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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2장
제 2 장 레위 마태
[대 지]
一. 반신불수가 온전해짐(1-12)
二. 레위 마태를 부르심(13-17)
三. 의식과 새 생명 운동(18-22)
四. 안식일에 대한 교훈(23-28)
[본문강해]
一. 반신불수가 온전해짐(1-12)
. 2:1-2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예수께서 갈릴리 지방에서 전도를 마치시고 가버나움에 들어가셨다. 예수님이 집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들에게 도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기회 있을 때마다 생명의 도를 가르치고 전파하셨다. 오늘날 우리들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증거하기를 힘써야 한다.
. 2:3-4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일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고치려고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님이 계신 집에까지 왔으나 사람이 많아 예수님 앞에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병자를 침상채 달아 내렸다.
이것은 난관을 돌파하는 신앙이다. 예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자에게는 난관이 있다. 그 난관을 돌파하고 끝까지 나아갈 길을 찾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다. 그러나 찰 수 없다고 도중에 포기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도 길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 잠언26:13-14에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고 했다. 게으른 자는 이런 저런 핑계를 하면서 예수님 앞에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께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찾게 해주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게 해주신다.
. 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 라"고 말씀하셨다.
저희의 믿음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네 사람의 믿음을 말한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으며 예수님께 나아가면 반드시 예수님이 구원해 줄 것을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께 나아가기를 힘쓰고 난관이 있을 때 끝까지 그 난관을 돌파하고 나아갔다.
그 난관은 사람이 많이 둘러 있어서 예수께 접근할 수 없는 것이고, 지붕 위에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병자를 달아 내리운 것은 난관을 돌파하는 신앙이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아무리 방해물이 많고, 길이 막혔을지라도 잘 찾아보면 반드시 나아갈 길이 있다. 그 길을 연구하고 힘써 찾으면 찾을 수 있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힘써 찾을 때에 마침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지붕을 뚫고 그 병자를 침상에 달아 내림으로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기의 피로 구속을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는 권세가 있다. 예수께 나아갈 때에 이 중풍병자는 몸만 나아간 것이 아니고 마음도 나아갔다. 그러므로 예수 앞에 나아가서 예수님을 볼 때에 마음이 서로 통하고 심령이 예수님과 더불어 교통하게 되었다.
그 중풍병자는 예수님을 그리스토로 믿고 사모하며 그에게 나아가면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다. 그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히브리서11:6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였다. 중풍병자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고 예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얻었다. 이 새 생명은 죄 사함을 받은 결과로 얻은 것이다.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을 얻으면 영적 평안과 즐거움이 넘치게 된다. 누구나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께서 좋은 것을 아끼지 않고 풍성하게 주신다.
중풍병자가 세상에는 소망이 없는 것을 알고 오직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나아갔다. 중풍병자는 그 병 때문에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찾을 마음도 생겼고, 어떠한 난관이 와도 그것을 극복하고 나아가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또 자기 혼자 힘으로 나아가지 못하여 여러 사람이 협력하여 나아갔다. 이 네 사람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거나 친척, 혹은 친구들일 것이다. 그 네 사람들도 이 중풍병자를 고쳐 보려는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다른 방법으로는 고칠 길이 없었으므로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8:17)라고 하였으므로 그리스도가 오시면 병을 고쳐 주실 것을 확실히 믿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도 그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귀한 신앙을 갖게 된 것이다. 중풍병자 때문에 그의 가까운 사람들(메고 온 사람들)까지 믿음을 갖게 되었다.*
. 2:6-8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않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참람하도다 참람이란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언동을 하거나 하나님께만 합당한 언동을 피조물에게 돌리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말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 외에는 죄 사하는 권세가 없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주제 넘는 말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 2: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일어나 걸어가라"하는 말보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이 더 어렵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본문의 내용은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보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이 더 쉬운 말이다. 왜냐하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려고 중풍병자를 일어나 걸어가게 했기 때문이다. 걸어가게 하는 것은 인자가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는 증거이다. 만일 걸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면 쉬운 양은 했지만 어려운 것은 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려운 것(걸어가는 것)을 하면 쉬운 것(죄 사함)은 당연히 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가 병이 나아서 "일어'나 걸어간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된 증거이고 죄 사함을 받은 결과이다.
병은 대개 죄 때문에 난다고 볼 수 있다. 삼십 팔 년 된 병자는 죄 때문에 병이 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 준 후에 더 중한 병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이다(요5:14 참조). 그러나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소경은 죄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이라고 했다. 이 경우는 특별한 예외이며, 대개는 죄 때문에 영이 난다고 보아야 한다. 야고보서5:3-16에 죄 때문에 병든 줄 알고 병든 자를 위하여 서로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였다. 벌든 자는 자기 죄로 인하여 병이 난 줄 알고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을 찾아 회개하고 그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들도 그를 위해 기도할 때 서로 자기 죄를 고하면서 기도해야한다.
. 2:10-11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길 걸_어가라" 하실 때에 그 사람이 순종하여 벌떡 일어나 집으로 걸어갔다. 이것을 보면 중풍병자가 믿음이 아주 좋은 사람이다. 38년 된 병자에게도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요5:8). 병이 나서 누워 있던 침상을 그대로 놓아두면 그 자리에 다시 누울 염려가 있다. 그러므로 병이 나서 누워 있던 침상을 가지고 가서 버려야 한다.
이는 예수 믿는 사람이 과거에 병자 노릇하던 그 환경과 분위기를 정리 정돈하여, 끊어 버릴 것은 끊어 버리고 없애야 할 것은 없애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그러한 자리에 들어 갈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과거에 심령이 병들었을 때에 사귀었던 친구나 나쁜 습관들을 다 내어 버려야 은혜 가운데서 계속 달음질 칠 수 있다.
. 2: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너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실 때 중풍병자가 반드시 그대로 될 것을 믿고 순종하니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겨서 일어났다. 이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때에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기쁘고 즐거운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큰 권세를 하나님이 주셨다"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을 보면 어려운 일(걸어가는 일)을 하였으니 쉬운 일(죄 사하는 일)도 예수께서 능히 하실 수 있음을 친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二. 레위 마태를 부르심(13-17)
. 2: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예수께서 어디에 계시든지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친국 복음을 가르쳐 주셨고 영적 형을 고쳐주는 표적으로 육신의 병을 고쳐 주셨다.
.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태복음9:9에는 레위를 마태라고 하였다. 마태가 예수 믿기 전의 이름은 레위이고, 믿은 다음에는 마태라고 불리운 것 같다. 베드로도 예수 믿기 전에는 시몬이었으나 믿은 후에는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가졌다. 마태는 당시에 그 지방의 세금을 받는 세리였다. 그러므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좋은 직장을 가졌으나 예수님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실 때에 그 직장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아가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마태가 예수님의 우수한 제자가 되어 마태복음을 기록할 수 있었다.
. 2: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부름 받은 레위는 너무 기뻐서 자기 집에서 잔치를 하였다. 예수님을 손님으로 청하고, 또 자기 친구들도 많이 청하였다. 마태의 친구들은 대개가 세리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마태 한 사람이 회개하고 따라오는 것을 기뻐하셔서 초대에 응하여 같이 음식을 잡수셨다.
. 2: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질문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를 창기와 같은 죄인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참 도를 말하는 선한 선생님(예수님)이 어찌하여 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고 힐문한 것이다.
.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쏠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의원은 병자의 병을 치료하여 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병이 없고 깨끗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다. 의원이 병든 자에게 필요한 것 같이 예수님은 죄인에게 필요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죄를 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三. 의식과 새 생명 운동(18-22)
. 2: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을 자주 한 모양이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식하는 절기를 정해 놓고 일년에 네 번씩 금식하였다(슥8:19 참조).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므로 그 이유를 예수님께 물어 보았다.
. 2:19-20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나니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혼인집 손님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신랑을 빼앗길 날은 신자가 예수님을 빼앗길 때를 가리킨다. 금식을 의식주의로 자주 하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치 않다. 금식하는 목적은 자기의 목소리를 하나님께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다(사58:3-5 참조). 그러므로 이 목적을 떠나서 절기마다 금식하고, 또 남이 금식하므로 자기도 금식하는 것은 의식주의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신랑과 같이 즐거워하고 교제하며 새 생명의 세계에서 살기 때문에 금식할 필요가 없으며 신랑을 빼앗길 때에는 금식하면서 신랑을 다시 찾아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자기 목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할 때에는 부르짖으면서 금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
. 2:21-22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금식에 대한 답변을 하시면서 두 가지 예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①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욱 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②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 한다고 하였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팽창할 때에 부대가 터져서 부대도 버리고 포도주도 버린다.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의문과 의식주의를 가리킨다. 로마서7:6에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지니라"고하였다. 그러므로 의문과 의식주의는 묵은 것이다.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진리와 영감으로 하는 새 생명 운동으로 성도들의 영혼을 살려 나가는 신령한 운동이다. 영을 살리는 영적 역사는 새 것이므로 이것을 묵은 의식주의 속에 넣으면 안 된다. 요한복음6:63에"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하였다. 영의 운동을 의문과 의식주의 속에 넣어 두면 영적 운동이 실패되고 의식주의도 제대로 안 된다.
교회는 영을 살려 나가는 일을 하는 곳인데, 교회가 세상주의와 인본주의와 의식주의로 나아가게 되면 영의 운동도 되지 않고, 세상주의나 의식주의 운동도 되지 않는다. 교회가 의식주의 속에 빠지면 영적 운동을 할 수 없다. 영이 의식에 얽매어 제재를 받는다면 영의 역사가 중단된다. 영이 자유롭게 진리와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날마다 장성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새 부대는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롬7:6, 히8:13 참조). 우리의 중생한 영이 말씀과 영감 속으로 들어가야 우리의 영적 생명이 점점 창성하고 생명의 역사가 커 나간다. 교회를 외부적으로 부흥시키기 위하여 의식주의와 인본주의로 나아가면 영적 생명 운동이 안 된다. 교인이야 많든지 적든지 진리를 바로 밝히고 한 사람이라도 바로 세우고 영을 살려 나가는 교회가 되어야 참 빛의 등대가 되는 것이다.*
四. 안식일에 대한 교훈(23-28)
. 2:23-24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실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은 일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따져 물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대한 세칙을 정하여 지키고 있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오리(2㎞) 이상 걸어가면 죄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밀 이삭 잘라먹는 일까지 정죄하고 나선 것이다.
*안식일에는 식물을 준비할 수 있다고 했고(출12:16), 또한 신명기23:25에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시장하여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은 율법에 어긋남이 없으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 2: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들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성경으로 답변하였다. 다원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하여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었다. 이는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여호와께 묻고 허락을 얻어먹게 한 것이다(삼상22:3-6).
. 2: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랑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어 지키라고 하신 것은 사람에게 모든 복을 주기 위함이다. ①하나님의 신령한 안식에 참여하는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요, ②장차 올 안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며 그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시키기 위함이다. ③안식일을 지정으로 그리스도와 깊이 사귀며 영적 평안을 얻고 영적 양식을 공급받아 영을 살려 나가기 위함이다. 이러한 자리에서 터나 사람이 안식일 규례에 종노릇만 하는 것은 안식일을 주신 참된 목적에서 이탈된 것이다.
. 2:26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안식일을 주장하신다는 뜻이요 그리스도 안에만 참된 안식이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을 받아 그 안식 세계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안식을 받지 못한 자는 아직도 안식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다.
성도가 영적 안식을 누리면서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한다. 김 현봉 목사님은 어떤 과부 교인이 찾아 왔을 때에 그 과부에게 "요사이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며 사느냐"고 물어 보셨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안식을 누리고 있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고 있으면 과부일지라도 남편보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낙원에서 사는 사람이다(사56:3-7).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면 아무리 세상에서 모든 것을 풍성히 가지고 일평생에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했다고 할지라도 헛되고 헛된 것이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부귀와 영화가 극치에 달하였으나 지내고 보니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라고 했고,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서 수고하는 중에서 영적 안식을 누리는 것이 참된 복이다. 전도서5:18에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 복이로다"라고 했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에서 부요하게 살든지 가난하게 살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안식을 누리며 영적 낙원에서 사는 생활을 해야겠다. 만일 현재 영적인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영원한 실패이다.
성도가 영적인 안식만 주장하여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면 잘못된 것이다. 성도는 영적 안식에 참여하는 동시에 안식일의 규례도 지켜야 한다.
구약 시대에는 안식일이 토요일이었으나 신약 시대에는 주일로 변경되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는 쉬셨다. 구약 시대에는 칠일 안식일을 지켰으나 오랜 후에 다시 다른 날을 정하여 이레 중 첫날에 안식을 지키게 하였다(히4:7-10 참조). 토요일에 지키던 옛 계명이 연약하여 폐했다고 하였다(히7:18).
새 계명이 되는 주일에 예수님이 부활하셨고(마28:1), 부활 후에 7차 주일인 오순절 날(부활 후 49일째) 즉, 주일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고(행2:1), 주일에 성부께서 묵시를 주셨다(계1:10). 그러므로 주일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합하여 새로운 생명과 말씀과 은혜를 주시는 날이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에 지키던 안식일(토요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일(일요일)을 지켜야만 제 4 계명을 바로 지키는 것이다.
구약의 안식일이나 월삭, 절기들을 그림자요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골2:16 참조), 구약의 모든 제도는 그림자이고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어 놓은 것은 실체이다. 예수님이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이 옳다. 사도들도 주일을 지켰다(고전16:2, 행20:7).
"주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안식의 표징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려고 강제로 주일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더 좋은 안식 세계를 예비하여 놓고 그 안식을 주기 위하여 주일을 지키라는 것이다(출31:13 참조). 따라서 주일에 일하면 안 된다. 네 자녀나 남종이나 여종도 일하지 말며 문안에 유하는 객일지라도 일하지 말라고 했다(출20:8-11 참조). 이 날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쉬신 날을 기념하는 동시에 영적 안식을 받기 위하여 지키는 것이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심령 속에 안식을 받고 생명의 말씀을 받아 한 주일 동안 안식을 누리면서 그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또 앞으로 영원한 안식이 올 것을 보여 주는 날이다. 현재에도 주님이 주시는 영적 안식에 참여해야 하고 동시에 앞으로 천년 왕국과 영원한 하늘 나라가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믿고 그 세계를 바라보며 그 소망을 이루어 나아가면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성도가 주일에 교회에 나오면서 돈을 내고 버스를 타면 죄인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한 방편으로써 버스를 타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주일에 사사로운 일을 보기 위하여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은 죄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심방하거나 구제하거나 사람의 생명을 살려내는 일은 주일에도 할 수가 있다. 그 외에는 주일에 일하면 죄이다.
주일을 지키는데 있어서 외부적인 면과 내적인 면이 합하여 조화를 이루어야 완전하다. 나무가 살려면 나무 껍질도 성하여야 되고 나무의 속도 살아야 한다. 만일 나무의 속만 중히 여기고 껍질은 필요 없다고 하여 벗겨 버리면 그 나무는 죽고 만다. 영적 안식만 중히 여기고 외부적인 면을 무시하면 안 된다.
성도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여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율법 폐기론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나무 껍질은 필요 없다고 다 벗겨 버리는 사람과 같다. 내적인 안식 세계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율법적으로 외부적 면만 지켜야 된다고 주장하면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나무의 속은 다 죽어 생명이 없는데 껍데기만 잘 유지하겠다는 사람과 같다.
주일은 육신이 쉬는 날이 아니고 영혼이 쉬는 날이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쉬어야 되겠는데 예배당에 나가면 여러 시간 예배드리기 때문에 피곤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다. 영적인 안식 세계에 들어가면 그 심령이 기쁘고 즐겁고 위로가 와서 육신의 피곤함도 없어진다. 토요일까지 죽어가던 사람이 주일날 교회 나와서 은혜 받고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여 영이 살고 육체도 건강해지는 수가 많이 있다. 주일은 하나님이 특별히 안식의 은혜를 주시는 날이다. 그래서 십계명의 중심 계명이 안식일에 관한 계명인 네 째 계명이다. 그러므로 주일을 범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거기에 관한 모든 은사를 내어버리는 사람이요, 진주를 발로 밟는 돼지와 같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