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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땅사람교회(최성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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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문 스크랩 영화 속 미래사회와 기독교
고구마 추천 0 조회 85 11.01.20 10: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국여전도회 연합회 강연, 2011, 1.24-25)

 

영화 속의 미래사회와 기독교

최성수

(신학박사, 목사, 영화 및 문화평론가, 장신대 외래교수)

 

미래 사고와 과학 기술

대안적인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미래학자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것은 과학 기술이다. 이 말은 현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또 준비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명암이 달라진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런 관점에서 미래는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으로 이해된다. 과학 기술이 왜 대안적인 미래를 찾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는지,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근대 과학혁명이후로 테크놀로지는 사회 변화의 원동력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왔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의 기원을 들여다보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철학자 데이비드 린드버그는 『서양과학의 기원』에서 과학의 기원을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찾고 있다. 이곳에서 과학이 기원된 이유는 농사를 잘 짓기 위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이집트는 비옥한 나일강 삼각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을 차지하고 있다. 비옥한 땅이지만 우기만 되면 모든 것이 물에 쓸려갔기 때문에 우기를 대비하기 위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별을 관측하게 되었고, 그 결과 원시적인 의미에서의 천문학을 비롯해서 측량술과 삼각법이 개발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드버그는 진정한 의미의 과학을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 찾는다.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자연 현상들을 관찰하고 그것의 원리를 밝혀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린드버그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가 아니라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과학의 기원을 본 것은 그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과학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하튼 과학이라는 것이 인간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에 반복되는 위기들에 체계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태동된 것에 대해선 이견이 없는 것 같고, 이런 이유로 과학 기술은 미래를 생각함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한편, 과학 기술의 발전이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고 미래 형성에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되면서 과학 기술은 종교와의 갈등을 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종교는 인류의 문제와 특히 미래와 관련해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종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고 또 학자들 마다 다른 기원이 설명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이면서 공통된 동기는 동물이나 추위와 같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위기대처 방식의 하나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되기 훨씬 이전부터 인류 역사에는 미래와 관련된 다양한 의식이 있었고 또한 비록 주술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인류는 미래를 예측하는 다양한 방법들(점, 역술, 예언, 꿈 등)을 개발해왔다.

 

미래를 말하는 다양한 방식들

영화 속의 미래사회를 말하기 전에 미래를 말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일별하는 것은 영화적인 미래 이해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플라톤(Platon)은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서 “이데아”를 미래의 세계로 생각했다. 물론 이데아는 현재와 공존하고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만 다르기 때문에 이성을 통한 부분적인 인식이 가능하지만, 사후에야 비로소 온전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미래적인 의미를 갖는 세계이다.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세계에 만족할 수 없었던 플라톤은 그 이유가 물질성에 있다고 보았고, 인간은 육체에 갇혀있는 한 온전한 인식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다루는 글 “파이돈”에서 플라톤은, 죽음은 이데아의 세계로 가는 진입로요 통과의례로 이해한다. 그곳은 해방의 세계요, 이념의 세계이며 또한 미래의 세계다.

토마스 무어(Thomas Moore)는 유토피아(Utopia)를 주장했다. 1516년에 출판된 『국가의 최선 정체(政體)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Libellus …… de optimo reipublicae statu, deque nova insula Utopia)』라는 라틴어 제목에서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아니다’(ou)와 ‘장소’(topos)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아무 데도 없는’(nowhere)을 의미한다. 일종의 공상적이면서 비판적인 미래라고 볼 수 있는데, 토마스 무어는 당시 공상적인 미래 이미지를 통해서 당시 사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는 유물론적 변증법을 통해서 세계사를 재해석하였다. 이에 따르면 역사는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경제활동과 구조에 의해 구성된 것이며, 자본주의 사회는 구조적으로 붕괴될 소지를 갖고 있고 결국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세계로서 공산주의가 미래 사회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미래를 과학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구성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최초의 ‘과학적인 미래’라고 볼 수 있다.

신 마르크스주의자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희망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였는데, 희망이 존재의 결핍에 의해 생긴다고 주장했다. 존재의 결핍을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인간은 결국 살아있는 한 희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희망하는 한 현실에 대해 언제나 비판적인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로써 블로흐는 그의 비판적 실재론(Kritischer Realismus)의 철학적인 근거를 제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현재는 결핍의 세계이고 희망하는 세계임에 반해, 미래는 충족되는 세계이며, 희망이 성취되는 세계이다.

미래학은 미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앞서 언급한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좀더 과학적인 방법론에 따라 구체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태동되었다. 즉, 미래학은 과거와 현재를 관찰하여 메가트렌드를 발견하며,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또 방법론적인 전망을 통해 바람직하고 대안적인 미래를 예측한다.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와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제임스 데이터(James Dator)와 같은 대표적인 미래학자들의 미래예측은 놀라우리만치 정확한 것이 많았다. 그들의 예측 방법론은 과학적인 미래학을 태동하게 만들었지만, 그들의 예측은 과학적인 관찰과 분석에 근거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어서 오늘날 국가 및 글로벌한 정책을 수립하는 데에 있어서 미래학자들의 자문은 빠지지 않고 있다.

 

이처럼 일반적으로 미래에 대한 생각들은 주로 과거와 현재를 관찰하고 분석하여 얻은 자료들을 종합하여 단기 혹은 장기의 미래사회에 투영하여 얻어진 것들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미래와 미래를 말하는 방식에서 현대 사회에서 크게 주목받는 두 가지는 미래학자의 미래예측과 영화 예술의 미래 이미지다. 왜냐하면 철학적인 의미에서 미래는 존재론적인 맥락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미래에 대한 생각과 주장은 종교나 과학(미래학) 안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미래 사고에 있어서 영화적 상상력의 의미

미래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고 있듯이, 오늘날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과학 기술이다. 테크놀로지에 미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래학자 모두가 테크놀로지에 대해 낙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마티아스 호르티스(Mathias Hortis) 같은 미래학자는 『테크놀로지의 종말』(21세기 북스, 2009)에서 인간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요소는 테크놀로지가 아니라 오히려 문화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다양한 행태를 역사적으로 연구한 후에 테크놀로지 역시 문화의 영향력 아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문화가 중요하다』의 저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대 문화 형성과 유통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연코 대중문화의 영성이며, 그리고 대중문화의 영성을 표현하는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문학과 음악, 그리고 영화다. 이 말은 결국 미래를 결정하는 주체자는 의미를 생산하는 자이며, 의미를 매개해주는 것은 문학과 대중음악, 그리고 영화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미래를 생각하고 구체화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주목해야 할 장르는 문학과 음악과 영화이다.

사실 이런 경향은 현재 미국의 CEO들이 경영학 석사(MBA)보다 예술학 석사(MFA)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기업 경영자들 사이에서 인문학적 사고가 주요 화두로 등장하고, 특히 경영철학에서 창의력이 관심의 중심으로 부각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오늘날 예술은 단지 교양의 수준을 넘어서 미래적인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대중문화의 꽃이라 불리는 영화예술은 미래와 관련해서 음악보다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김지하가 주장하고 있듯이, 현실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음악을 바꾸어야 한다면서 한국의 중심음인 율려와 관련해서 율려 운동 주장하였다. 음악은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큰 힘을 부여해주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시대의 변화는 음악의 변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역시 현대인의 미래 사고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으며, 미래 형성을 향한 의지 형성에 강력한 동기가 되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영화는 시나리오를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문학적 상상력이 더 근본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대중적인 호소력에 비춰볼 때는 단연코 영화적인 상상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미래 문화 형성에 있어서는 문학과 더불어 영화는 음악보다 더욱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특별히 영화는 테크놀로지의 미래에 대해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 왔고 또한 고도로 발달된 테크놀로지, 즉 CG(컴퓨터 그래픽)와 디지털 SFX(특수 효과) 기술의 발전으로 미래 사회에 대한 이미지를 무제한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다른 어떤 장르보다 하이테크 영상을 기술적으로 구현해나가는 데에 있어서 선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이런 점에서 미래와 관련해서 영화의 대중적 영향력은 단연코 으뜸이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한 각종 첨단 기기들이나 건축 양식, 그리고 머리나 의상 스타일들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에 부응하여 현실화되는 실정이다. 영화 속에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

미래학이 과학적인 관찰과 비판적인 분석, 그리고 방법론적인 예측에 의존하는 것에 비해 영화적 미래를 제시하는 SF 판타지 영화는 그 속성상 미래에 대한 종합적인 이미지를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미래에 대한 모든 이미지들이 총동원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공상적인 미래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미래의 모습이 CGI(Computer Generated Imagery)로 투영되기도 한다. 특별히 영화 <아바타>(제임스 카메론, 2009)에서 확인해볼 수 있었듯이 영화에 대한 입체적인 감상이 가능해지면서 작품세계와 현실의 경계는 더욱 불확실해졌다. 사실 <매트릭스> 이후 가상과 현실의 섞임은 더 이상 낯설게 여겨지지 않게 되었지만, 입체적 영상기술의 발달로 인해 미래는 단지 상상 혹은 공상될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현실적으로도 체험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편, 수많은 미래의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는 영화 속 미래사회에서 볼 수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소수의 영화들을 제외하면 미래를 말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암울하고 불행한 이미지로 가득한 소위 디스토피아(Dystopia)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미래라는 화려함 속에서 어두운 그늘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영화의 공공신학적인 의미와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대중문화 속에서 디스토피아는 현재에 대한 비판과 경고의 의미를 위해서 고안된 미학적인 도구이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존 스튜어트 밀 역시 영국의 아일랜드 정책을 비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달리 말해서 영화 속의 미래 사회가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는 까닭은 이미지를 통해서 현실의 부조리를 조명하고 현실을 수정하거나 변혁하려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디스토피아는 현실비판적인 의미를 생산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 미래사회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현실을 유비적 혹은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이처럼 영화 속 미래사회를 보는 것은 영화의 문화신학적인 의미는 물론이고 공공신학적인 의미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별히 필자가 강조하며 주장하고 있는 영화의 공공신학적인 의미는 관객으로 하여금 쉽게 주목하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게 하며, 동시에 보는 자들의 책임의식을 환기시키고, 더 나아가서 부조리한 현실과 그 안에서 신음하며 고통당하는 존재(인간과 자연)와 관련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촉구하는 데에 있다. 영화는 감독의 의도와 제안에 근거해서 때로는 참여를 위한 구체적인 방향과 방법까지도 제시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영화 속 미래 이미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기독교 공동체와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질문은 이렇다. 영화 속의 미래사회와 관련해서 기독교는 무엇을 인식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말하는 미래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것에 대해 바른 태도는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영화가 말하는 미래사회의 모습을 스케치한 후에, 영화 속 미래사회 이미지가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색해보고, 그 후에 기독교가 말하는 미래와 관련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영화 속의 미래사회와 관련해서 기독교가 마땅히 인지해야 할 과제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영화 속 미래사회 이미지

영화를 통해 미래를 말하는 방식과 소재는 매우 다양하다. 단순히 과거나 현재를 비판적으로 혹은 유비적으로 재현함으로써 관객들의 마음에 미래에 대한 이미지를 각인시키거나, 때로는 미래 사회를 직접 상상하기도 한다. 다양한 장르와 소재, 그리고 주제를 통해서 미래를 말하고 있지만, 장르적으로 볼 때 가장 독보적인 형태는 단연코 SF 판타지 영화다. 판타지 영화는 일정한 세계관적인 원리에 근거해서 매우 폭넓은 시각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영화이다. 그야말로 단순한 공상일 수도 있고, 종교적 상상력에 따른 것일 수도 있으며, 과학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 있고, 또 이념적인 미래 사회가 이미지로 표현된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판타지 영화는 세계관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감상될 때, 영화가 주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피하면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판타지 영화 가운데 특히 사이언스 픽션(SF) 영화는 말 자체가 시사해주듯이 과학 기술에 근거한 과학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투영된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대과학 기술에 의해 구성된 미래세계의 하나를 제시하면서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SF 영화 속 미래사회를 일별해보는 것은 대안적인 미래를 위해, 혹은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다음에서 말하는 영화 속 미래는 주로 SF 판타지 영화를 일컫는다.

 

미래사회 이미지를 생산함에 있어서 사용되는 소재 가운데 대표적인 예들을 든다면 생명공학, 인공지능, 환경문제, 자원개발, 첨단 기계 기술 및 IT 세계 등이다. 이들 소재들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들을 통해서 미래사회에 대한 이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 생명공학

생명공학과 관련해서 미래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에는 <여섯 번째 날>, <아일랜드>, <스플라이스>, <가타카>, <더 문> 등이 있다. 생명공학적인 지식에 근거한 영화는 유전자 조작과 복제 등이 일상화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하면서 그런 사회 속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영화적 상상력을 통해서 전망한다. 한편으로는 인류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생명공학의 가능성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설득력 있게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기술 개발에 있어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탐색한다. 공통점은 인간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양하게 조명하는 가운데, 생명공학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받을 수 있음을 강조한다. 대부분 인간의 본질을 탐색하는 점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컨대 유전자에 대한 인간의 개입이 가능해짐으로써 한편으로 미래 사회는 더욱 진보된 인간을 생산해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들이 생명 공학의 혜택을 입을 수 없게 됨으로써 결국 새로운 계층구조가 형성되고, 또한 인간 이해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복제된 인간 역시 인격체로서 존중받아야 할 것을 강하게 주장하는 <아일랜드>가 보여주는 미래사회는 장기 이식이 갖는 자원적인 한계를 극복하면서 오히려 인간의 욕망을 상업적으로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을 복제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장기 매매의 불법적인 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건강한 상태에서 인간을 복제하여 둠으로써 장기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복제된 존재로부터 장기를 적출해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크게 두 가지 과학기술을 전제하고 있다. 하나는 거대한 홀로그램으로 가상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 자궁의 생산이다.

<여섯 번째 날>은 불법적인 복제를 통해서 사악한 의도를 실현하려는 인간의 노력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미래사회와 관련해서 특이할 만한 점은 유전자를 통해 인간을 복제할 뿐만 아니라 신코딩(syncoding)이란 기술을 통해 기억마저도 이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밖에도 미래사회의 모습으로 다양한 것들이 제시되고 있다. 예컨대 오늘날에도 일부 활용하고 있는 생체 인식 시스템이 잘 발달되어 있고, 모든 교통수단들이 원격으로 조종이 가능하며, 클라우딩 컴퓨터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고, 또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형로봇도 등장한다.

<가타카>의 배경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출생이 가능하고, 모든 인간의 건강은 DNA 분석을 통해서 예측될 수 있는 사회다. 우생학적인 인간 이해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자연적인 출생자들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인종으로 전락된다.

<스플라이스>는 유전자 재조합 기술이 발달한 사회를 제시한다. 불치병 치료를 위한 단백질을 얻기 위해 이종의 DNA 배합을 시도한 한 부부 과학자는 제약회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인간 여성의 DNA와 조류, 어류, 파충류, 갑각류의 유전자를 결합하는 금기의 실험을 강행하여 마침내 새로운 생명체인 ‘드렌’을 탄생시킨다. 이 영화는 유전자 조합 기술의 발달이 전망되는 현실에서, 그것이 인간의 욕망과 결합될 경우 어떤 결과에 이를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 로봇 혹은 인공지능

로봇이나 인공지능에 관한 영화는 주로 인류의 미래에 있어서 테크놀로지가 갖는 의미를 탐색한다. 특별히 테크놀로지와 인간의 관계에 집중함으로써 인간 이해의 또 다른 면을 부각시킨다. 이와 관련된 영화로는 <메트로 폴리스>, <블레이드 러너>, <바이센터니얼 맨>, <A.I.>, <로보캅> 등이 있다. 로봇 개념과는 다르지만 <써로게이트>에서는 기계와 인간의식의 결합이 시도된다.

 

<메트로 폴리스>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는 이미 멜리에스 감독에 의해 제작된 바 있지만, 아마도 본격적인 로봇 영화로 일컬어지는 것은 1927년에 제작되어 소실되었다가 1984년에 복원되어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된 프리츠 랑 감독의 <메트로 폴리스>가 처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제의 로봇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노동기계로 전락해 고통당하는 인간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달으며 반란을 일으키자 그들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제조된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로봇이다. 인간복제의 기술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를 반영하는 것인데, 기술적인 상상력을 통해서 로봇을 등장시켰다. 사실 로봇 ‘마리아’는 한 과학자가 자신이 사랑한 여인의 모습을 닮은 로봇이었다. 기계에 인간의 피부를 이식하는 기술을 통해서 인간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인간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하나의 이상적인 존재로서 제조된 것이었다. <메트로 폴리스>는 현대 로봇 기술이 추구하는 로보 사피엔스(Robo Sapiens)의 이상을 담고 있다.

 

<바이센터니얼 맨>

로봇산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로보 사피엔스이다. 인간을 닮은 기계를 말하는 데, <바이센터니얼 맨>은 로봇이 인간으로 진화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영화는 로봇 기술의 진화와 관련해서 매우 흥미로운 두 가지 질문을 다룬다. 하나는, “로봇에게 진화가 일어난다면 그 궁극적인 모습은 무엇이 될 것인가?” 이며, 또 다른 하나는, “로봇이 인간으로 진화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 이다. 이 질문을 염두에 둔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 자유와 학습과 인격적인 대우, 그리고 사랑을 조건으로 제시함과 동시에 미래는 결국 인간임을 역설한다.

 

<블레이드 러너>

최고의 SF 영화로 꼽히는 <블레이드 러너>는 환경오염으로 인해 더 이상 지구에서 살 수 없게 되자 인간이 외계 행성을 개발하기 위해 인간을 닮은 기계를 만들어 행성으로 보내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의 장기들은 얼마든지 필요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복제가 가능하며, 생명체들이 살아가기 힘들어진 지구환경으로 인해 인간은 지구 생명체를 닮은 기계로 만족을 누린다.

 

<A.I.>

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을 다룬 영화로 주목받는 영화는 단연코 <A.I.>이다. 이 영화는 원래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에 의해 기획되었지만 사망으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하다가 후에 큐브릭의 아내로부터 시나리오를 넘겨받은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에 의해서 완성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불치병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있는 사람들을 냉동상태로 보존할 수 있는 기술을 전제한다. 뿐만 아니라 언어와 감정을 학습할 수 있는 로봇, 인간의 기능을 전문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로봇, 그야말로 인간과 다방면으로 소통할 수 있는 로봇 생산이 가능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 영화 역시 로봇이 한 인간으로 진화해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데, 인간의 독선적인 행위로 인해 철저하게 차별화되는 로봇 세계의 비극을 고발한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로봇과 그의 꿈의 실현에 대한 이야기다.

 

<로보캅>

<로보갑>의 배경은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 가능한 세계다. 소위 사이보그가 현실이 되는 시대인데,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사고로 신체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된 전직 경찰이 사이보그로 변신하여 범죄 소탕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사이보그를 제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로 로보캅은 감정에 있어서 심각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사이보그에 있어서 감정과 기억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감정과 기억이 인간의 본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성찰하고 있다.

 

<써로게이트>

인간은 집에서 특별한 기기에 접속하기만 하면 되고 밖에서의 삶은 써로게이트가 대행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써로게이트를 통한 삶은 신체에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전쟁과 같은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고, 또한 위험한 상황에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그러나 써로게이트를 만든 과학자 자신이 써로게이트 시스템을 파괴한다는 설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써로게이트를 통한 삶은 인간의 진정한 소통 방식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인류에 큰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인간 상호간의 직접적인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또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말하고자 한다.

- 환경문제

환경문제로 인해 일어날 미래사회의 모습을 그린 영화는 20세기 들어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것은 지구 환경의 위기가 심각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경각심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표적인 영화로는 <투모로우>, <2012>, <나는 전설이다>, <더 로드> 등이다.

 

<투모로우>

<투모로우>는 지구 온난화에 대한 대책을 소홀히 한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를 경고하는 메시지가 담긴 영화인데, 특별히 환경회의의 결과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미국 행정부를 향한 감독의 비판적인 시각을 잘 읽어볼 수 있는 영화다. 가까운 미래에 온난화로 북극이 녹으면서 지구가 새로운 빙하기로 들어가게 된다는 내용이다.

 

<2012>

<투모로우>가 지구 온난화의 결과를 영화적 상상력으로 보여주었다면, <2012>는 대중문화에서 회자되고 있던 소위 ‘2012년 지구 종망론’에 근거하여 제작된 영화다. 이 영화의 내용은 지구 온난화가 아니라 순전히 태양계의 순환운동과 태양의 이상 현상이 미친 지구의 변화로 인한 재앙에서 비롯되는 종말에 관한 것이다. 모든 인류가 멸명하는 가운데 소수의 선택된 인류에 의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또한 새로운 인류를 구성함에 있어서 중요한 철학은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이 영화는 위기에 처했을 때, 특히 미래 사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인간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환기시키면서도 미래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에 있어서 권력과 자본의 힘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더 로드>

<더 로드>는 SF가 아닌 판타지 영화로서 종말 이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 지, 종말 이후의 희망의 근거가 되는 것은 무엇인 지를 성찰하는 영화다. 종말의 이유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생략한 채 종말 이후에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인간이 서로 뭉쳐서 살아갈 수 있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격체로 여겨지지 않고, 심지어 인육을 먹는 행위가 정당화되어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는 위기의 상황이 영화의 배경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희망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탐색하면서 영화는 아들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희생적인 노력을 보여주는데, 영화는 자신의 생명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마음에서 미래의 희망이 있음을 역설한다.

 

<나는 전설이다>

<더 로드>와 비슷한 상황 설정이다.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의해 인류가 괴물로 변형된 사회에서 유일하게 혼자 살아남은 사람이 백신을 개발한다는 이야기다. 특히 영화가 탐색하는 질문은, 종말 이후에 혼자 남은 사람이 있다면, 그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 것인가? 이다. 인류를 멸망하게 만든 장본인인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한 백신을 개발하는 일일 것이다. 이 말은, 미래 사회가 어떻게 전개되든지 중요한 것은 인류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적대세례에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 자원개발

지구의 위기는 지구 자원의 고갈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물의 고갈이 가져오는 사막화 현상은 이미 잘 알려진 불행한 현실이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인한 냉전의 시대는 비록 지나갔지만, 독일의 잡지 ‘슈피겔’의 기자들은 『자원전쟁』이란 제목의 책에서 점점 고갈되어 갈 뿐만 아니라 수요가 점차적으로 늘어만 감에 따라 천연자원을 얻기 위해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원전쟁의 현황을 전해주었는데, 그 책의 저자들은 그것이 새로운 냉전의 시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본다. 지구촌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심각한 자원전쟁의 국면을 피하기 위한 노력은 영화적 상상력을 만나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영화는 <아바타>, <더문>와 앞서 다룬 <블레이드 러너> 등이 있다.

 

<더 문>

지구에서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달을 탐색한다는 기본 구조 속에서 <더 문>은 인간의 탐욕이 어떻게 나타나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에너지 확보를 위해 지구와 달까지 오가는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인간을 복제하고, 복제된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로봇인 샘(A.I.)을 만든 것이다. 복제된 인간은 오직 가상의 시나리오를 통해서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지만 마침내 자신이 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며, 또한 생명이 제한된 복제인간임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는다. 자원개발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그로 인해 인간이 하나의 소모품으로서 어떻게 비인격적인 존재로 전락될 수 있는지를 고발한다.

 

<아바타>

이모션 캡쳐와 3D 영상으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 <아바타>는 점점 고갈되어 가는 지구 자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성을 개발할 필요가 절실한 시대에 인간이 ‘판도라’라 불리는 평화로운 행성을 침략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배경 역시 과학기술이 발달되어 있고, 특별히 유전자 복제에 대해 특별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미래 사회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적인 상태로는 적응하기가 어려운 환경에서 원주민인 나비족의 몸을 복제하여 인간을 위한 아바타를 생산하고, 인간은 의식을 통해 아바타와 접속해서 아바타로 하여금 행성을 탐색할 수 있게 한다. 자원 개발과 관련해서 인간의 탐욕이 어떻게 생성되고 드러나는지를 고발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오직 의식만을 통해서 아바타 안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인간이 마침내 아바타가 되는 장면이다. 몸과 의식이 분리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원론적인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 IT 세계

IT 세계와 관련된 영화는 <매트릭스>가 대표적이다. 컴퓨터의 가상현실과 현실의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상황에서 기계와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성찰하는 영화다. 인간은 결코 기계에 의해 구성된 사회에서 살아가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해서 결코 기계를 배제한 사회에서만 살 수도 없는 일이다. 미래사회에서 기계와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든 화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마이너리티 리포터>는 인간과 기계가 협력하여 일할 때 어떤 미래가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기대감이 부풀어 있지만, 인간 탐욕에 의해서 얼마든지 기계가 조작될 수 있음을 전망하였다.

 

- 외계침입

미래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가운데 단연코 빠질 수 없는 소재가 지구가 외계의 침입이나 행성의 충돌로 인해 겪는 위기이다. 다분히 종말론적인 분위기 속에서 인간의 한계와 능력을 실험하면서도, 또한 인간의 희망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지를 고민하는 영화들인데, <인디펜던스 데이>, <아마겟돈>, <터미네이터>, <우주전쟁>, <스카이 라인> 등이 있다.

전자의 두 영화는 지구와 행성의 충돌 위기를 담고 있다. 지구인의 초국가적인 협력과 몇몇 개인들의 희생적인 노력으로 위기가 극복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터미네이터>는 지구의 운명을 책임질 미래의 지도자에 대한 외계인의 공격에 맞서 싸우는 터미네이트들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미래 사회를 이끌 지도자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각성하게 한다. <우주전쟁>과 <스카이 라인>은 미래사회를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지만 오직 지구를 파멸하기 위해 온 외계의 침입자들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이야기다. 그러나 지구를 공격하는 외계의 침입자로 인해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통해 영화는 가상적인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을 설정하고 이런 상황에서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지를 숙고하도록 한다. 이런 점에서 두 영화는 공통적으로 총체적인 위기 앞에서 인류의 보루로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의 의미를 성찰한다.

비록 우주의 침입은 아니지만 우주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영화들이 있다. <스타워즈>와 <스타트랙> 등이 대표적이다. 지구가 아닌 우주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이 전제된 먼 미래의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영화 속 미래 사회의 이미지를 통해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로 가득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의 의미는 결코 지구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에 대해 절망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 속 미래 이미지를 통해서 영화가 탐색하고 있는 것은 현실 비판과 인간의 본질 이해이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 영화 속 미래사회 이미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화 속 미래사회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의문시된다.

특히 유전자 복제를 통해서 생산된 인간에 대한 차별이 심해지고, 기능에 있어서 뛰어난 새로운 신분계층이 형성되면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는 미래사회에는 복제뿐만이 아니라 기억마저도 이식이 가능하게 되면서 인간의 정체성에 혼돈이 일어나고,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서 최고의 기능을 발휘하는 인간이 선호됨으로써 인간이 기계가 되는 비인간화 현상이 일어날 것임을 보여준다.

둘째, 인간의 탐욕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생명복제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미래사회는 생명을 무한히 연장하려는 욕망을 충족시켜 줄 것이며, 이로 인해서 맞춤형 복제가 성행해 결국 우생학적인 인간이해가 지배적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스플라이스>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리 치료를 위한 연구라 하더라도 통제에서 벗어난 욕심은 재앙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셋째,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공간 개념이 형성된다.

<매트릭스>에서 확인해볼 수 있었듯이 컴퓨터의 가상현실은 오늘날 더 이상 ‘가상’이 아니라 실재가 되어 버렸다. 현실경험과 마찬가지로 가상현실 경험이 실제적으로 가능하게 됨으로써 미래의 유비쿼터스 시대에는 현실이외에 가상현실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갖게 된다. 가상현실의 삶은 지금도 스마트 폰과 클라우딩 컴퓨터를 통해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진행되고 있다.

넷째, 지구 혹은 인류를 위협하는 삶의 패턴은 수정되어야 한다.

영화는 지구 종말론에 근거한 다양한 시나리오들을 가지고 미래사회를 조명하고 있는데, 분명하는 것은 지구 혹은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위기가 도래할 것이고, 그것을 유발하는 삶의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지구자원에 대한 남용과 인간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욕망, 그리고 기능성만을 중시해서 인간을 보는 태도 등이다. 영화는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를 통해 이런 것들의 비극적인 결과들을 보여줌으로써 수정할 것을 촉구한다.

 

영화 속 미래 사회가 실제로 현실이 될 것인지에 대해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과거 영화가 미래사회의 단면으로 보여주었던 많은 것들 가운데 일부는 이미 현실화된 것도 있다. 그들 가운데 다수, 곧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의 많은 것들은 여전히 가상 시나리오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가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영화 속 미래사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현실 속 인류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영화 속 미래사회와 기독교

영화 속 미래사회와 관련해서 기독교는 어떤 과제를 인식해야만 하는가? 앞서 언급한 대로 공공신학적인 맥락에서 볼 때, 영화는 미래사회 이미지를 통해 미래사회의 밝은 미래를 위한 공적인 이슈를 각인시켜준다. 앨빈 토플러와 더불어 미래학 연구의 개척자로 알려진 제임스 데이터가 『다가오는 미래』에서 제시한 미래에 대한 네 가지 이미지(지속 이미지, 붕괴 이미지, 규율 잡힌 사회 이미지, 그리고 변형사회 이미지)는 영화 속 미래사회 이미지의 의미를 조명해주고, 또한 이와 관련해서 기독교가 공적인 과제를 신학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해준다.

첫째, 지속 이미지는 현재의 긍정적인 상태가 발전적으로 지속된다는 시나리오에 근거한 것이다. 영화 속 미래사회 이미지 가운데 긍정적인 것은 발전적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인류의 편의를 도모하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며, 가족을 중시하고, 또 환경보호를 위한 삶의 패턴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면서 인류의 지속 가능한 성장에 기여하는 과학 기술의 발전은 필수적이며 또한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이에 비해 둘째, 붕괴 이미지를 생산하는 주범인 환경 과부하, 자원고갈, 경제불안, 도덕적 퇴보, 대내외 군사공격, 운하충돌, 인권 유린, 부조리한 각종 사회 구조 등은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서 발생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미지인데, 영화의 디스토피아적인 이미지는 하나의 경고 메시지로서 읽힐 수 있으며, 보는 자로 하여금 긍정적인 미래로 유도하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이미지들은 잘못된 신념이나 사회구조, 혹은 생활 습관과 삶의 패턴들로 인해 야기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변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로 많이 사용된다. 중세의 교회가 교회의 주장을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 심판과 지옥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과 같은 남용이 소수 권력자들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셋째, 규율 잡힌 사회 이미지란 미래 사회가 지배적인 가치나 그 밖의 가치를 중심으로 조직되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대안적인 이미지이다. 일정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근거해서 작성된 시나리오이며, 미래사회의 근거가 되는 철학에 포커스가 집중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영화가 제시하는 현실 이미지와 관련해서 그것의 세계관적 혹은 이념적인 근거들을 성찰해야 하며, 복음과 그것들과 어떻게 관계하는 지를 숙고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복음의 정신을 더욱 부각시킬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거나 혹은 반복음적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넷째, 변형사회 이미지는 신념, 행동, 조직과 관련해서 현재 형태에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형태의 출현을 지향하는 이미지다. 현재보다는 더 나아진 미래를 위해 현재가 변형되어야 한다고 할 때 어떤 근거에 따라 변형되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다양한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이 세상에 새로운 존재와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대안적으로 제시한다.

 

이처럼 영화가 제시하는 미래사회 이미지들은 각각 나름대로 메시지를 생산하고 또 전달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을 제시함으로써 영화는 무엇보다 현실을 비판하고 변혁하기를 원하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근거를 모색할 뿐만 아니라 대안적인 미래를 제시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관객은 단지 이미지에만 매여 영화의 메시지를 간과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특히 기독교적으로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

영화를 기독교적으로 감상한다 함은 영화를 단지 표상예술로서만 감상하거나 감상을 위한 예술로만 간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영화는 표상예술이기는 하지만 또한 각종 이미지적인 기호를 사용하여 의미를 생산하며 유통하는 예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를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감상한다 함은 신학적으로 크게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는 문화신학적인 관점에서 조명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공신학적인 관점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은 영화적인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 경험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첫째, 문화 신학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물질성을 통해서 당신 자신은 물론이고 뜻과 의지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가능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는 일종의 성례전적인 의미를 갖는다. 영화를 통해 하나님의 행위와 그분의 뜻을 드러날 수 있다는 말이다. 작품세계와 하나님의 세계 사이에서 이뤄지는 유비적이고 비판적인 다양한 관계들을 통해 복음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다.

둘째, 공공신학적인 의미다. 곧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탁월하다. 영화의 세계가 곧 현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영화는 다큐멘터리와 같은 장르를 통해 직접적으로 보여주거나 혹은 극영화를 통해서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현실을 재구성한다. 공적인 주제들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며, 영화적인 재현을 통해 공적인 이슈를 형성할 수 있다. 공공신학적인 관점에서 이뤄지는 영화 감상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공적인 역할과 과제를 인식하고 구체적인 실천을 결단하게 하고 또 실천 방향을 모색하도록 한다. 영화가 제시하는 현실은 비록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관객에게 필요한 것은 영화 안에서 제시된 현실에 대해 공감각적인 자세로 감상하는 것이다. 물론 영화적으로 구성된 세계와 현실을 동일시해서는 결코 안 되겠지만 영화 속 미래 사회이미지를 통해서 우회적으로 드러나는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거니와 만일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영화 속 미래와 기독교적인 미래 이해

영화적인 미래는 과학적 상상력이나 종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과학적 상상력은 과학 기술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세계관을 형성하는 종교적 상상력은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영화적인 미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상상력에 따라서 인간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미래는 인간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과거를 분석하고, 현재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면서 그 결과를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해 투영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시되는 것은 인간의 노력과 희망이다. 지구 종말을 다루는 영화들의 대부분이 휴머니즘적인 종말론으로 귀착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에 비해 기독교에서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계시된다. 하나님의 약속이 곧 미래인 것이다. 몰트만(J?rgen Moltmann)은 희망의 신학을 통해서 이점을 매우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희망의 신학의 한계는 약속을 현실화하는 과제를 인간에게 부과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와 역사의 관계에서 인간의 역할이 전적으로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미래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 과정에서 반드시 지적되어야 할 일은 약속은 하나님에 의해 성취된다는 것이다. 독일 신학자 자우터(Gerhard Sauter)는 이점을 매우 강조하면서 몰트만을 비판하고 있는데, 즉, 자우터에 따르면,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존재하게 되며, 약속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 이뤄질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수행하는 가운데 오직 기대하고 소망할 수 있을 뿐이다.

기독교적인 미래 이해는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미래는 하나님의 공간이며 인간은 단지 초대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 미래 이미지와 관련해서 기독교의 과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영화 속 미래 이미지는 대부분이 디스토피아적이라는 것과 그것이 현실 혹은 현실에 대한 태도나 신념과 관련해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또한 그것이 휴머니즘적인 미래 이미지로 귀착되고 있음에 천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세 교회 역시 교회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또 자신의 현실에서의 역할을 돋보이기 위해 미래 이미지를 사용했고, 또 인간의 선한 행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 곧 휴머니즘적인 관점을 교회의 가르침 안으로 흡수하였는데, 이것은 교회의 타락과 대단히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교회의 타락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방식에 자신을 내맡기면서 하나님이 참 하나님으로 나타나시기를 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에 더욱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영화 속 미래사회 이미지에 대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참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첫째, 도로시 세이어즈가 『기독교 교리를 다시 생각한다』와『창조자의 정신』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세상을 언제나 새로운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을 계발하여 인류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일은 미래 이미지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스런 삶의 패턴으로 인해 부당하게 고통 받고 있는 인간과 자연을 긍휼히 여기신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현실에 공감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부당한 구조를 제거하거나 극복하기 위해 제기되는 공적인 이슈들에 대해 적극 참여해야 한다.

셋째, 휴머니즘적 미래 이해를 비판하는 의미에서 인간적으로 결코 소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소망할 수 있는 이유들을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휴머니즘적인 미래 이해는 미래가 인간에 의해 구성되고 인간적인 것을 소망의 이유로 삼는 데 비해, 기독교적인 미래 이해는 미래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약속이 소망의 이유가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독교 종말론은 휴머니즘적인 미래보다도 더욱 강한 설득력을 입증할 과제를 갖는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이 결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길 기대하며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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