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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6 KBS1 통일로 가는 길 타박타박 북녘 기행 고성군1
고성군1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1. 분단의 땅 남녘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땅은 어디일까요? 아마 서쪽에서는 개성, 동쪽에서는 강원도 고성군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 있는 북녘 고을 고성군으로 가 볼까요.
강원도 고성군은 남쪽에도 있는데, 북한 땅에도 있군요? 하나의 군(郡)이 남북으로 갈린 건가요?
고성군이라고 하면 남한에 두 개가 있다. 하나는 경상남도의 고성군(固城郡), 다른 하나는 강원도의 고성군(高城郡 )이다.
한국정쟁으로 인해 강원도의 고성군은 둘로 갈렸다. 전쟁 이전에는 고성군 전체가 북한에 속해 있었다.
2. 결국 고성군이 둘로 쪼개졌는데, 그렇다면 전쟁 전에 고성군의 중심지인 고성읍은 지금 휴전선 남쪽에 있나요? 북쪽에 있나요?
북쪽에 있다.
옛날의 고성군 지역을 휴전선으로 갈라놓고 보면 북한쪽이 훨씬 넓다.
휴전선 남쪽의 속초 양양군(일부) 지역은 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강원도가 둘로 다시 갈리면서 남쪽의 강원도, 북쪽의 강원도로 나뉘게 되었는데, 북한에서는 강원도를 북쪽으로 더 넓혀 원산-덕원 지역까지로 하고 원산을 도청소재지로 하였다.
북한의 강원도 지역으로 볼 때 도의 남동부 해안에 위치해 있는 고성군의 서북부는 통천군, 서부는 금강군(전 회양군 일부), 동남부는 남한 강원도의 고성군과 접해 있고 동부-북동부는 동해에 면해 있다.
현재 행정구역은 1읍 23리로 구성되어 있고 군 소재지는 고성읍이다.
3. 고성군은 옛날에 뭐라고 부르던 곳인가요?
삼국시대 이전에 이곳은 강릉과 함께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인 예국(濊國)의 영토였다.
그 뒤 고구려 세력이 왕성해지면서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어 두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지금은 북한에 있는 고성읍과 장전읍, 외금강면, 서면과 현내면 일부 지역은 달홀(達忽), 현재의 고성군 대부분은 수성군으로 불렸다.
달홀은 568년(진흥왕 29)에 주로 승격되었다가 경덕왕 때 고성군으로 개칭되었고, 수성군도 수성군(守城郡)으로 개칭되어 고려로 이어졌다.
뒤에 신라에 편입되어 569년에 달홀주(達忽州)라 칭하였고, 후에 고성군으로 개칭하였다.
4. 달홀, 달홀군,... 지명은 다 뜻이 있게 붙이는 건데 ‘달홀’은 무슨 뜻이 되죠?
‘달홀’에서의 ‘달’은 산(山)을 의미한다.
전국에는 '달' 음절이 들어간 지명이 엄청나게 많은데, 이러한 지명들은 주로 산악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달바위, 달재, 달고개, 달내, 달여울(月灘 ) 등
달래꽃, 달래, 달구질 등에서 ‘달’의 듯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달'은 원래 고구려어로서 삼국이 통일되기 전에 '~달(達)'식으로 불리던 고을 이름들이 통일 후인 신라 경덕왕 때 거의 '~산(山)'식으로 바뀌었다. 이를 보아도 달이 산의 뜻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식달현(息達縣 .평남 중화) - 토산현(土山縣)
·석달현(昔達縣. 함남 안변) - 난산현(蘭山縣)
·가지달현(加支達縣. 안변 부근) - 청산현(菁山縣)
달은 높다는 뜻으로도 씌어 달홀(達忽)(강원 고성)이 고성군(高城郡)으로, 달을성현(達乙省縣)(경기 고양)이 고봉현(高烽縣)으로, 달을참현(達乙斬縣)(경기 강화 교동면)이 고목근현(高木根縣)으로 바뀌기도 했다.
경기 수원의 팔달산(八達山), 충북 영동의 박달산(朴達山), 전남 목포의 유달산(鍮達山) 등 ‘달’은 ‘월(月)’로도 의역되어 월악산(月岳山과 월출산(月出山) 등의 이름도 나왔다.
5. 그러면 ‘달홀’이 변한 고성군이 그 이후로 변함없이 지금까지 지명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것인가요?
고려시대에 전국을 10개 도로 개편할 때 삭방도(朔方道) 고성군으로 되었고, 그 후 전국을 5도 양계로 재편하면서 동계에 소속되어 고성현이라 하였다. 조선 초에 다시 고성군으로 되었다. 1629년(인조 7년)에 고성현으로 되었다가, 1638년(인조 16년)에 다시 고성군으로 되었다.
1895년에 23부제를 실시하면서 강릉부(江陵府) 고성군으로 되어 7개 면을 관할하였다. 1896년에 13도제를 실시하면서 강원도 고성군으로 되었다.
1914년 고성군 전체를 간성군에 편입하여 고성면, 신북면 등 9개면, 12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27년에 간성군을 고성군으로 개칭하면서 일부를 양양군에 넘기고 군내면을 간성면으로 개칭하였다.
달홀(고구려)→달홀주(신라)→고성군→(고려 삭방도)고성군→(동계)고성현→고성군(조선)→고성현(인조 때)→고성군(〃)→(23부제 강릉부)고성군→(13도제 강원도)고성군→간성군에 편입(일제) 고성면→(1927년)고성군으로 개칭
6. 북한에서는 고성군이 한국전쟁으로 반으로 잘려 버렸을 때 그 반 토막의 고성군을 행정적으로는 아무 초치 없이 놔 뒀을까요?
1952년 군면리 대폐합. 고성군(장전-외금강-서면)+통천군(임남면)→고성군
2003년 현재 1읍(고성읍), 23리(고봉리, 구읍리, 금천리, 남애리, 두포리, 염성리, 능동리, 복송리, 봉화리, 삼일포리, 성북리, 순학리, 신봉리, 온정리, 운곡리, 운전리, 월비산리, 장포리, 종곡리, 주둔리, 초구리, 해금강리, 해방리)
고성군 소재지는 고성읍이다.
150503 KBS1 통일로 가는 길 타박타박 북녘 기행 고성군2
고성군2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1. 고성군의 행정 중심지는 고성읍이 되겠죠? 그러기 때문에 북한에선 휴전 이후에 이곳(고성읍)을 많이 변화시켜 왔을 것 같은데...
강원도 고성군 1읍 23리의 하나. 군의 중심 동해의 장전만(고성만) 연안에 위치.
명승지 금강산을 끼고 있어 관광도시의 특성에 맞게 문화휴양도시로 운영되고 있고, 중심거리를 따라 근로자들의 생활에 편리한 다층 문화주택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여기에 군급 기관들과 교육문화 보건기관, 상업 봉사시설 등이 배치되어 있다. 곳곳에 공원과 휴식터들이 마련되어 있다.
교통은 금강산청년선이 부설되어 있으며 여기에 종착역인 고성역이 있다.
도로는 원산~금강산 간 관광도로와 온정~금강 간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고성항을 통하여 원산, 통천, 흥남 등 동해안지역과 수상통로가 개설되어 있다.
도 소재지인 원산시까지는 도로로 102km, 수로로 통천항까지는 50km, 원산항까지는 106km이다.1. 통일전망대를 많이 가던데, 이 전망대에선 북한쪽을 바로 코앞에서 바라볼 수 있죠?
2. 강원도 고성으로 여행 가는 사람들을 보면 이 지역의 통일전망대를 많이 가던데, 여기서는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죠?
금강산이 바라다 보이는 전망대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고성 통일전망대는 비무장 지대와 휴전선 너머로 금강산이 바라다 보이고 해안선을 따라 해금강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는 곳이다.
1983년 문을 연 이곳은 연간 150만 명이 다녀가는 동해안의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통일안보공원 내 출입 신고소에서 신고서를 작성하고 잠깐 동안 안보 교육을 받은 후 1층과 2층엔 전시관, 그 위에 전망대가 있는 통일전망대로 이동하게 된다.
6·25 전쟁의 참상을 담은 영상물과 사진 자료, 유물 등을 둘러본 후 전망대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해금강 주변의 섬들과 만물상, 현종암, 사공암, 부처바위 등이 아스라이 보이는 바다다.
중앙으로는 금강산 봉우리들 중 마지막 봉우리인 구선봉을 조망할 수 있다.
3. 이 고성 지역은 바닷가인데,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많이 살았을까요?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거진읍 화포리와 현내면 죽정리 등에 1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고성지역은 탁자식 고인돌의 동해안 쪽 남방한계선으로 알려져 있다.
또 간성읍 신안리, 거진읍 거진리, 화포리, 현내면 송현리, 죽정리, 초도리 등에서는 돌도끼, 민무늬토기, 가락바퀴, 반달돌칼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또한 현내면 명파리와 죽정리에서는 신라 고분 6기가 확인되었다.
5. 이 지방에 전해 오는 특별한 풍속 같은 것은 없나요?
이 지방의 전에 동제가 있었다.
『동국세시기』에 “고성의 풍속에 매월 삭망에 관청에서 군사당(郡祠堂)에 나가 제사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비단으로 신의 가면을 만들어 당에 두었다가 섣달 스무날 이후부터는 신이 고을 사람에게 내린다고 해, 그 가면을 쓰고 아내(衙內)와 읍촌을 돌면서 춤을 춘다. 집집마다 이를 맞이해 즐기다가 정월보름 전에 당 안에 다시 보관하기를 해마다 되풀이한다”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6. 북한의 고성 지역의 지명들 중 특히 소개해 주실 만한 것이 있다면 알려 주시죠.
기대봉(깃대봉) / 고성군 구읍리의 서남쪽의 봉우리. 측량할 때 깃대를 꽂아놓았다고 한다.
기대배기봉(깃대백이봉) / 고성군 구읍리 서남쪽의 봉우리. 측량할 때 깃대를 꽂아 놓았다 한다.
뒤골(뒷골) / 고성군 운곡리 뒤골산 아래의 골짜기, 구읍리 북서쪽 서리마을 뒤 골짜기
아래뒤골(아래뒷골) 구읍리 북서 뒤골 아래쪽 골짜기
뒤산(뒷산) / 운곡리 솔개마을 뒤의 산.
뒤동산(뒷동산) / 고성군 삼일포리 소재지 사평마을 뒤의 산. 과수원, 왕대밭이 많이 조성되어 있다.
배골(뱃골) / 운전리 남쪽 골짜기
새골(사이골. 갯골) / 능동리 골짜기.
초대봉(촛대봉) / 고성군 성북리의 서북쪽 고성읍과의 경계의 봉우리. 촛대처럼 생겼다.
절터골 / 신봉리 골짜기. 운곡리 골짜기. 해방리 골짜기.
터골짜기. 장포리 골짜기. (안터골짜기) / 순학리 와우산 남쪽 골짜기.
게사니코등산. 능동리. 개사니(거위) 거위처럼 생긴 등성이.
게사니골짜기. 고성군 고성읍의 골짜기. 지난날 골 안에서 게사니(거위)를 사육하였다.
따바리골 / 고성군 주둔리의 골짜기. 똬리 모양으로 뻗어 있다.
오얏골 / 고성군 해방리의 남쪽의 골짜기. 지난날 오얏나무(자두나무)가 많이 자랐다 한다.
딴봉 / 고성군 삼일포리 진미마을 남쪽의 봉우리. 외따로 솟아 있다.
노루목고개 / 고성군 주둔리 사설봉 남쪽의 고개. 지난날 노루가 자주 출몰하였다지만 낮은 고개의 듯이다.
시랑리 / 고성군 월비산리 영역에 있던 폐리. 본래 고성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옛날 시랑 벼슬을 하던 사람이 살았다 하여 시랑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에 간성군 서면 시랑리로 되었다.
사평리 / 고성군 삼일포리 영역에 있던 폐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시에 고성군 일북면의 장평리, 상평리, 사현리를 병합하여 간성군 신북면에 신설한 리로서 사현리의 "사" 자와 장평리, 상평리의 "평" 자를 따서 사평리라 하였다. 1927년경에 고성군 신북면 사평리로 되었고, 1939년경에 고성군 장전읍 사평리로 되었다. 1943년경에 외금강면 사평리로 되었다가, 1952년 군면리 대폐합에 따라 고성군 삼일포리에 편입되면서 폐지되었다. ///
3·1운동 당시 간성군에도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장날을 이용한 시위가 계획되었으나, 이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일제가 시장을 폐쇄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5월 15일 죽왕, 토성면이 양양군으로 편입되고 군의 명칭이 고성군으로 바뀌었으며,1935년 오대면이 거진면으로 개칭되었다.
간성읍 교동리에 간성향교가 있다.
토성면 청간리에 청간정(淸澗亭), 교암리에 천학정(天鶴亭)이 있다.
간성읍 상리 와우산 기슭에는 6·25전쟁 때 공산 치하에서 희생된 46명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1420년(세종 2)에 창건한 간성향교는 간성읍 교동리에 있는데, 6·25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공산 치하에서 수복된 뒤 지방 유지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150503 KBS1 통일로 가는 길 타박타박 북녘 기행 ·삼일포
삼일포
국토교통부 국가지명위원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1. 지난 시간에는 고성군 이야기를 들어 보았는데요, 이곳에 금강산 삼일포하는 곳이 있죠? 그 얘기를 들어볼가 합니다.
우선 삼일포란 이름이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지부터...
`삼일포`라는 지명이 신라시대의 사 신선이 삼일간 머물렀던 곳이라서 삼일포란다.
삼일포는 순 우리말로 ‘사흘개’라 한다.
고성에 있으므로 ‘고성 삼일포’라고도 하며, 금강산에 있다 하여 ‘금강 삼일포’라고도 한다.
삼일포(三日浦)의 남쪽 산봉우리 절벽에 신라의 화랑들이 새겼다고 하는 ‘술랑도 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여섯 글자가 있다.
2. 이 삼일포에는 어떤 볼거리들이 있을까요?
이곳의 삼일포는 이중환(李重煥)이 『택리지』에서 산수승지(山水勝地)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은 명승이다.
관동팔경의 하나이며, 휴전선 이북 고성군에 있다.
삼일포에는 장군대와 봉래대, 연화대, 금강문, 몽천, 와우도, 단서암, 무선대, 사선정토, 매향비 등 명소들이 있다.
볼거리가 많고 아름다운 삼일포는 남북방향으로 긴 타원 모양이며, 휴양관광지로 가꾸어져 있고 천연기념물 제218호로 지정되었다.
3. 방금 말씀하셨지만, 이 삼일포는 <관동별곡>이라는 가사에도 나오는 곳이죠? 경치가 옛날부터 무척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나 봐요.
고셩(高城)을란 뎌만 두고 삼일포(三日浦)랄 차자가니,
단셔(丹書)는 완연(宛然)하되 사션(四仙)은 어대 가니.
예 사흘 머믄 후(後)의 어대가 머믈고.
션유담(仙遊潭) 영냥호(永郎湖) 거긔나 가 잇난가.(관동별곡)
4. 삼일포 근처에서 또 어떤 명풍경들을 볼 수 있을까요?
‘관동팔경’ 삼일포·해금강 코스는 삼일포, 연화대, 봉래대, 해금강으로 이어지며 버스와 도보로 왕복 3시간이다. 바위산인 봉래대는 삼일포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이다.
삼일포의 면적은 0.79㎢, 둘레는 5.8㎞, 길이는 1.8㎞, 너비는 0.4㎞, 집수구역면적은 1.775㎢이다. 수면이 맑고 기괴한 암석과 36봉이 호수에 비치어 절경을 이룬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 호수 중 제일 경색이 아름다운 호수로 꼽고 있다.
삼일포의 주변은 36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호수 안에 4개의 섬이 있고, 그 중 하나에 신라시대 4선(四仙)인 영랑(永郞), 술랑(述郞), 안상(安祥), 남랑(南郞)이 놀고 갔다는 사선정이 있다.
4개의 섬이름은 사사선(四四仙), 무선대(舞仙臺), 봉락대(鳳樂臺), 석대(石臺)이다. 호수 북쪽 석면에는 ‘영남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라고 새겨져 있고, 그 중 2자는 단서(丹書)로 되어 있어 단서석이라고 부른다.
5. 그런데, 삼일포의 그 아름다운 호수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인지?
삼일포는 본래 만이었는데, 남강에서 날아온 모래가 바닷물의 작용을 받아 다시 운반되어 쌓이게 되어 만 앞이 막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뒤 금천의 물이 들어가 된 석호이다.
해수면이 현재의 높이에 이른 약 6,000년 전 바닷물이 삼일포를 지나 북강 상류 안쪽으로 온정리 부근의 금강 제1, 제2교가 있는 곳까지 밀려들어왔고 육지에서 공급된 토사가 호수의 입구를 막아 바닷물이 호수가 된 것이다.
그 시기가 약 3,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6. 이곳은 지금은 금강산 관광이 막혀 갈 수가 없죠. 북한에서는 이곳을 찾아가기 쉽게 교통 시설을 잘 해 놓았을가요?
남한 사람들은 금강산 관광을 갈 때 버스를 통해서도 쉽게 갈 수 있었다.
지금은 원산과 금강산 사이에 관광도로가 연결되어 있디.
삼일포역이 있는데, 북한에 위치한 금강산청년선의 철도역이다. 인근에 삼일포 해수욕장이 있으며 전에는 금강산 관광을 통해 이 역으로 갈 수 있었다.
금강산청년선(金剛山靑年線)은 강원도 안변군 안변역과 고성군의 감호역을 연결하는 철도 노선으로, 원래의 동해북부선을 분리시켜 개칭한 노선인데, 남한에서는 주로 동해북부선으로 부른다. 제진역까지 시험운행으로 인해 삼일포역까지만 여객열차가 운행한다. 금강산을 지나는 철도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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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3026&cid=46618&categoryId=46618
고성군
강원도 동북부에 위치. 북으로 금강산을 경계로 통천군(通川郡)과 접하고, 동쪽은 동해, 서쪽은 향로봉을 경계로 하여 인제군(麟蹄郡)에 접하였으며 남으로는 속초시 장사동(章沙洞)을 경계로 하고 있다.
면적은 516.9㎢이고, 인구는 5만 5,950명(2008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은 2읍, 4면, 행정리 127개 리가 있다.
군청은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하리
해안평야를 따라 남북으로 발달한 교통로, 소규모의 항구와 어항, 모래해안을 이용한 관광지 개발 등으로 군민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 집중해서 분포하고 있다.
태백산맥에는 금강산(1,638m)·향로봉(1,296m)·고성산(1,267m)·진부령(529m) 등이 있다.
진부령은 이 지역의 영서·영동 지방을 잇는 유일한 교통의 요충지 구실을 한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강릉과 함께 예국(濊國 :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의 영토였다. 그 뒤 고구려 세력이 왕성해지면서 고구려 영토로 편입되어 두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지금은 북한에 있는 고성읍과 장전읍·외금강면·서면과 현내면 일부지역은 달홀, 현재의 고성군 대부분은 수성군으로 불렸다.
달홀은 568년(진흥왕 29)에 주로 승격되었다가 경덕왕 때 고성군으로 개칭되었고, 수성군도 수성군(守城郡)으로 개칭되어 고려로 이어졌다.
이곳의 삼일포는 이중환(李重煥)이 『택리지』에서 산수승지(山水勝地)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은 명승이다.
995년(성종 14)에 지방을 10도로 나누었을 때 삭방도(朔方道)에 편입되었다가, 현종 때 5도 양계로 개편되면서 동계(東界)에 소속된 고성군과 수성군은 각각 고성현과 간성현(杆城縣)으로 바뀌었다.
간성현은 그 뒤 군으로 승격되어 고성현을 겸무하다가 1389년(공양왕 1)에 다시 둘로 나누어져 조선으로 이어졌는데, 고려 말에 학교제도가 정비되면서 이곳에도 이용계(李龍溪)가 간성향교를 세웠다.
간성군과 고성현으로 나누어져 조선으로 넘어온 현재의 고성군은 세종 때 고성현이 군으로 승격되어 간성·고성의 두 군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간성군의 호수는 227호, 인구는 871명이었다. 현재 거진읍 냉천리에 건봉사지(乾鳳寺址)가 있는데, 이곳은 임진왜란 때 승병의 기지였다.
그 뒤 1604년(선조 37)에 고성군은 북관(北關 : 함경도 지방)에서 가까워 당상무관이 군수로 파견되다가 1623년(인조 1)에 복구되었고, 1629년고성군에서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일이 생겨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38년에 회복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이 23개 부로 나누어지자 간성·고성군은 강릉부 관할의 9개 군 속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다시 전국이 13도로 편제되면서 강원도 관할로 바뀌었다. 전국 부·군·면 통폐합 조처에 따라 고성군은 간성군에 흡수되고, 간성군은 간성·오대·죽왕·고성·신북·서·수동·토성·현내의 9개 면 124개 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3·1운동 당시 간성군에도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장날을 이용한 시위가 계획되었으나, 이 일이 사전에 누설되어 일제가 시장을 폐쇄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1919년 5월 15일죽왕·토성면이 양양군으로 편입되고 군의 명칭이 고성군으로 바뀌었으며, 1935년 오대면이 거진면으로 개칭되었다.
1945년 광복 당시 고성군은 고성읍·장전읍과 거진면·수동면·외금강면·서면·현내면·간성면 등 2읍 6면을 관할했는데, 38선 이북이어서 북한지역이 되었다가 휴전협정 후 1954년 10월 21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 조치법’이 실시되어 간성면·거진면·현내면·수동면의 4개 면이 편입되었다.
1963년 1월 1일 양양군에 편입되었던 토성면·죽왕면이 다시 편입되어 6개 면을 관할했다. 그러나 수동면은 휴전선이 통과하여 민간인의 거주가 금지되어 실제로는 5개 면만을 관장하였다. 1964년 12월 28일 간성면 흘리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 7월 1일 거진면이 읍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토성면의 사진리와 장천리가 속초시로 편입되고, 1979년 5월 1일 간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선사시대 유적으로는 거진읍 화포리와 현내면 죽정리 등에 1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고성지역은 탁자식고인돌의 동해안 쪽 남방한계선으로 알려져 있다. 또 간성읍 신안리, 거진읍 거진리·화포리, 현내면 송현리·죽정리·초도리 등에서는 돌도끼·민무늬토기·가락바퀴·반달돌칼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수습되었으며, 현내면 명파리와 죽정리에서는 신라 고분 6기가 확인되었다.
고려 때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현내면의 산학리성터(일명 고성산성)와 간성읍 신안리의 간성지(杆城址)가 일부 남아 있다.
불교유적으로는 거진읍 냉천리에 고성 건봉사지(高城乾鳳寺址)와 불이문(不二門), 토성면 신평리에 화암사(禾巖寺)가 있다.
간성읍 교동리에 간성향교가 있다.
토성면 청간리에 청간정(淸澗亭), 교암리에 천학정(天鶴亭)이 있으다.
간성읍 상리 와우산 기슭에는 6·25전쟁 때 공산치하에서 희생된 46명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1420년(세종 2)에 창건한 간성향교이다. 간성읍 교동리에 있는데,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공산치하에서 수복된 뒤 지방 유지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1984년에 개장한 현내면 명호리의 통일전망대는 이 지역 청소년과 일반 주민은 물론, 내외국의 관광객에게 반공의식을 고취하는 최적의 교육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군민의 날에는 수성문화제가 열린다.
이 지방의 동제에 대해서는 『동국세시기』에 “고성의 풍속에 매월 삭망에 관청에서 군사당(郡祠堂)에 나가 제사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비단으로 신의 가면을 만들어 당에 두었다가 섣달 스무날 이후부터는 신이 고을 사람에게 내린다고 해, 그 가면을 쓰고 아내(衙內)와 읍촌을 돌면서 춤을 춘다. 집집마다 이를 맞이해 즐기다가 정월보름 전에 당 안에 다시 보관하기를 해마다 되풀이한다.”라고 했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설화로는 「삼정사지오목전설(三井四池五木傳說)」과 「고성산전설」이 있다.
「삼정사지오목전설」은 고려 때 이 지방의 어느 원님이 세 곳에 우물을 파고, 네 곳에 연못을 만들고, 5종류의 나무를 심으면 관운이 좋아 관직에 오래 머물 수 있고 또 장수도 한다는 말을 듣고, 곧 간성고을에 우물 3개와 못 4개를 파고 은행나무 등 5가지 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이다.
「천하정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간성읍 금수리 뒷산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우물이 있는데, 옛날에 이 곳 땅 속에서 용마가 솟아나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 용마는 강릉최씨(江陵崔氏) 문중에서 장사가 나는데 그 장사를 업고 가기 위해 나왔다고 한다. 당시 마을사람들이 온 동네 명주실을 모두 모아 용마가 나온 구멍에 넣었는데 실이 끝에 닿지 않았다고 한다.
「고성산전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노인산 옆에 산학산(山鶴山)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쳐들어와 조선의 혈맥을 끊기 위해 이 산 산정에 있는 50평 가량의 바위를 쇠꼬챙이로 파고, 황소를 잡아 그 속에 묻었다.
10여 일 지난 뒤 마을사람들이 올라가 보니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고, 다만 황소 피가 말라 이끼가 되어 바위에 돋아 있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발을 구르면 사방에서 쿵쿵 소리가 난다고 해서 고성산(高聲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성과 북한 금강산을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가 개설되어 있으나 현재 금강산관광로로 도로만 활용되고 있다.
관광이 지방은 전통적인 산천유람의 관광에서 시작해, 신라 때는 화랑도들의 국토순례지였고 고려시대까지는 승려들의 순례지였다. 또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의 명승 유람지이기도 했으며, 근래에는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동해안에는 현내면과 거진읍에 걸쳐 있는 화진포해수욕장과 죽왕면의 송지호해수욕장·삼포해수욕장 등 많은 해수욕장이 있으며, 관동팔경의 하나인 청간정과 천학정에는 여름이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화진포해수욕장에는 지상 3층 236평 규모의 화진포해양박물관이 있는데 어·패류 1,500점 등 4만여 점이 전시되어 있고, 해양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특히 국립공원인 설악산이 가까이 있어 산과 바다를 함께 즐기려는 피서객들이 많다. 한편,
진부령에는 천연의 조건을 갖춘 알프스스키장이 있어 설경과 겨울 스포츠를 즐기려는 사람이 많아 호텔과 산장 등의 숙박시설이 잘 되어 있다. 마산봉 기슭에 위치한 알프스스키장은 원래 북한의 삼방스키장과 함께 일제강점기 때 생긴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장이다. 스키장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1년이며, 1972년부터 1978년까지 진부령스키장으로 전국동계체전은 물론 각종 전국규모의 국내 스키대회 유치로 우리나라 스키장의 대명사였다.
안보관광지로 현내면 명파리에 통일전망대가 있고, 거진읍 냉천리에 건봉사, 죽왕면 오봉리의 민속촌인 왕곡마을에 전통가옥이 있다.
고성 8경(화진포, 건봉사, 청간정, 통일전망대, 송지호, 마산봉 설경, 울산바위, 천학정)과 함께 8미(味)가 있다.
8미는 어부들이 밤새 술을 푼 속을 달래려고 새벽 출어를 나가기 전에 요기삼아 먹던 음식이다,
금강산 관광은 1998년 11월 18일 동해항에서 금강호의 시범운항을 시작되었다. 금강산관광 중 해로관광이 중단되고 2003년 2월 14일 육로로만 금강산 관광이 가능하게 되었다.
명태축제는 매년 2월 명태의 주산지인 고성군 거진항 일대에서 개최된다. 명태는 고성의 주산품으로 전국 어획량의 70% 가량 차지하며 명태의 맛과 군어(郡魚)로서의 자부심을 알리고자 고성군내의 크고 작은 10여 개 항구를 돌아가며 매년 2월에 열리는 축제로 명태경매 재연, 명태요리경연대회 등 각종 이벤트행사 및 한마당잔치가 벌어진다.
간성읍(杆城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본래 간성군 읍내가 되므로 현내면(縣內面)이라 하다가 1895년 군내면(郡內面)이 되어 상리(上里)·방축(防築)·용연(龍淵)·서문(西門) 등 15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해상면(海上面)의 탑현(塔峴)·어룡(魚龍)·오금천(五金川) 등 17개 리를 병합하였다.
1919년 간성군이 폐지되고 고성군으로 개칭할 때 간성면이라 해 고성군에 속하였다. 1945년 광복 후 38선 이북이어서 북한지역이 되었다가 1953년 휴전협정 후 수복된 지역으로 1954년 고성군에 편입되고,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거진읍(巨津邑)
군의 중앙 동부에 위치한 읍.
본래 간성군 지역으로 오현면(梧峴面)이 되어 장항(獐項)·영천(?泉)·거진(巨津)·수리(水里) 등 1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대·죽지·송학 등 대대면의 9개 이를 합해 오대면이라 했으며, 1935년 소재지인 거진리의 이름을 따서 거진면으로 개칭하였다.
1945년 광복 후 38선 이북이어서 북한지역이 되었다가 1953년 휴정협정 후 수복된 지역으로 1954년 고성군에 편입되고, 1973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북쪽과 남쪽에서 발원해 읍 중앙에서 만나 동해로 흐르는 현산천이 있고, 북동쪽 해안가에는 석호인 화진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