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2째 단락
사리자여! 색불이공 공불이색~~~~ 역부여시
2째 단락에서는 1째 단락에서의 확실한 목표가 조견오온개공을 확실하게 보면 도일체고액 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는 조견오온개공하는 방법 , 즉 수행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조견하는 방법.
오온은 색수상행식인데 이걸 우리는 '나'라고 한다. 8만4천 경이 있어도 결국 '나'를 보려고 한다.
수많은 수행방법 있다.
참선 - 나를 찾는것,
관경 - 경을 보는 것(나를 보는 것),
염불 - 부처님 생각하는 것 (나를 부르는 것),
절하고, 다라니 하는 이 모든 수많은 방법이 결국 '나'를 보기 위한 수행이라는 것이다.
이것 저것 쫒아다녀 하는 수행방법은 결국 어리석어서 그렇다. 이게 중생이다.
수행은 신통을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어느 것이 제일 스승하냐?
어느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냐?
없다.!!
색 불이공, 공 불이색, 색 즉시공, 공 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라 (이와 같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 ..
이러한 조견으로 오온이 공한 것을 보라! 이것을 '나' 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보면 보는 대로, 구하는 것. 다 구해지나?
그래서 근심,걱정 고통이 생긴다.
마음이 상에 끄달리지 말고 '돌이켜라' 이것이 중요하다.
대상에 집착한 만큼 마음이 일어난다.
예를 들어 집에 키우는 강아지가 죽었다고 하자 ,
슬퍼겠지! 얼만큼?
애착하고 집착한 만큼 슬프다. 슬픔은 밖에 있지 않다. 뭘 돌이켜야 하나?
'집착하는 이게 뭐냐? 이 마음이?'
그 마음을 보라 실체가 있나!
'이 것' -대상을 보고 일어나는 마음을 '조견'하고 '관조'해야지.
잘 안된다. 왜? 안해 봤으니까!
그렇지만 이제 이런 마음을 '돌이켜 봐'야 한다.
슬퍼하는 마음, 기뻐하는 마음, 그런 정해진 마음이 있나? 그런 마음의 실체가 없다.
그런 마음은 어떻게 생기나? 상에 끄달리니까 생긴다.
이것 돌이켜 보는 것이 '조견오온'이다 '관조'다 , '무아'다. 마음도 실체가 없다 이게 '본래면모'다.
그리고 이게 바로 '참 나'다.
무아를 알면 사는 게 달라진다. 뭘해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저절로 무주상보시가 된다.
근심 걱정은 왜 생기나? 받으려 하니 생기는 거지! 받으려 하니 중생이고, 무아를 알면 남을 위해 좋은일
(육바라밀)하는 게 아니고 지혜를 밝히려고 좋은일 한다.
그런 사람(무주상보시)이 바로 보살이다. 보살은 받을 생각이 없다. 다만 수행을 통해 내 지혜가 밝아진다.
밝아질수록 조견오온개공을 통해 반야바라밀 실천으로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이다. 제불은 아뇩다라삼막삼보리다.
열심히 사는 것!
누굴위해 하나? 철저히 알아야 한다. '나'를 바꿀 수 있다.
'나'
모든 뿌리는 '나'다. 나를 바꾸려면 '나'를 알아햐 단다.
몸(색)과 마음(수상행식), 몸은 이슬과 같다. 이슬은 햇빛만 비추면 흔적없이 사라진다.
이몸이 결코 백년 가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어떠냐? 마음은 더 빨리 사라진다.
나는 결국 찰라 찰라 생하고 멸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 우리는 평생을 살아간다. 한 평생 수행을 통해 '나'를 알아야 한다.
결국 '나'를 찾기 위해서다. 어떤 수행이든지 '나'를 찾는 수행이다.
우린 조견오온 할 줄 모르고 자꾸 바깥에 반연한다. 끄달리는 것을 자꾸하면 끝도 없이 끄달린다.
'반연'하지 말고 '반조'하라, 내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비추어라.
끄달려 가면 결국 '윤회'다.
욕망이 일어나면(하고 싶은것) 성취(갖고 싶은걸 가졌다)하면 또 더 이루고 싶고,... 다 채우고 죽는 사람은 없다.
자 이럴때 어떻게 해야 하나? '이뭣고? ' -일어나는 욕망에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 하고 (이루고)나서 뭐 할까?
- 하고 싶은 이 마음이 뭘까?
- 결국는 '이 뭣꼬?' 가 된다. - 조견오온개공이다. => 수행은 '나'를 위한 것이다.
예를 또 하나 들어보자,
경을 왜 보는가? 나를 보기 위해서다.
꼭꼭 씹어서 밥을 먹어야 하듯이 '경'도 꼭꼭 씹으면 '나'를 잘 보게 된다.
이걸 보기 전에는 '말'에 끄달려 다닌다.
어떤것이든 좋고, 나쁘고가 없다. 이것 저것 가릴게 없다. 어떤 경전이든지 꼭꼭 씹다보면 '내 몸'을 만든다.
결국 '지혜' 하나만 남는다.
있다/없다 , 좋다/나쁘다, 중생의 어리석음ㅇ다. 산다,죽는다에 끄달리면 중생(윤회) ,
보살은 생로병사에 실체가 없음을 안다. 그러므로 윤회가 없다.
윤회는 꿈처럼 있고, 꿈처럼 없다.
망상을 일으키면 꿈이 있고 지혜를 일으키면 꿈이 없다.
꿈에서 깨는 수행을 하라!
'나'를 해결하면 저절로 해결된다.
여기서 부처님의 비유를 하나 더 들어보자.
'독화살'을 맞았다. 뭐가 급할까?
화살을 빼는게 급하다. 그럼에도 그 독화살이 '어디서 날아 왔나?', '누가 쐈는지?'....
2,3번째 화살을 맞지 마라!
있다, 없다 싸울일이 아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독화살'의 비유를 들었다.
불교는 윤회가 있나? / 없나? '무아'다, '무아론적 윤회'를 불교에서만 얘기 했다.
불교는 윤회를 인정한다. => 무아론적 윤회 , 과학도 '무아'를 인정한다. 그러나 " 단멸론 " 으로 얘기했다.
죽으면 끝난다.
불교는 '내'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를 하나?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8가지 비유를 보자.
1) 스승이 제자에게 암송 하듯이 (스승이 옴마니반메훔 할때,이 암송으로 물질적인게 건너간 것이 있나? )
2) 등불에서 등불로 옮기듯이 ( 이촛불에서 저촛불로 불을 옮길때 원래타는 불이 건너갔나?)
업보는 있되 작자는 없다. (작용(연기)뿐, 작자(무아) 없다 )
3) 거울이 영상이 비치듯이 윤회한다
4) 도장을 찍으면 자국이 남듯이
5) 태양이 돋보기를 통과하여 불이 나듯이
6) 씨앗이 변화되어 싹이 되듯이
7) 시큼한 과일을 보면 침이 고이듯이
8)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울리듯이
이렇게 윤회를 설명했다.
인연 작용에 대한 예를 들어보자,
비가 올때, 우리는 '비가 온다' 고 말한다. '비' 라는 실체가 있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현상)이다.
'비' 라는 개념을 만들다 보니 '밖'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
'보기 때문에 보는자가 생긴다.'
무슨 말인가?
눈감고, 눈뜨면 생긴다.
내가 있어서 보는게 아니다.
또, '생각하니까 생각는 자가 생긴다.'
같은 말이다. 귀막아 보라, 들리나? 코막아 보라.... 느낌 없으면 느끼는 자 없다.
그래서 작용은 있되, 작자는 없다는 것이다.
이 윤회의 뿌리는 무엇인가? 바로 '탐진치'다.
욕망에 따라가면 '종'이 된다. 욕망에 끄달리지 않으려고 참아도 '종'이 된다. 이 둘다 욕망에 '반응' 했기
때문이다. 욕망을 따라가면 '업보', 억제하면 '스트레스'가 남는다.
부처님께서는 고행, 쾌락, 욕망에 끄달리지 말고 다 버려라 했다.
있다/없다 흑백논리, 분별에서 자유로와져야 한다.
이게 '중도'다. '연기'다, '공' 이다.
알아차려라 이게 '중도' 다. 되돌아 보라!, 반문하라!
'욕망을 일으킨 이게 뭐냐?' '이뭣꼬?' 로 나를 보라, 조견오온해라!!
열번 백번 반복해도 아깝지 않는 말이다.
=연기=공=중도 로 가라!!
욕망이 일어나는 뿌리를 바로 알아차려라!
색즉시공, 공즉시색 - 공불 , 공성에서는 '생로병사'가 없다.
꿈은 망상을 일으키면 있고, 지혜를 일으키면 없다.
다음시간에 수행방법에 대해 조금 더 얘기 할 것이다!!
이상 12번째 이야기 입니다.
일화합장.
첫댓글 핵심 요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화보살님 바쁘실텐데 도반님들 위해 마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덕분에 다시 잊어버리는 나이
부끄럽지만 어쩔수 없는 까마득
덕분에 공부할수 있어 감사합니당
이 인연 공덕으로 성불 하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