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을 추구하는
일꾼
누가복음 12 : 15. 디모데전서 6 : 6~10
지금
여기에서
이상기온으로 인해 세계 곳곳에 많은 기근과 전염병 등이 창궐한다는 소식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불행의 원인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한 것들이 많습니다. 과학기술과 경제의 발전으로 인간의 삶은 편리하게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자연의 파괴와 훼손으로 인한 생명체의 위험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통계적으로 GNP가 5,000달러에서 10,000달러가 되려면 자연생태계가 현재보다 3-5배가량 더 파손되어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풍요로운 생활을 하려는 인간의 욕심이 생태계의 파괴와 비례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 이기심의 바탕에는 무언가를 더 가지려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기적 욕망이 그리스도인 가운데에도 뿌리내리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1. 욕망을 버리고 청빈한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청빈(淸貧)의 문제는 종교계보다도 환경론자들과 생태신학자들로부터 그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실제로 생태신학자들은 환경보호 계명 제1조인 "하나님만을 섬기며 청빈하게 살고(마 6 : 24). 물욕을 버리고 선한 청지기가 되며, 자연을 위해 기도하자. "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청빈' 하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가난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 청렴이 가난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 비움'은 청빈의 삶을 강조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예수님의 삶은 두 벌 옷도, 내일 먹을 양식도, 누울 집도 없는 극도의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제자들 또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처럼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가장 높은 경지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필수요건은 청빈입니다. 청비니은 누군가에게 베풀었다는 생각마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나눔을 업적으로 보고 추구하면 그것은 청빈의 반대인 탐심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 12 : 15).
바울은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모든 소유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것이 청빈의 영성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청빈한 것은 아닙니다. 가난하지만 많은 물질을 소유하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청빈이 아닙니다. 반면 부자일지라도 자기를 위해서는 엄격하게 절제하며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청빈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재물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데 사용한다면 청빈의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 선교사의 삶으로 생을 마친 허드슨 테일러 같은 이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한 위대한 사역자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비용만을 사용하면서 엄격하게 청빈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청빈의 삶은 스스 선택해야 합니다.
청빈한 삶은 세상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삶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좋은 것을 소유하라고 말합니다. 옆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어서 너도 가지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탐하는 삶의 끝은 허무함과 공허입니다.
아이를 키워 보면 내 아이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장남감은 옆 친구가 가진 장난감 인 경우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청빈의 상대 개념은 부가 아니라 탐욕입니다. 탐욕은 거머쥐고 있는 것이고, 청빈은 나눠 갖는다는 뜻입니다. 절제된 미덕인 청빈은 단순히 가난이 아니라, 나눠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난을 경험해 보지 못하면 나눠 가질 줄도 모를 것입니다. 내가 가난해 봄으로써 이웃의 가난과 어려움에 눈과 마음을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선택한 청빈은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삶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니카노 고지의 「청빈의 사상」에서는 청빈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청빈이란 단순한 가난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의 사상과 의지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만들어 낸 삶의 간소한 형태이다." 청빈은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만들고, 선택한 삶의 형태입니다, 예수님은 삶을 통해 청빈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청빈은 사도들과 많은 믿음의 선조들, 선교사들이 택한 삶이었습니다.
현대 가톨릭에서 청빈의 대표적인 실천신앙인으로 기억되는 사람은 테레사 수녀일 것입니다. 한 사람이 평생 124개국 5,604개나 되는 자선단체의 많은 사람에게 직접 감동을 주거 영감을 불어넣은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극빈자들에게 '어머니' 라고 불리던 테레사 수녀는 1946년, 기차에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 후 테레사 수녀는 관용과 청빈정신의 사역에 헌신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의 청빈사상은 이러합니다.
"싫증내지 말고 주되 남는 것을 주어서는 안 되고 상처를 받을 때까지 고통을 느낄 때까지 주며,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누는 방법을 제대로 알게 된다."
신앙의 본을 보인 선조들은 청빈을 위해 애썼습니다. 마음과 몸이 하나 이기에 육체의 편안함은 영의 나태함을 가져온다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청빈을 선택하여 자신의 삶은 간소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애쓰고자 최대한 노력했던 것입니다. 청빈은 하나님의 일꾼이 가져야 할 소중한 덕목입니다.
새로운 삶을
소망하며
갖고 싶은 것을 마음껏 갖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인간의 탐욕이 오늘날의 비극과 불행을 초래하였습니다. 지금 내가 누리는 편리함과 부유함이 누군가의 궁핍에서 시작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가장 낮은 자리, 가장 청빈한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애써야 합니다. 다음의 시를 읽으며 청빈의 삶을 다짐하는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힘들고 비죽비죽 웃을 일 없어도
아름다운 기도와 함께 가을은 그렇게 가고 있습니다.
햇귀가 투명하면 노을이 곱듯
없이 살아도 아쉬움 게 없는 삶을 위해 바람으로 몸 가린 채
가을 속에 서 보면 세속에 물든 내 남루한 삶도
물에 행군 쌀 톨처럼 순결해집니다.
굽이굽니 넘어가는 들노래가 허우대 좋은 허수아비더러 청빈을 배우라 함에 만행길 떠나는 나그네 봇짐에 얹혀
너도, 그리고 나도 하염없이 흘러간 가야 합니다.
저어기, 가을 끝에까지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 : 6-10).
▽ 그동안 내가 가장 소유하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떠올려 봅시다.
▽ 그것을 가졌을 때 충분히 만족하는 마음이 들었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정말 나의 신앙생 활과 가정, 다른 관 계에 긍정적 영향을 주었습니까?
▽ 만족과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했다면, 예수님과 바울, 그리고 테레사 수녀의 삶을 떠올리 며 소유하고자 했던 것을 포기하는 다짐을 해 봅시다.
한국장로교출판사
지은이 : 박기철
첫댓글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는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주님께영광
하나님의 일꾼은 가장 낮은 자리 가장 청빈한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애써야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