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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주해 3장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1. 성전 미문에서 일어난 치유의 기적
자, 이렇게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순간을 베드로가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이 사람들이 술에 취한 것 아니냐?”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담대하고 분명하게 첫 설교를 했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의 모습과는 그 어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읽을 때는 예전의 베드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변화된 베드로, 성령으로 충만해져 담대하게 행동하는 기별자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가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기별자가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복음을 나타내는 기별자가 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치유받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배웠던 찬양 가운데, “나는 걷네, 나는 뛰었네”라는 내용을 담은 찬양을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장면입니다.
사도행전 3장 1절을 보겠습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제구시는 오후 3시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성전에 간다는 표현을 단순히 이동하는 것으로만 기록하지 않고, 성전에 올라간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편에도 성전에 올라가며 부르는 노래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였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선천적으로 걷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걷지 못한 사람은 다리의 근육과 운동 기능이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다리를 펴 주는 것만으로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걷기 위해서는 다리와 발목의 기능뿐 아니라, 몸을 지탱하고 움직일 수 있는 힘도 필요합니다.
이 사람은 사람들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날마다 옮겨 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여러 성문이 있었고, 본문은 그가 미문이라고 불리는 성전 문에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미문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3절입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처럼 구걸했고,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절부터 상황이 달라집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주목해서 읽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여기에는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을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주목한다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는 아테니조(atenizō)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눈길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기울여 집중해서 바라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을 만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바로 그에게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그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본다는 것과 그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을 스쳐 지나갑니다. 그들의 얼굴을 볼 수는 있지만, 그들의 아픔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알면서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을 주목했습니다.
5절입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여기서도 바라본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사용된 단어는 아페코(apēchō)가 아니라 에페코(epechō)입니다. 문맥상 시선을 그들에게 고정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본문에는 주목하는 시선과 바라보는 시선이 이어집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 사람도 그들에게서 무엇인가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바라보았습니다.
이 장면에는 만남이 있습니다.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과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의 만남입니다.
치유의 순간, 복음으로 말미암는 회복의 순간은 바로 이 만남 속에서 일어납니다. 누군가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그 시선 앞에서 도움을 기대하는 마음이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필요를 진심으로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믿음을 선포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여기에는 세 가지 표현이 함께 등장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사렛은 예수께서 자라나신 지역을 가리킵니다. 예수는 그분의 이름이며,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그분을 선포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근대 이후 일부 신학적 논의에서는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분하여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구분은 신약성경 연구에 여러 학문적 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역사 속에 오신 예수와 신앙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예수이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말로만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베드로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습니다.
왜 누가는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는 사실을 특별히 기록했을까요?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그의 기록은 치유의 결과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단순히 다리를 펴게 된 것이 아니라,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실제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걷기 위해서는 다리의 구조뿐 아니라 몸을 지탱하고 움직이는 기능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단순히 다리가 펴졌다는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걸을 수 있도록 필요한 힘과 기능까지 회복된 사건입니다.
3장 2절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라는 설명과 7절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라는 설명은 서로 대응합니다.
누가는 치유 이전의 상태와 치유 이후의 상태를 세밀하게 기록합니다. 그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 사람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 사람은 뛰어 일어섰습니다. 걸었습니다. 뛰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치유받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몸의 건강만 회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으로 들어갔습니다. 매일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 발로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어제까지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 이제는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복음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몸의 회복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삶의 방향까지 새롭게 합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또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이제 이야기의 초점이 바뀝니다. 앞에서는 치유받은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졌다면, 이제는 그 사람의 변화를 목격한 사람들에게 초점이 옮겨갑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본문에는 놀라움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헬라어 엑스타시스(ekstasis)입니다. 이 단어는 놀라움과 큰 충격으로 말미암아 평소의 상태에서 벗어난 듯한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조금 놀란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오랫동안 알고 있던 사람에게 일어난 변화를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놀란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전의 상태와 지금의 상태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살아가라
여기서 우리는 6절의 말씀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우리는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을 기적을 일으키는 특별한 주문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라고 외치면 무조건 기적이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는 수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권위, 정체성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은 그분의 권위 아래서, 그분을 믿고 의지하며 행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헬라어 전치사 에피(epi), 엔(en), 에이스(eis) 등은 각각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3장 6절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을 해석할 때에는 특정 전치사 하나만으로 모든 의미를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를 선포했습니다.
또한 “걸으라”는 명령은 그 순간 일어나 걸으라는 뜻으로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명령 자체를 문법적으로 반드시 평생 예수와 함께 살아가라는 지속적 명령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본문 전체의 신앙적 의미는 여기서 더 깊어집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어났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삶은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복음은 단지 한순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예수님 없이 살아가던 사람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고, 예수님을 향해 살아가며, 예수님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변화입니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걷지 못했는지 알고 있었을까요?
성경은 그 답을 알려 줍니다. 사도행전 4장 22절입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그는 사십여 세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으므로 수십 년 동안 걷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여들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가 시작됩니다.
사도행전 2장의 핵심이 베드로의 설교였다면, 사도행전 3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걷지 못하던 사람을 치유한 사건에 이어 베드로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12절부터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겠습니다.
4. 우리를 주목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12절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는 자신이 기적을 일으킨 사람으로 주목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돌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근본적인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칭찬할 때 그 칭찬에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과 경건 때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도 이제는 나이가 들고 목회 경험이 쌓이면서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말씀을 전하고 나면 “목사님, 오늘 말씀에 은혜받았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힘이 나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말씀을 전했는데 반응이 없으면 ‘내가 설교를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인사하고 감사하다고 말해도, 그 칭찬을 제 능력에 대한 평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역사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물론 아직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들의 반응에 지나치게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누군가가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반응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 김진홍 목사님과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젊었을 때 집회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이 외모를 칭찬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재치 있게 받아넘기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칭찬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관한 유머 섞인 일화였습니다.
이처럼 칭찬을 들을 때에도 자신을 높이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방향으로 마음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봉사하고 말씀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주님을 바라보게 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지만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렸습니다.
5.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13절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을 이해하려면 출애굽기 3장과 6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5장 22~23절에서 모세는 바로를 만나고 돌아온 뒤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모세는 바로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더욱 학대했고,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이 왜 이렇게 더디게 나타나는지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6장 3절입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이 구절은 성경을 연구할 때 중요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고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들에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이 구절은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할 수 있는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는지의 문제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맥상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과 구원 행위를 어떻게 드러내시는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 시대에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는 역사 속에서 자신의 언약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알려지신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전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과 관련됩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지만,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아내를 누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삭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야곱 역시 자신의 욕심과 꾀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붙들어 주셨고, 그들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셨으며, 그들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그들의 위대한 업적만을 바라볼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 표현에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으신 언약의 연속성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셨고, 그 후손의 하나님이시며, 그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관점으로 사도행전 3장 13절을 읽어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사람들을 붙들어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했습니까?
베드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의한 예수님을 거부했다고 말합니다.
14절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그들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살인한 사람을 놓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선택을 정면으로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거부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부활시키셨습니다.
15절입니다.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단순히 훌륭한 선생님이나 윤리적인 모범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지 조금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지식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며,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부활은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베드로는 그분을 죽인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사도행전 2장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3장의 설교에서도 증인이라는 주제가 나타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직접 경험하고 확인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단순한 철학이나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난 살아 계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었습니다.
6.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과 완전한 회복
16절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는 치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밝힙니다.
그 사람을 낫게 한 것은 베드로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곧 그분의 권위와 능력이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치유의 사건을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질병이 반드시 환자의 믿음의 정도에 따라 치유된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고난과 질병의 원인을 언제나 개인의 믿음 부족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이 사건에서 분명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완전히 회복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오늘 우리에게도 기도 제목이 하나 떠오릅니다.
함께 말씀을 나누던 자리에서, 한 집사님의 가족이 큰 수술을 받고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많은 사람이 마음을 모아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의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켜 주시고 회복의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물론 모든 환자의 회복 과정이 같지는 않습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 시간에 언제나 같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회복의 소식을 들을 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회복이 더딘 이들 곁에서도 믿음과 사랑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우리에게 치유의 능력을 자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7.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함을 받으라
17절부터 베드로의 설교는 호소의 성격을 띱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베드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그들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들처럼 대하지도 않습니다.
18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의 고난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의 책임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이루셨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의 설교와도 연결됩니다.
베드로는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으로 설교를 끝내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호소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죄 없이함을 받으라고 선포합니다.
복음은 죄를 지적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합니다.
20절입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초림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께서 예수님을 다시 보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역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만물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이 문맥은 초림하신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 승천, 그리고 재림의 소망을 연결합니다.
재림은 단순히 세상의 마지막에 관한 두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와 고통으로 무너진 세상을 하나님께서 회복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고난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완전한 회복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아직 모든 것이 회복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질병도 있고, 죽음도 있으며, 불의와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만물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 소망이 재림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다.
8.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
22절입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베드로는 여기서 신명기 18장 15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생각해 봅시다.
믿음의 조상으로는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왕으로는 다윗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낸 위대한 선지자로는 모세가 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장차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약속은 유대인들의 메시아 기대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그가 누구인지 질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장 19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그가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20절에서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21절입니다.
“또 묻되 그러면 누구냐 네가 엘리야냐 이르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여기서 “그 선지자”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단순히 어떤 선지자인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서 약속된 선지자, 하나님께서 보내실 분을 가리키는 질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 3장으로 돌아옵시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으로 사람들이 크게 놀란 바로 그때, 모세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이 잘 알고 있는 성경의 약속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설교에서는 다윗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3장에서는 모세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다윗은 왕이면서 선지자로서 메시아를 증언했고, 모세는 장차 일어날 선지자에 관한 약속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구약성경과 분리된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약속하시고 이루어 오신 구원의 역사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23절입니다.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한 종교 지도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의 주를 거부하는 문제입니다.
24절입니다.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베드로는 모세만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을 비롯하여 이후의 선지자들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때를 증언했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여러 시대와 여러 선지자의 증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이것이 성경을 읽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성경의 각 부분을 따로 떼어 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큰 흐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25절입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인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창세기 12장 3절과 22장 18절 등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의 증언이 함께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 모세를 통해 주신 약속, 다윗의 시편을 통해 드러난 메시아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이어집니다.
26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설교를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은 사람들이 악함에서 돌이키는 것과 연결됩니다.
복음은 단지 복을 받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죄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하는 기별입니다.
이렇게 사도행전 3장의 베드로 설교가 끝납니다.
9. 사도행전 4장 —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
사도행전 4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1절입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사도들이 백성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고 있을 때, 종교 지도자들이 찾아왔습니다. 제사장들과 성전을 맡은 자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싫어하여”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예수 안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가르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사도들의 가르침은 그들의 신앙적 입장과 충돌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이 사건에는 단순히 교리적인 의견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불편하게 여겼고, 그들의 활동을 억제하려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적 논쟁이 언제나 진리를 찾으려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지키려는 마음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주장이 틀렸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이 싫거나 그 사람의 주장이 자신의 이익을 위협하기 때문에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반대가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교리나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정당한 비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 진리를 찾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진리를 거부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말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먼저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는 사도행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들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구절은 12절과 19~20절입니다.
12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유일성을 선포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그리고 19~20절에서는 사도들이 권력자들의 명령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어 사도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 두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그 신앙을 지키는 삶의 태도를 함께 보여 줍니다.
첫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둘째, 인간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할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은 바로 이 두 가지 원칙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장입니다.
그러나 그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강의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오늘은 사도행전 3장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 치유와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사도행전 4장에 나타난 사도들의 담대한 증언과 초대교회의 신앙을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마치는 기도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이 말세에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에 주의 귀한 종을 통해 말씀을 연구하게 하시고, 말씀을 대함으로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지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함께 연구하기 시작한 이 몇 주 동안, 마치는 날까지 하나님의 놀라우신 영께서 말씀을 지도하는 주의 종과 말씀을 연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함께하여 주옵소서.
이 강의를 통해 우리의 심령이 더욱더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도와주시옵소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바라보게 하시고, 사람의 능력을 자랑하기보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옵소서.
또한 우리가 사람들의 겉모습만 바라보지 않고 그들의 아픔과 필요를 깊이 살피게 하시며,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다시 한 주일 동안 주님께서 여러 곳에 있는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에 함께하여 주시고,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핵심요약정리
1. 성령은 말하는 기별자를 행동하는 기별자로 변화시키신다.
베드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으며, 사도행전 3장에서는 행동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증언했다.
2. 참된 복음 사역은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데서 시작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을 주목했다. 사람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과 그의 필요에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다르다.
3. 은과 금보다 더 귀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베드로는 돈을 줄 수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했다. 복음은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보다 더 깊은 생명의 회복을 바라보게 한다.
4.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사람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했다. 복음은 삶의 상태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방향을 열어 준다.
5.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는 것을 거부했다. 기적의 근원이 자신의 능력이나 경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선포했다.
6. 예수님은 생명의 주이시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윤리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종교가 아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시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신앙이다.
7.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함을 받으라고 호소했다. 복음은 죄를 드러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용서와 회복의 길을 제시한다.
8. 재림은 만물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사도행전 3장 20~21절은 예수님의 재림과 만물의 회복에 관한 소망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완전한 회복을 바라본다.
9. 구약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된다.
베드로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을 통해 주어진 약속을 인용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이심을 증언했다.
10. 진리를 거부하는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사도행전 4장은 종교적 반대가 때로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탐구가 아니라 개인의 이해관계와 거부감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말씀 앞에서 살펴야 한다.
오늘의 핵심 기별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일으키시고, 회복시키시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이웃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의 소망을 담대하게 증언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