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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 날 / 출품작
새순이 돋는다. 한겨울의 혹독함을 인고하여 얻은 결과다. 뿌리 촉은 눈을 열어 땅속을 여행하며 나뭇가지도 새 눈 티여 파란 세상 만나고 있다. 또, 꽃 피우고 마지막 낙화의 도를 위해 종씨 잉태 준비도 한다. 그 보람 행하면 조용히 모두를 내려놓는 수행자의 행복한 미소가 지금 나뭇잎과 줄기에서 일렁거린다. 봄날의 활발한 움직임이다.
계절에 맞게 짜진 시간 틀림이 없다. 멈춤이 없다가 맞다. 따스한 햇볕, 한가한 구름, 파란 하늘, 살랑이는 바람들과의 공연. 봄의 미학이다. 겨우내 처져 있던 비내골도 활기가 넘친다. 이미 앙상벌한 잎사귀들이 바람에 나풀거린다. 일부 드러난 계곡 바닥에도 연 녹의 잡초가 너나 할 것 없이 부러울 정도로 힘이 당차다. 그래서 봄 봄 하면서 기다리고 맞이하는가 보다.
존재는 생에 대한 결과물이다. 성장은 존재다. 땅속 엉기고 성기는 뿌리는 굵고 작고 갈림이 없이 달음질 물을 찾는다. 잡은 자리 조금씩 일구어 넓고 높은 곳을 보며 자란다. 감고 디디고 오르면서다. 약한 자는 그늘에서 기다가 사라진다. 그 자리 또 다른 잡목이 들어선다. 종족 번식 세상에서 만세 하는 게 존재하는 이유니까. 곡우 날은 그렇게 다가왔다.
섭리랄까. 나는 순리라 한다. 지는 자와 이기는 자, 어울리는 자들의 나누기. 구성원으로 존재감. 생사를 같이하는 삶으로. 짐도 모르고 이김도 모른 한울에서 당당하게 활개를 친다. 칼을 숨긴 장수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다. 곡우는 이런 봄날의 절정 시기다. 씨앗에서 이미 한 번 걸러진 종자들. 겁도 없이 오직 번식을 위해서 고개 내민다. 계곡과 밭에서 비비고 서로 엉긴다. 연잎으로 녹색으로 하늘 향해 발을 든다. 본래의 가치인 존재의 과정이다. 봄날이다 자연이다, 라며 풍경이라 부른다.
문제는 물이다. 천우天雨외는 방법이 없다. 삶에는 파란 하늘비도 있어야 하고 단비도 폭우도 있어야 한다. 물은 필요한 시기에는 꼭 있어야 한다. 지금이 그 시기다. 여기 비내골도 마찬가지다. 강자나 약자나 생존에서는 무조건 필수가 물이다. 보금자리도 마찬가지다. 곡우는 자연 현상으로 씨를 뿌릴 수 있게 봄비가 내려 특히 곡식 작물이 풍성하게 해 주는 중심 절기다. 산천을 생동감으로 충만하게 해 왔었다. 하지만 올 곡우는 아니다.
가물다. 가물어도 너무 가물다. 작년, 가을장마 후부터 비가 별로 없었다. 오더라도 맛보기도 안 되는 작은 양이다.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생존은 이어 가지만 갈증은 깊어 지고 있다. 곡우 날이 다가오면서까지도 없었다. 이번 곡우 날에도 없다. 나목 잡풀은 다른 개체로 바뀌어도 변화가 없어 보인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그 모습 그대로 생생하다. 지금 저 잎사귀와 가지가 파릇파릇 한 게 그 증표다.
문제는 계곡물에 사는 어종이다. 특히 올챙이다. 가뭄 때문은 아니지만 이미 물고기는 사라진 지 오래라 관심 밖이다. 사방댐 공사 시 낙차가 심한 구조물 설치로 오르내릴 수 없다. 가재는 이미 땅속 깊이 자리 잡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고둥도 볼 수 없고. 이들은 가물어도 생존 보호 본능이 있는 것 같다. 물이 잘 흐르면 다시 나타난다. 올챙이는 아니다. 전멸이다. 한 줌의 먼지로 바닥에서 사라진다. 또는, 뭇 새의 먹잇감이 되기도 하고.
맑게 잘도 내려오더니 이제 소리도 없다. 물에 분 낙엽을 잡고서라도 내려왔는데. 조금 조금씩 주변 나목과 잡초에 내주다 보니 바닥을 들어낸다. 본연의 일을 충실히 해 기운이 다 소진된 것이다. 탈진이라고 해야 하나. 가뭄을 자신의 몸으로 희생한 것이다. 며칠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래도 초목 잎은 본체 색을 그대로 띠고 있다. 뽑아도 뽑아도 잘도 나는 채소밭 잡초들. 채소는 다르다. 물을 주어야 싱싱한 겨울 동 초를 키울 수 있다. 밭이랑에 줄 수량이 안 된다. 수원지에 올라가 호스 보완 작업할까 하다 바로 포기한다. 비도 오지 않는데 밭으로 당겨오면 계곡 올챙이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곳곳에 무더기로 잘 부화하여 잘도 유영하고 있었다. 겨울비에 조금씩 모인 물과 호스 낙숫물이 모인, 밭 양지 물통에도 많이도 부화했다. 얼음이 다 녹고 활발히 움직이는 며칠 전 계곡에 방류까지 해주었다. 꼬리치기 자유 헤엄. 각기 보금자리 찾아가기 위한 채비하는 걸 봤다. 세상 무서움 모른 체 오물오물. 잘도 헤엄쳤다. 오늘 보니 앙증맞은 몸짓이 참 간지럽고 애가 탄다. 바닥이 돌과 나목이랑 같이 눈에 든다. 구덩이같이 된, 물이 고인 자리. 갈 곳 잃은 올챙이는 꼬리만 흔든다. 하늘은 보일까?
당장 급하다. 한데 어찌하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너무 안타깝다. 곡우 날이라 더 슬프다. 계속되는 가뭄에 미력한 존재가 된다. 이 또한 자연 순리니. 곡우면 뭐 해? 물도 없는데. 성질난다. 하늘에다 하소연해본다. 제발 좀 도와 달라고. 곡우는 파란 하늘, 비도 아닌 파란 비만 움켜잡고 있다. 어느덧 산 그늘이 내리고 서산에 노을이 걸린다. 아직은 살랑거리는 올챙이들. 밤사이 꿈은 꿀 수 있을까? 땅이 언제까지 말라갈지 모른 화창한 곡우 날. 산수풍경에서 계곡 풍경을 보는 슬픈 애상이 가슴 훌친다.
2022. 09. 29. 경산문학 38집 출품작
곡우 날 / 2차 교정 중
봄날이 한껏 활발하게 나부낀다. 촉촉한 땅에서 따스한 햇볕 받아 새로움을 잉태하는 아주 좋은 시기다. 한겨울 혹독함을 인고한 결실. 초목 발 촉은 새눈 열어 땅속을 여행하고. 나뭇가지도 새 순 튀워 파란 세상 만나고 있다. 또, 꽃 피고 마지막 낙화의 도를 위해 종씨 잉태하라라. 그 보람 채우면 조용히 모두를 놓는 수행자의 행복한 미소가 지금의 나뭇잎과 줄기에서 얼렁거린다.
활기의 빛을 본다
계절에 맞게 짜진 시간 틀림이 없다. 멈춤이 없다가 맞다. 따스한 햇볕, 한가한 구름, 파란 하늘, 살랑이는 바람들과 마침이 없는 공연. 봄날의 미학이다. 겨우내 처져 있던 비내골은 활 기가 넘친다. 이미 앙상벌한 잎사귀는 바람결 나풀거린다. 일부 드러난 계곡 바닥에도 연 녹의 잡초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부러울 정도로 힘 당차다. 그래서 봄 봄 하면서 기다리고 맞이하며 맛보는 거다.
존재는 생에 대한 결과물이다. 성장은 존재다. 만장을 위해 들고 주변과 경쟁으로 빛 낸다. 땅속 엉기고 성기는 뿌리는 굵고 작고 갈림이 없이 달음질 삶의 물을 찾는다. 잡은 자리 조금씩 일구어 넓고 높은 곳을 보며 일군다. 감고 디디고 오르면서. 약한 자는 그늘에서 기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 자리 또 다른 잡목이 들어선다. 종자 번식 세상에서 초목날가지 만세 하는 게 존재하는 이유니까. 곡우 날은 그렇게 다가왔다.
섭리랄까. 나는 순리라 한다. 지는 자와 이기는 자, 어울리는 자들의 나누기. 구성원으로 존재감. 생사를 같이하는 삶으로. 짐도 모르고 이김도 모른 한 울에서 생존으로만 당당하게 활개를 친다. 자유 만끽을 위하여. 칼을 숨긴 장수처럼. 곡우는 이런 봄날의 절정 시기다. 씨앗에서 이미 한 번 걸러지고 이긴 종자들. 겁도 없이 오직 번식을 위해서 다들 고개 내밀었다. 계곡과 밭에서 비비고 서로 엉긴. 연잎으로 하늘 향해 발을 든다. 본래의 가치인 존재 의미의 시작. 봄날이다 자연이다라고 하는 풍경 연출이다.
문제는 물이다. 천우天雨외는 방법이 없다. 삶에는 파란 하늘비도 있어야 하고 단비도 폭우도 있어야 한다. 특히 물은 필요한 시기에는 꼭 있어야 한다. 지금이 그 시기다. 여기 비내골에서도 마찬가지다. 강자나 약자나 생존에서는 조건이 필요 없는 필수가 물이다. 어느 보금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곡우 때는 자연 현상으로 씨를 뿌릴 수 있게 봄비가 내려 특히 곡식 작물이 풍성하게 해 주는 중심 절기다. 산천을 생동감으로 충만하게 해 왔었다. 하지만 올 곡우는 아니다.
가물다. 가물어도 너무 가물다. 작년, 가을장마 후부터 비가 별로 없었다. 오더라도 맛보기도 안 되는 작은 양이다.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생존은 이어 가지만 갈증은 깊어 지고 있다. 곡우 날이 다가오면서까지도. 이번 곡우 날에도 더 없다. 나목이나 잡풀은 다른 개 체로 바뀌어 모양새 변화없이 자라고 있다. 서로 치고 받아도 눈에 보이는 풍경은 그 모습 그대로 생생하다. 지금 저 새 잎사귀와 가지가 파릇파릇 한 게 증거다.
문제는 계곡물에 사는 어종이다. 특히 올챙이다. 가뭄 때문은 아니지만 인간 호작으로 물고기는 사라진 지 오래라 관심 밖이다. 사방댐 공사 시 낙차가 심한 구조물 설치로 오르내릴 수 없는 조건이다. 가재는 이미 땅속 깊이 자리 잡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고둥도 볼 수 없고. 이들은 가물어도 생존 보호 본능이 있는 것 같다. 물이 잘 흐르면 다시 나타난다. 올챙이는 아니다. 전멸이다. 한 줌의 먼지로 바닥에서 사라진다. 또는, 뭇새 먹잇감이 되기도 하고.
맑게 잘도 내려오더니 이제 소리 없다. 물에 분 낙엽을 잡고서라도 내려왔는데. 조금 조금씩 나목과 잡초에 물을 내주다 보니 바닥이 났다. 본연의 일을 충실히 해 기운이 다 소진된 것이리라. 탈진이라고 해야 하나. 가뭄을 자신 몸으로 지우고 있다. 며칠 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래도 초목 잎은 본 체 색을 잘 띠고 있다. 뽑아도 뽑아도 잘도 나는 채소밭 잡초들. 채소는 다르다. 물을 주어야 싱싱한 겨울 동초를 키울 수 있다. 밭이랑에 줄 수량이 안 된다. 수원지에 올라가 호스 보완 작업을 할까 하다 바로 포기했다. 비도 오지 않는데 밭으로 당겨오면 계곡 올챙이는? 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곳곳에 무더기로 부화하여 잘 유영하고 있었다. 겨울비에 조금씩 모인 물과 호스 낙숫물이 모인, 밭 양지 물통에도 많이도 부화했다. 얼음이 다 녹고 활발히 움직이는 며칠 전 계곡에 방류까지 해줬다. 꼬리치기 자유 헤엄. 각기 보금자리 찾아가기 위해 채비하는 걸 봤다. 세상 무서움 모른 체 오물오물. 잘도 헤엄쳤다. 오늘 보니 갓난아이의 앙증맞은 몸짓 웃음. 참 간지럽고 애닳다. 마른 바닥이 돌과 나목이랑 같이 눈에 든다. 구덩이같이 된, 물이 고인 자리. 갈 곳 잃은 올챙이는 꼬리만 흔든다. 하늘은 보일까?
당장 급하다. 한데 어찌하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너무 안타깝다. 곡우 날이라 더 슬프다. 계속되는 가뭄에 미력한 존재가 된다. 이 또한 자연 순리라. 곡우면 뭐 하니? 물도 없는데. 성질이 난다. 하늘에다 하소연도 해 본다. 제발 좀 도와 달라고. 곡우는 파란 하늘, 비도 아닌 파란 비만 움켜잡고 있다. 어느덧 산 그늘이 내리고 서산에 노을이 걸린다. 아직은 살랑거리는 올챙이들. 밤사이 꿈은 꿀 수 있을까? 땅이 언제까지 말라갈지 모른 화창 한 곡우 날. 산수풍경에서 계곡 풍경을 보는 슬픈 애상이 가슴을 훌친다. 활기와 죽음이 상존하는
비내골에 해살만이 가득하다.
22. 04. 21.
곡우 날 / 교정 중
봄날 촉촉한 땅에서 따스한 햇볕 받아 새로움을 그리는 아주 좋은 시기다. 한겨울 혹독함을 인고한 결실. 초목 발촉은 새순 눈 열어 땅속을 여행하듯 간다. 얼마 후 가지에도 새 눈 티여 파란 세상을 만나보리라. 또, 꽃 피우고 마지막 낙화의 도를 위해 종씨를 잉태하지. 조용히 모두를 놓는 수행자의 행복한 미소가 나뭇잎과 줄기에서 얼렁거린다.
봄날 미학의 멋이다. 계절에 맞게 짜진 시간은 틀림이 없다. 멈춤이 없다가 맞다. 따스한 햇볕, 한가한 구름, 파란 하늘, 살랑이는 바람들과의 공연. 생동감 비내골은 활기가 넘친다. 이미 앙상벌한 잎사귀는 바람 결에 나풀거린다. 일부 드러난 계곡 바닥에도 연 녹의 줄기 잡초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부러울 정도로 힘이 찬다. 외관 보기로는 그렇다.
존재는 생에 대한 애착이다. 나뭇잎 성장은 만장을 위해 들고 주변과 경쟁이다. 땅속 엉기고 성기는 뿌리는 서로 맞대기로 굵고 작고 없이 달음질 연속이다. 초목은 잡은 자리 조금씩 일구어 넓고 높은 곳을 보며 자란다. 감고 디디고 오르면서다. 약한 자는 아래에서 기다 사라 진다. 또, 다른 잡목이 자란다. 성장은 만세와 종자 번식 세상에서 존재하는 이유니까. 곡우 날은 그렇게 다가왔다.
섭리랄까. 나는 순리라 한다. 지는 자와 이기는 자, 어울리는 자들의 나누기. 구성원으로 존재감. 생사를 같이하는 삶으로. 짐도 모르고 이김도 모른 한울에서 생존자로 당당하게 활개를 친다. 한 번의 자유 만끽이다. 칼을 숨긴 장수처럼. 곡우는 이런 봄날의 절정 시기다. 씨앗에서 이미 한 번 걸러지고 이긴 종자들. 겁도 없이 오직 번식을 위해서 다들 고개 내민다. 계곡과 밭에서 비비고 서로 엉긴다. 연잎으로 하늘 향해 발을 든다. 본래의 가치인 존재의미 시작이다. 봄날이다 자연이다 하는 풍경.
문제는 물이다. 천우天雨외는 방법이 없다. 삶에는 파란 하늘 비도 있어야 하고 단비도 폭우도 있어야 한다. 특히 필요한 시기에는 물은 꼭 있어야 한다. 지금이 그 시기다. 여기 비내골 에서도 마찬가지다. 강자나 약자나 생존의 필수가 물이다. 보금자리도 물을 기본으로 한다. 곡우 때는 자연 현상으로 씨를 뿌릴 수 있게 봄비가 내려 특히 곡식 작물이 풍성하게 하는 중심 절기다. 산천을 생동감으로 충만하게 해 왔었다. 하지만 올 곡우는 아니다.
가물다. 가물어도 너무 가물다. 작년, 가을장마 후부터 비가 별로 없었다. 오더라도 맛보기도 안 되는 작은 양이다. 아주 심한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생존은 이어 가지만 갈증은 깊어 지고 있다. 나목이나 잡풀은 이종異種자라든 아니든 빈자리 채워 어찌하든 자란다. 서로 치고받아도 눈에 보이는 풍경은 아주 생생하다. 새 잎사귀와 가지의 파릇파릇 모습에 정말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계곡물에 사는 어종이다. 특히 올챙이다. 가뭄 때문은 아니지만 이미 물고기는 없어 진지 오래다. 사방댐 공사 시 낙차 단 설치로 오르내릴 수 없는 구조물이 설치된 후부터다. 가재는 땅속으로 깊이 자리 잡았는지 보이지 않는다. 고둥도 볼 수 없고. 이들은 가물어도 생존 보호 본능이 있는 것 같다. 물이 잘 흐르면 다시 나 타 난다. 올챙이는 아니다. 멸실이다. 한 줌의 먼지로 바닥에서 사라진다. 또는, 뭇 새 먹이감이 된다.
곳곳에 무더기로 부화하여 유영하고 있다. 겨울비에 조금씩 모인 물과 호스 낙수 물이 모인, 밭 양지 물통에도 많이도 부화했다. 얼음이 다 녹고 활발히 움직이는 며칠 전에 계곡에 방류했다. 꼬리치기 자유 헤엄. 각기 보금자리 찾아가는 채비다. 세상 무서움 모른 체 오물오물. 잘도 헤엄친다. 오늘 보니 갓난아이의 앙증맞은 몸짓의 웃음보이지만 참 안타깝다. 지금 말라가는 바닥에서 돌과 나목이 눈에 든다. 바닥이 들어나있다. 구덩이같이 된, 물이 고인 자리. 갈 곳 잃은 올챙이는 꼬리만 흔든다. 하늘은 보일까?
맑게 잘도 나오더니 이제 소리도 없다. 물에 분 낙엽을 잡고 잘도 내려오던 물이 너무 힘들어한다. 조금 조금씩 나목과 잡초에 물을 공급하다 보니. 본연의 일을 충실히 수행해 기운이 다 소진된 것이다. 탈진이라고 해야 하나. 며칠 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흐르는 물이 없다. 그래도 초목은 연 한 잎 성장 모양은 변화가 없이 본체 색을 띠고 있다. 뽑아도 뽑아도 잘도 나는 채소밭 잡초들. 보신용 채소는 다르다. 물을 주어야 싱싱한 동 초를 키울 수 있다. 밭이랑 채소에 줄 수량이 안된다. 수원지에 올라가 호스 보완 작업을 할까 하다 바로 포기했다. 비도 오지 않는데 밭으로 당겨오면 물이 부족한 계곡 올챙이는? 생각에 미친 것이다.
올챙이는 당장 급하다. 어찌하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자연 보호 운동가들에게 연락해볼까? 도룡룡 때문에 단식도 하던데. 고개 흔들고 만다. 너무 안타깝다. 곡우 날이라 더 슬프다. 계속되는 가뭄에 미력한 존재가 된다. 이 또한 자연 순리이니. 곡우면 뭐 하니? 물도 없는데. 성질부린다. 하다 하다 하늘에 하소연해 본다. 제발 좀 도와 달라고. 곡우는 파란 하늘 비, 비도 아닌 파란 비만 움켜잡고 있다. 어느덧 산 그늘이 내리고 서산에 노을이 걸린다. 살랑거리는 올챙이는 밤사이에 꿈은 꿀 수 있을까? 땅이 몇 자나 말라 가는지 모른 화창한 곡우 날. 산수풍경에서 계곡 풍경을 보는 슬픈 애상이 가슴을 울린다.
*곡우 날 초고
봄날 끄트머리 절기다. 촉촉한 땅에서 따스한 햇볕 받아 새로 움을 그리는 아주 좋은 시기. 초목 새순 일구는 눈이 열려서 갈기 여행. 지저 그리움. 꽃 피우 고 씨앗 낳고 마지막 낙화의 도 위해. 수행자로 뒤 안길 행복한 미소가 어슬렁인다.
봄날 미학의 멋이다. 계절에 맞 게 짜진 시간은 틀림이 없다. 멈 춤이 없다가 맞다. 따스한 햇빛, 한가한 구름, 파란 하늘, 살랑이 는 바람과의 공연. 생동감 비내 골은 활기가 넘친다.
생에 대한 애착은 전쟁이다. 갖 은 역량을 다해 나무 잎사귀 성 장은 앙상블이다. 또 잡은 자리 조금씩 일구어 넓은 높은 곳을 본다. 감고 디디고 오르면서다. 만세와 종자 번식이 세상 존재하 는 이유니까. 곡우는 그렇게 다 가왔다.
섭리랄까. 나는 순리라 한다. 지 는 자와 이기는 자, 어울리는 자 들의 나누기. 구성원으로 존재. 생사를 같이하는 삶으로. 짐도 모르고 이김도 모른 한울에서 생 존자로 당당하게 활개를 친다. 자유 만끽이라고 할까. 칼을 숨 긴 장수처럼.
문제는 물이다. 비내골에는 천우天雨외는 방법이 없다. 파란 하늘비도 있어 야 하고 단비도 폭우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필요한 시기에 물이 꼭 있어야 한다. 강자나 약자나 생존의 필수가 물이다. 보금자리도 물을 기본으로 한다. 곡우는 아주 적절한 시기에 여기 닥 맞는 절기다. 봄을 생 동감으로 충만하게 한다. 하지만 이번 곡우는 다르다.
가물다. 가물어도 너무 가물다. 작년, 가을 장마 후부터 비가 없 다. 오더라도 맛보기도 안되는 작은 양이다. 아주 심한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 생존은 이어가지 만 갈증은 깊어 간다. 나목이야 어찌하던 자란다. 새싹 잎사귀 가지 파릇파릇 모습에서 어려움 은 안보인다.
올챙이다. 계곡물에 사는 동물. 무더기로 부화하여 유영한다. 각 자 보금자리 찾아가는 채비를 한 것한다. 세상 무서움 모른 체 오 물오물. 갖난 아이의 앙증맞은 몸짓 웃음이 보이지만 참 안서럽 다. 물이 말라 가는 바닥에서 돌 과 나목이 눈에 들어온다. 바닥
이 들어난다. 작은 우물같은 물 구덩이. 갈 곳을 잃은 올챙이는 꼬리만 흔든다. 하늘은 보일까?
텃밭도 물이 딸린다. 맑게 잘도 나 오던 물이 이제 소리도 없다. 물에 분 낙엽을 잡고서도 잘도 내려오던 물이 너무 힘들어 보인 다. 한 목음 목음 나목들에 보시 한 마음. 본 연의 일을 충실히 해 기운이 다 소진이 된 것이다. 탈 진이라고 해야 하나. 곡우날 비 내골 계곡 현상이다.
텃밭에 물은 계곡물을 물 호스로 연결에 이용하고 있다. 수원지 간다. 와서 보니 계곡물이 너무 많이 줄어 있다. 며칠 전까지도 잘도 내려오던 물이다. 초목이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 목음으로 활용됨이다. 앞으로는 더 많은 물이 필요하다. 헌데 비는 오지 않는다.
지금 당장 급한 이올챙이 어찌하 랴. 너무 안타깝다. 부족한 물 보 충 작업을 포기한다. 곡우날이라 더 슬프다. 계속되는 가뭄에 미 력한 존재가 된다. 이 또한 순리 이니 어쩌 하리. 곡우면 뭐하니. 물도 없는데. 하다 하다 하소연 도 해본다. 제발 좀 도와 달라고. 곡우는 파란 하늘비만 움켜 잡고 보고만 있다.
22. 0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