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 『혼자 춤추는 異邦人』
인간에 대한 사색과 탐색
李 明 洙
(시인. 『시로 여는 세상』 주간)
시인은 한곳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는다.
詩를 포함하여 시인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물처럼 어디론가 흐른다. 詩人은 늘 열려진 세계를 향해 여행하는 나그네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는 것이 그래서 늘 새로움 위에 축적되어 삶의 지층을 이루어 가게 되는 것이다.
최근 시집과 시선집 그리고 산문집을 잇달아 출간해 눈길을 모으고 있는 金松培 시인의 일련의 글을 읽으며 새삼 그런 생각을 깊게 했다. 스스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접어들었음을 밝히며 삶의 궤적들을 조용히 돌아보려는 그의 태도는 한결 진지하고 훨씬 차분해져 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자기 인식과 삶의 문제에 대한 통찰이 본격적으로 시 속에 살아나고 있음을 확인하게 하는 대목들이 눈에 띄인다. 이것은 詩人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불타는 나무에는
새들이 날아들지 않는다
나는 보았다.
신비한 생명 속에 깃든 연약한 욕망
어느 날 내 육신을 불태우면서
잔잔한 선율을 몰아내는 어지러운 생명
내 영혼 곁으로 날아드는 새떼를 보았다.
詩로 길들여진 영혼
한 웅큼의 詩心으로 불태우는 사람
나는 알겠다.
몇 번이나 수렁으로 빨려든 허망
어느 날 일상사의 슬픔을 털어내면서
비범한 감성으로 추스리는 아름다운 혼볼
내 솔직한 현주소를 깨우치고 있었다.
--「尋牛圖 감상 · 5, 詩로 길들여진 영혼인가」 전문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톤을 지닌 「尋牛圖 감상」 연작에서 詩人은 분명 새로운 그 무엇을 보고 있다. 보고 있다는 표현보다 찾아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 나이 ! 그의 詩는 이렇게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괴테는 '자신을 깊이 파고 들어가 천성에 맞게 살아가는 인간이 되라'고 충고하고 있다. 왜? '너 자신이 되기 위해서', '참다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
金松培 시인이 자신의 내면에 천착해 무엇인가 찾아내고, 거기에서 어떤 삶의 질서와 의미를 읽어내려는 태도는 그런 면에서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될 만하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사색과 통찰이 바탕에 깔리지 않고서는 안 된다. 삶의 진실은 바로 이런 인간 자신을 상대로 한 사색에서 우러나기 때문이다.
구름처럼 떠있는 시간이 깊어질수록
못내 아쉽게 되돌아보는 행적이지만
용케도 기어오른 삶의 줄기가 현기증으로 나불댄다.
뻗어나간 욕망만큼 무서운 사색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조심스러이 다시 기어 올라야하는 창살에는 불이 꺼졌다.
--「담쟁이」 중에서
시인이 일상적 풍경이나 사물의 작은 움직임에서 우주의 질서와 삶의 진리를 읽어 낼때 그가 쓰는 시는 깊이와 넓이를 지닐 수 있다. 50줄에 접어든 金松培 시인이 '소를 찾는 일이 나를 찾는 일'이라는 선문답적인 삶의 해명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시에 대한 해명을 삶과의 연결 고리에서 해낼 수 있다는 증거라고 보아도 좋을 듯 싶다.
어리석음을 잉태한 자는
바람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우둔하고
흔들림을 몸으로 느낀 자는
눈물이 멈춰도 떨림의 끝은 없었다.
누가 이승의 술잔을 비우고 떠났을까
지금 시리도록 차가운 사랑을 안고
달빛 속으로 걸어간다.
조심스런 어리석음으로 내 딛는 발걸음
내 가슴을 관통하는 여린 사랑의 눈매로
저 황량한 떨림의 끝을 향해
아아 저승으로 넘나 든 영혼의 빛 줄기
어느 지점에서 빈 술잔으로 뒹굴고
처절하게 무너진 달빛만 껴안는다
참으로 어리석음과 떨림을 함께 풀어
그냥 삼키는 이승의 술잔이여.
--「갈대, 눈물로 흔들리다 · l4」 전문
金松培 시인의 최근 詩에는 인간에 대한 탐구와 함께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이 배어있다. 그것은 비극적 삶의 인식에서 근원될 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조의홍 시인은 평설에서 '존재화합 수용의 세계'로 논의하고 있어 명쾌한 관점을 보여준 바 있지만 결국 이런 해석도 金松培 시인이 절망과 좌절을 자기 것으로 끌어안을 수 있는 역량을 지녔음을 입증하는 것으로 필자는 이해했다.
그런 면에서 시인은 부단히 변모하는 일면을 지니고도 있지만 결국 변할 수 없는 하나의 정점을 갖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인간은 언제까지나 인간이다'라는 평범한 진리로 풀이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시인이 즐겨 삼는 시적 소재나 대상은 변하여도 인간을 상대로 한 끊임없는 사색과 통찰은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여름나무는 겨울을 꿈꾸지 않는다
고향 뒷산으로 보송보송 피어오르던
솜털 같은 구름은 여름이 마냥 좋았지만
어디 계절의 순리는 그렇게
내 맘처럼 되는 일 있더냐
겨울나무는 헐벗은 자의 이미지만 한 짐 진 채
막연하게 여름을 꿈꾸고 있다
심연 가득 가난으로 채워진 자의 눈물을 비우며
어쩔 수 없는 상징 몇 개만 구름으로 띄우고
윤사월 설영근 청보리는 싫어 싫어
또다시 꿈꾼다. 허망의 행렬이 어지럽고
무성한 담장너머 장미꽃을 꿈꾼다
그러나 아무 것도 없는 자에게는
순환의 법리도 저 멀리 빗겨가고
한 알 잘 익은 석류를 예비하면서
여름나무는 그래도 겨울을 꿈꾸지 않는다
고향 뒷산 전설로 남은 구름처럼
어디 순리를 거역할 수 있는 일이더냐
태풍이 오리라는 예감의 여름 기상도 위에
꿈은 그냥 꿈으로서 흐를 뿐이다
--「여름을 꿈꾸며」 전문
최근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어 자신이 종내 몸담고 살아왔던 허무의 집에서 뛰쳐나와 무엇인가를 의욕적으로 찾고 있는 金松培 시인, 그의 詩가 외형적인 변모와 함께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탐색이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해갈 것을 함께 기대해본다.
바로 이런 그의 시편이 이같은 믿음을 뒷받침 해주고 있지 않은가.('94.12.『예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