 제1차 진주성전투에서 승전했다.
의병은 관군이 막지 못해 왜적에 짓밟히고 많은 생령(生靈)이 죽어가자, 동족을 구하고 향리를 수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1593년 정월에 명나라의 진영에 통보한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여 명이었다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는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왜적과 싸워 의령 삼가 합천 창녕 영산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우도를 보호했고, 거창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왜적을 지례에서 요격하고, 무계에서도 승전하여 합천군수가 된 김면(金沔), 이봉(李逢) 등과 권의중 의병장, 고상증 치병장, 권용중 中衛 등이 연계하여 활동한 기록이 있다
6월 1일 가은의 훈련봉사 송건宋健이 군사를 거느리고 상주 함창에 남아있던 적을 급습하여 무수히 죽였고 6월 15일 예천부근에서 우복용禹伏龍 용궁현감이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의 왜군을 격퇴했고 뒤에 안동부사로 영전했다
6월에는 상주의 적이 용궁 예천과 끊임없이 왕래하여 5일 동안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호계를 노략질 하던 왜적이 산서 산북을 침범하여 바위굴에 숨고 굶주림을 참지 못한 이는 왜적의 모습을 하고 물건을 빼앗아 가는 일도 있었다
7월에는 김삼(김천) 개령 상주 함창 문경 5개 고을에 왜적이 득실거렸다
8월 7일 함창의 찰방 권경호, 내한內翰(한림학사) 鄭經世가 이봉을 대장으로 황령사에서 의병 결성했다
문경인근 지역의 의병 활동은 고상증의 용사실기, 권용중의 용사일록 조정의 임란일기, 趙翊 가휴可畦진사일기가 전하는데 용사실기 용사일록에서 같은 사건이 날자가 다른 차이가 있고 이일이 상주 북천에서 죽었다는 오류도 보인다
8월 15일 대승동 반계북쪽에 사족士族 30명 검지劍枝 60-70인이 모여 권의중權義中 상장上將, 권용중 중위中衛, 권대훈 독후장督後將 권몽주 군관장軍官將 최대립 선봉장 변서 수병장收兵將 여춘을 전향장典餉將 박원개를 조군장調軍將 정이황 정이오를 전군장典軍將 고상증 고상안 치병장 이기진 이기성 군기장軍器將 신언희 신언필을 기찰장機察將 김신년 임경회를 돌격장 김원진 장서掌書 황정간 고인계 채득강 김득용 막좌幕佐로 삼고 신에게 제사지내고 명첩을 주백에 보내 감영에 보고토록 했으나 의진義陣의 명칭이 없다 임란문경의병기념비에서는 문경의병으로 명명했으나 당시 이 지역은 상주목이라 산양의진으로 명명함이 타당하다
영주 예천 등지에서 활 잘 쏘는 사수 7-8인을 데려오는 등 무예가 출중하지 않고 규모는 별로 크지 않은 수십 명이 지리에 밝아 곳곳에 복병을 설치하여 왜적의 잔당을 쳐부수는 게릴라전을 이듬해 5월 3일 명군이 당교의 왜적을 몰아 낼 때 까지 펼치는데 다른 의병진과 합동으로 참여하고 곽망우당 의진에 여러 차례 참여하였다
1597년 화왕산에서 함께 창의한 화왕산동고록火旺山同苦錄이 곽원갑의 창의록에 전하는데 고인계 고상증(고상노) 권대훈 권몽주 권의중(권기수) 김득용 김신년 김원진 박원개 변서 신언희 여춘 정이오 정이황 채득강 채득호 채득해 최대립 황정간 실려있다.
1596년 3월 3일 팔공산 회맹에 58개읍에서 422명이 참여했는데 고인계 권대훈 권몽주 권의중(권기수) 김득용 김신년 김원진 박원개 변서 신언희 정이오 정이황 채득강 채득해 채득호 최대립 황정간 등이 참여했다
8월 17일 상산의병 이홍민 대장의 명령으로 용궁 예천으로 오는 적을 막을 막기 위해 매복하고 용궁을 노략직하는 적을 헌평들 밖으로 쫓았다
9월 초부터 당교에 왜장 초소카베 모토치카長曾我部元親가 1천여명을 주둔시켜 물자수송 등의 병참기지로 이용하면서 노략질이 심했다 9월 12일 당교 왜적이 영순을 침범 하여 영강 가에서 김의중 김용중 등과 의병들이 왜적을 대파하고 환도 철환을 획득하여 김원성 신언희를 보내 주백州伯(상주목사)에게 보고하여 50섬의 군량이 왔다
10월에 권의중이 향병대장에 임명되고 초유사 장계로 내금위장 직책도 겸했다
10월 20일 의병장 김각, 관병장 김광복, 가판관 정기룡 등과 향병대장 권의중이 노략질 하는 왜적을 합동으로 3백여 수급을 베고 낙서에 향병이 머물렀다
당교의 왜적은 산양을 거처 용궁 천덕원 예천의 유천을 11월에도 쳐들어갔다
11월 23일 권의중 향병대장과 의병장 김각, 가판관 정기룡이 상주성의 남 서 북문으로 횃불을 들고 쳐들어가니 왜적이 동문으로 달아나자 동천가에서 500여급을 참수하고 순영에 승전보를 올렸다
12월 7일 호남 수군에 쫓겨 온 중모현의 왜적을 권용중이 관의장과 함께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순찰사 한효순의 명으로 권응수가 상주 함창 의병과 함께 당교왜적을 급습하여 격퇴시켰다
1593년 조선의 관읍官邑 328개 가운데 181개를 왜적이 유린 했고 경상도는 67개 관읍 중 48개 지역이 점령당했다 1월에 김면金沔 군영의 막좌 곽재우郭再祐가 권용중을 상의장尙義將으로 삼았는데 1월 15일 김면 통정대부 의병총제사義兵摠制使, 곽재우 통정대부 의병원수義兵元帥, 권의중 의병대장義兵大將 교지가 내렸다 뒤에 전공으로 권의중이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 되었다
첫댓글 山陽義兵陣
義兵將 : 權義中
中衛 : 權用中
治兵將 : 高尙曾 高尙顔
幕佐 : 黃廷幹 高仁繼 蔡得江
軍官將 : 權夢周
先鋒將 : 崔大立
督後將 : 權大勳
轉餉官 : 余春
軍器將 : 이기진 이기성
義兵 : 金遠振 金遠聲 朴元亮 金得龍 蔡得海 朴元凱 趙基遠 趙榮遠 申彦熙 權己壽 卞緖 金申年 權平 金經濟 金經澈 鄭以悟 鄭以惺 朴士文 余春福 金嗣宗 南嶸 金復興 成浹 成汝松 金鶠齡 (義士諸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