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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태의 은혜
주제 : 은혜, 겸손, 부르심
성경 : 마 10:2-4, 요 13:29, 마 9:9-10
예배 :
장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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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ucture A. 은혜의 크기 (마 10:2-4) “세리 마태” B. 변화된 삶 - 진정한 겸손 (요 13:29)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C. 오직 예수! (마 9:9-10)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
Introduction
- ‘이미지 과잉시대’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은 대부분의 인식 왜곡이 상업적인 의도를 지닌 광고 부분에서 오는 것이 많듯이, 한 번 강렬한 이미지가 부여되면, 그 다음에는 그 이미지를 기준으로 개념이 형성되고 마는 것이다. 그때부터 판단력이 흐려지고, 개념이 왜곡되어서 그 본질 보다는 이미지의 느낌만이 개념의 근저에 남게 되는 것이다.
가끔 성경을 읽을 때에, 이러한 ‘이미지 과잉’의 부작용을 경험할 때가 있다.
많지도 않은 세리에 대한 성경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어떤 고정관념으로 인식이 되어버려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리에 대한 개념은 실제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셈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사회에서 세리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세리와는 실제로 완전히 다른 인식의 사람들이었다.
- 그런 세리였던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마태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다. 마태는 사실 숨겨져 있는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면, 참으로 밭에 숨겨진 보화와 같은 귀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가 받아 가지고 있던 은혜가 무엇인가,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은혜는 무엇인가?
오늘은 숨겨져 있는 마태의 은혜를 배우자!
1st DT A. 은혜의 크기 (마 10:2-4) “세리 마태”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3)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4) 가나안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
Explanation
* - 마태의 전직은 우리가 아는 대로 세리였다. 그리고, 예수의 12제자 명단은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그러한 공식 명단에서, 마태에 대하여 다른 두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결코 마태의 전직을 언급한 적이 없다.
복음서나 사도행전은 훗날 예수님의 승천 후 최소 30여년 이상이 지나서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책이다. 그때는 교회에서 12사도의 위치가 절대적으로 높여져 있던 시점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외의 다른 세 책,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단순히 마태라고만 소개하였다.
그러나 3절을 보면, 자신이 기록한, 적어도 자신의 공동체 교회에서 만들어지고 읽었던 마태복음서에서 마태는 분명하게 자신을 “세리 마태”라고 소개한다.
- 왜 그랬는가? 여기에 마태가 받은 은혜가 숨겨져 있다.
세리는 어떤 신분인가?
매국노요, 자신의 부를 위하여 신앙적인 배신을 한 자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동족을 피빨아 자신의 부를 축적한 자이다.
그래서, 같은 동족으로부터 멸시, 소외를 당하였으며, 당시 유대인의 회당에서 절대로 출입불가한 사람 중 하나로 세리를 지정하였다. 당연히 공식적으로 유대교에서 출교당한 자였다.
그렇게 유대인들이 절대적인 죄인으로 여기는 그런 신분, 그런 죄인의 신분인 세리 칭호를, 그것도 교회의 12사도의 공식 명단을 기록할 때에 그런 공식 명단에다가 자신의 이름 앞에 적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으며 해결받을 수 없는 죄악과 번민, 고독의 상태에 있던 자였던가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 - 마태는 알았다. 그런 세리였던 자신이 12 제자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은혜이다. 마태의 은혜는 여기서 더욱 그 크기가 커진다. 자신의 죄의 무게가 어떤지 아는 마태는 그만큼 주님이 불러주신 은혜가 더욱 커지고, 그 은혜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진 것이다.
그가 정작 세리였던 시절에는 그가 자신을 결코 세리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창피함을 넘어서서 동족의식이 강한 유대인 사회에서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직업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참담한 양심의 파괴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가 변화받고 나서는 바로 그가 받은 은혜가 드러나게 된다. 변화받고 나서는 그는 자신을 세리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변화받은 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된다.
그의 은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 죄를 인정하는 만큼 은혜는 크게 느껴졌다.
이것은 오직 은혜였다.
Illustration
- 똑같이 빚을 지고 있다가 그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은혜를 받았더라도, 그 받은 바 은혜의 크기와 무게는 서로 다른 법이다. 그것이 얼마나 죄송스러운 일인지 느끼는 만큼 받은 은혜의 크기도 서로 다른 법이다.
오늘날 하나님 앞에서 그 은혜를 깊이 깨닫는 자는, 자신의 죄성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은혜가 무엇인지 그 깊이가 다른 법이다.
- 사도바울을 보라 - 그는 자신이 죄인중에도 죄인 중의 괴수라 하였다.
여러분,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
마태는 이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늘 마음에 느끼고 사는 제자였다....
- 마태는 계속해서 자신을 마태라고 부른다.
마태복음서에는 자신을 레위라고 지칭하는 언급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레위는 유대식 이름이고, 마태는 헬라식 호적 이름이다(헬라식 호적 이름이라도 그 이름 자체는 히브리식 이름을 헬라말로 음역한 것이다).
그가 출교당할 때 이미 그의 유대식 이름은 거의 무용지물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복음서들은 마태의 변화된 모습을 인정하여 그 본디 유대식 이름, 레위로 불러주었다. 그러나..그는 헬라 호적식 이름, 마태로 자신을 고집하여 불렀다.
이유는 레위라는 이름은 '가깝다, 연합하다, 하나님과 친한' 것을 말한다.
반면에,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의 선물,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하나님의 선물이요..자신 같은 자가 하늘 나라의 기초석이 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자신의 신분과 비교해 볼 때 갚을 수 없는 은혜임을 깨달았다.
- 그것은 다른 말씀이 아니다. 바로 나같이 죄 많은 인간이 그 죄 많음을 기억할 때 그 은혜가 더 크게 느껴져서 우리는 아무 말 할만한 입장이 못되는 낮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의 처지와 기도가 바로 마태의 처지와 기도가 아니겠는가!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그가 오히려 바리새인보다도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
Application
- 은혜받은 자는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인정한다.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는다.
거기서 은혜가 시작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 은혜에 머물며 살게 된다. 언제나 그 은혜가 너무나도 귀한 것이어서 자신이 하는 모든 사역의 동기가 된다. 주를 위하여 무엇이든 하리라! 내가 아무리 내 인생을 다하여 수고하여도 그 은혜는 절대로 절대로 다 갚을 수 없다.
과거만 그러한가? 아니다. 지금도 나의 죄성은 나를 존재케 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는 잊을 수 없다.
- 헬라말에서 죄라는 말은 본디 '빚'이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만 빚진 자일 뿐이다. 그 빚의 크기를 우리는 안다. 우리의 과거로부터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런 점에서 그 빚을 다 갚지는 못한다.
우리는 모두 다 각자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러나 그 존귀함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인정해 주시고, 나를 불러주신 그 하나님의 존중 때문에 존귀한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다.
- 나는 죄인이었다. 그 죄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그러나 그 은혜는 남는다! 그리고 그 은혜 때문에 빚진 심정이 남는다.
이것이 마태의 은혜였다. 마태는 그 은혜를 기억하였다!
때로, 힘들고, 고난 속에서 불평이 나올때는 기억하라! 내가 진 빚은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었고, 그리고 그 무게는 내 생명을 다하여서라도 갚지 못할 무게이다. 여러분의 은혜의 크기가, 그 무게가 거기서 시작되고 느껴지기를 바란다.
Transition
이제, 마태의 또 다른 숨겨진 은혜를 보자!
2nd DT B. 변화된 삶 – 진정한 겸손 (요 13:29)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
Explanation
-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기초교육 말고도 고등교육까지 받은 사람이 둘 있었다. 하나는 마태이고, 또 하나는 유다였다.
마태는 세리로서 고등교육을 받았고, 유다는 가룟 지방에서 고등교육을 받았다. 당시 돈 궤를 맡는 정도의 셈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고등교육에서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고등교육을 받았어도, 자신은 세리였다. 마땅히 제자들의 무리에서 돈 궤를 맡는 일, 곧 회계의 일은 자신이 유일한 최고 적임자였다. 그러나 오늘 요한복음 13장 29절에는 유다가 그 일을 맡았다고 한다. 제일 적합한 마태 자신이 아니라 가룟 유다가 회계를 맡았다.
* - 회계는 신임과 능력의 자리였다.
아마도 견주어볼 때 회계는 신임과 고등교육,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 직책을 유다가 맡았어도 정작 세무사요 회계사였던 마태는 자신이 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고, 그 신임의 자리를 유다가 맡아도 어떠한 일도 없었다(이런 빌미가 있었다면, 복음서의 기록 성향상 충분히 교육자료로서의 소개감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바로 최고 적임자인데 남이 그 자리를 맡으면, 종종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그것이 엘리트 교육 수료자로서 얻은 라이센스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치가 이런데도, 마태는 이 일로 갈등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볼 때 유다는 이 직책에 합당한 자였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는 마태가 더 적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개의치 않았다.
➜ 마태는 훗날 자신의 변화가 어떠한 은혜 때문인 줄을 잘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는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주신 직분을 감당한 사람이었다.
Illustration
- 은혜받은 자가 나타내는 진정한 겸손은 무엇인가?
진정한 겸손은 말이나 겉모습에 있지 아니하다. 진정으로 은혜 받은 사람은 나의 형제를 은혜로 대접하는 사람이다.
왜? 나도 쓸만한 것이 없는 사람인데 주님이 불러주시고 은혜로 이끄신 바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도 비록 나보다 못하지만 은혜로 그를 낫게 여긴다.
내 생각이 가장 옳을 것 같아도 때로는 아니라고 접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죄성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은혜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에게도 은혜로 대접한다. 자신이 받은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좋게 쓸만하게 보셨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쓸만한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남도 자격이나 조건으로 보지 않는다. 은혜로 본다.
Application
- 남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들 때에라도 언제나 은혜로 대접하라!
그러한 일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실행되어야 하는 법이고, 그 겸손은 바로 마태와 같이 은혜 받기 전의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다른 이들을 은혜로 대접하는 것은, 그들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의 발로가 실현되는 일이다.
- 반면에 남을 자신보다 ‘낮게’ 여기는 태도는 은혜가 아니라 율법주의적인 태도이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교만의 발로이며, 그것이 드러난 현장인 것이다.
교만은 바로 자신의 죄성을 잊은 사람들이 보이는 행태이다. 그것은 은혜의 정반대의 길이다. 그러니 절대로 절대로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낮게’ 여기는 태도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죄성의 무게와 그것을 생각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의 삶이다.
자신이 누리는 은혜만을 위해 은혜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나누도록 주어진 것이다.
은혜 받은 삶을 연습하라.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그들의 간책을 실행할 것이다.
Transition
다시 마태복음 본문으로 돌아와서 마태가 받아 누리고 있던 또 다른 은혜를 살펴보자. 마 9:9-10을 읽자.
3rd DT C. 오직 예수! (마 9:9-10)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
Explanation
* - 이것은 마태가 부름받는 장면의 기록이다. 이 짧은 두 구절에는 참으로 귀한 은혜의 열매가 숨겨져 있다.
잘 보아야 하는 부분이다!
오늘 본문만 가지고는 마태가 부름을 받았을 때, 어떠한 일을 한 사람인지 잘 알 수 없다. 오늘 본문만 따라서 살피자면, 그 이야기는 이렇다.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었고, 그리고 주님이 부르셨고, 그리고는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셨는데, 그 주위에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앉아 있었다.’
자, 다른 복음서에 이 장면을 기록한 부분을 비교해 보자!
누가복음 5:27-29을 보면, 이런 식의 기록이다.
‘레위라 하는 사람이 - 마태라는 이름이 아니라 - 세관에 앉아 있었고, 그리고 주님이 부르셨고, 그러자,
“저가 자신의 모든 것(=전 재산)을 다 버리고 일어나 주님을 좇았다!”
그리고는 레위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아주 큰 잔치를 벌여드렸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이 많이(많이) 그 집에서 와서 (초청받아서) 함께 먹었다.‘
- 당시 로마 당국은 유대인 세리에게 일정한 세금만 받으면, 세리들이 얼마를 더 세금으로 붙여 받은지는 상관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리가 세금 징수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군병들을 붙여주기까지 하였으니, 이 세리들은 대부분 엄청난 재산가들이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부르셨을 때 마태는 자신의 그렇게 많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예수를 좇았던 사람이다. 그것은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고 예수를 좇았다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예수의 부름을 받은 것을 기뻐하여 ‘큰’ 잔치를 벌였는데, 그곳에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있었으니, 그들이 마태의 초청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 여기에는 전적인 헌신, 전적인 결단, 전적인 사역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마태는 자신의 이러한 자랑스러운 변화나 업적에 대해서는 무덤덤하다시피 할 정도로 객관적인 사실만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는 말도 없고, 세리나 죄인들은 그저 마태의 집에 있었다는 정도의 언급만 나온다. 마치 잔치에 초청을 한 것이 아닌 양, 그저 그 자리에 예수님과 함께 세리와 죄인들이 있었다는 사실만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은 마태가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벌이고 그곳에 자신의 동료인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을 초청하여 자리를 만든 것인데도 말이다.
- 왜 자신의 극적인 변화를 기록하여 후세대에 은혜를 끼치려 하지 않았는가?
그는 이 사건을 기록하는 장면에서 자신이 드러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받은바 은혜로 다른 이들에게 끼칠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훌륭함이 드러나게 되면, 그것은 자칫 이 세상 구원의 주인공인 예수님이 가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베푼 은혜의 주인공 만이 드러나게 하고 싶었다!
Illustration
- 이제 더욱 잘 비교해 보라!
다른 세 복음서 -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는 각기 그 저자 자신의 의견, 자신에 관한 기사에 대한 주관, 또는 숨어있는 의견이나 암시 등이 자연스레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마태는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자기 이름으로 어떠한 의견이나 주의주장도 기록되지 않은 제자였다. 마태는 사복음서 어느 곳에서도 한 번도 입을 연적인 없는 몇 안 되는 제자이다. 요한복음에서 마태는 아예 그에 관한 기록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그런 제자가 비록 여럿이라 하더라도).
- 예를 들어, 요한은 자신이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였다는 사실을 은연중 나타내고, 마가는 청년 마가를 암시하는 기록을 남겨 두었다. 누가는 아예 자신이 그 복음서의 저자임을 나타내며 누가복음을 시작하고 있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까지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책을 쓰다보면 자연스레 자신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서에는 그러한 사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저자로서 마태에 관한 기사조차도 전혀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기술한다.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 복음서라고 하는 책의 목적상 오직 자기를 불러주신 예수님만이 드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Application
-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을 돌이켜 보자. 종종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은 우리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일부러 내놓는다면 그것은 은혜가 무엇인지 잊은 사람일 것이다.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 은혜의 주인공 오직 예수님만 나타내고 싶을 것이다.
- 우리는 종종 받은바 은혜를 나타낸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간증에 머물때가 많다. 그러면,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다.
내가 무엇인가 기림받을 만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 때문이다. 따라서 드러나야 할 존재는 오직 예수님 뿐이다.
- 내가 무엇인가 기여한 공로가 있다면, 그것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 덕분이다. 내가 만일 무슨 조그마한 재주나 달란트가 있다면, 그를 베푸신 주님의 은혜이다. 내가 만일 무슨 사역을 감당할 만한 일군이 되었다면, 이것이야말로 그 수많은 죄와 빚에도 불구하고 나를 일군으로 삼아 불러주신,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오직 주 예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일 뿐이다.
Conclusion
- 우리의 온 몸과, 그 하는 일과 그 삶에서 오직 예수님만 드러났으면 좋겠다. 사람의 냄새가 아닌, 그리스도의 향기만이 우리 교회에 은은히 퍼져 나가기를 바란다.
- 고전 15:10은 그 고백을 들려준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참고 : 이 부분은 해당 성경 본문과 관련된 추가 이해나, 또는 설교 본문의 방향을 보강하거나, 또는 다른 방향의 인사이트를 제공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의 내용을 중심으로 설교의 초점이나 방향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 - 마태복음 외의 다른 두 공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경우는 명단 기록이라기보다는 열거에 가깝다)에서 12사도의 명단을 기록할 때에 마태 앞에 ‘세리’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또한, 12사도의 명단을 기록할 때에는 세 공관복음서 모두 ‘마태’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그 명단은 공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부르심을 받는 기록에서는 모두 마태복음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태를 레위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전직이 세리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 부르심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는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 마가복음이 공관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기록이 되었으므로, 마태의 부르심에 대하여 마가 공동체가 읽게 되었던 본문이 초대교회의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 및 이해였을 것이다. 그 뒤로 누가 공동체에서는 마태의 부르심에 대한 그의 반응을 좀 더 크게 높여 강조하였다. 막 2: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눅 5: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마 9: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헬, ‘그’)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 예수님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공식 언어인 헬라말을 따라서 유대인들은 보통 히브리식 이름과 헬라식 이름 두 가지를 가진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즉 본명은 히브리 이름으로 사용하고, 호적 이름은 헬라 이름으로 등록한 것이다. 시몬은 히브리말 이름, 베드로는 헬라말 이름이며, 다비다와 도르가, 사울과 바울도 같은 경우이다. 하지만 마태라는 이름은 본디 헬라말이 아니라 히브리 이름, ‘맛단’, 또는 ‘맛다냐’를 음역하여 그대로 옮겨 호적한 헬라식 이름이라는 점에서 다른 경우들과 차이를 지닌다. - 다메섹과 갈릴리와 지중해를 잇는 무역로 가운데 있던 가버나움에는 규모가 큰 세관이 있었다. 마태는 이곳에서 세관으로 있다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당시 로마의 ‘앞잡이’로서 세리의 포악함에 대한 일례는 바로 관세와 같은 경우였다. 로마가 정해 준 관세는 2.5% 수준이었지만, 문제는 그 관세 부과 대상의 값을 세리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세관에서는 본디 물품 값을 열 배로 과잉책정하고 그것의 관세를 2.5% 부과하여 사리를 채운 후에, 본디 물품 값에 대한 세금만 로마 당국에 내면서 축부를 한 것이다. 로마 당국은 이러한 사실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받을 세수만 확보되면, 식민지 국민의 원망을 그런 식으로 모르는체 하며 정리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정해진 관세 이상의 세금을 세리가 받아도 눈감아주기도 하였다. - 마 10:3의 ‘다대오’는 베자 사본과 같은 고대 다른 사본에는 ‘레배오’(Λεββαῖος)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좀 더 후대의 다른 사본들에는 이러한 불일치를 설명하려는 듯이 보이는 ‘레배오라 불리는 다대오’라는 본문도 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시내산 사본, 바티칸 사본 등의 더 권위있는 사본을 따라서 단순히 ‘다대오’라고 보는 것을 따르고 있다. |
※ 본문 살피기 : 이번 주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레위라 하는 마태에 관한 성경의 여러 기록을 비교하면서 그의 신앙과 삶에 대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음의 질문들을 통하여 본문을 미리 살펴보시지요. - 마태복음 10장 2절의 열두 사도의 명단에서 마태는 그의 직업이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 요한복음 13장 29절을 보면, 예수님과 12사도 무리의 회계를 맡은 것은 누구라고 합니까? - 마태의 직업을 생각해 보면, 12사도 중에 실제 회계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누구였습니까? - 마태가 부르심을 받는 기록인 마태복음 9장 9절과 누가복음 5장 27-28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마태복음 본문에는 없지만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 마태의 부르심을 기록한 또 다른 본문인 마가복음 2장 14절을 찾아보십시오. 그곳이나 누가복음 5장에서도 마태의 이름은 마태복음과는 달리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습니까? - 또한, 마태복음 9장 10절과 누가복음 5장 29절도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게 된 것은 그가 어떻게 하였기 때문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