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보리사(강서성 의풍) ...출가란 애증의 번뇌를 끊는 것
황벽희운黃蘗希運(~850년)선사의 도량인 황벽사와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년)선사의 도량인 보리사이다
임제종은 대기大機 와 대용大用 을 밝히고
조도종은 향상 向上등을 밝힌다. 즉 불조미생전佛祖未生前 소식이다.
구도자들은 덧없는것에 무관심해야한다. 사는것은 일을하는것이요 죽는것은 쉬운일이다.
강서성 정향현 보봉향 석문산(石門山) 보봉사(寶峰寺)는 마조 도일(馬祖道一ㆍ709~788) 선사의 원적도량으로 동아시아 선종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마조는 호남성(湖南省) 남악 형산의 마경대(磨鏡台)에서 깨우친 뒤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서 18년 동안 선(禪)의 오묘한 진리를 설파하고 석문산 보봉사에서 788년 원적한다.
마조는 남창 우민사에서 18년 동안 행화의 자취를 드리우고 자신의 원적을 예감한 듯 788년 석문산을 거닐다가 제자에게 일면불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라는 화두를 남기고 천화(遷化)하기에 이른다.
마조의 생애 중 삭발처인 사천성의 나한사(羅漢寺), 개당설법 도량인 불적령(佛跡岺) 성적사(聖跡寺), 깨우침을 얻은 남악 형산의 마경대와 마조선을 본격적으로 펼쳤던 홍주 개원사(현 남창 우민사)와 함께
마조의 원적도량인 석문산 보봉사는 마조가 홍주 종지를 널리 펼쳤던 동아시아 선종을 일으킨 행화도량으로 알려졌던 곳이다.
마조선사와 제자 수료화상의 도량 보봉사 벽면에
즉심시불卽心是佛 : 마음이곧 부처다 비심비불 非心非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마조의 대표적인 선사상으로 ... 馬祖道一大寂禪師 사리탑에 세겨져있는내용
심외무별불 불외무별심 :心外無別佛 佛外無別心 부처밖에 마음이 따로있는것이 아니다.
졸탁동시 : 알이부화되면 그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쪼고 암탉을 밖에서 쪼아 병아리가 안에서 나오게하는것
마조는 일찍이 석문산에 올라가 큰 가람이 들어설 만한 땅임을 간파하고 제자들에게 서둘러서 석문산 아래 보봉사를 창건하게 한다. 그때가 850년이었다. 보봉사의 초창의 사명은 늑담사(潭寺) 또는 법림사(法林寺)였으나 당대중 4년(850)에 선종이 ‘보봉’이라는 편액을 하사하면서부터 보봉사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봉사 소개 안내문에 따르면 절 주위에는 첩첩이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위태로운 낭떠러지가 벽같이 솟아 있으며 수목이 울창하고 산천의 물이 역류하듯 합쳐지는 것 같다고 풍수지리설을 강조했다.
특히 구룡을 강조했는데 절 뒤의 일곱 산봉우리가 달려오고 좌우로는 양봉우리가 합하여 아홉 마리의 용이 모여 있는(九龍聚會) 땅이라고 하여 산천의 지세를 풍수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보봉사는 마조선을 사방에 펼치다가 마조가 788년 입적하자 곧 마조의 원적도량(圓寂道場)이 되었다. 일상생활 그 자체가 선차
중국 선종의 차문화는 선종 초초 달마에 연원하여 마조 도일에 의해 완성되다시피했다.마조가 창안한 홍주종의 종지를 규봉 종밀(圭峰宗密ㆍ780~841)은 일체 개진(一切皆眞)으로 압축하고 있는데 마조사상의 전반적인 흐름은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설파했다.
마조-백장-남전-조주로 이어진 선맥의 흐름 속에 선차라는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기 시작한 이래 차와 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접어들었다.
소와 수레바퀴 둘 중에서 한 바퀴만 없어도 수레가 갈 수 없으니 이 선문(禪門)에서도 차가 없이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조는 깨우쳐주고 있다.
달마에서 혜능으로 이어지는 순선(純禪)의 시대에서 혜능(慧能ㆍ638~713) 뒤를 이어 마조가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선이 중국인들의 정신문화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차를 선종에 불어 넣은 것이다. 선종의 차 마시는 풍습은 달마에서 혜능까지 다반사로 이어오다
마조가 강서성으로 들어옴으로써 선종의 차문화는 선차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선종 차문화의 생명력은 대략 6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대의 선승 중의 한 사람인 운암(雲巖ㆍ?~841?)
선사는 좌선 중에 너무 졸음이 와서 음다를 한 이후 그 졸음을 쫓아 견성을 이루었다는 고사가 있다.
특히 중국 선종의 차문화는 마조의 제자 백장으로부터 보편화된다. 백장은 처음 선원을 만들고 백장청규를 만들어 화두만 찾는 선 수행에서 탈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라는 선원 규칙을 만들어 보청정신을 생활화시켰다. 그 문화의 중심은 다반사인 차문화이다.
오카쿠라텐신(岡倉天心)은 그의 저서 『차의 철학』에서 선종과 차문화를 이렇게 말했다.‘마조 시대 이후 선종의 차문화을 보면 양자강의 정신이 작용하여 그 결과 이전의 인도 이상주의와는 대조적인 중국에 맞는 선의 정통을 만들었다.’ 특히 선종의 공안 중에서는 뜰앞에 잡초를 뽑거나 밭의 무를 자르거나 차를 따거나 하는 동안, 일상생활 속에 행하는 모든 것이 선 아님이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석문산 보봉사 선차의 오늘날 조주의 차나 마셔라(喫茶去)라는 끽다거 화두는 마조의 평상심이 도에서 출발 남전→조주를 거치면서 선가의 다반사가 되어 버렸다. 그 역사적 현장인 보봉사에서의 선차회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중국 선종의 차의 특징은 승려가 된 뒤에는 반드시 체다 소임을 맡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백장청규를 실천하면서 화두를 탁마한다는 것이 한국 선과 다른 특징이다.
보봉사의 스님들이 간택하고 있는 화두는 평상심이 도, 즉심즉불 등 마조의 대표적인 화두와 조주의 염불시수(念佛是誰)를 든다. 강서 선차는 마조의 연원 선불교가 마조시대에 와서 활짝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마조라는 걸출난 인물의 출현에서 예견된다. 마조의 출현은 이미 육조 혜능과 남악 회양의 문답에서도 예견된 일이다. 육조는 반야다라의 예언을 상기시키면서 회양에게
“그대의 발아래 말 한 마리가 나와 천하 사람을 밟아 죽일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 한 마리는 마조를 두고 한 말이다.
마조는 사천성 시방현에서 출생하여 고향인 나한사(羅漢寺)에서 출가 덕순사(德純寺) 처적을 의지하여 출가했다.오늘날 마조 법맥은 육조-남악으로 이어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지선→처적→무상→마조로 이어지고 있다고
「종밀」의 『원각경대소초』는 증언한다. 이렇게보면 마조는 검남종(劍南宗)의 계승자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조선과 선다일미 정신을 밝히고자 한다.
마조가 중국 정신문화사에 우뚝 솟을 수 있었던 것은 강서성(江西省)을 전법루트로 선택한 데서 기인한다. 마조가 사천성에서 강서로 들어오니 그의 선법을 따르려는 제자가 모여들기 시작한다.
바로 그 무렵에 마조서강(馬祖西江)이라는 화두가 나온다. 서강은 우민사 앞에 흐르는 강을 말하는데 원래 이름은 감강으로 파양호와 연결되어 양자강과 합류되는 강인데 마조는 서강을 배경으로 선불교에 차를 도입시키기에 이른다. 마조가 활약한 강서를 강남차구로 구분하는데
강서차구의 핵심은 선종의 차문화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강서는 중국 3대 차산지와 4대 쌀산지로 불렸다. 강서가 중국 3대 차산지로 불리는 것은 당대 중국조사선을 드높힌 마조에서 연유된다. 마조가 남창 우민사에서 선법을 펼치니 서당, 백장, 남전, 황벽, 대주 등 당대 이름난 명승이 모여든다.마조의 남창을 중심으로 강서성과 호남성ㆍ안휘성ㆍ호북성ㆍ복건성ㆍ하남성 등 남북 전역에서 마조선이 일어나기에 이른다.
마조선의 핵심은 선차이다. 마조는 139명의 제자들을 배출했는데 그 중에서 백장, 남전과 그 법손인 조주에 의해 선차는 끽다거라는 공안으로 대중화되었다.강서 선종의 선차정신은 백장에 의해 백장청규가 제정되면서 보편화된다. 지금은 황벽, 백장, 마조 선차 등이 남아 있다. 운무차라는 명차가 많은데 운무차는 선차에서 연유,
대부분 선종 사찰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선종의 차는 그 맛과 향이 뛰어나 선승들의 입에서 입으로 비전되고 있다. 마조선의 핵심은 선다일미마조는 좌선만이 오도를 이룰 수 있지 않다는 진리를 회양 선사로부터 깨우친후 선종에 차문화를 도입케 된다.
마조가 차를 맛본 것은 회양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선은 결코 앉아서 깨칠수 없다는 진리에 깨우침을 얻은 마조는 그 순간은 제호에 비유했다. 마치 제호(醍)를 마시고 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제호란 차중에 최고로 치는데 소나 낙타의 젓으로 차 중에서 가장 맛과 향이 뛰어나다고 『법화경』에 전하고 있다. 마조는 깨우침의 순간을 제호에 비유한 이래 선에 차를 불어 넣으면서 깨달음으로 연결한다.
그 첫 번째로 방온 거사를 시험하였다. 방온 거사가 마조를 만나면서 첫 번째 던진 질문이 마조서강이라는 화두이다. 먼저 방온 거사가 묻는다. “일체의 존재와 무관한 사람은 누구입니까(不與萬法爲侶者)?” 마조가 말한다.“서강의 물을 한 입에 마셔버리면 그때서야 말해 주겠다(待汝一口吸盡西江水).” 방온은 마조의 이 한마디에 깨우쳤다.
그 뒤부터 참문하는 제자에게 물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물은 차와 직결된다. 초의의 『동다송』의 품천에 ‘ 차는 물의 신이요 물은 차의 몸체(茶者水之神)’라고 했다. 조주 끽다의 탄생 배경을 살펴보건데 마조의 제호의 맛에서부터 비롯된 후 선종사상의 음다문화가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으리라고 보여진다.
마조의 선다일미를 이은 사람은 백장 회해 선사(百丈懷海禪師ㆍ720~814)였다.
백장은 강서성 봉신현 백장촌에서 백장사를 열고 백장청규에 보청을 넣음으로써 승려의 노동을 의무화시켰다. 그 뒤부터 차는 선종의 다반사로 되어 버렸다. 백장뿐만 아니라 황벽, 남전에게도 차는 이어져 선차일미 사상이 당대 주류가 되었다.
마조 최후의 말씀 ‘일면불월면불’마조는 788년 열반에 이를 즈음정월 제자와 함께 강서성 건창의 석문산에 올라 숲 속을 거닐다가 갑자기 골짜기 사이 동굴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다음 달 내가 죽으면 유해를 석문산에 묻어달라”하고 곧장 개원사로 돌아왔다.2월 4일이 되자 마조는 건강이 안좋아 보였는데 그 전날밤 원주가 여쭈었다.“화상께서 환후가 안좋다고 하였는데 어떠신지요?”그러자
마조가 “해 같은 용모의 부처님, 달 같은 얼굴의 부처님 (日面佛月面佛)”이라고 말하고 조용히 천화(遷化)했다.
이것이 마조가 남긴 최후의 말씀이었다. 그때가 80세였다. 마조는 장수와 단명을 일면불월면불로 풀어 말했다.
마조가 열반에 들자 석문산에서 다비하여 탑을 세웠다. 탑명은 당시 동평장사(同平章事) 권덕려(權德輿)에게 쓰게 하여 석문산에 세웠다.
회창법란 이후 선종은 강서 관찰사 배휴에게 조칙을 내려 탑과 나란히 보봉(寶峰)이라는 사액을 내려 영원히 명멸되지 않게 했다.
그런데 문화혁명 시기에 보봉사는인민정부에 접수 당해 마조탑 또한 훼손을 당하고 보봉사 자리에는 보봉초급중학(寶峰初級中學)의교사로 사용해 오다가 1992년에서야 보봉향의 인민정부로부터 불교계에 반환되어 1993년부터 복원 불사가 진행되어 오다가 1996년에서야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마조탑을 탑의 전면은 ‘마조도일대적선사사리지탑’이라고 음각했고 좌우면에는 코끼리상을 조각했으며 그 옆에는
마조의 화두인 심외무별(心外無別), 불외무별심(佛外無別心)을 중국불교협회 부회장 주소량이 써서 음각했다.「
정안현지(靖安縣志)」에 따르면 마조탑은 정원 4년(788)에 건립했다고 하며 「부지」에 따르면 회창 841~846년 사이에 파괴되었으며 송대에 재중건하고 다시 문혁 때 파괴된 것을 1993년에서야 일성 방장에 의해 원형태로 복원한 것이다.
1966년 발굴조사 과정에서 지하 3층 하단에 석함이 발견되었는데 마조의 사리함임이 밝혀졌다.마조사리함은 강서성 박물관에 보존해오다가 1993년 마조탑 복원 때 원래의 위치에 넣었다고 전한다.선차의식은 수행하는 이상으로 중국 선종에서는 중요시 여긴다.
왜냐하면 백장청규의 정신이 선다일미 속에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중국 선종에서의 차의 특징은 단순한 마시는 음료의 차원을 떠나 깨달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대중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방장 스님의 지도 아래 서로 공부했던 것을 탁마하는 자리를 선다의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 전통이 천년 전이나 그 이후에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보봉사 선다의식에서 만날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마조의 차정신이 중국 선승들의 동맥 속에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마조서강의 공안이 영상처럼 되살아나는 것은 그만큼 중국 정신사 속에 선차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마조선차는 두 가지 주류로 이어진다.
그 하나는 백장, 황벽, 남전으로 이어지는 중국 전통선맥이다. 이들 조사를 통해 백장의 백장청규로, 조주의 끽다거로 이어지면서 중국 차문화 속에 선다문화의 의미를 각인시켜 주었다
또 하나는 마조차맥의 신라 유입설이다.우리 선종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일곱 산문이 마조의 법맥을 잇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남전-마곡으로부터차맥을 이어옴으로써 신라 선종에 음다문화를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차향 등이 국왕 대신으로부터 내려졌고 고려불교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그 연원은 양자강 문화 즉 차문화이며 그 주역은 마조 도일 선사였다. 마조 선차는 중국 선불교를 떠받치는 힘이며 그 정신은 마조의 개당도량 보봉사, 우민사, 그 법손의 도량인 백장사, 남전사 등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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