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01.
- 10대 그룹 20개社 사외이사 89명 중 46%가 전직 공무원
- 정부가 수시로 날벼락 때리니 權府의 유력자 모시기 만연해
사외(社外)이사는 우리나라와 선진 기업과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분야다. 일례로 마이크로소프트(MS)의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오마하의 현인(賢人)'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 대주주인 버크셔 해서웨이의 사외이사를 2005년부터 지금까지 맡고 있다. 유통 회사인 월마트의 현 사외이사 9명 중 7명은 IT·금융·항공 등 다른 업종의 전·현직 CEO이다. 판·검사나 관료 출신은 없다. 이를 통해 외부인의 시각에서 사내 체질 개선과 새 성장동력 발굴에 도움받고 있다.
1998년 이 제도를 도입한 우리는 어떤가. 빌 게이츠처럼 다른 대기업의 사외이사로 오래 몸담고 있는 기업가는 전무하다. 이달 현재 10대 그룹의 매출액 최상위 2개사씩 20개 상장기업에서 활동하는 89명의 사외이사를 분석해 본 결과, 배출 1위 직업(41명·46%)은 '전직(前職) 공무원'이었다. 특히 검찰·기획재정부·금융감독원·국세청·공정위 등 5대 권력기관 출신자(27명)는 교수(26명)보다 많았다.
권부 출신 유력자를 '방패막이용' 사외이사로 모시는 행태가 '적폐 청산'을 금과옥조로 내건 문재인 정부 들어 더 대세로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요즘 경제·경영학 교수들을 만나보면 "기업마다 사외이사 자리를 힘있는 전직들로 채워 우리는 명함 내밀 틈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당 기업에 "왜 구시대적 행태를 하느냐"고 타박할 수만도 없다.
현 정부 출범 후 한 달이 멀다 하고 쏟아지는 수백억~수천억원짜리 '정부발(發) 날벼락'에 기업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피해를 줄이는 게 훨씬 다급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기아차는 올 8월 통상임금 패소 판정을 받아 1조원 가까운 충당금을 냈다. 그 결과 10년 만에 적자 기업(분기 기준)으로 전락했다. 최근 19년간 한 번의 경고조차 내리지 않던 고용노동부는 갑자기 올 9월 5309명의 파리바게뜨 제빵사를 본사가 직접 고용하라고 판정했다. SPC그룹은 이로 인해 연간 600억원의 추가 인건비 부담을 떠안게 됐다.
그러다 보니 시중에선 현 정부를 가리켜 '역대급 공정(公定·공무원이 다 정하는) 정부'니 '가장 노골적인 관존민비(官尊民卑)'라는 평가가 나온다. 임금·근로시간·채용·투자·고용 형태 등 전방위 기업 활동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옥죄기가 유례없이 강력한 데다, 대부분 친(親)노동자·반(反)기업 일색인 탓이다.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와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행위 단속 등을 명분 삼아 60명의 인원으로 최근 출범한 공정위 기업집단국은 입맛에 안 맞는 기업에 언제든 고강도 조사와 응징을 가할 수 있어 아예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린다.
오죽했으면 기업인마다 "(기업이 내릴) 결정은 정부가 다 하고, 기업은 종업원에게 월급 주고 정부에 세금 내는 창구일 뿐"이라고 어깨를 떨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우리도 선진국처럼 외부 기업가 출신을 사외이사로 선임해 혁신 성장을 하자'는 얘기는 물정 모르는 사치스러운 주장일 뿐이다.
시장과 기업 활동에 대한 정부의 적정한 개입은 필요하다. 빈부 격차와 양극화 해소를 위해선 더 장려할 측면도 있다. 하지만 과도한 개입은 시장 역동성은 물론 현장 기업인의 '야성적 본능'까지 마비시키는 독약(毒藥)이나 마찬가지다. 정부가 통제하고 계획해 부(富)의 분배와 일자리 문제 해결에 속 시원하게 성공한 사례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정부가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양질의 일자리를 원한다면, 삼성전자·도요타·아마존 같은 세계적 수준의 기업을 많이 키우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려면 조선시대 주자학 부활을 연상시키는 '정부는 선(善), 기업은 악(惡)'이란 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대신 우리 기업인의 실력과 수준을 믿고 그들의 사기(士氣)를 북돋워줘야 한다. 서로 존중하고 합심(合心)하는 정부·기업 관계를 현 정권 임기 내 가지길 바란다면 너무 큰 꿈일까.
송의달 에디터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