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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15)
하나님의 권세와 청지기 의식
롬 13:1~7
I. 서론
어느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그날따라 스피커 상태가 영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맨 뒤에 앉아 있던 성도님 한 분이 설교를 듣다가 도저히 안 들려서, 강단을 향해 소리쳤다고 합니다. “목사님, 뒤에서는 설교가 잘 안 들립니다. 좀 크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그 성도님 몇 줄 앞에 앉아 있던 한 집사님이 뒤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괜찮아요. 별로 들을 내용도 없어요.” 오늘이 로마서 강해 마지막 시간입니다. 별로 들을 내용도 없는 설교를 지난 몇 달 동안, 잘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로마서 강해를 마무리 하는 시간입니다. 로마서 강해 첫 시간에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하나 말씀드렸습니다. 그 단어는 “하나님”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로마서에는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뜻. 오늘 본문도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권세가 인간 사회에서 어떻게 발휘되는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로마서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바울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로마 교회 안에 있는 “각 사람”에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 권면의 내용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은 무엇을 말할까요? 각 사람마다 적용할 부분이 다를 것입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자녀들은 부모님이 위에 있는 권세가 될 것입니다. 주인을 섬기는 노예들은 주인이 위에 있는 권세가 될 것입니다. 로마 황제를 왕으로 두고 있는 국민들은 로마 황제가 위에 있는 권세가 될 것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 있는 권세에 거역하면, 그것은 곳 그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2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2절,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바울은 본문에서 그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고 있습니다. 바로 국가입니다. 바울 당시의 상황에서는 로마 정부, 혹은 로마 황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3~4절,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단어입니다. 영어로, “God’s servant”입니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그러니까, 국가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권세를 받아서 사역을 하는 기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3~4절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은 “악”과 “두려움”이라는 단어입니다. 3절,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4절,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니까, 국가의 기능은 악한 일에 대한 심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국가에 권세를 주심으로 악을 억제하고 악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국가의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권세에 복종하는 이유입니다.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5절,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로마서를 읽고 있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진노 때문이 아니라, 양심 때문에 국가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양심을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양심”은 하나님께서 국가에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존 머리 교수님의 설명을 들어 보겠습니다. John Murray, “바울은 ‘양심’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양심임이 명확하다. 여기서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감에서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복종이 형벌적 심판을 우리에게 초래하기 때문에 순종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고유의 의무가 있기 때문에 순종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양심에 따라 귝가에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국가에게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구체적인 예로, 세금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당시 로마 사회에서 로마 정부에 세금을 내지 말자는 운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6~7절,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정부에 세금을 바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세금을 내더라도 그리스도인이 세금을 내는 이유와 세상 사람들이 세금을 내는 이유가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권세가 어떻게 국가에서 발휘되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을 기초로 해서 우리의 사고를 조금 더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가지 작은 주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 가지 주제를 이 시간에 조금 더 고민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주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통로로 국가에 권세를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국가가 하나님의 사역자로 잘 사역할 때에는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제는 하나님께서 국가에만 권세를 주신 것이 아니라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도 이런 식의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차례대로 살펴보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1) 첫 번째, 하나님께서 현대 서구 국가에 권세를 주시는 방법입니다.
한 마디로, 대부분의 현대 서구 국가에는 하나님께서 “선거”라는 제도를 통하여 특정 인물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표를 하지 않거나 투표를 잘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년 2024년 11월 5일에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민주당과 공화당, 두 정당에서 대통령 후보를 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년 선거를 통하여 특정 인물에게 미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권세가 우리의 투표를 통하여 흘러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쪽 후보와 정당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따를 수 있는지 기도하고 연구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투표를 해야 합니다. 혹시 내 마음에 쏙 드는 후보나 정당이 없다면, 하나님의 뜻을 덜 해치는 후보나 정당에라도 투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권세가 올바른 통치자에게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았다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권세가 있을 때, 그 권세로 세상에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미국 34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는 정계를 은퇴하고 골프를 즐겼다고 합니다. 어느 날,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난 후, 골프장 직원이 다가와서 물었다고 합니다. “대통령님, 대통령을 그만 둔 후에 달라진 것이 있으십니까?” 그러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있고말고~, 골프 시합에서 나한테 이기는 사람들이 갑자기 더 많아졌어.” 우리에게 권세가 있을 때, 그 권세로 선한 영향력을 최대한 많이 끼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국가가 하나님의 사역자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국가에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그들의 정책을 따라야 할까요? 성경을 연구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불복종해야 할 때는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대로 국가에 불복종하면, 그것은 국가에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성경에 많은 예가 있지만, 그 중에서 3가지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출애굽기에서 바로가 히브리인 산파들에게 갓난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명했을 때, 그들은 순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출 1:15~17,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부당한 살인을 정부가 명령했을 때, 그것에 불복종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이유입니다. 17절,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면, 히브리 산파들은 노예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굽 왕의 명령에 불복종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애굽 왕 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다니엘서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모든 신하에게 금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순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단 3:16~18,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우상에게 절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불복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한 말입니다. 17절입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한글 성경 번역이 좀 이상합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마치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는 것처럼 번역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사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화형을 당할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번역을 읽어 보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쉬운성경> 단 3:17, “만약 우리가 용광로 속에 던져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타는 용광로와 왕의 손에서 구해내실 것입니다.” <NASB> 단 3:17, “If it be so, our God whom we serve is able to rescue us from the furnace of blazing fire; and He will rescue us from your hand, O king.” 그러니까, “If”의 조건문은 하나님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왕이 자신들을 용광로에 넣을 지의 유무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신앙이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실지라도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그 이유는 느부갓네살 왕 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지신 분이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와 똑같은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셋째,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을 금했을 때, 베드로와 사도들은 순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행 5:27~29,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을 전파하지 못하게 하는 명령을 받았을 때, 불복종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베드로와 사도들의 말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와 사도들도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그들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이런 것입니다. 국가가 부당하게 살인을 하라고 명령할 때, 국가가 헛된 우상에게 절하라고 명령할 때, 국가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명령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마지막 세 번째, 하나님께서는 국가에만 이러한 권세를 주신 것이 아니라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도 이런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교회에서는 목사와 장로에게,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이러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제외하면,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 좋은 목사와 장로를 만나는 것, 좋은 직장 상사를 만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부모를 만나야 어릴 때부터, 정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신앙교육과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좋은 목사와 장로를 만나야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참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좋은 직장 상사를 만나야 사회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올바로 발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매일 마약, 폭력, 폭언을 하는 부모를 만나면, 그 자녀들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가르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목회하는 목사와 장로를 만나면 그 교회에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될까요? 직장에서 이유 없이 괴롭히고 사람을 차별하는 직장 상사를 만나면, 그 밑에서 일하면 직원들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만약 부모의 위치, 목사나 장로의 위치, 직장 상사의 위치에 있다면, 우리는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부모로서의 권세, 목사나 장로로서의 권세, 직장 상사로서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올바로 사용해서, 자녀를 잘 양육하고, 성도를 잘 섬기고, 직장 후배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III. 결론
이 말씀만 드리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 마디 했다고 합니다. “네가 옷걸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말아라.”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 이유는 옷걸이에게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신의 신분인 양 착각하는 옷걸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권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영원한 권세는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그 나머지 권세들은 옷걸이에 걸리는 옷과 같은 것입니다. 언젠가는 모두 벗어버려야 하는 것들입니다. 영원한 권세는 없습니다. 대통령도 몇 년 후면,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 옷을 벗어야 될 때, 벗지 않기 때문에 독재 국가의 통치자들이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권세가 아무리 작을지라도 그 권세가 하나님께서부터 왔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가지고 있을 때, 그 권세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네게 준 것으로 너는 어떻게 살았니?” 주님 앞에 설 때, 잘했다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