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주의 추억
이봉희
뒷마당의 감나무 잎이 주홍빛 옷을 입는다. 한 잎 두 잎 떨어지며 알감 하나 덩그러니 남았다. 겨울이 오는 신호다. 앙상한 가지를 보며 마음이 쓸쓸해지는 날. 어깨를 움츠리고 추운 겨울의 맛을 느껴본다. 그런 날이면 나도 모르게 메인에서의 추억 속으로 떠난다.
메인에 사는 아들은 우리에게 함께 간직할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가을이 무르익어 단풍이 아름다운 시기에 비행기 표를 보내주었다. 미국에서 제일 먼저 해 뜨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아케이다 국립공원의 산 정상에 올라서니 사면이 바다였다. 단풍의 색이 어찌 그리도 곱고 다른지. 서로 뽐내듯 색색 옷을 입고 어울려 온 산을 덮은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메인 주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인지 등대가 많았다. 작은 시골마을 인데도 조금만 벗어나면 어김없이 등대가 있었다. 특히 포틀랜드주의 등대는 크고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이 찾아서인지 관리가 잘 되어있었다. 넓고 푸른 잔디와 멋진 건물들은 절벽위에 세워진 등대를 돋보이게 했다. 등대주위에는 어김없이 오래 전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던 흔적이 남아있다. 식량과 무기창고도 쓸쓸하게 남겨져 관광객을 맞고있다.
겨울이면 메인의 작은 마을은 온통 눈으로 덮힌다. 어느 겨울, 딸과 함께 도착한 다음 날. 호두까기 인형극을 보고 나오니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며 우리를 반겼다. 얼어붙은 호수를 낀 어느 식당 앞 높은 망루가 서 있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문을 여니 그 곳에도 웅성거리며 컴퓨터앞에 모여 있었다. 화면으로 보니 독수리가 새끼를 품고 있었다. 하루 종일 켜져 있는 화면은 독수리가 알을 품기 시작해 새끼가 날아갈 때 까지 누구에게나 보여주고 있었다. 아들은 오랜만에 만나는 누나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하여 보여주었다. 바다를 낀 작은 마을 오솔길들을 차를 타고 수잔 보일드의 노래를 들으며 누나와 많은 추억을 남겼다.
열흘 후 딸은 오랜만에 동생과 함께 나누었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남편이 긴 여정에 피곤한 모습으로 아들에게 왔다. 그렇게 우리는 아들과 함께 지내지 못함에 목말라 추운 겨울에 메인으로 모였다. 아들이 자주 가는 식당도 극장도 함께 가고 때로는 따듯하게 해서 먹이며 그 곳에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맞았다. 마치 동화 속의 작은 마을처럼 아기자기하게 상점들도 거리도 장식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오늘도 근무한다며 아들이 일찍 나가 배웅하고 들어온 지 얼마 뒤. 엄마 보고 싶어 일찍 왔다며 아들이 돌아왔다. 잠시 후 전화벨 소리에 받으니 딸이었다. 몇 마디 주고받는데 창밖으로 딸이 보였다. 내가 잘못 보았나 하며 문을 여니 거짓말처럼 딸이 서 있었다. 믿기지 않아하는 나에게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의 깜짝 선물이라며 다가와 안겼다. 딸이 메인에서 집으로 간지 열흘이 조금 넘었는데 또 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비행기 표를 구하는데 온 가족이 함께 할 생각에 돈이 아깝지 않았단다. 동생에게 가져올 음식을 준비하여 거의 50파운드를 들고 왔으니 일 다니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랜만에 모인 네 식구는 몇 시간을 차를 타고 눈 덮인 등대를 함께 보러갔다. 역사를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그 곳의 역사적 건물들도 찾아 다녔다. 눈 쌓인 호숫가를 산책하며 속마음도 나눌 수 있었다. 아케이다 공원도 또 겨울 산을 오르며 얼음도 타고 그동안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던 마음들을 채우며 행복한 시간들을 함께 했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 부모를 챙겨가며 섬기는 모습에 더 좋았다. 매일 저녁 동네에서 하는 연극도 오페라도 보러 다니며 시골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맛을 마음껏 느꼈다.
크리스마스 저녁, 일찍 저녁을 먹은 우리는 아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 나섰다. 마을 중심부에 가니 삼삼오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환담을 나누며 반겨주었다. 잠시 후, 마을버스 한 대가 우리 앞에 서서 문을 열어주며 인사를 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가 빨간 모자를 쓰고 활짝 웃으며 반겼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저녁에 동네를 돌며 트리 구경을 시켜주는 거란다. 26명이 좀 넘었나. 어린 꼬마부터 할머니까지 여러 가정이 마치 한 가족처럼 어울리는 모습에 추웠던 몸이 따듯해지는 듯 했다.
차가 떠나자 한 사람이 입을 열어 캐럴을 불렀다. 한 사람 두 사람 작은 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나 되어 합창을 하며 캐럴을 부르는 모습이라니. 중간 중간 운전하는 할아버지가 딸랑 딸랑 끈을 당기며 호 호 호 하면 모두가 노래를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라고 신호하는 거란다. 헌데 캘리포니아에서 멋지게 장식한 트리에 익숙했던 나는 어린아이 장난 같아 웃고 말았다. 전구 몇 개 나무에 감싸놓은 것이 전부인데도 옆에서는 아름답다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삼십분이 조금 넘게 캐럴을 부르며 한 마음으로 행복해하는 그들 속에서 난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박한 행복을 그들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아름다운 밤이었다.
새 해 아침 창밖을 보니 밤새 내린 눈이 온 세상을 덮은 듯 아름다웠다. 눈이 쌓여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남편과 아들은 집 앞의 눈을 치우고 차 유리의 얼음을 긁어내느라 손을 호호 불며 추위와 맞서고 우리는 떡국을 준비했다. 얼마나 그리던 일상이었나. 우리는 그렇게 온 가족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겨울의 추억을 그곳에서 행복한 가족이라는 앨범에 담아 놓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들어가 발자국을 남기고 손에 손을 맞잡고 추위에 혼자 남을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감사했던 그 겨울. 메인에서의 겨울은 살을 에이듯 추웠지만 서로의 손을 맞잡고 온 몸으로 감싸주던 추억은 우리의 가슴을 따듯이 적셔주었다.
누구나 삶 속에서 행복한 추억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우리 가족에게는 메인에서의 추억이 어제 일처럼 기억되어 삶의 기쁨이 되어주고 있다. 곱디고운 단풍이 나를 유혹하는 가을이 오고 흰 눈이 하얗게 산을 덮으면 나는 가족의 손을 잡고 메인으로 떠난다. 행복했던 그 추억 속으로.
12/2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