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이 내린 사약을받고 피를토하며 숨을거두는 왕비 바로 폐비윤씨 연산군 1476~ 1506 생모로 훗날 연산군의 관적인 복수극을 야기한 사건의 주인공이다 폐비윤씨는 아버지 함안윤씨 윤기견과 어머니 고령신씨 사이에 태어났다 성종과 첫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명회 딸 한씨사이에 자식이없자 대비 정희왕후가 주도하여 2명의 후궁을 간택했다 1457년 3월에 폐비윤씨가 그해 6월에는 윤호의 딸이 입궁하여 숙의가 되었다 1474년 성종5년4월 공혜왕후가 19세의 나이로 소생이없이 사망하자 새로운 왕비 선택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고민끝에 성종의 왕비는 후궁중에서 뽑은것으로 성종의 후궁중 행실도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하다는 평가를받은 숙의윤씨가 왕비가 되었다 성종이 자식 연산군을 임신하고 있던것도 왕비선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476년 성종7년 숙의윤씨는 왕실의 지원속에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후궁에서 승진 케이스로 왕비의 자리에올라 윤씨는 세달만에 원자 연산군까지 출산하면서 날개를단다 그지위를 공고히 해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성종과 불화가 생기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성종은 여러명의 후궁을 두웠고 그러니까 불화가 안생기면 비정상이지 이들을 총애하면서 왕비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성격이 강한 윤씨는 남편의 탈선을 방조하지 않았고 비상을 소지하면서 후궁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명을재촉 하는거지 결국성종은 열을많이 받았서 뚜껑이 휘뜩 열렸는지 1479년 6월 공식적으로 왕비의 폐위를 단행한다 성종실록 에는 주요한 이유를 들었다 핑계 거리를 찿은거지 첫째는 1477년에 몰래 독약을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말린감과 비상을 주머니에 같이넣어 두었는데 이것이 성종에게 먹이고자 한것일수도 있다는것 둘째는 무자식 대를이를 아들이없게 하는일 반신불수가 되게하는일 무릇사람을 헤치는 방법을 적은 책에써서 상자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발각된일 셋째는 성종의 후궁인 엄씨집안과 정씨집안이 윤씨를 헤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이들에게 해가미치게 하고자한것 넷째는 상참으로 임금에게 정사를 아뢰는 일을하는 중신으로 조회를 받는날 왕비가 먼저 일어나야 마땅함에도 조회를받고 돌아온 뒤에일어나 부인의 도리를 보이지 않았다는것 다섯째는 궁중에 있을때에 대신들의 가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 했다는 등이었다 시기와 질투심으로 후궁들을 모해하고 왕을제대로 보필하지 않고 지나치게 대신들의 일에 관심을 보인다는것 등이 왕비퇴출의 주요 이유였다 사가로 쫓겨난 윤씨는 폐출에 그치지않고 1482년 성종이 내려준 사약을 마시고죽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일로 훗날 엄청난 피바람이 분다 사망후 폐비윤씨의 무덤은 경기도 경단에 조성되었다 1489년 성종은 세자 연산군을 생각하며 윤씨지묘 라는 이름을 내리게했다 그녀의 무덤은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후에 회릉으로 승격되었다 사후에 제헌왕후 로서 왕비의 위상을 잠깐 찾았지만 그기간은 짧았다 1506년 중종반정 으로 연산군이 아웃되면서 회릉역시 외묘로 격하되었다 오랜기간 동대문구에 위치했던 회묘는 1969년 10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의 서삼릉 경내로 다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