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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6:15~23 영적 전쟁
로마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선포하고,
1장에서 죄의 종류를 나열하고, 2장에서 유대인도 죄인이며, 3장에서 궤변론자들도 그리스도인들도 죄인이고, 바울 자신도 죄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가둔다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주셨다고 선포하였습니다. 화목제물이란,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자신과 모든 백성과 기물들이 죄 사함 받기 위하여 제단에서 잡은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그 피를 언약궤 뚜껑 위에 뿌려서 사함을 받는 것인데, 그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대제사장이시자, 속죄제물 곧 화목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죄사함을 받게 하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의롭다함을 받게 하셨고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4장에서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믿음을 증거하는데, 그가 노인이 되었을 때 얻은 이삭과 이삭번제 사건을 통해서 곧 아브라함은 독생자 이삭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실 때, 믿음으로 제물로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실 줄 믿고 그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막으시고, 여호와 이레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 곧 약속을 믿는 믿음 곧 하나님께서 보내실 자를 믿는 믿음 곧 예수를 믿는 믿음 곧 죄사함과 부활을 믿는 사람에게 의롭다하심을 칭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로 인하여 5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믿음으로 화평을 하나님과 누린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부활로 인하여 소망으로 발전되는데, 마지막 심판에서 그의 진노하심에서 구원받을 것임을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조를 통해서 이를 더 분명히 하는데, 그것은 곧 아담 안에서 죄와 죽음의 비참 속에 있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과 부활로 영생을 얻게 될 것인데, 그러므로 그것은 곧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노릇 한 것처럼, 예수로 인하여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6장 본문에서는 곧 죄, 십자가의 죄사함과 칭의를 너머 그 다음을 말합니다. 6장은 곧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은혜 안에 거한 사람 곧 예수 대속의 십자가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믿음으로 칭의를 얻어 화목하게 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까. 은혜 안에 있으면 저절로 죄를 짓지 않습니까. 바울의 논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 몸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짓지 않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글개역개정판에서 이 구절의 뉘앙스는 성도가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어도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루터는 노예의지론이라는 것을 말했는데,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는 죄의 노예 곧 죄의 종으로 삽니다. 그러다가 거듭나면 하나님의 종이 되는데, 자동차로 말하면 하이브리드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일종의 자유가 생긴 것인데, 두 본성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심과 다른 것입니다. 거듭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유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어디에 순종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릅니다. 사망에 이를 수 있고, 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담이 죄짓기 전 상태로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자유를 잘 사용하라고 말합니다.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또한 율법의 종으로 살지 말고, 예수님처럼 사랑의 종노릇 하라는 것입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교훈의 본’은 바울이 로마교회에 전한 복음과 거룩한 생활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로마교인들이 바울이 전한 그 교훈의 본을 따라 마음으로 순종하여, 다시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죄는 지을 때는 당장에는 좋은 것 같지만, 갈수록 나빠집니다. 그러므로 스펄전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칭의는 이해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와 싸워야 하는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분명한 것은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전에는 결코 참된 행복, 안식, 영적 건강을 누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믿음의 길을 들어선 후에도 옛 본성이 너무 질겨 낙담하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타락한 본성 안에 잠들어 있는 난폭한 힘들을 스스로 다스려보겠다고 각오를 하기도 하나 헛수고가 되기도 하고, 아무튼 사죄의 은총을 너머 성결한 삶을 원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스펄전 목사님은 예수께서 세 가지 방식으로 죄를 없애주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1) 죄의 형벌
2) 죄의 권능
3)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범하게 되는 자범죄를
없애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일3: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의 권세와 타고난 기질로 인해 고민 중이라면, 성경의 약속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그 약속에 믿음을 두고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은혜의 언약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스펄전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그러므로 첫째로 중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이며, 둘째로 칭의의 삶을 살 때, 두 본성 사이에서 선택이 중요합니다. 옛 본성에 순종할 것인지, 새 본성에 순종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죄에 순종하지 말고, 의에게 자신을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훈련하라고 하였는데, “말하자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인데, 옛 생명에서 너희는 너희 지체들을 사용함으로 능동적으로 죄를 지었다. 너희는 죄짓는 데 수동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저절로 행해졌던 것이 아니었다. 너희가 그것을 한 것은 그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정말 그렇다. 그러므로 (거듭난) 너희는 너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그런 식(죄를 적극적으로 지었던 때와 같이 적극적으로)으로 살아야 한다. 너희 자신이 이런 일을 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의 기능과 지체와 너희의 수단을 (모두 잘)사용해야 한다.”
한 마디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의 모든 영과 혼과 육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적극적으로 사용되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죄인 되었을 때는, 의에 대해서 자유로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거듭나기 전을 생각할 때, 죄에 대해서는 본성이 그것을 따라갔고, 의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습니다. 율법? 예수님? 그런 거는 도덕 윤리 같은 거 아닌가. 무관심하고, 똑같다고 생각했고 윤리 도덕도 때론 무시하고 하여간 그저 죄의 본성대로 살았습니다.
21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그때라는 것은 거듭나기 전을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 안이 아니라, 육체 안에 있을 때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것을 생각할 때, 부끄러운 것입니다.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러나 이제는’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믿어 거듭난 새 피조물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나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아멘.
그러므로 로이드존스 목사님 왈 ‘그 때’와 ‘그러나 이제는’을 하나님은 구별하십니다.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물론 그것이 죄 없는 완전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죄의 세력은 ‘죽을 몸’에 왕노릇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세력은 ‘죽을 몸’이 아닌 (거듭난 새 사람)우리에게는 왕 노릇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을 몸’에는 죄의 세력이 왕 노릇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몸’에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았으나, 완전하지 못하며, 나의 몸은 여전히 죄가 있는 비천함이 있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영화되지 못한 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상전이 아니고, 우리를 귀찮게 하는 골칫거리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그리스도인에게 죄는 상전이요 주인입니다. 비그리스도인 안에 있어서는 죄가 정상이며 그는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지위는 자기가 위에 있고 죄는 그를 끌어내리려고 애쓰는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은 주권이 교체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죄의 세력을 몰아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거듭나서 의의 종이 됨으로 말미암아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듯이, 나무가 바뀐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포도나무에 접붙여졌기 때문입니다. 돌감람나무 가지였던 자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졌기 때문입니다. 이상하다 나는 돌감람나무 개살구 개복숭아였는데 이상하다. 그러므로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선행과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도 그것은 모레 위에 지은 집이 됩니다. 윤리 도덕이 중요하나 거듭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바울이 그러하였는데, 그는 자칭 율법으로 흠이 없는 바리새인 율법교사였는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인간이 율법을 잘 지켜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 거듭나야 의인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죄를 표범 점박이라고 하였습니다. 세탁으로 표범 점박이를 없애지 못합니다. 바울이 아무리 율법을 잘 지켰어도 예수님을 만나 영적으로 자신을 보니 점박이 표범이었다는 것입니다. 표범 점박이 같이 우리 죄가 그런 것입니다. 또한 표범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맹수 중에 하이 클래스입니다. 악어도 잡아먹습니다. 개도 잡아먹습니다. 심지어 어느 지방에서는 사람도 잡아먹었습니다. 나무도 잘 탑니다. 그런데 바울은 과거 그리스도인들을 떼로 잡아 감옥에 쳐 넣는 무서운 왕표범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다른 표범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사람의 미래는 모르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도, 타종교인도 은혜를 입으면 그렇게 변합니다. 아무튼 마찬가지로 바울이 로마교인들을 보니, 이들도 거듭나게 되었고, 이들의 삶을 보니 칭의 후에 이들은 회개하여 회개의 열매를 맺은 이들의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은 최종 목적지입니다. 할렐루야! - 로이드 존스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는 결과가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는 예수 안에서 영생입니다. 거듭났다고 해서 죄를 계속 고의적으로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고전5:5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다윗은 이것을 알아, 자신이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시19:13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원받았을지라도, 죄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구하고, 끊임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보니 정말 속 시원하게 완전히 회개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계속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것을 7장에서 언급하는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는 거듭났더라도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먼저 모세가 죄를 나병으로 묘사하였고, 또한 예레미야는 죄를 두고 표범이 점박이를 세탁해서 없앨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새 피조물이 되었음에도, 죄는 평생관리대상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19절에서 11~13절에서의 내용을 반복합니다.
10~13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옛날에, 공장에 견학을 간 적이 있는데, 센딩(가는) 회사에 기계가 있는데, 사람이 유리 바깥에서 기계에 손을 넣어 물건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 기계에 들어가 들어가서 이 작업을 하고 또는 저 기계에 들어가 저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옛사람에 들어가 죄 짓는 작업할 수도 있고, 새사람 속에 들어가 의로운 일을 작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옛 사람은 목적지가 사망, 새 사람은 목적지가 영생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선택 보다 중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주의 은혜가 넘어져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은혜가 믿음의 뿌리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동시에 선택도 은혜가 결국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에 대한 용서, 회심, 정결, 구원이 가능합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그들 속에 무엇인가 선한 게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선하심, 긍휼, 연민, 자비, 은총의 발로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은혜로’ 가능한 것입니다. “너희가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 이 말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믿음은 수로나 배관역할을 합니다. 은혜는 샘물과 시내 같은 수원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의 물결이 흘러가서 목마른 영혼들의 목을 축이는 수도관입니다. 수도관이 망가지면 정말 골치 아픕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사용되는 손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의 통로입니다. -스펄전- 그러므로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은사는 선물을 말합니다. 선물은 곧 은혜는 예수 은혜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선물을 공짜입니다. 선물을 받으십시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