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한 동네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현재의 지역명이 됐다
인기멤버
hanjy9713
2023.09.14. 01:55조회 2
댓글 0URL 복사
골목이야기
을지로동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을지로는 중구에 속한 동네로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현재의 지역명이 됐다. 햇빛을 받으면 구리처럼 반짝여서 구리개(구리고개)라고 불리던 이 곳은, 일제 강점기 이후 '을지로'라는 이름이 생긴다.
1. 을지로동의 유래
[골목이야기] 을지문덕 장군의 기운을 받은 곳…①을지로의 유래
서울의 대표적인 상업·업무 지구인 을지로동은 조선시대 까지만 해도 진흙으로 된 언덕길이었다.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 같다고 하여 구리고개, 줄여서 구리개라고 불리웠다.
일제강점기 이후 '을지로'라는 새 이름이 생기는데(1946년), 이는 당시 중국 상인들이 구리개 일대를 조선말 무렵부터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중국 수(隋) 나라를 격파했던 을지문덕 장군의 성을 따서 '을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을지로 일대에 지금의 집들과 골목이 생겨난 건 한국 전쟁 이후다. 전쟁 이후 서울은 아수라장이었고, 부서진 집을 재건하는 일이 시급했다. 서울 중심부 축에 속하면서 주요 시설이 없던 을지로에는 집을 수리하는 건축자재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의 을지로3가에서부터 을지로5가까지 재건시설업들은 이때 들어섰다.
을지로동 변천과정
조선시대 한성부 남서의 관통방 지역
1946년 서울 중구 을지로동(乙支路洞)
2.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
시대가 변해서 우리도 흐름을
쫓아가야 하는 상황이 됐죠.
[골목이야기] 과거와 현재의 공존…②을지로의 흥망성쇠
과거 개발의 주역이었던 공구거리는 그대로 시간이 멈췄다. 일부는 떠났고 남은 일부는 재개발을 기다리며 묵묵히 그곳을 지키고 있다.
전성기였던 70년대는 왕래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 어깨를 부딪치곤 했다. 상인들은 밀려드는 손님 탓에 돈을 셀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전성기의 영광은 이제 흔적만 남았다. 대림상가 옥상에서 바라본 공구거리는 낡은 상가들의 슬레이트 지붕들이 빼곡하다. 70년대부터 자리를 지켰던 한 상인은 "이 곳이 한국 근대 공업의 시초라고 보면 된다"며 "건축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을지로로 모였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1987년 용산 전자상가가 개발되면서 을지로는 구시대의 유물로 낙인찍혔다. IMF 이후엔 눈에 띄게 쇠락했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호황이었던 전자제품들은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이제 더 이상 좀처럼 쓰이지 않게 됐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는 이들도 있다. 2017년 새 단장을 마친 세운상가에서 만난 장인들이다.이들은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련한 경험을 기반으로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처럼 을지로는 역사가 있고 현재의 삶이 있다.
을지로 현대사 변화
1954년 을지로 도로 확장
1968년 세운상가 완공
1984년 지하철 2호선 개통
3.'힙지로'로 부상
[골목이야기] "힙스터들 모여라"…③핫플레이스가 된 을지로
나만 알고 싶은 그런 공간이죠.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세대)에서 을지로는 힙지로(힙+을지로)로 통한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건물 곳곳엔 맛집과 핫플레이스가 보석처럼 박혀있다.
실험적이고 예술적인 공간들은 SNS로 소통하는 밀레니얼 세대가 찾기에 더 없이 좋은 공간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딴 세상이 펼쳐진다. 깔끔하고 감성적인 인테리어는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게끔 한다. 그야말로 '소확행'을 실천하기 딱 좋은 장소인 셈이다.
이렇게 힙지로가 된 데에는 오랜 시간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