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진 강
향일암에서...
밥알이 동동 떠 있는 청주 한 사발에다 잘 익은 돌산 갓김치를 척 베어 삼키니 빈속이 짜르르 하다, 식은 밥이라도 있다면 한 그릇 후딱 해치울 것 같다, 뜨뜻한 취기가 알맞게 번져 온다, 좁던 시야가 망망대해처럼 훤하게 넓어지고 잔잔한 한려수도가 포근하게 다가온다, 이 기분으로는 비단결같은 바다에 풍덩 빠져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기분 좋은 어지럼증으로 모두가 그윽해 보인다.
고요한 남해 바다를 바라보니 무언가 자꾸 망각하고 싶다. 뭔가 생각날것 같기도 하고 잊으야 할 것도 없는데 잊어 버리고 싶다. 내 속에 들어앉은 부질없는 갈증 때문일까, 시야에 안착시킨 망원렌즈로 펼쳐지는 너른 물결은 더 이상 나의 넓은 바다가 아니다. 우주의 섭리 앞에서 먼저 같은 인간이지만 두둑한 뱃심으로 바다를 무심히 바라본다,무엇이 내 육신으로 스며들었을까, 바라보고 선 하늘이 비단 방석인양 자리를 내놓는데 사양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남해는 내가 터 잡고 싶은 좌청룡 우백호다,
여수 돌산을 돌아 끝닿는 곳마다 봄눈 녹듯 마음도 녹아 내린다. 덩치답지 않게 멀미가 심한 바람에 어떤 시야도 배를 탄 듯 울렁거리지만 훤히 트인 청정한 바다가 손닿는데 마다 멀미를 털어 내주니 어진 혼이 겨우 제정신을 차린다, 슬쩍 비켜 가는 해풍, 풍성함을 일깨우는 갯내음, 떠오른 해를 향해 무심코 일어서는 물비늘, 모두가 자기를 낮추는 듯한 겸손의 물결이 천지에 가득하다.
어둠을 걷어 내는 밝음,오늘 하루도 새날의 의미로 묶어 두고 싶다. 일상을 일상답게 이어가고 시작이 있으므로 마지막이 있음을 서서히 깨달아 가는 하심(下心)의 극치 살아서 너불거리는 바다 속의 생명들이 해삼 오그라들 듯 탄력이 붙어 호흡 한 번으로 천지의 바닷물을 다 빨아 들이킬 수 있는 이 넘치는 자신감,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오르더니 머리속이 햐얘진다.뭔가를 비운다는 것이 이런 순수함을 맛보게 하는 것임을 진작 알았지만 텅 빈 공간의 가벼움이 이처럼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인 줄 미쳐 몰랐다.
동산만한 바위를 돌아 돌팍 사이를 헤집고 원효가 수련햇다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니 수많은 인적의 손 때가 절절이 묻어 반질거리는 바위들이 곳곳마다 간절한 염원을 위해 구석구석 욕심을 버섯처럼 키우고 있다. 우후죽순 같은 몰상식들이 군데군데 고개 쳐들고 있어 안타까움이 발돋움 한다. 길 닿는 곳마다 끝도 없는 군상의 행렬 때문에 흙 길이 아니라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길이 되었고 바위를 오르느라 맺히는 땀방울을 한려수도의 부드러운 해풍에 금방 말라 버린다.
소리소문에 꼬리표를 달았는지 사시사철 기도하는 절이 아니라 벅적거리는 인연들로 작은 사찰은 몸살을 앓는다, 팔순의 노보살이 용케 참선을 하고 있어 그 위력이 가히 짐작 밖이다, 짜드락 땅뙈기에 아슬하게 버틴 암자와 해맑은 동자승,세상의 때가 너무 많이 묻어 안타까움이 더하는데 보살의 명상은 암자의 체면을 당당하게 지켜주고 있다, 벌떼처럼 밀려와 몇푼의 지전을 보시함에 넣고 당당하게 걸어나가는 적선군자들, 그 속에 내가 끼여 있는 데도 잠시 잊어 버리고 한 발자국 물러선 듯 초인인양했으니 그 어리석음이야,
은가루를 부어 놓은 듯한 바다를 바라보며 좌중한다, 격 없이 일어나는 물결 위에 열두 신장을 불러모아 할말을 털어놓으려고 새로 산 립스틱으로 부적을 그린다, 욕망처럼 매달고 다니던 부픈짐을 걸망 벗듯 훌훌 벗고는 아무데 퍼질고 앉아 무릎장단을 친다, 지는 해를 향일암에다 잠시 멈추게 하고 밝음을 구석구석 퍼지게 비껴 않는다,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는 해풍을 무릎꿇게 해놓고 막무가내로 덮친다, 대우주를 겁탈한 죄는 몇 년의 실형을 받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했다는 결국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내 삶의 무게를 알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고 싶던 말 언제 다 내뱉아 버렸는지 가뿐해진 육신은 종이 한 장의 무게다. 우주 속에 점 하나로 양귀비꽃즙에 발목 묶이는 마약중독자가 이만할까. 대자연은 환상 그 이상이며 말 못 할 속박이다. 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지금 거북이가 겁없이 사천왕 앞을 지나가도 누구하나 나무랄자 없다.
먼 곳 수평선에다 눈을 꽂는다. 현기증이 향일암 대웅전과 나머지 풍광들은 주먹만하게 줄여 준다, 눈 안에 들어오는 것 모두가 제자리에 있는것이 없을 정도로 세상 물체가 다 하얗다,지우고 싶은 것도 없고 아깝다 고 남겨 놓고 싶은 추억도 생각나지 않는다,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리는 것도 감추기 힘든 속내지만 가슴이 편치 않은 것만은 사실이니 토악질이 일어나다가도 서늘한 바람에 제정신이 든다. 멀리 보이는 화물적재함의 큰배들이 고사리 손으로 만든 종이배만 하게 보인다,슬쩍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만다.
돋는 해, 출렁이는 물결,미련 같은 것 남기지 않는 단정한 해탈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작은 착각들을 무슨 보물인양 안고 사는 미련은 언제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삶의 쉼표 하나 사이를 훌적 건너뛰지 못하는 어리석은 미련도 안타갑다.
암자의 법당에서 슬며시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노보살과 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스님네들, 좀 좋다는 소문에 와아 몰려드는 인파에 몸을 숨겼다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습들을 보니 좋은 풍광 앞에서는 총칼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요요한 곳에 그럴싸하게 앉혀 놓은 명물이 있다 하면 귀신같이 알고 떼거지로 몰려드는 여유도 나무랄 수는 없다. 눈요기로는 그저 그만이니 어쩌랴, 공부하는 스님들에게는 인간 ㅍ공해지만 비단폭 같은 남해를 바라보니 울컥 치솟는게 있다.
목젖을 꾹 눌러 갈길을 막는다.끈 떨어진 풍선이 하늘로 마구 도망간다. 헛손질을 해도 아무도 아는 척 하지 않는다. 제자리를 더 돈독히 지키기위해 풀어놓는 일, 살리기 위해 죽이는 일,본래의 자리를위해 슬며시 목젖을 도로 놓는다, 나 외에 내게 관심 가지는 자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 총총걸음으로 곳곳에 눈 점찍어 놓고 잠시 합장으로 호흡을 가다듬는다. 우주의 기운이 충만한 암자를 떠나면서 뒤뚱거리는 뒷모습 남기고 싶지 않아 발빠르게 걸어 나왔다.
반 눈뜨고 바라본 남해는 이태백의 시상(詩象)보다 못 할 리 없다. 원효대사의 숨결이 묻어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화쟁사상과 무애사상보다 못할 것 없다.이쯤되니 내민 배포가 풍선처럼 둥둥 떠오른다.잠시 잠깐 눈을감고 편안한 순간을 감사하며 줄줄이 이어진 돌거북의 행렬를 뒤로하고 암자를 내려왔다.
상술에 기어이 못 이긴 척 잘 익은 갓김치와 동동주 한 사발을 마신다. 술기운에 몸이 따습다. 향일암 경내를 벗어나는 길목마다 해풍을 마시며 자란 돌산갖을 사라고 장사꾼들이억척같이 옷깃 잡는 것도 다정스럽다. 소문 보다 먹어 보니 곰삭은 갓김치 맛이 일품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