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의 풍경, 내면의 울림으로 그려내다.

김종학 작가는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개별 대상과 풍경을 통해 자연과 우주를 화폭
에 담아왔다. 온갖 꽃들의 향연으로 가득 찬 화면, 튜브에서 갓 짜낸 원색의 강렬함과 금방이라도 묻어 날 듯 한
생생한 물성의 느낌, 원근법을 생략하여 눈앞에 가득 채워지고 느껴지는, 사물 하나하나의 생김과 움직임.
여기에는 꽃과 나무, 물과 하늘, 새와 나비 등 작가의 마음으로 들어온 설악의 사계가 원색의 색채와 질감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수십년을 설악산에 묻혀 살면서 ‘설악의 화가’로 불리워 온 작가가 화면에 담아낸 설악은, 대상으로서의
설악이 아니라 설악을 통해 내재화된 내면의 설악으로, 이는 김종학이라는 한 예술가의 내면세계라 할 수 있다.

40년 전 모든 걸 버린 그로 하여금 새로운 열정으로 다시 붓을 들게 만들었던 설악의 모습은, 그 하나하나가 그
에게 소중한 삶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자리에 들기 까지 산으로 물로 헤매며 본 설악
의 모습을 다시 그림으로 풀어 놓은 그의 작품은 마치 어머니 품에서 노니는 아이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연을 객관적인 대상으로서만 인식하지 않고, 마치 숨 쉬고 있는 듯 강한 생동감을 가진 대상
으로 표현해 낸다. 생명력을 부여받은 만개한 꽃과, 산새, 기운차게 흐르는 개울, 설악의 자유스러운 풍광은 작가
의 삶 속에 체화된 자연의 모습인 것이다. 기운생동을 쫓아 순간적으로 그린다는 작가의 말처럼 설악산 자락을
헤집고 다니며 보고 느꼈던 순간의 감동과 이미지는 고스란히 작품 안에서 발현되는 것 이다.

김종학 작가의 화풍은 추상적 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설악산의 나무, 꽃 등을 생생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구상이 분명하지만 세부풍경을 과감히 생략한 채, 자연을 재구성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추상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원근법을 무시한 채 눈에 보여지는 모든 사물을 압축해서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해방감까지 느끼게 한다. 그림 속 꽃이나, 물 산새들은 모두 포치(鋪置)되어 각각의 사물들이
캔버스상의 네 변방에서 중심까지 생생히 표현 되어있다. 따라서 그가 묘사한 작품 속의 대상들은 어느 이름
없는 꽃이라 할지라도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는 듯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듯 한 것이다.

꽃이 많이 피는 봄이 오면, 오색찬란한 꽃들의 향연을, 가을에는 바람에 잔잔히 이는 누런 들판의 모습을, 겨울
에는 눈 쌓인 겨울산의 모습을 담담히 담아내는 그의 그림 속에는 자연이 흠뻑 베어 있다. 잎이 스러진 후에
다시 돋아 오르는 새 잎의 순환과 같이 그의 그림은 솔직하고 자연스러우며 자연의 이치를 통달한 듯 보인다.

혹자는 그의 작품을 두고, ‘여성적인 꽃을 그리지만 남성적인 표현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파격적인
구도에 거친 붓 터치와 여러 가지 원색을 동시에 풀어 놓아 그야말로 혼을 쏙 빼놓을 정도의 야성미를 느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기’란 사람이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것’이라는 그의 지론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애정을 가지고 수집한, 고미술품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만 보더라도, 그가 ‘사람이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것’을 일상 속에서 이루어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흔히들 작품을 보면 그 작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설악산 자락에서 눈으로 마음으로 담아온 풍경들을 자유롭게
펼쳐 놓은 그의 작품은 어디에도 메어있지 않은 유목민적 기질과 순수함을 지닌 자연인 김종학을 떠올리게
만든다. 시련의 끝자락에서 붓을 쥐어준 자연의 관대함과 포용력, 그것의 순환 속에 자연스레 적응해 가는
어우러짐의 미학을, 그는 너무도 아름답게 닮아 있다.
글 | 이계선(통인옥션갤러리 관장)

원생의 자연 - 김종학의 화면

김종학의 화면에는 일상으로 만나는 자연이 가득 들어있다. 특별히 어떤 것을 그린다는 의식 없이 주변에 널려
있는 것들을 아무런 격식 없이 화면으로 끌어들인다. 산이 있고 숲이 있고 개울이 있는가하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밭이 나오고 거기 몰려드는 온갖 벌레와 나비와 새가 등장한다. 화면에는 언제나 이런 것들로 가득 찬다.
어떤 것을 특별히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화면에는 무차별적인 대상의 어지러운 등장으로 인해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현란한 생명의 향연이 벌어진다.

오랫동안 설악산에 정주하면서 자기 주변을 그리기 때문에 그의 화면에는 설악의 풍경과 그 주변의 정경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자연을 모티브로 한다는 점에서 그의 시각도 자연주의적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긴 하지만 그를 쉽게 자연주의적 화가로 분류하지 못하는 것은 객관적인 거리에서 바라보는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원생의 체험으로서의 자연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바라본다기보다는 온몸으로 느낀다고나 할까
자연과 부단히 일체가 되는 놀라운 범신적 관념이 화면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꾸민다
는 의식이 개입되지 않는다. 더불어 사는 것으로서의 건강한 혼융만이 있을 뿐이다. 민화를 연상케 하는 치기가
느껴지는 것도 이에 말미암는다. 서민들의 꿈이 민화에 아로새겨지듯이 그의 화면에도 건강한 꿈이 누빈다.
온갖 공해로 찌든 현대인에게 그의 작품이 주는 충격은 바로 이 건강한 미의식이다.

그의 화면에는 세 가지 특징이 걷잡힌다. 전면화와 사선구도와 물성의 자립성이 그것이다. 전면화란 화면
가득히 대상이 자리 잡는 구도를 이름이다. 여기에선 시각의 위도나 사물들끼리의 위계가 애초에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모든 대상은 평면이란 공간 속에 쏟아 부어진 형국을 취한다. 앞뒤나 위아래의 공간적 질서가
아무런 의미를 띠지 않는다. 단지 그것들은 작가와의 관계에서만 존재성을 지닌다. 전면화에 못지않게 사선
구도가 두드러지게 걷잡힌다.
사선구도의 선호는 아마도 설악산의 가파른 산세에서 획득된 것이 아닌가 보인다.
사선으로 흐르는 개울과 그 개울물을 따라 헤엄쳐가는 물고기 떼도 사선구도로 잡힌다. 가파른 산세는 물론
이고 아스라이 전개되는 숲도 사선으로 자리 잡는다. 사선구도는 단연 시각적 긴장을 유도한다.
힘찬 자연의 내밀한 기운이 사선을 타고 화면을 가로 지른다. 또 하나의 특성은 잔득한 안료가 주는 물성의
훈훈함이다. 안료는 대상을 구현해내는 수단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안료는 안료 자체의 자립성
을 강하게 들어낸다.
현란한 색소와 터치의 강렬한 구현이 대상을 앞질러 나타난다. 안료가 지닌 물성의 감동적인 자기발언이 대상을
가로 질러 다가온다. 회화적인 회화란 수식은 이렇게 해서 가능하다.
글 | 오광수(미술평론가)

(김종학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