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는 한자 ‘자미(滋味)’에서 온 말인데, 아기자기한 즐거운 기분이나 흥취를 말합니다.
시에서 재미의 문제는 연원이 오래된 비평적 관점이었습니다.
서사의 긴장과 충돌, 반전을 통한 극적 구성 등이 산문에서 재미를 산출하는 방법이라면,
시 창작에서 재미를 산출하는 방법은 해학(유머), 풍자(새타이어), 풍유(알레고리), 역설(패러독스),
모방적 개작(패러디), 언어유희(펀), 기지(위트), 농담(조크), 상황에 따라 재빨리 발휘하는 재치,
축소와 과장, 자기비하와 폭로 등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재미의 시학’을 위한 준비된 근원과 시적 전통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민중의 감정이 스민 민요, 신화와 설화, 향가, 고려가요, 한시, 시조와 사설시조, 판소리와 민속극에서부터
우스갯소리를 수용한 현대의 시에서까지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재미는 우리의 전통적 문학자질 가운데 중요한 요소였으며,
이는 현대시에서도 중요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해학은 비판적 내용을 희화화시키는 것입니다.(공광규, 『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 참조)
① 해학의 전통
문학작품의 생명력은 상당수 재미를 통해서 유지됩니다.
딱히 시는 아니지만 계속하여 시의 제재로 복제되는 처용설화와 함께 전하는 「처용가」에서부터
민요, 「춘향전」 등 연희문화나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우화와 소설류 등이 그러한 사례들입니다.
서구의 『아라비안라이트』나 『오딧세이』, 『이솝우화』 등도 재미 때문에 살아남은 세계적 걸작인 것입니다.
풍자가 대상을 공격하고 비판하고 폭로하여 재미를 준다면,
해학은 대상의 은근한 접근을 통해 악의가 없는 재미를 줍니다.
해학은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오래된 문학적 기법입니다.
서거정은 1477년 『골계전』을 4권으로 엮었는데,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름난 사람들 사이에 생긴
기이한 일이나 이야기나 재담을 모아서 엮은 책입니다.
유교주의로 잘 무장된 우리의 점잖고 근엄한 유학자들은 해학을 좋아해서
해학집을 책으로 묶어 돌려보기도 했습니다.
조선 초기에 오랫동안 문단을 장악했던 서거정 같은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서거정은 40여 년간 『경국대전』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저술 참여와
『동문선』을 편찬하면서 조선의 치교와 빛나는 문장을 전부 정리한 사람임에도 뜻밖에 『골계전』을 지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해학을 좋아한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인정을 받고 명성을 얻거나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글은 힘든 글이어서
마음을 피로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상 근심과 무료함을 없애기 위해서 ‘휴식의 문학’으로 『골계전』을 지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골계담은 서거정만의 것이 아니라 강희맹, 송세주, 성현 등의 저작들에서도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며, 민중문학의 전통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특히 민요는 해학의 보고입니다.
필자의 고향인 청양 지역에서 모내기할 때 부르는 민요를 하나 보겠습니다.
시의 대상인 식물의 생태와 인간의 생태를 병렬시키고 있습니다.
유자 탱자는 의가 좋아
한 꼭지에 둘이 여네
처자 총각은 의가 좋아
한 베개에 잠이 드네
―청양지역 민요, 「이앙요」 전문
창자는 처음에는 한 꼭지에 두 개가 열리는 유자와 탱자의 생태를 말한 다음,
한 베개에 남녀가 잔다는 인간의 행위를 통사구조의 반복과 병렬구성을 하여 재미를 줍니다.
이러한 방법은 민요에서 발견되는 재미의 전략입니다.
결혼한 부부도 아니고 신랑 각시도 아닌,
미혼의 처자와 총각이 한 베개에 든다는 흥미로운 상황은 더 극적 재미를 줍니다.
한국문학에서 해학의 전통은 대단합니다.
이미 『삼국유사』에 설화와 함께 전하는 향가인 「처용가」에서 그 싹을 보여줍니다.
동경 밝은 달 아래
밤새도록 놀러다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 가랑이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할까
―『삼국유사』 「처용가」 전문
처용설화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다리가 네 개 가운데 두 개는 내 것인데
나머지 두 개는 누구의 것이냐라는 표현방식이 재미있습니다.
시에 설화를 채용하면 개성미가 적고 예술성이 낮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아래 시 김춘수의 「타령조·1」은 긍정과 여유의 설화인 처용가를 수용한 것입니다.
사랑이여, 너는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새벽녘에사
그리운 그이의
겨우 콧잔등이나 입언저리를 발견하고
먼동이 틀 때까지 눈이 밝아오다가
눈이 밝아오다가, 이른 아침에
파이프나 입에 물고
어슬렁 어슬렁 집을 나간 그이가
밤, 자정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 돌다가
먼동이 틀 때까지 사랑이여, 너는
얼마만큼 달아서 병이 되는가,
병이 되면은
무당을 불러다 굿을 하는가,
넋이야 넋이로다 넋반에 담고
打鼓冬冬 打鼓冬冬 구슬채찍 휘두르며
疫鬼神하는가,
아니면, 모가지에 칼을 쓴 춘향이처럼
머리칼 열 발이나 풀어뜨리고
저승의 산하가 바라보는가,
사랑이여, 너는
어둠의 변두리를 돌고돌다가……
―김춘수, 「타령조·1」 전문
조선조의 김립(김삿갓)은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정통적인 한시에 밝아 한시를 많이 창작했고 과거에도 급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통적인 한시를 깨뜨리는 말장난 같은 시도 써서 독자에게 재미를 선사했습니다.
틀에 박혀 갑갑했던 기존 한시에 대한 의식적인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개다리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 함께 떠도네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미안해 하지 마오
물속에 비치는 청산을 나는 좋아한다오
―김삿갓, 「죽 한 그릇」 전문
인용한 시는 외딴집에서 죽 한 그릇 얻어먹으면서도 민중의 어려움을 배려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빈궁한 살림에 부득이 멀건 죽으로 대접하며 미안해 하는 주인에게
화자는 죽 그릇에 떠 있는 청산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주열은 해학의 양식을 민요의 양식, 설화의 양식, 판소리의 양식, 우화의 양식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는 민요의 양식은 김소월의 「먼 후일」과 김동환의 「웃은 죄」,
설화의 양식은 서정주의 「귀촉도」와 김춘수의 「타령조」,
판소리의 양식은 조태일의 「자유와 시인더러」와 김지하의 「오적」,
우화의 양식은 윤곤강의 「독사」와 최승호의 「나비떼」 「개들의 결합」을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다 해도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김동환, 「웃은 죄」 전문
위 김동환의 「웃은 죄」는 민요의 3음보를 수용한 것입니다.
정희성(1945~ )은 ‘젓’과 ‘젖’이 유사음인 것을 이용하여 웃음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3행까지 평범한 문장이 진행되다가 4행 “우리 성당 자매님 젓 좀 팔아주라고”하면서
시인의 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공연히 얼굴을 붉”힌 까닭을 독자가 알아차리면서 한바탕 웃음이 터집니다.
주일날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갔다가
미사 끝나고 신부님한테 인사를 하니
신부님이 먼저 알고, 예까지 젓 사러 왔냐고
우리 성당 자매님들 젓 좀 팔아주라고
우리가 기뻐 대답하기를, 그러마고
어느 자매님 젓이 제일 맛있냐고
신부님이 뒤통수를 긁으며
글쎄 내가 자매님들 젓을 다 먹어봤겠느냐고
우리가 공연히 얼굴을 붉히며
그도 그렇겠노라고
―정희성, 「새우젓 사러 광천에 가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