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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이야기1
이름:임순호
작성일:2004.4.22(목) 12:13
김녕이야기1
마을약사·
고려 18대왕 의왕 7년 (1153)에 탐라군(耽羅郡)을 탐라현(耽羅縣)으로 고쳤으며
최섭경을 탐라령으로 삼고 김녕(金寧)을 비롯해서 14개 현을 두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김녕리는 현구좌읍과 조천읍의 중심이었으며 설촌연대는 현
청소재지가 되기 전일 것이 읍연혁에 기술했다.
서김녕리 김호민옹(金豪敏翁)의 말씀에 의하면 남흘동(南屹洞) 남쪽 2km지점에
"삭시꼴이"라는 곳이 있는데 현재도 대나무가 있고 기왓장이 발견됐다는 것이며
속칭「왕개」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가 혈거토착(穴居土着) 지역임을 전構?있다.
이로서 김녕경(金寧境)의 역사는 20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조 18대왕 의종 7년(1153)에 김녕에 현촌을 설정하여 후망대 연대를 구축하였는데
이것은 입산봉(笠山峯)에 있었던 것을 말하며 서쪽으로 동복리(東福里) 한마당 봉화대
북촌리(北村里)와 함덕리(咸德里) 신촌리(新村里)와 삼양리(三陽里)경계의 동산에 있는
봉대에 연결되는 것이다.
김녕향사는 관덕정(觀德亭)을 본받아 건축하였는데 연대미상의 화재로 소진되어
장부 집기등 귀중한 유물이 모두 없어져서 복구를 못했기 때문에 김녕리 연혁을
엮으기가 어렵게 되었다. 일찍이 평양(平壤)에 이르기까지 상인들의 출입이 있었고
이조시에는 진상용으로 수자(袖子), 산귤(山橘) 동정귤(洞庭橘) 치자(梔子) 옷
동백나무등을 식재 장려해서 한양으로 반출했다.
○ 설촌유래
·설촌시기는 "삭시골"이라고도 부르는 신상도와 왕절동 부근에서 사람이 살기
시작한 200년전후로 추정
·고려시대에 동서도현물 설치한 당시에는 김녕현촌의 소재지였으며 관할
구역은 현재의 구좌읍 일원이었으나
·1874년 좌면을 분리하여 구좌면과 신좌면으로 행정구역을 확정하면서
동·서김녕리로 양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김녕리란 호칭은 「富하고 平安한 마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김녕 궤네깃당 전설
소천국은 알손당 고부리물에서 솟아나고 백주또는 강남천자국의 백모래밭에서
솟아났다. 백주또는 인간으로 탄생하여 열다섯 십오세가 되어 가만히 천기를
짚어 떠보니 천생배필이 될 짝이 조선국 제주도 송당리에 탄생하여 사는 듯 했다.
백주또는 신랑감을 찾아 제주도로 들어와 송당리오 가서 소천국과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부인은 아들을 5형제 낳고 여섯째를 포태중에 있었다.
백주또는 많은 자식을 먹여 살릴 것이 걱정이 되었다.
「소천국님아 아기는 이렇게 많아 가는데 놀아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것들을 어떻게 길러 냅니까? 농사를 지으십시오.」
부인의 말에 소천국은 오봉이 굴왓을 돌아 보았다. 피씨 아홉섬지기가 되는 밭이
있었다 소를 몰고 쟁기를 지워서 밭을 갈러 갔다. 백주또는 점심을 차리는데 국도
아홉동이 밥도 아홉동이 열 여덟동이를 차려서 밭에 지고 갔다.
「점심일랑 소 길마나 덮어 두고 내려가오」 백주또는 집으로 돌아오고 소천국은
계속 밭을 갈고 있었다. 이때 태산절 중이 지나다가 배가 고프다면서 들렀다.
「밭가는 선관님아 잡수던 점심이나 있거든 조금 주십시오」
소천국은 먹은들 얼마나 먹으랴 하고
「저 소 길마를 들고 보아라」
이렇게 말하였다. (註 : 길마 = 질매(제주방언))
중은 국 아홉동이 밥 아홉동이를 모조리 쓸어 먹고 도망가 버렸다.
소천국은 배가 고파 점심을 먹고자 보니 밥은 한 술도 없엇다. 할 수 없이
밭갈던 소를 때려 죽여 손톱으로 가죽을 벗겼다. 찔레나무로 고기를 구우며
익었는가 한점, 설었는가 한 점 먹다 보니 소 한 마리가 다 되었다.
그래도 초요기도 되지 않았다. 다시 소가 없을까 하여 묵은 각단밭을 보니
검은 암소가 한 마리 풀을 뜯고 있었다. 소천국은 이 놈을 잡아 먹으니 그제야
다소 요기가 된 듯 했다.
쇠머리도 두 개, 쇠가죽도 두 장을 담장에 걸쳐 두고 소천국은 배때기로
밭을 갈고 있으니 백주또가 점심 그릇을 가지로 왔다.
「소천국님아 어찌해서 배때기로 밭을 갑니까?」
「그런게 아니라 태산절 중이 지나다가 국 아홉동이 밥 아홉동이를 다 들러 먹고
도망가 버리니 할 수 없이 밭갈던 소를 잡아 먹고 남의 소까지 잡아먹으니 소도둑놈
말도둑놈이 아닙니까? 살림을 분산합시다.」
백주또는 화를 내며 바람위로 올라서고 소천국은 바람아래로 내려서서 백주또는
당오름(웃송당 언덕배기)에 가 좌정하고 소천국은 알송당 고부니모르에 좌정했다.
소천국이 배운 것은 본래 사냥질이었다. 백주또와 갈리자 좋은 활과 살을 둘러메고
노루, 사슴, 산돼지를 잡아 먹었다. 사냥을 다니다가 해낭곳 굴왓에서 정동골쳇
딸을 만나 첩으로 삼고 고기를 삶아 먹으며 세 살림을 꾸몄다.
한편 백주또는 아들을 낳았다. 아들이 세 살이 되자 제 애비나 찾아 주려고 아이를
업고 소천국을 찾았다. 행낭곳 굴왓 움막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고
찾아가 보니 소천국이 있었다.
업은 아이를 부려 놓았다. 아이는 아버지를 만났으니 어리광을 부리노라고
아버지 무릎에 앉아 삼각수(三角須)를 뽑고 가슴팍을 치곤 했다. 아버지인 소천국은
화를 내었다.「이 자식 밴 때도 일이 글러서 살림이 분산되더니 나서도 이런 불효한
행동을 하니 죽여야 마땅할 것이로되 그럴 수는 없고 동해바다로 띄워 버려라」
무쇠석갑에 세 살난 아들을 자물쇠로 잠그고 동해바다에 띄워 버렸다.
무쇠석갑은 용왕국에 들어가 산호수 가지에 걸렸다. 그 날부터 이상하게도
용왕국엔 풍운 조화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용왕국 대왕이 이상히 생각하고
큰 딸을 불렀다.
「큰 딸아기 나가 보라 어찌 든변 난변이 세어지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둘째 딸아기 나가 보라 어찌 든변 난변이 세어지느냐?」
「아무것도 없습니다. 」
「작은 딸아기 나가 보라 어찌 든변 난변이 세어지느냐?」
작은 딸이 나가 보더니
「산호수 상가지에 무쇠 석갑이 걸렸습니다.」
「큰 딸아기 내리워라」
「한쪽 귀도 달싹 못하겠습니다.」
「들째 딸아기 내리워라」
「한쪽 귀도 달싹 못하겠습니다.」
「작은 딸아기 내리워라」
작은 딸은 번쩍 들어 내려 놓았다.
「작은딸애기 문 열어라」
작은 딸애기는 꽃당에 신은 발로 세 번을 돌아가며 둘러 차니 무쇠 석갑이
저절로 열렸다. 속에는
옥같은 도련님이 책을 한 권 받아 앉아 있었다.
용왕국 대왕이 말을 걸었다.
「어느 국(國)에 사느냐 ? 」
「조선 남방국 탐라국에 삽니다.」
「어찌하여 왔느냐 ?」
「강남 천자국에 국난이 났다 하기로 세변을 막으로 가다가 풍파에 쫓겨
들렀습니다.」용왕국 대왕은 얼른 천하맹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딸 방으로 드십시오」 대답이 없고, 「둘째 딸 방으로 드십시오」
대답이 전무하고, 「작은딸 방으로 드십시오」 작은 딸 방으로 들어간다.
작은 딸은 음식상을 차리되 칠전반상기에 융숭하게 차려 갔으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탐라국 장수님은 무슨 음식을 잡숩니까」
「내 국은 소국이라도 돼지도 잡아 전 마리를 먹고 소도 잡아 전마리를 먹는다.」
아버지에게 가 말을 하니 용왕국 대왕이 말을 하되 「내 기구를 가져서 사위손 하나
못 대접하겠느냐?」
날마다 돼지를 잡고 소를 잡고 석달 열흘을 먹여 가니 동창고, 서창고가
다 비어갔다. 용왕국 대왕이 생각하되 요 사위를 그대로 두었다간 용왕국이
망할 듯했다.「여자라 한 것은 출가외인이니 남편따라 나가거라」
용왕국 대왕은 막내딸을 불러 지시하고 무쇠 석갑에 사위 부부를 들여 놓아
물 바깥으로 띄워 버렸다. 무쇠 석갑은 강남천작국 백모래밭에 떠 올랐다.
그 날부터 강남천자국에 풍운조화가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천자님은 매우 걱정하여
하인을 시켜 해변을 돌아보도록 하였다. 보고가 들어왔다. 백모래밭에 무쇠 석갑이
떠올랐는데 거기에서 풍운조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황봉사를 불러라」 황봉사가 점을 친 무쇠석갑의 문을 열자면 천자님이
모대(帽帶)를 차리고 향촉을 피워 북향 사배를 드려야 열려지겠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천자님이 그대로 시행하니 무쇠문이 열렸다. 속에는 옥같은 도련님과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어느국 삽니까?」 천자님이 정중히 물었다.
「조선 남방국 탐라국에 삽니다.」
「어찌하여 오셨습니까? 」
「소장은 귀국에 남북적을 격파하고 세변(世變)을 막으로 왔습니다.」
그때는 마침 남북적이 강성하여 천자국을 치려는 판이었다. 천자님은 팔목을
덥석 잡고 궁안으로 모셔 들였다.
그 대우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소와 돼지 열네마리를 먹었으니 과히 보름은
살았으리라. 용왕국 대왕은 해가 질 무렵에 대접을 더욱 융숭히 하면서 철갑투구,
갑옷, 언월도, 비수검 나무활 기치창검을 내어 주고 남북적을 쳐주도록 부탁이
단단했다. 이 아들(궤눼깃한집)은 억만 대병을 거느리고 싸움터로 나아갔다.
처음에 머리 둘 달린 장수를 죽이고 두 번째 들어가서 셋 달린 장수를 죽이고
세 번째는 머리빡 넷 달린 장수를 죽이니 다시는 대항할 장수가 없었다. 천자
님이 대회하여 포상을 하려 했다.
「이런 장수는 천하에 없는 장수로다. 땅 한 조각 물 한 조각을 베어 드릴 테니
땅세 국세를 받아 먹고 사십시오」
「그도 마외다」
「그러면 천금상(千金賞)에 만호후(萬戶候)를 봉하리다」
「그도 마외다」
「그러면 소원을 말하십시오」
「소장은 본국으로 가겠습니다.」
관솔을 베어서 전선 한척을 짓고 산호수 양식등 한 배 가득 싣고 억만군사를
대동하여 조선국으로 나왔다.
경상도라 77관 전라도라 53관으로 하여 이거제(二巨濟), 삼남해(三南海), 사진도(四珍島),
오강화(五江華), 육완도(六莞島)로 하여 탐라로 들어온다.
탐라바다로 배를 놓으니 마침 썰물을 만나서 우도 진질깍으로 배를 붙였다.
소섬 모살내기로 올라 예물에 와서 영기(令旗)를 세우고 소섬을 두러보니 말과
소만 가두어서 먹일 곳이었다. 「뭍섬(본도)으로 올라가자」하고 종달포에 오고 보니
소금만 해 먹을 곳이었다. 산쪽으로 올라 가기로 했다. 들판을 거슬러 올라
비자림에 올라가서 천지가 진동하게 방포일성(放砲一聲)을 놓았다.
송당리에 있는 아버지 소천국과 어머니 백주또는 포소리에 깜짝 놀라 하녀를
곧 불렀다.「어찌하여 방포일성이 크게 나느냐?」
하님이 나가 보니 「세살 적에 죽으라고 무쇠 석갑에 담아 띄워 버린 상전님이
아버지를 치러 들어옵니다.」하고 황급히 보고해 왔다.
「에 이놈 고약한 놈이다. 그 새에 무쇠 석갑이 다 녹아 없어졌을 터인데 여섯째
아들놈이 살아올 리가 만무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포일성을 크게 내며 여섯 째 아들이 들어왔다.
아버지는 겁이 나서 어쩔줄 모르고 알송당 고부니모르로 도망치다가
웃송당 당오름에 가 죽어 당신이 되어 정월 열사흘날과 10월 13일에 대제를
받아 먹게 되었다.
여섯째 아들 궤눼깃한집은 각 마을 일류 포수들을 모아다 노루 사슴 산돼지
등을 많이 잡아오게 했다. 아버지가 생시에 사냥을 잘하고 고기를 좋아했으므로
사냥해 온 고기를 올려 제를 지낸 후 방광오름으로 가서 억만
군사를 다 돌려 보내었다. 이제는 홀가분한 몸으로 한라영산이나 구경가자는 것이다.
꿩안진재로 매안진재로 북오름으로 체오름으로 차차 올라 교래 앞뱅듸로
뒷곳으로 알소남당으로
웃소남당으로 하여 테역장오리(몰장오리)로 올라가서 물을 마시고 좌우로
둘러보니 과연 용맹한 장수가 날듯했다. 이젠 그만 구경하고 바람위로 찾아가기로
했다. 바람위는 김녕리다. 웃송당으로 알송당으로 도리앞뱅듸로 지래기된밭으로
차차 내려와 백개굴왓으로 서리왓으로 오름새끼로 한가름으로 하여 어대오름
씰곳 담쟁이거멀로 남산거멀로 어웍돋은 못으로 희연못으로 화수리로 지미산전을
지나 정시물에 왔다. 여기나 좌정할까 하여 보니 여자들이 목욕을 하고
있는게 보였다.「더러워 못 쓰겠다.」
다시 좌정할 곳을 찾으려고 좌우를 살펴보니 김녕 입산봉(立傘峯)은
두 일산(日傘)을 세운 듯하고 괴살미(괴산악)는 양산 강산 불린 듯 하다.
아끈다랑쉬는 초출일산(初出日傘)을 불린 듯하다.
웃궤눼기로 들어가 보니 위로 든 바람 아래로 나고 아래로 든 바람위로 나고
알궤눼기를 굽어보니 별도 솜솜 달도 솜솜해서 과연 좌정할만 했다. 좌정할 곳을
정해 두고 사장을 내리 달아 보니 서울 둥당 과거 줄만 하다. 남물이(김녕 남흘동)는
괴괴잔잔 하고 쟁됨(김녕내의 지명)은 말발이 세고 당올래는 인발(人足)이 세고
식당빌레는 개짐승이 세다. 김녕을 한바퀴 둘러본 뒤 망태목이 차일을 치고
사흘이레 동안을 앉아 있어도 어는 누구 대접하러 오는 자가 없었다.
궤눼깃 한집은 48 상단골 38 중단골 28 하단골에 풍운조화를 내려쳤다.
단골들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심방(巫)을 데려다 점을 쳐 보았다.
심방은 「소천국 여섯 째 아들이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신당으로 상을 받으려고
내려 준 풍운조화입니다.」 점괘를 풀이했다. 단골들은 궤눼깃 한집을 모시고 물었다.
「그러면 어디로 좌정하겠습니까? 좌정지를 말씀하옵소서」
「나는 알궤눼기로 좌정하겠노라」
「멋을 잡습니까? 」
「소도 전 마리를 먹고 돼지도 전 마리를 먹는다.」
만백성들은 사정을 했다.
「가난한 백성이 어찌 소를 잡아 위할 수 있겠습니까? 가가호호에 돼지를 잡아
위하겠습니다.」「어서 그리 해라」
그리하여 만백성이 알궤눼기에 자리를 고르고 제단을 만들어 1년에 한 번
돼지를 잡아 물 한방울도 덜지 아니하고 위하는 신당이 되었다.
※ 제주도문화유산(제주도편)에서 참고
。 궤눼깃한집 이름은 태젓도라 한다.
。 註 : 해당곳 굴왓(교래리에 있음), 꿩안진재 : 꿩오름, 매안진재 : 매오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