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작] 이상은
겨울, 미술관 / 이싱은
로트렉의 말이 웃고 있다
샤갈의 닭이 울고 있다
칸딘스키는 알 수 없는 음악을 연주한다
마티스는 수줍음을 숨기고 강렬하다
바에서 만난 남자가 전시회 티켓을 주었다
친구에게 자랑하며 찾아간 덕수궁은 겨울 날씨에 치여 쓸쓸했다
내가 걸려있는 벽이 보이는가
사람들은 날 보지 않고 지나간다
봐주세요, 봐주세요, 나의 향기를 맡으세요!
단정한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한다
겨울, 미술관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엄마를 찾는다
엄마, 엄마가 늙는 게 싫어
더 이상 늙지 마세요
난 엄마에게 젊어 보이는 선글라스를 끼운다
엄마와 내가 손잡고 미술관에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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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회 지용신인문학상 심사평
응모작품이 질이나 양에 있어 예년에 못 미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성에 차지 않았다. 요즈음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여러 문제점이 다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남의 시를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알지 못한다. 시를 읽는 가운데 좋은 시를 읽고 감동하고 이어 시를 쓰게 되는 것이 흔히 있는 시수업의 순서인데, 이것이 다 생략된 채 창작교실 같은 데서 기계적으로 시 쓰는 법을 익혀 억지로 시를 만들다 보니까 이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가 싶다. 한편 표현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시를 쓰겠다는 사람보다 말의 맛에 빠져 시를 쓰겠다는 사람에 더 신뢰를 둔다는 한 외국 시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같은 불만에도 불구하고 당선작으로 뽑을 만한 시는 여러 편이 되었다. '메리제인'(정수지)은 궁상과 청승이 없이 경쾌하고 밝아 좋았다. 더듬거리고 우물거리는 대목도 없이 발빠르고 날렵하다. 휘파람이라도 불며 환한 대낮에 꽃길을 가는 느낌을 주는 시들이다. 다른 시의 성적인 이미지들도 칙칙하고 찐득어리는 대신 수채화처럼 곱다. 한데 작품의 편차가 심하다. '그 겨울날엔'(고봉국)은 특이한 분위기와 정서를 잘 그려낸 아름다운 시다. "쓸쓸함과 낭만이 너무나도 서글퍼", 또는 "쓸쓸함과 낭만이 떨어져 내린 자리" 같은 치기어린 거슬리는 표현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거울'(라한희)은 삶의 의미 따위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상당한 수준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데 이상하게 머리로 쓴 시라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다.너무 큰 얘기를 하려는 중압감을 벗어버리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겨울, 미술관'(이상은)은 감각이 모던하고 신선하여,시를 읽는 재미를 한껏 맛보게 해준다. 어려운 내용이 아니면서도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발상이 상식적이거나 평이하지 않은 것도 이 시의 좋은 점이다. 같은 작자의 '너에게'는 뛰어난 사랑 시로, 말을 다룸에 있어 상당한 수준임을 짐작케 한다. 토의 끝에 심사자들은 이 네 응모자의 시 중에서 이상은의 '겨울 미술관'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20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자 이상은씨 인터뷰
악어가 되고 싶었다. 아니, 악어 그 자체인지도 몰랐다. 두텁고 견고한 껍질로 마음을 감싸고, 때로 타인에게 날선 이빨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후벼 파는 듯한 마음의 통증은 점점 더해졌다. 자신이 자신에게 거듭 해 생채기를 내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상처는 어느새 몸뚱이 전체를 삼켜버릴 듯 커졌고, 그러다 시를 만났다.
20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자인 이상은(44·사진)씨. 그는 서울 홍대 앞 카페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 퍼포머다. 무대 위에서 자작시를 낭송하고 시로 인해 촉발된 즉흥 언어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 ‘악어’라는 닉네임으로 더 익숙한 그에게 시 쓰기와 퍼포먼스는 일종의 치유 행위이기도 하다.
스물셋에 발병한 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고 살기 위한 본능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때로는 배설, 때로는 갈구. 때로는 소통을 원하는 글쓰기 덕분에 자존감을 회복했고 혼자만 아프다는 오만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씨는 “시 쓰기는 내가 사랑하는 ‘너’와 소통할 수 있는 길이었다”며 “소외에 대한 공포와 육체의 파괴에 대한 공포가 있었는데 많이 극복했다”고 밝혔다.
특별히 시를 쓰고자 한 적은 없었다. 처음에는 에세이를 썼다. 긴 글을 계속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짧아졌고 그것은 곧 시가 됐다. 특별히 시 공부를 한 적도 없다. 이기적이어서 남의 글을 읽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씨. 그러나 요즘 조금씩 시 공부의 필요성을 느낀다. 서점에 나가 새로 나온 시집도 들춰보고, 좋은 시로 이름난 시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씨는 “지금까지는 자유롭게 시가 뭔지도 모르고 썼는데 앞으로는 시의 맛을 제대로 느끼고 표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수상작 ‘겨울, 미술관’은 미술 전시를 보고 나서 쓴 시. 수많은 작가들의 그림 중 주목받지 못하는 작품 속에 자신을 투영했다. 당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던 외로웠던 마음이 작품에 반영된 것. 그는 “이 시를 통해 ‘누구나 사랑받을 가치가 있고 사랑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했다.
▷수상 소감은.
“다소 어깨가 무겁습니다. 지금까지는 자유롭고 즐겁게 놀듯이 썼는데 앞으로는 미지의 독자를 상상하며 말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에 사뭇 비장해집니다. 심사위원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시, 과정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아주셔서 고마운 마음 가득입니다.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즐겁게 계속해서 쓰겠습니다.”
▷작품을 구상할 때 특별히 의식하는 것이 있는지.
“없습니다. 단어 하나, 제목 하나 떠오르면 그냥 씁니다. 즉흥성이 강한 편입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가 쓴 작품 중에는 저의 아픔, 저의 경험을 형상화한 작품이 많습니다. 일종의 자가 치료를 하고 있는 셈이죠. 다만 소망이 있다면 사람들이 제 작품을 재밌게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퍼포머로 활동 중인데 주로 어느 곳에서 공연 활동을 하는지.
“지금까지는 서울 홍대 앞의 복합문화공간과 피아노가 있는 카페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정기적으로 했던 곳은 지금은 사라진 행복확대재생산의 ‘퀘스천 데이’였습니다.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매주 수요일 모여서 공연을 했었습니다. 부암동에 있는 라이브&갤러리 카페 ‘로사’에서도 공연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평소 정지용 선생과 작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아름다운 언어를 정감 있게 표현하신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시인입니다. 그래서 이번 수상이 더욱 영광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시집을 발간할 예정입니다. 또 퍼포먼스 세 편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쓴 시들인데 몸이 약 부작용으로 비대했기 때문에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살이 많이 빠져 공연을 위해 몸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중 ‘하얀 나비’라는 극시가 있는데, 자기 상처를 스스로 극복해가는 이야기입니다. ‘길 위의 집’은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에서 정신적 잉여 상태를 묘사한 시입니다.”
<약력>
1971년 서울 출생
1994년 성균관대 유학대학 유학과 졸업
1995년 성균관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중퇴
현재 퍼포머 ‘악어’ 로 공연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