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사
대한불교조계종 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대찰의 모습을 갖춘 것은 1284년(충렬왕 10) 시중 조인규(趙仁規)가 막대한 사재를 투입하여 중창하고 그의 원찰로 삼은 뒤부터이다. 그때부터 이 절에는 100명이 넘는 수도승이 상주하였다. 자손들이 여기에 그의 사당을 짓고, 전장과 노비를 두어 대대로 제사를 지냈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호로 지정되었다
1407년(태종 7) 조정에서는 이 절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하고 천태종에 소속시켰으며, 1431년(세종 13) 조인규 영당을 중건하였고, 연산군이 도성 내의 사찰에 대한 폐쇄령을 내렸을 때 이 절은 봉은사(奉恩寺)를 대신하여 선종본찰(禪宗本刹)의 기능을 행하는 정법호지도량(正法護持道場)이 되었다. 광해군 때는 이 절의 소속 전장과 노비를 모두 관에 소속시켰고, 1689년(숙종 15) 3월 화재로 모든 건물이 불탔을 때 성희(性熙)가 중건하였다. 1761년(영조 37) 정조가 동궁으로 있을 때 이 절에 원당을 설치한 뒤 밤나무 3,000주를 심고 원감(園監)을 두었으며, 1798년(정조 22) 조무의(趙武毅)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1876년(고종 13) 3월 26일 실화로 수십 칸의 건물이 소실되자 4년 후인 1879년에 음곡(陰谷)이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종교 탄압정책으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이어 오다가 1955년 비구니 아연(娥演)이 주지로 취임한 뒤 중창을 시작하였고, 월덕(月德)·탄성(呑星)·월탄(月誕) 등이 그 뜻을 이어 당우를 회복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산신각·종각·수각(水閣)·봉향각(奉香閣)·대방(大房) 등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양식으로 처마는 이중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동종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청계사 소장 목판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 입구에는 2개의 사적비가 있고, 사찰 주위의 계곡이 좋다.
극락전
경내 가장 뒤쪽 중심에 자리잡은 극락보전(極樂寶殿)은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를 하고 있다. 기단부는 최근에 쌓은 것이지만 중수할 때 대들보에서 ‘庚子 三年 三月'이라는 글씨가 확인되어 1900년(광무 4)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붕의 포작은 익공식이며, 처마가 이중으로 된 겹처마로 되어 있다. 앞면에는 각각 4분합의 세살문이 있다. 전각 외부의 벽화로는 수행자가 도를 깨우치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아 헤매는 것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심우도(尋牛圖) 10폭이 채색 없이 수묵화(水墨?) 형태로 그려져 있는데 현재 필선이 매우 흐려져 있어 자세히 알아보기 어렵다.
안에는 유리장 안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후불탱, 그리고 신중탱 등이 봉안되어 있다.
외부 처마 아래에 걸린 ?극락보전(極樂寶殿)? 편액은 도서와 관지가 없어 작자와 쓴 시기를 알 수 없지만 글씨로 보아서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해서체의 글씨가 별 다른 꾸밈없이 단정하면서 힘이 있어 화려함보다는 내실을 느끼게 한다. 주련은 4점이 걸려 있는데 그 내용과 뜻은 다음과 같다.
樂堂前滿月容(극락당전만월용) 극락전 앞에 걸린 보름달과 같은 부처님 얼굴
玉毫金色照虛空(옥호금색조허공) 옥호에 금빛 찬란산 빛 내어 허공을 비추시네
若人一念稱名號(약인일념칭명호) 만일 사람이 일념으로 부처님 이름 외운다면
煩刻圓成無量劫(번각원성무량겁) 번뇌 단박에 없어지고 원만성취 이루리
지장전
지장전(地藏殿)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편액이 걸려 있지는 않지만 안에 지장보살입상이 봉안되어 있으므로 지장전이라고 부른다. 주련의 내용과 뜻은 다음과 같다.
地藏大聖威神力(지장대성위신력) 지장 대성의 위신력은
恒河沙劫說難盡(항하사겁설나진) 항하의 모래만큼 억겁을 설하여도 다하지 못하여
見聞瞻禮一念間(견문첨례일념간) 한 마음으로 보고 듣고 또 엎드려 절하니
利益人天無量事(이익인천무량사) 사람과 하늘 모두에게 한량없는 이로움 주소서
극락전 아미타삼존불
아미타삼존불은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져 있다. 불상은 높이 110㎝이고 두 보살상은 높이 107㎝로 모두 조선 후기에 속하는 양식을 지니고 있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부처로서 광명과 지혜의 신(神)이 있는 보살(菩薩)로서 극락정토의 지혜와 광명을 가지고 모든 중생들을 삼도(三途 = 지옥·아귀·축생의 세계)에서 건져 끝없는 광명과 지혜의 신(神)을 얻게 하는 보살이라 하여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라 하였다.
그런데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은 한 작가의 솜씨로 보이지만, 관음보살상은 양식에서 조금 차이를 나타내며 조성 연대도 다소 올라가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 삼존불좌상은 사각형의 평면적 얼굴에 가는 눈, 작은 입과 코, 넓은 귀 등을 오려 붙인 듯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하체와 상체, 그리고 머리부분에서도 나발(螺髮)의 모습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어 다른 불상보다는 다소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조선 후기의 불상 가운데 보기 드문 정제미를 표현한 수작이라고 평가된다.
와불
청계사 극락보전 오른쪽에는 광장처럼 넓은 대지가 있고 여기에 거대한 와불상(臥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특이하게도 자그마한 자갈들을 모아서 조성한 이 와불상은 지금은 청계사의 명물이 되었는데, 1999년 지명 주지가 봉안하였다.
지장보살입상
극락보전 왼쪽에 부도가 서 있고 그 뒤로 지장보살입상이 봉안되어 있다.
1993년에 화강암으로 조성한 이 지장상은 지장전 금동 지장보살입상과 함께 청계사의 지장신앙을 느낄 수 있는 성보문화재라 할 수 있다.
극락전 후붕탱
극락보전에는 삼존불상 이외에 후불탱과 신중탱 등의 불화도 봉안되어 있다. 이들 탱화는 모두 19세기 중엽의 작품이지만 가치성은 매우 높은 편이다. 후불탱은 세로 285㎝, 가로 200㎝ 크기로 비단에 채색한 것이다.
그림의 구도를 보면 아미타불과 관음?지장보살의 아미타삼존을 중심으로 아난(阿難)과 가섭(迦葉), 타방불(他方佛) 등이 배치된 간략한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구도?형태?채색?필선(筆線) 등 전체적으로 볼 때 19세기 불화 가운 매우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특히 차분한 필선으로 밑그림을 그렸다든가, 적색과 녹색이 주조색인 반면 중간색을 많이 사용하여 부드럽고 화사한 느낌을 주려 노력했다는 점 등에서 더욱 돋보인다고 하겠다. 제작 연대는 함풍년간(咸豊年間, 1851∼1861)으로 추정된다.
극락전 신중탱
극락보전 후불탱보다 다소 앞선 시기인 1844년(헌종 10)에 그려진 신중탱은 화폭을 2단으로 구분하여 윗부분은 제석과 범천을 위주로 한 신중의 그림을, 아랫부분은 천룡을 위주로 한 무장 모습의 신중을 그렸다. 세로 172㎝, 가로 219㎝의 크기로 이전 시대의 것보다 채색이 짙어지고 윤곽선도 뚜렷해졌으나 그림의 각 형태는 도식화된 느낌을 준다.
청계사 괘불
청계사에는 비로자나삼신불(毘盧舍那三身佛)을 그린 길이 600㎝, 너비 330㎝의 커다란 괘불이 있다.
1862년(철종 13)에 조성된 이 괘불은 정확한 내용의 화기가 남아 있어 여러 면에서 도움을 준다. 곧 이 괘불에는 궁중의 상궁(尙宮)이던 차씨(車氏)라는 인물이 왕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다. 아울러 괘불 제작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증명(證明)은 은파 법담(銀坡法譚), 인성 두찰(仁城斗刹), 예봉 학윤(禮峰學潤) 등의 스님이 맡았으며, 괘불을 그린 금어(金魚)는 화남 총사(化南摠舍)와 윤익(潤益) 스님이었다.
그림의 내용은 화엄종의 주존불인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이 화엄교리를 설법하는 장면을 구성한 것인데, 비로자나불을 화신(化身) 석가불과 보신(報身) 노사나불이 협시하고 있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묘사하였다. 이 괘불의 특성은 삼신불만을 크게 묘사하여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우고 그 밖의 권속들은 철저히 배제하였다는 점인데, 이것은 시기상 다소 차이는 있지만 경기도 일대의 사찰 소장 괘불과 유사한 점으로 보인다. 곧 남양주시 흥국사(興國寺) 괘불(1858년)과 불암사(佛巖寺) 괘불(1895) 등과 구성 형식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림의 주조색은 암홍색과 암록색이며, 거기에 중간 색조의 분홍색, 그리고 군청색을 써서 화면을 어둡게 처리하였다. 아울러 채색 위에 선을 일정한 굵은 선으로 구획하여 줌으로써 그림이 선명하게 보이게 하였다.
청계사 동종
극락보전 왼쪽에 위치한 종각에 봉안되어 있으며, 현재 보물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110㎝, 입지름 76㎝로, 종의 표면에 ‘康熙四十年辛已四月日鑄成 廣州靑龍山淸溪寺大鐘七百斤'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1701년(숙종 27)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문에 따라 본래 청계사에서 제작한 것이 분명하지만 한동안 봉은사에 봉안되어 있다가 1975년 다시 청계사로 옮겨와 봉안하고 있다. 이 종은 범종 가운데서 대종에 속하는 큰 종이며, 조선 후기 범종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감도는데, 종의 꼭대기는 수평으로 펑퍼짐하지 않고 약간 둥그스름하게 불러 있고, 그 한가운데에 서로 반대쪽을 향해 있으면서 몸이 엉켜 있는 쌍룡의 용뉴가 돌출해 있어 여기에 쇠고리를 꿰어 종을 매달았다. 어깨 부분에 돌려진 띠는 그 안에 연속으로 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고, 맨 아래쪽 종구(鐘口)의 둘레를 장식한 띠에는 보상화문(寶相花紋)이 연속으로 새겨져 있어 신라 이래의 고유양식을 나타내면서 화려한 장식효과를 내고 있다. 한편 보살입상은 연꽃 가지를 쥐고 구름 위에 서 있는 모습인데, 유곽과 유곽 사이에 모두 네 개가 조각되어 있다. 이 같은 보살상은 보은 법주사 종(1636년), 문경 김룡사 종(1670), 양산 통도사 종(1686) 등의 17세기 범종에서만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 종의 제작을 주도한 사인(思印) 스님은 수타사 종(1670), 통도사 종, 강화 동종(1711) 등 모두 8구의 종을 제작한 이 시대의 대표적 승장(僧匠)이지만 그 자세한 행장은 알려진 바가 없다.
청계사 소장 목판
청계사에는 본 사찰에서 판각되고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14종 466판에 달하는 경판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466판의 경판 가운데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총 213판으로 가장 많은데
이들 경판 가운데 간기(刊記)가 명확한 것은「묘법연화경」(1622),「고봉화상선요」(1623),「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1623),「불설천지팔양신주경」(1831), 「대장경목록(1834)」, 「수영대명왕대다라니」(1902) 등이다. 이들이 모두 청계사에서 발행된 것으로 볼 때 여타 간기가 명확하지 않은 경판들도 모두 청계사에서 판각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