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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환품(問幻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묻기를,
‘환인(幻人)이 보시·지계·정진·인욕·일심(一心)·지혜를 배우고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배우고 살운야(薩云若)를 배우면
살운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한다면,
저는 마땅히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겠으니,
그대의 뜻에 따라 나에게 대답하여라.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5음과 환(幻)은 다름이 있는가?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세활·법과
18성과 환은 다름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다름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37품·부처님의 18법·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
나아가 도(道)와 환은 다름이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다름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5음이 바로 이 환이고 환이 바로 5음이며,
12쇠와 18성이 모두 이 환이며,
37품과 부처님의 18법도 또한 환이며 환이 곧 18법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환인(幻人)에게 집착이 있고,
번뇌[縛]가 있고,
생(生)이 있고,
사(死)가 있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없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환인은 또한 생하지도 않고 또한 멸하지도 않는데,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살운야를 이룰 수가 있겠는가?”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얻을 수 없습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명자(名字)에 집착하고,
법과 5음 숫자를 합하여 보살이라고 하는가?”
대답하였다.
“이와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명자에 집착하고 5음 생멸을 볼 수 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일어남도 없고 멸함도 없고,
명자도 없고 또 신행(身行)도 없고,
의행(意行)도 없고, 집착도 없고,
번뇌[縛]도 없는데 반야바라밀을 배운다고 해서
어찌 살운야를 얻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이룰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응당 얻을 바가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아뇩다라삼야삼보에 이르게 되니,
마치 환인의 배움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5음은 환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5음으로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살운야를 이루겠느냐?”
수보리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5음의 소유(所有)는 무소유(無所有)이고,
무소유란 것도 또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5음은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고
그림자와 같고 더울 때의 아지랑이와 같고 변화와 같은데,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겠느냐?”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5음·6쇠는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무소유이니,
볼 수가 없습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새롭게 대승의 뜻을 발한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법문을 들으면 공포가 없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새롭게 대승을 배우는 보살은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얻지 못하고
선지식과 같이 하지 못하여 혹은 두려워하고 혹은 무서워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어떤 구화구사라를 행해야만
보살들로 하여금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살운야의 행과 상응하며,
5음은 무상하다고 관하여 5음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이 뜻으로 살운야의 행과 상응하여 5음이 고(苦)이고,
공하며 아(我)가 없음을 관하며,
5음이 공하고 상(相)이 없고 원(願)이 없음을 관하며,
5음이 적정한 것임을 관하면 마땅히 얻을 것이 없게 되며,
의지할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과 구화구사라를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은 마땅히
‘나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무상(無常)·고(苦)·공(空)·비아(非我)를 설하고,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적정의 법이 응당 얻을 것도 없으며,
의지할 것도 없음을 설하리라’고 생각하면
이것을 보살의 단바라밀이라고 한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은 또한 나한·벽지불의 뜻으로
5음이 무상하고 고(苦)이고 공하고
아(我)가 없음을 관하지 않으며,
또한 나한·벽지불의 뜻으로
공·무상·무원·적정을 관하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이 계를 범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공포에 떨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이다.
보살이 온 힘을 다해서 봉행하고
능히 참을 수 있으면
이것을 보살이 찬제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이 뜻으로 살운야의 행과 상응하여
5음이 무상함을 관하나 응당 소견이 없어야 하며,
집착도 없어야 하며,
살운야의 뜻을 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보살이 유체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보살이 마땅히 이러한 행을 지으면
나한·벽지불의 뜻을 일으키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악한 마음에 구속되어도
이러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선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며,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관해야 하는 것이 5음이 공하므로
공이 바로 5음인 것은 아니다.
6정(情)·18성·37품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려면
어떤 선지식과 함께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듣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보살은 5음이 무상하고 고(苦)이고
공하고 아(我)가 없는 것이고,
공하고 모양이 없고 원하는 것도 없으며,
적정하여 희망하는 바가 없으며,
이 희망하는 바가 없는 복을 가지고
나한·벽지불지의 행은 짓지 않고 단지 살운야만을 구한다.
이것을 보살의 선지식이라고 한다.
6정·18성·적정을 설하면서 희망하는 바가 없다.
이 공덕을 가지게 되면 성문·벽지불지는 원하지 않는다.
이것을 보살의 선지식이라고 한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이 37품과 부처님 의 18법을 생각하고
살운야를 생각하며 도(道)를 생각하고,
일체 설법에 희망하는 바가 없음으로써
희망하는 바가 없는 복을 가지고
성문·벽지불지를 위하지 않고 다만 살운야를 위한다.
이것을 보살의 선지식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배울 때
구화구사라가 없고 악지식(惡知識)이 되며,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듣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까?”
세존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보살이 살운야의 뜻을 여의고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높이고
선·정진·인욕·지계를 행하고 보시를 행하며
단바라밀에 의지하게 되니,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이 살운야의 뜻을 여의고,
5음의 내외공(內外空)을 생각하며,
이 공으로 스스로를 높이고 의지하게 된다.
6정(情)이 공함을 생각하고,
18성이 공함을 생각하며,
이로써 스스로를 높이고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이 공함을 생각하고,
18법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다.
이것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구화구사라가 없고,
반야바라밀의 설법을 들었으나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이 보살의 악지식(惡知識)이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6바라밀을 멀리 여의도록 가르치며,
보살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니 배우지 말라고 하며,
단지 모일 줄만 알고 들으려고 하지 않고,
수지(受持)하지 않고,
경전을 독송하지 않고,
또한 타인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시 보살에게 악지식이 있어
마군이 즐겨 하는 일을 말하고 마왕 파순(波旬)이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들에게 6바라밀을 멀리 여의라고 말하며,
보살에게
‘선남자여, 이러한 6바라밀을 배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말한다.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군이 다시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가서 성문에 해당하는 행동과
경을 분별하고 자세히 설하지만
이것은 마군의 일을 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군이 다시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에게
‘선남자여, 그대는 또한 보살의 뜻이 없고,
또한 아유월치도 아니다.
그대는 또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가령 보살을 가르치지도 않고,
마군의 일을 깨닫게 하면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이다.
마왕 파순이 다시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에게
‘선남자여,
안·이·비·설·신·의가 공하며,
6쇠·18성이 모두 공하며,
6바라밀과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이 모두 공한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배운들 무슨 소용인가?’라고 말하고,
이와 같이 가르친다면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인 것이다.
또한 수보리여,
마군이 다시 벽지불의 형상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이르러서 보살에게
‘선남자여, 시방은 모두 공하며
부처님도 없고 또한 보살도 없고
또한 성문도 없다’고 말하며,
보살들에게 이러한 마군의 일을 설한다.
이것이 곧 보살의 악지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마군이 다시 성문의 형상을 하고서 옷을 입고,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들에게 살운야의 뜻을 단절하게 만들고,
성문·벽지불의 행을 설한다.
이와 같이 지어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이것 이 보살의 악지식이다.
마군이 다시 보살의 스승의 몸을 하고서
그에 맞는 옷을 입고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행을 여의도록 가르치고,
살운야·37품·부처님의 18법을 여의도록 가르친다.
공하여 모양이 없으며 원하는 것도 없어야 한다 하고,
보살에게 이 법을 가지게 하면서
‘그대는 마땅히 이 법을 생각해야 하고 성문지(聲聞地)를 증득하는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배우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마군의 일일 뿐이다.
또한 수보리여,
마군이 다시 보살의 어머니 모양을 하고서
보살의 처소에 이르러서
‘아들아, 너는 마땅히 수다원을 증득해야 하고
나한과를 익혀 증득해야 하는데,
아뇩다라삼야삼보가 무슨 소용인가?
이것을 얻으려면 무량한 겁 동안 생사를 받을 것이며,
응당 손을 끊고,
다리를 끊는 아픔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보살들을 향해서 이러한 마군의 일을 설한다면,
이것이 마군의 일을 짓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여, 마군이 다시 비구의 형상을 하고서
그대 옷을 입고 보살의 처소에 가서 보살에게
안·이·비·설·신·의는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공하고 아(我)가 없는 것이라 하고,
공하여 모양도 없으며 원하는 것도 없어 적정한 것인데,
37품과 부처님의 18법을 설하는 것은
모두 모양을 설하고 일에 집착한 것이라고 말을 한다면,
이것이 보살의 악지식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미 알았으면 마땅히 속히 널리 여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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