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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道)의 씨앗을 잉태하고(태을금화종지) 2/4
부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한 유명한 선사(禪師)가 대답했다. "마음이 곧 부처니라."
몇 년이 지난 후 그 제자가 똑같은 질문을 하자 선사는 대답했다. "부처도 없고 마음도 없느니라."
"그러면 왜 전에는 마음이 부처라고 하셨습니까?"
"우는 아이 달래느라고 그랬던 게야. 아이가 일단 울음을 그치면 나는 부처도 없고 마음도 없다고 말하지."
철학이란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한 장난감, 그리고 신학도 마찬가지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경험과 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사색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내면의 과학이다. 다른 어떤 과학 못지 않게 종교도 과학적이다. 종교와 과학의 차이라고 하는 것은 방법론상의 것이 아니라 대상에 관한 것일 뿐이다. 과학은 에너지와 빛이 유동하는 객관세계를 탐구한다. 종교는 빛이 흐르지는 않지만 흐르도록 변형될 수 있는 내면의 주관세계를 탐구한다. 그래서 과학은 종교보다 수월하다. 단 한 순간이라도 종교가 과학보다 단순하다고 생각되어 본 적은 없다. 그것은 고등 과학이다. 과학보다 단순해질 수 없다. 그것은 한 차원 높은 과학이다.
먼저 빛이 내면으로 홀러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그대의 존재에 가 닿고, 그대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면 그때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거기에 그대는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만 존재한다. 그대가 존재하는 곳은 껍데기일 뿐이다. 빛이 바깥으로 흐를 때 그대가 존재한다. 그 껍데기 속에만 그대가 존재한다. 그대의 진정한 자아란 '참'자가 붙은 '참자아'이다. 그것은 현재 그대의 자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참자아'는 만물의 자아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커다란 탈바꿈이 일어나야 한다. 자연은 그대로 하여금 바깥으로 흐르도록 조장해 왔다. 자연의 기능은 끝났다. 인간에 관한 한 자연은 그 한계에 도달하였다.
이제 인간이 자연보다 더 나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자연적으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그대가 스스로 설 수 있는 지점에까지 그대를 데려다 놓았다. 인간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인간은 이제 어른이다. 자연은 더 이상 그대를 길러주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자연적인 진화는 끝이 났다.
이것은 사실이다. 과학자들조차도 점점 이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하고 있다. 수천 년이 흘렀는데도 인간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마치 자연의 활동이 끝나버린 듯 인간은 그대로이다. 이제 인간은 성장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아나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의 호기심에 그쳐서는 안된다.
철학은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종교는 매우 진지하고 확실한 탐구이다. 그것은 하나의 공부이다. 그리고 호기심과 공부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호기심은 아직 어리고 그냥 머리 한구석을 긁적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긁고 싶어 긁으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철학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죽는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철학 속에는 그대 자신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대는 저만치 떨어져 남는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는 있지만 그것이 생사의 문제는 되지 않는다. 지식을 축적하기만 할 뿐 실천은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한 유명한 유교 학자가 있었다. 그는 팔십에 가까운 노신사였는데 그의 학문과 통찰력에는 견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소문이 들려왔다. 그의 학식을 능가하는 새로운 학문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 노신사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서라도 매듭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긴 여행을 떠났다. 몇 달간의 힘든 여행 끝에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한 뒤 방문한 목적을 알렸다.
새로운 선문(禪文)을 이끌어 가고 있던 선사(禪師)는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말했다. "악행을 피하고 되도록이면 많은 선행을 베푸는 것,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전부이지요."
이것을 듣자 그 늙은 유교학자는 발끈하여 소리쳤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먼 길을 왔소. 그런데 세 살 난 어린애도 아는 그 따위 말을 나에게 가르치려 들다니. 누굴 놀리는거요 ? "
그러자 그 선사가 말했다. "놀리는게 아니요 선생. 한번 생각해 보시오 비록 세 살 난 어린애가 아는 것이라도 팔십이 되기까지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 아니오."
종교는 어떤 것을 아는데 있지 않고 그것을 살아가는데 있다. 종교는 삶이다. 그것이 자신의 삶이 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종교를 생활화하기 위해서는 철학적인 태도를 버리고 실험적이 되어야 한다. 각자각자가 실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학자들의 실험실은 바깥에 존재한다. 종교가는 자신의 존재가 실험실이다. 그의 몸, 그의 영혼, 그의 마음이 바로 실험실이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실험하고 있는 사물에 집중해야 한다. 이 작업은 눈을 뜬 상태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종교의 작업은 눈을 감은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세계에서는 실험자와 피실험자가 동일하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하다. 헛갈리고 이상하고 이해가 안가고 앞뒤가 안 맞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종교의 세계에서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이 동일하다. 과학의 경우에는 양자가 뚜렷이 구분이 된다. 사물들은 구분이 확실하고 분명하다. 그러나 종교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의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아는 자조차도 삼켜진다. 종교는 아는 자와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지식을 주지 않는다. 아는 주체와 동떨어진 체험을 주지도 않는다. 종교는 바로 아는 자의 본질 그 자체를 준다.
종교적인 사람이 되려면 모든 철학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선험적인(a priori) 모든 지식을 버려야 한다. 선험적인 지식들은 어느 것이나 방해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탐구하는데 방해만 된다. 탐구 자체가 그 시초부터 기만되어 버린다. 결론부터 내리고서 어떻게 탐구할 수가 있겠는가. 기독교인이 되고나서 종교적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힌두교도가 되고나서 종교적이 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대가 힌두교도라면 어떻게 종교적일 수가 있겠는가? 힌두교도가 됐다는 것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는 것을, 이미 진리가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탐구의 의의가 어디에 있는가? 왜 찾아 나서려고 하는가? 그대가 할 모든 행동들은 이미 결론을 내린 것에 대한 증거나 논점의 수집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그대의 결론이 틀린 것일지. 왜냐하면 그대의 결론은 그대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가 그대에게 물려준 것에 불과하다.
사회는 그대에게 결론을 부여해 주는데 관심이 있지 그대가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깨어있는 의식을 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대가 깨닫기 전에, 어떤 탐구가 시작되기도 전에, 사회는 그 탐구를 가로막는 온갖 종류의 결론을 부여한다. 탐구자는 사회에 위험인물이 되기 때문이다. 탐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매우 편리하고 고분고분하다.
그는 단순히 명령과 지시를 받고 그것을 따른다. 그는 틀에 박힌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다. 누군가 마음에 믿음을 심어주는 작은 행위도 그를 마취시키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의 마약이다. 믿기 시작하면 사람은 계속해서 믿는다. 차츰차츰 그는 그 믿음이 자신의 경험이라고 여기게 된다. 믿음은 일종의 최면이다. 그대는 어린 아이에게 계속해서 암시를 준다. 너는 기독교도다, 너는 기독교도다라고... 그리하여 그를 교회에 데리고 가고 소위 종교 행사니 예배니 하는 것들에 잡아넣는다. 마침내 그 아이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하나의 틀에 짜맞추어 넣어져 기독교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그르다고 생각한다.
그와 똑같은 일이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나고 있다. 어린아이들은 마취당한다. 의식은 근원부터 오염 당한다. 그리고 그대가 믿기 시작하면 거기에 대한 온갖 종류의 논거와 예증을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 자의식(ego)이 개입된다. 이제 그것은 진리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다. 배후에는 너와 나 둘 중에 누가 옳으냐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게 된다. 어떻게 내가 틀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옳아야 한다. 그래서 자신을 지지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끌어 모으게 되는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매우 복잡해서 온갖 종류의 것이 발견되어질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무엇을 결정하든 상관이 없다. 비관주의자는 삶 속에서 그의 비관주의를 증명하는 온갖 증거들을 찾아낸다. 낙관주의자도 마찬가지다. 삶은 이원적이다. 삶은 역설적이며 복합적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그렇게도 많은 철학과 사상과 신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신학은 자신이 내린 결론의 울타리 안에 머물면서 철저하게 그 정당성을 확보한다.
신앙인들이 문제점을 조금이나마 자각하게 된 것은 오늘날에 이르러서이다. 이것은 대단한 축복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신앙인들까지도 의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기독교도들은 그렇게 득의에 차 있지 못하다. 그럴 수가 없다. 그들은 불교도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기독교도들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쥐고 있다고 고집할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는 기독교도뿐만 아니라 불교도와 이슬람교도와 도교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이 시대는 너무나 혼란되어 있는 것을..... 일찌기 세상이 이렇게 혼란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러나 기억하라. 이 혼란은 위대한 축복이다.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 일어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있어서의 이 혼란은 새로운 여명에의 시초이다. 미래의 사람들은 이슬람교도도 기독교도도 힌두교도도 아닌 그냥 탐구자들이 될 것이다. 믿음과 신앙의 암흑이 사라지고 있다. 미래에는 어느 누구도 믿는 일을 그만 둘 것이다. 사람들은 탐구하고 발견하면서 자기 확신이 설 것이다. 믿음은 빌어 온 것이지만 자기 확신은 자신의 경험이다.
내가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미래에 출현하게 될 그런 종류의 종교이다. 나는 현재의 그대들에게 미래를 가져다주고 있다. 나는 그대들을 순수한 탐구자로 만들고 있다. 아무런 신앙 체계도 없이, 결론도 없이, 실험에 뛰어들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면서도 진리만 받아들이는 열린 가슴의 소유자들로...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닫힌 자들이다. 그의 문과 창은 닫혀있다. 그는 일종의 감옥 속에서 산다. 그는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다. 그가 창문을 열어젖히면 햇빛과 바람이 들어오고 빗방울이 들어와 그의 신앙 체계가 흔들리게 될 것이다. 만약 진리의 바람이 사방으로부터 불어오면 그는 그의 신앙을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진리를 외면해야 한다. 그는 폐쇄된 세계, 창문도 없고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혼란시킬 수 없어 계속해서 그의 신앙을 보호해 나가야 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개인의 건강에 대해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다.
사회는 그대가 가지고 놀 장난감들을 계속해서 주어 왔다. 마치 성가시게 구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 장난감을 주듯이. 부모들은 속이 편하다. 그래야 아버지는 신문을 읽을 수 있고 어머니는 부엌에서 일을 할 수 있다. 어린애는 장난감에 빠져 있다.
인도의 시골 마을에서는 이것이 풍습처럼 되어 왔다. 들에 일하러 나가는 가난한 부인네들은 애들까지 데리고 나가야 한다. 큰 아이 같으면 혼자 놀 수 있지만 어린 아이는 그럴 수 없다. 그들은 엄마들의 골칫거리이다. 배가 고프거나 오줌을 싸거나 추우면 그들은 울어댄다. 그러면 엄마가 와서 그들을 보살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일손을 멈추게 한다. 그래서 주인은 허락하려 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어린 아이에게 소량의 아편을 먹이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어 버렸다. 아편을 먹은 아이는 나른한 잠에 빠진다. 그가 꿈나라에 있는 동안 엄마는 일에 전념할 수가 있다. 일을 위해서라면, 엄마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농장 주인을 위해서라면 이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건강에 대해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나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믿음을 던져줌으로써 그대로 하여금 실험할 필요도, 탐구할 필요도 없게 만든다. 탐구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어 훌륭한 사무원이나 시민, 경찰관 또는 유능한 수집가가 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맹목적인 믿음을 거부한다면 그대는 탐구하느라 바쁠 것이고 내면적인 것에 점점 더 관심이 많아져 바깥일 따위는 잊어 버릴 것이다.
사회는 그대가 외향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대가 보다 효율적이고 보다 쓸모있게 되기를 바란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니다. 폭탄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더라도 보다 유능하고 쓸모 있어야 한다. 군대에 있더라도 항상 능률적이고 고분고분해야 한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가 하는 일이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가 결정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따라야 한다. 그 대열에 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탐구자가 될 때 거기에 위험이 뒤따르게 된다. 그대는 더욱더 내면으로 향할 것이다. 그대의 가치관이 변하고 우선순위가 뒤 바뀔 것이다. 돈이나 권력 따위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야망이나 소유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것이며 재산에 대한 배려도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내면의 부와 내면의 천국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사회에 대해서는 점점 비능률적이 되어간다.
그리고 사회는, 내적인 것을 추구하며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삶이 많을수록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세상을 허용하려 들지 않는다. 명상하는 삶이 많을수륵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치가들은 과거에 저질렀던 것과 같은 실수들을 더 이상 저지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내면으로 향하게 되면 전쟁은 저절로 자취를 감출 것이다. 그러면 누가 싸우기를 원하고 누가 서로 죽이고 살해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런데 폭력이라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양 채색되고 있다. 국가의 이름을 빙자한 살해, 기독교 또는 이슬람교를 빙자한 살인 등, 그러나 사실 살인이란 것은 교회나 기독교나 국가 따위가 문제되지 않는다. 그것은 파괴와 살상과 미친 짓들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를 보면 거의 십 년마다 큰 전쟁이 일어난다. 곪을대로 곪은 인간의 마음이 십 년쯤 되면 터지고야 말기 때문이다. 자신들 속에 너무나 많은 독소들을 축적해서 더 이상 담아둘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광란이 발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다 더 안으로 향하게 된다면 전쟁도 사라지고 정치도 사라질 것이다. 사람이 내면으로 향하면 물론 그들은 비능률적이 될 거고 또한 능률적이 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미친듯이 일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기쁘고 행복하며 보다 축제 분위기일 것이다. 그들은 필요한 것은 충분히 만들어 내지만 불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필요한 것, 쓸데없는 것들에 너무나 많은 관심들을 쏟고 있다. 그것이 없이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움직이고 뛰어야 한다고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다른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는 그대를 믿음으로 마취시키고 그대의 탐구 정신을 시초부터 파괴한다. 그러나 종교는 그대의 탐구 정신을 되살려 낸다. 종교란 그대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명심하라. 그것은 호기심이 아니고 매우 진지한 탐구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떻게 운명을 읽을 수 있겠는가? 물론 거기에 소음은 가득하겠지만 음악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머리 굴리는 일은 많겠지만 축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리저리 오가고 끊임없이 돌진하겠지만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생사의 수레바퀴에서 끊임없는 긴장 속에 살겠지만 삶의 환희와 존재의 아름다움은 맛보지 못할 것이다. 앎의 첫걸음이자 그대에게 가장 가까운 그대 존재의 환희와 기쁨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첫 발자국은 자기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지만 호기심은 결코 삶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가려운 곳을 잠깐 긁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에 한 여관지기가 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수지를 맞출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낙담한 끝에 한 현명한 부인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사례금을 받아 넣으면서 그 부인이 말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해요 여관 이름을 바꾸면 됩니다."
그가 대답했다. "하지만 수세기 동안 그것은 '황금 사자 여관'으로 불러 왔는걸요"
그녀가 말했다. "이름을 바꾸도록 하세요 간판을 '여덟 종'이라고 바꾸고 일곱 개의 종을 문간에 달아놓도록 하세요"
그가 말했다. "일곱 개를요? 말도 안되요 그게 무슨 효험이 있겠어요?"
"잠자코 가서 해 보시구려." 그 부인이 말했다.
그래서 그는 집에 돌아와 그녀가 시킨대로 해 보았다. 그러자 매일같이 길손들이 그 앞을 지나다가 멈추어 서서 벨을 세어 보고는 잘못을 지적해 주기 위해 서둘러 여관으로 들어왔다. 마치 자신들이 유일하게 그것을 발견한 사람인 양 착각하고 들어와서는 여장들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주인은 큰돈을 버는 부자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다. 여관의 이름은 '여덟 종'인데 표시는 '일곱 개의 종'으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 그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따위 호기심을 가지고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그리고 진리에 관해서 묻는다. 그러나 묻는 눈빛을 보면 진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격식 있는 이야기는 된다. 그러나 거기에 몰두하여 열정적으로 찾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만약 그대의 찾는 행위가 아주 열정적이고 진지하고 몰두할 정도가 아니라면 그대는 그대 존재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작업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호기심으로 나선 사람은 그와 같은 많은 작업을 할 수 없다. 호기심은 그대를 변화시키기에는 불충분한 것이다. 그것은 아주 작고 미약한 에너지에 지나지 않는다. 알고자 하는 진정한 열정이 있어야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은 언덕을 올라가는 작업과 같다.
그러므로 『태을금화종지』에 있어서는 우선 이것부터 이해하라. 철학적이 되지도 말고 사회의 꼬임에 넘어가지도 말며, 믿지도 말고 불신하지도 말라는 것. 기억하라. 내가 말하는 '믿지 말라'는 것은 불신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불신도 일종의 믿음, 즉 부정적인 믿음이다. 내가 말하는 믿지 말라는 것의 의미는 믿음도 불신도 둘 다 버리라는 것이다. 아무 결론도 내리지 말고 그냥 마음을 열어두라. 그대의 무지를 숨기려 들지 말고 그냥 그대의 무지를 깨닫기만 하라. 그대는 순진한 바보가 되어야 하며 '나는 모른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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