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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재래종교와 기독교에 관한 연구
차 례
제1장 서 론 1
제1절 문제제기 1
제2절 연구방법 및 방향성 4
제2장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과 무속신앙 6
제3장 무속신앙의 기본구조 9
제1절 무속(巫俗)의 정의 9
제2절 巫俗의 世界觀 11
1. 宇宙觀 12
2. 神觀 14
3. 人間觀 16
제3절 巫俗의 儀式 17
제4절 巫俗과 歌舞 18
제5절 무속과 강신무의(ecstacy) 22
제6절 한(恨)의 상징으로서의 무속신앙 23
제7절 마을 공동체의 주재자로서의 ‘무당’ 29
제4장 무속신앙이 한국재래종교에 끼친 영향 31
제1절 무속이 불교에 미친 영향 31
제2절 무속이 유교에 미친 영향 34
제3절 무속이 도교에 미친 영향 38
제4절 무속이 한국인의 심성에 미친 영향 41
1 의타심(依他心) 42
2. 보수성(保守性) 43
3. 운명신앙 44
4. 역사의식의 결여(현실주의) 45
5. 오락성(娛樂性) 46
6. 주술신앙 47
제5장 성서 속에 나타난 무속신앙 50
제1절 신약의 관점에서 본 무속신앙 50
제2절 구약 속에 나타난 무속신앙 53
제6장 무속신앙과 기독교 62
제1절 무속신앙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 63
1. 신앙 생활에 미친 영향 63
(1)기복적 신앙 64
(2) 비윤리적 현실 생활 65
(3)강신(降神) 위주의 신앙 66
(4) 감각적 체험 생활 68
2. 교회에 미친 영향 69
(1) 「굿」화한 교회 69
(2)교회에 대한 신당 개념 70
(3)무속화된 부흥사 73
(4) 물량주의적 가치 74
3. 예배 의식에 미친 영향 75
(1)과열된 예배 75
(2)방관자로서의 예배 76
(3)기복적인 예배 78
제2절 무속적 신앙이 일어나는 이유 79
1. 세계적인 신비주의적 종교현상 80
2. 한국 사회의 불안정 81
3. 교회 내의 구조적인 문제 81
4. 오순절주의의 영향 82
5. 적극적 사고 방식의 영향 84
6. 교회 성장 신학의 영향 86
제3절 초대기독교인들의 기독교 수용 형태 87
제4절 무속과 기독교의 차이 95
1. 기도와 축원 99
2. 설교와 공수 101
3. 찬송과 가무 103
제5절 무속현상에 대한 목회적 대응 105
제7장 무속에 대한 평가와 기독교의 토착화 108
제1절 무속에 대한 평가 109
1. 무속에 대한 역사적 평가 109
2. 무속에 대한 기독교의 평가 114
제2절 무속과 기독교의 만남 120
제3절 기독교 문화와 토착화 126
1. 한국 교회와 복음의 토착화 126
2. 토착화의 성경적 근거 128
3. 토착화의 과정 134
4. 기독교와 한국 무속신앙의 수용 138
제8장 요약 및 결론 142
참 고 문 헌 148
제1장 서 론
제1절 문제 제기
기독교의 역사는 ‘복음의 문화적 전위’(轉位)의 역사이다. 복음이 어느 문화권에 선포되든지 복음이 그 문화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의 수용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이런 복음과 문화의 만남에서 현상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여러 가지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복음과 문화의 만남으로 창조적인 에너지가 형성되어 그 문화가 생기를 되찾고 복음도 그 문화 토양에서 꽃을 피워야 한다. 이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히브리 문화권에서 태동했던 복음의 씨앗이 헬라 문화, 라틴 문화, 앵글로색슨 문화, 그리고 미국의 청교도 문화에서 그러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우리 한국 교회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 땅에서 천주교의 역사는 200년이 넘고 우리 개신교의 역사는 100년이 넘은지 오래다. 이 시점에서 볼 때에 선교 100년의 연륜을 헤아리는 한국 교회가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는 사실은 괄목할 만하다. 특별히 교회 성장면에서 볼 때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 하였다.
그러나 한편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당면한 문제가 많다. 교회 자체에서 자성과 참회의 소리가 드높고 외부로부터 많은 비난과 질타를 받고 있는 현실이다.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들은 물량 주의, 기복 신앙, 교회의 대형화, 이기적 개인주의, 개교회 중심주의, 헌금 양태와 그 용도 문제, 신학교 난립 문제와 그에 따른 목회자의 자질 문제, 교파 분열, 교회 난립, 경직된 보수주의, 율법 및 교회 주의, 신비적 열광 주의, 신앙과 생활의 불일치(이원론적 신앙생활), 세속화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병적인 원인이 어디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한국 교회의 현주소에 대한 진단은 무엇인가.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이 잘못 정립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한국 토속신앙에 침식되고 동화되므로 복음적 신앙을 잃지 않았는지 반문하게 된다. 환언하면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 문화를 크게 변혁시키거나 대치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침식되고 습합된 점이 많음을 보게 된다.
기독교 신앙이 한국인 신앙의 형태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잘못 정립된 다섯가지 문제를 제기해 본다. 그것은 ①기복적 신앙, ②혼합적 신앙, ③개인주의적 신앙, ④타계적 신앙, ⑤과거 지향적 신앙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에서 지적된 비기독교적인 신앙의 모습이 한국 기독교인의 의식구조에 잠재해 있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진통을 겪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선 자리를 재확인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바로 이 전환점에서 우리는 「이 땅 위에 기독교 문화가 과연 어느 정도 정착해 왔는가?」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문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되어 진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의 정착 없이는 복음의 정착, 즉 한민족의 복음화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은 한국 문화 속에 자리잡고 있는 기독교의 위치를 찾아보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질문이 제기하는 문제는 기독교의 도입의 연한이 다른 재래 종교와 비교해서 짧으니 만치, 어떻게 기독교가 한국 문화 주류에 자리잡고 정착할 수가 있느냐고 하는 문제이다. 즉 한국 문화와는 전혀 이색적인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올 때 어떻게 수용되며, 어떻게 적응하며, 어떠한 변모를 하며, 또한 서양 옷을 입고 온 기독교가 어떻게 한국 옷을 입을 수 있으며, 한국적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에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2백년(구교) 동안은 한국의 개화기로서 서구 문화와 문명을 수용하는 시기로 한국의 전통 문화에 대해서 경시한 것이 사실이고, 또 기독교 복음의 본질상 한국 재래의 구습과 미신을 타파하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이로 인해서 한국의 토속적 신앙이나 전통 문화는 무시되고 기피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한국 기독교회는 복음의 씨앗을 파종하고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해서 그 토양인 한국의 전통 문화와 전래 종교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져야만 하게 되었다. 한국인의 종교심성과 의식구조를 깊이 성찰하고 거기에 맞는 선교 전략이 기독교회가 복음이나 신앙의 이름으로 전통 문화와 종교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된다. 최소한 전통 문화의 내용은 거부할 수 있으나 그 내용을 담은 형식은 벗어날 수 없다. 즉 한국인의 전통적으로 공유하는 문제의식, 사유 방식, 정서에 뿌리 박힌 표현 등으로 복음을 수용하고 신학을 정립할 때 비로소 설득력 있는 한국적 신학을 수립하고 나아가서 한국의 새로운 문화 창출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제2절 연구 방법 및 방향성
기독교가 한국 땅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극단적인 두 가지 형태를 생각할 수 있다. 그 첫째는 개종자가 자기의 전통적 문화나 종교적 유산을 거부하면서 무조건 새로 도입된 기독교에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형태이다. 어떻게 보면 초기 선교사들이 이런 입장을 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개중에는 전통 문화에 대해 이해하려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체로 무시하거나 기독교적 문화로 대치하려는 경향성이 강했다고 할 수 있고, 새로 개종한 사람들도 서양식으로 사는 것이 마치 기독교인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다른 극단은 기독교를 한국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많은 문화적 요소의 하나로 취급하여 전통 문화 속에 완전히 흡수해 버리는 것이다. 나라의 주권과 개화에 이용한 듯한 초대 급진적 기독교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초기의 전형적인 기독교의 수용 태세는 전자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자기의 과거와 전통에 대해 전적으로 이를 거부하려는 개종한 기독교인들에게는 자기 자신이 형성되고 몸담아 온 자기 문화에 대해 건설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연구가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 기독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입장은 서구의 기독교를 흉내낼 뿐 진정한 주체적 기독교 이해는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태도 때문에 전통적 문화나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행태를 택하건 종합이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 비록 전통 문화(특히 무속 신앙)에 대해서 부정적이거나 거절하는 입장에 서 있었을지라도 한국 전통 문화는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무속의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무속은 중요한 민간 신앙으로서 한국인의 편재된 종교 현상 체험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 온 살아 있는 신앙 체계로서의 무속은 소위 고등 종교라고 하는 불교나 유교, 그리고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끼쳐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 종교 현상의 특이점으로 모든 종교의 무속화(巫俗化)를 말하며, 이에 대한 평가를 긍정 또는 부정적으로 하고 있다.
무속과 복음의 대치 현상은 한국 문화의 서구화 경향과 발맞추어 복음의 일방적인 이김으로 평가되었지만, 그렇게 통용되었던 판단을 내용적인 수용과 창조적인 상호 변형의 종교학적인 살핌을 통하여 재고해야 할 국면에 이르렀다. 시골의 촌락에서는 무속의 만신과 무당들의 기능을 기독교의 사제나 목사들이 단순하게 대체하는 경향이 짙었고, 오랫동안 당제(堂祭)들을 통하여 익숙해 있던 공동체적인 말을 지도자로서의 큰무당의 기능을 기독교의 목회자들이 이어받은 일이 어려워서 발생하는 역기능성도 많이 발견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종교현상 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는 이 백 년의 선교 역사를 통하여 선사 시대로부터 전승되어 온 한국의 종교 현상 위에 껍데기를 두르는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질그릇의 겉에 외피로 도금하는 과정을 통과하고 있으며, 내용적인 침식 과정은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런 안목에서 무속과 복음의 만남은 기층 문화적인 합류요, 창조적인 과정이며, 이는 기독교의 자리 매김을 위한 생명선과 같은 숭고한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뿌리를 깊숙이 내리지 못하는 나무는 비바람과 폭풍이 닥쳐오면 넘어지거나 뿌리째 뽑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적극적인 판단을 위하여 기독교의 복음을 수용할 한국 전통 문화의 실체와 그 기본 구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이 기독교를 포함한 한국의 종교와 한국인의 심성에 미친 영향이 무엇이며, 복음이 한국에 전래되면서 어떻게 토착화되어 있으며, 앞으로 한국 기독교가 한국인의 무속적인 심성과 전통 문화를 어떻게 수용하며 극복할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제2장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과 무속 신앙
오늘날 한국에는 여러 가지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들 종교를 크게 분류하면 불교‧유교 및 기독교와 같은 기성 종교와 동학을 효시로 하여 발행한 증산교, 대종교와 같은 신흥종교와 항간에서 전통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점복(占卜)‧풍수(風水), 무속(巫俗) 등의 민간신앙이 있다. 그러나 한국의 기층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기성 종교나 신흥종교가 아니라 민간신앙이다. 민간신앙은 고대로부터 민간에 전승되어 온 주술적(呪術的)인 종교적 복합체인데, 이 민간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무속 신앙(巫俗信仰)이다.
H. B. Hulbert는 「대한제국사 서설」에서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에 대해 “한국인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신앙은 원시적인 영혼 숭배 사상이며 그 밖의 모든 문화는 그러한 신앙 위에 기초를 둔 상부 구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원시적인 영혼 숭배라 함은 정령설(精靈說), 샤마니즘, 배물교적 미신(拜物敎的 迷信) 및 자연 숭배 사상을 일반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유동식 교수도 그의 책 「한국 종교와 기독교」에서 “한국인의 심성을 결정한 것은 무교”라고 말하였다. 그 한 예로서 한국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를 들 수 있다. 단군신화는 샤머니즘의 창작이다. 13세기말 고려의 충렬왕 시대에 보각국사 一然이 편찬한 三國遺事 속에 기록된 神話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갓 佛僧이 창작한 이야기가 아니다. 실은 한국에 부족국가가 형성되던 고대 조선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의 기록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 이전의 샤머니즘 시대에 형성된 이야기다. 그런데 祭政一致時代의 부족사회 형성 신화라는 점에서 이것은 당시의 신앙이었던 샤머니즘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대체로 일치된 것은 최남선의 해석에 따라 단군이 무당이라는 점이다. 단군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무당의 칭호의 하나인 ‘단굴’의 사음(寫音)이다. 이것은 蒙古語 Tengri와 공통되는 말이며, ‘텐그리’는 天 또는 崇天者 곧 무당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단군은 祭政一致 시대의 정치적 軍長인 동시에 종교적 祭司로서의 무당(Shaman)이었던 것이다.
태백산이란 ‘산’이며 이란 天帝, 太陽, 神 등을 의미한다. 곧 샤머니즘의 主神 하나님을 제사하는 산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神檀樹 곧 ‘서낭당’의 神木이 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城邑을 꾸미었다는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단군신화는 전혀 샤머니즘이 낳은 開國神話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고대로부터 한국에 전해 오는 신화였다. 실로 샤머니즘은 한국 문화 형성의 바탕을 흐르고 있었던 것이며 이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 속을 흘러 온 하나의 뿌리 깊은 한국의 通俗信仰인 것이다.
유동식은 이어 한국에 전래된 모든 외래종교는 무교(巫敎)라는 종교적 바탕 위에 세워진 것이며, 한마디로 한국인의 사상은 ‘비빔밥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즉 한국 사상의 맨 밑바닥에는 토속 신앙(土俗信仰)인 무교가 있으며, 그 위에 일천 년 역사를 가진 불교 신앙이 얹혀 있고, 그 위에 기독교 신앙과 서구 사상이 곁들여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무교에 대한 이해 없이 기독교 신앙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이라 할 수 있는 이 무속 신앙은 대단히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어서 모든 종교와 사상을 변질시켜 버린다. 한국의 무속 신앙은 외래 종교를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후에는 외래의 것을 표면에 내세우고 자신은 내면으로 숨어버리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언제까지나 소멸되지 않고 내면에 살아 있어 결국은 외래종교를 무속화 한다.
제3장 무속 신앙의 기본 구조
우리는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무속 신앙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한국인의 심성에 그토록 영향을 끼치고 있는 무속의 의미와 세계관을 살펴보겠다.
제1절 무속(巫俗)의 정의
무속 신앙은 신령과의 접촉을 통해서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침으로써 인간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무당(Shaman)을 중심으로 하는 주술적 종교현상이다.
그런데 이 무속 신앙(Shamanism)은 애니미즘(Animism) 또는 비타이즘(Vitalism)을 기초로 하고 있다. 애니미즘은 모든 물체에 애니마(anima)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자연숭배 또는 정령숭배의 원시종교로서 일종의 다령신앙(Polydemnnism, 多靈神仰)이다.
무속 신앙을 한국 고유의 종교처럼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아니하다. 그러나 실상은 한국만이 아니라 시베리아‧몽고‧만주‧중국‧일본 등 우리 주변의 여러 민족사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인 종교현상이다. 거의 범세계적인 보편적 원시종교 현상임이 드러나고 있다. 인류학자 캠벨(J. Campbell)에 의하면 샤머니즘은 대략 구석기시대 말에 발생한 종교현상으로 생각된다. 무속 신앙이 한반도에 언제부터 나타났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샤먼이란 용어는 흥분하는 자, 도발하는 자, 요동하는 자 등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샤마니즘 연구가 에라데(Eliade) 교수는 샤머니즘을 정의하여 “엑스타시의 고대적 기술”이라고 하였다. 곧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황홀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무교란 “노래와 춤으로서 신령을 섬기며 신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융합됨으로써 신령의 힘을 빌어 재앙을 없애고 복을 초래하자는 한 원시종교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샤머니즘을 巫敎라고 부르고 있다. 무교가 무엇인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 “巫”라는 한자의 구성이다. 巫자의 위의 “一”은 하늘 또는 神을 뜻하는 것이요, 아래의 “一”은 땅 또는 인간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한 가운데 내려그은 “∣”은 天과 地 또는 神과 人間의 결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양면에 “人”字가 둘이 들어서 있는 것은 바로 춤추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즉 巫敎는 무당을 통한 神人合一, 神과 인간을 하나로 연결케하는 종교현상이다.
한국의 샤먼은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다. 1930년대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女巫는 무당‧萬神‧丹骨‧巫女 등 약 22종의 이름으로, 男巫는 “격”(覡)으로 표시하는데, 박수‧卜術‧석사‧卜脚 등 28종의 이름으로 각각 불려지고 있다. 이밖에도 명두(鳴頭)‧태사(太師)‧여원(侶員)‧신방(神房)같은 칭호가 있고, 문헌상에는 巫‧師巫‧國巫‧차차웅(次次雄)‧선궁(仙宮)‧무격(巫覡) 등 약 23종의 칭호가 나타나고 있다.
제2절 巫俗의 世界觀
무속의 종교사상은 고등종교의 그것과 비교하면 아직도 미발달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므로 무속신앙에서 교리적 이론 체계를 기대할 수는 없다. 종교의 교리 체계는 체험의 내용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서 논리적으로 객관화할 수 있는 여건이 하락되지 않는 한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무속 사회에는 그와 같은 여건이 주어지지 못했다. 아직도 원시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으나 무속 신앙에도 그 나름의 사상적 표현이 있다. 그 사상 현상은 샤먼의 神話, 巫歌, 공수, 巫經 등의 표현 양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속 신앙에 있어서도 사상적 표현의 내용은 우주‧신령‧인간의 세 실재의 관계가 그 초점이 되고 있다.
1. 宇宙觀
샤먼의 모든 사상적 표현의 밑바닥에는 원시적인 애니미즘(animism)적인 세계관이 깔려 있다. 애니미즘은 사람은 물론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 정령(anima)에 힘입어 존재한다고 믿는 정령신앙이다. 애니미즘에 의하면, 영적이며 초자연적이며 신비한 정령은 인간과 자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높은 나무나 큰 바위에는 강대한 “애니마”가 있다고 믿는다. 인간보다도 강하거나 날랜 동물에게도 신비한 애니마가 있다고 믿는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나 빛나는 태양에도 신비롭고 위대한 애니마가 있다고 믿는다. 수목 숭배, 산옥 숭배, 천체 숭배 등의 여러 가지 “자연숭배”와 주술적 의식의 밑바닥에는 이같은 애니미즘적인 세계관이 깔려 있다. 애니미즘의 세계는 생명의 사회요, 갈등과 힘의 세계이다. 이 애니미즘적 세계는 모든 인간과 만물이 呪術的 因果律로 서로 얽혀 있다. 그러므로 이같은 정령의 세계에는 우연한 일이란 하나도 있을 수 없고, 만물은 살아 있는 것이다. 애니미즘의 세계에는 “무기물”이나 “무생물”같은 것이란 존재할 수 없다.
무속의 종교 사상은 이러한 원초적인 세계관을 전제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 무속 신앙에 의하면 우주는 天上界‧地上界‧地下界의 삼층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천상계는 光明界로 天神과 地神과 그 부하인 제신(諸神)들이 있고, 지상계는 중간세계로서 이에는 인류를 비롯하여 禽獸‧蟲魚‧草木 등이 군생하고, 지하계는 암흑계로서 악신과 악령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와같은 삼층 구조의 우주관은 시베리아‧만주‧몽고 등지의 샤머니즘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보편적인 우주관이다.
트란스(trance)형의 샤머니즘에서는 샤먼의 우주적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건너갈 수 있는 특기를 지니고 있다. 샤먼의 이같은 交通은 그들이 믿는 우주적 구조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트란스형의 샤먼이 우세한 지역의 샤머니즘에서는 우주관이 비교적 복잡하게 발달되고 있다. 그러나 빙의(憑依 : possession)형의 샤먼이 우세한 우리 나라의 샤머니즘에 있어서는 우주관이 비교적으로 약한 편이다. 트란스적 엑스터시 체험에 있어서 샤먼의 영혼은 신체를 떠나서 초자연적인 존재인 신령의 세계로 비상 또는 하강하는 우주여행을 하게 되지만, 빙의적 엑스터시 체험에 있어서는 밖에서 신령이 샤먼에게 찾아와서 그 속에 들어가 역사하기 때문에 우주관에 대한 관심의 여지가 별로 없다.
2. 神觀
무속(Shamanism)은 정령들이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하게 편재해 있으며 인간의 생사화복과 관계되는 여건들을 조장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일반인은 그 영적인 영역에 접근할 수 없고 직접 관여할 수 없다고 여기며 그 영역이나 존재가 두려운 것이라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고 이 신적 영역과 그 안에 신들을 접촉할 수 있는 자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 중재적 역할을 하는 자가 샤먼(무당)이다. 무당은 영들과 직접 교통하는 자로서 영계를 탐지하고 능력을 행사할 수 있어서 제사, 주술 등으로 재앙을 물리치며 복을 가져다주는 사제인 것이다.
무속에서 신앙 대상이 되고 있는 신령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많다. 무속 신앙에 의하면 이 천지간에는 무수한 신령과 악령들이 가득차 있다. 이렇듯 무속 신앙은 다령숭배(poly-demonism) 또는 다신론(poly-theism)적인 원시종교이다. 한국무속의 신령관은 아주 복잡하다. 김태곤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巫神은 약 273종으로 ①굿거리의 祭神이 73종, ②巫神圖의 神靈 115종, ③신당의 上祭神 138종, ④무속의 家神이 11종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렇듯 무수한 신령들을 그 계보에 따라 분류하면, ①天神系, ②地神系, ③人神系, ④雜鬼系로 각각 나누어진다.
한국무속의 신앙 대상의 약 60%가 天神‧日神‧月神‧星神‧地神‧山神‧水神 등의 자연계의 신령들로 나타나고 있다. 자연신계가 우세한 것은 한민족의 오랜 전통적인 농경적 사회구조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문화 속의 신은 특히 인간 주위의 어둡고 한적한 곳에 있으며 주로 밤에 활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공동묘지와 같은 곳은 묘지에 묻힌 시신들의 영이 귀신이 되어 그 주위에 항상 머문다고 여겨 왔다. 또한 산은 영들이 살고 있으며 죽은 자들의 영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죽은 혼이 산으로 올라간다는 개념은 대부분의 죽은 자의 장지를 산으로 택하는 것으로 살아서 아직 세상에서 활동하는 일상의 영역에서 분리된다는 개념과 함께 한다고 볼 수 있다.
巫神의 세계에는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의 高低의 순위가 없지 않다. 至上神을 하느님(天神)
으로 하고 그 밑에 지신‧산신‧수신 등이 각각 특정한 직분을 담당하고 있다. 천상계에는 하느님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일신‧월신‧성신 등이 있어 다스린다. 지상계에는 지신‧풍신‧수신‧인신 등이 있고, 지하계에는 十王神을 비롯하여 여러 신령들과 악령 악귀들이 있다고 한다. 무속의 각기 그 직분을 담당할 뿐 다른 신령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는다. 신령들 사이의 횡적관계는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같은 신령들의 경향은 전통 사회에서의 인간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들 신령은 초인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전지전능한 존재는 결코 아니다. 신령들이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 권능은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3. 人間觀
무속 신앙에는 인간은 靈과 肉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믿는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産神이 점지하고 잘 자라게 도와준다고 한다. 그래서 아기를 출산하면 밥과 미역국을 이 신령에게 먼저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무속신앙에 의하면 인간의 생사 회복 흥망성쇠는 초인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신령들의 작용으로 좌우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북두칠성은 인간의 壽福을 다스리고, 帝釋神은 어린이들을 수호하고, 大監神은 재복을 가져다 주고, 宅地神은 주부를 수호한다고 믿는다. 마마는 호기(胡鬼), 안질은 盲人鬼, 정신병은 精鬼의 탈로 믿는다. 일체 질병은 악령의 탈이나 祖靈의 벌로 오는 것으로 믿는다. 이렇듯 인간의 모든 길흉은 오로지 외부의 신령들의 작용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죽게 되면 그 사람의 육체는 썩어 없어지나 그 영혼만은 없어지지 않고 저승으로 간다고 믿는다. 무속 신앙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혼백이 셋 있는데, 사후에 그 하나는 下界로, 다른 하나는 묘지 속으로, 마지막 하나는 家廟內의 위패 속에 들어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무속에 영혼 불멸의 신앙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람의 혼백은 죽은 후에 바로 저승에 가는 것이 아니고 한동안 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면서 친척과 천지들에게 불안과 괴로움을 준다고 한다.
제3절 巫俗의 儀式
무속신앙은 실제적인 행위를 통하여 표현되는 ‘굿’이라고 일컫는 제의가 있다. 굿은 무속 신앙의 가장 두드러진 표현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무속의 제례를 총칭하여 굿이라고 부르지만, 엄격히 말하면 굿은 가무가 따르는 큰 규모의 제례이고, 규모가 가장 작은 것은 “비손” 또는 “치성”(致誠) 등으로 부른다. 그 중간 규모의 제례로는 푸닥거리와 고사(告祀)가 있다. 푸닥거리는 병자나 흉조가 발생하였을 때에 재화를 소멸하고 길복을 기원하기 위한 제의이고, 고사는 길복을 더욱 증진하고 재화를 소멸하기 위한 제의행사이다.
이같은 巫儀는 초인간적인 呪力을 지닌 행사로 확신되고 있다. 그래서 무속은 굿거리로써 공사간의 인생만사를 소원대로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점에서 巫儀는 예배(worship)라기보다는 차라리 呪術에 더 가까운 행사이다. 巫儀는 의식화된 주술 또는 주술적 의식이 되고 있다. 주술은 종교 이전의 단계에 속하는 초자연적인 힘의 조종술이다. 샤먼은 굿거리를 일종의 원형(archetype)적 의식행위로서 반복한다. 샤먼은 굿거리의 특수기능을 지닌 巫事의 전문가이다. 제의의 기계적 반복행위를 통하여 샤먼은 사제‧예언‧치병‧오락 등의 그 직능을 행사한다. 굿은 샤먼에게 있어서 가장 “창조적인” 종교 행사이다.
샤먼은 아기의 출산시 産神에, 병들었을 때에 病굿, 혼사에 혼인제, 초상엔 자리거지를 지낸다. 이밖에도 복을 비는 재수굿, 득남을 기원하는 칠성굿, 풍어를 비는 풍어제와 용왕굿, 망자의 넋을 樂地로 천도시키기 위한 진오기굿‧사자굿‧시왕굿 그리고 入巫祭인 내림굿 등 무수한 굿거리가 있다. 이들 굿거리는 그 동기와 내용에 따라서 분류하면 祈福祭‧治病祭‧死靈祭로 크게 나뉜다. 그러니까 굿거리의 최대 관심사는 기복과 양재(禳災)에 있다고 보겠다.
제4절 巫俗과 歌舞
한국적 샤머니즘의 특징이라 한다면 한국 샤머니즘에 있어서 歌舞와 밀접한 관계에 있고 그것이 문화적 단계에까지 발전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한국 역사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이라 할 수 있는 「三國志」 魏志 東夷傳에 한국 고대사회의 축제에 대한 기록이 있다. 거기에 보면 직접 샤머니즘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축제에서 신을 제사지내는 데에 가무가 거의 함께 행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중국인 眞髓가 지은 것이지만 당시의 한국인의 의례 생활에 관한 귀중한 것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신과 가무의 관계가 밀접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가무는 한국인 의례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적이라는 것은 한국 민속생활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민속문화 안에서 춤의 강한 힘을 발견하게 된다. 이조시대는 유교가 가무를 극히 제한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극히 제한을 받던 여성사회에서 샤머니즘을 통해서 춤이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춤과 샤머니즘을 결부시키는 것은 단순히 현상적 문제가 아니고 구조적 결합관계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춤에도 구조가 있다. 그것은 음악적 요소의 분석이나 악보상의 문제로 접근된 것이 아니고 기호학적 시각에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속의 굿에서 전체의례의 한 과정이라 할 수 있고 전체의례를 구성하는 가장 독립적 단위인 ‘거리’의 진행과정을 살펴 보겠다.
한 거리의 시작은 우선 음악과 춤으로만 진행된다. 이때 무녀는 아무런 가사를 노래하지 않고 마음의 준비나 관중에게 낯을 익히는 과정이고 그 의례의 서주부에 해당하며, 느린 행동이나 춤을 춘다. 신단에 절을 하는 것도 이때 행해진다. 이것에 이어서 무녀는 노래와 춤을 두 가지로 구분되어 행한다. 노래는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를 노래하고 이때 장단은 반주로 변한다. 굿을 하는 연유나 정성드리는 목적을 구술한다. 노래는 거의 정지상태에서 한 다음에 비교적 느린 춤을 춘다. 다음 단계에서는 이것이 한 단계 더 빨라진다. 이 단계에서는 노래의 가사는 거의 알아들기 어려워진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노래와 춤이 함께 행해진다. 템포도 한 단계 더 빨라진다. 무악은 더 크고 템포도 빠른 상태에서 무가가 구송되기 때문에 무가의 내용 전달은 오랫동안 굿을 보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무엇인지 짐작도 하기 어렵다. 만일 이때 새로 나타나 굿을 구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은 소리뿐이고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손짓, 발짓이며 굉음적 음악뿐이라고 느낄 것이다. 무당이 발광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때의 무가는 정해진 스토리가 아니고 무녀의 즉흥적인 축원의 짤막한 반복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복주시고요”, “수명장수 주시고요”라는 말의 반복이 행해진다. 이때 대개 “잘 한다”라는 소리가 나오거나 박수를 치는 경우가 있다. 무녀의 춤은 머리 위에서 앞뒤로 젓는 단순한 반복동작이다. 호흡이 빨라지고 얼굴이 충혈된 상태로 되어 무가를 창하지 않고 무악과 춤만이 행해진다. 이때는 신이 내렸거나 왕림한 상태이기 때문에 제주에게 신복이나 벌을 주는 의례를 행한다. 신의 노한 표정과 위엄을 보이는 행위도 이때 행해진다. 춤과 무언극 등으로 이 장면이 연극적으로 행해지는 부분이다. 이것이 끝나면 신의 축복을 즐거워하는 무녀의 무가가 행해진다. 이것이 끝나면 마을이나 개별적으로 축원하여 주는 시간이 된다. 개인기도와 같은 성격이 있다. 무녀는 ‘시주’(돈)를 거두거나 축원하는 장면이지만 개별적으로 특별히 축원하여 주는 것이 상례이다. 이러한 축원의 양식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헌금이나 축복기도와 아주 유사한 것이다.
이 기도가 끝나면 거리의 마지막이며 끝맺음이라 할 수 있는 ‘수부치기’라는 간단한 의례를 한다. 무녀가 술잔을 들고 잡귀잡신들을 간단히 향응시켜 보내는 의미의 형식이 있다. 다시 이것이 끝나면 담당무녀는 무복을 벗고 완전히 거리를 끝낸다. 무복을 입는 것은 神의 사람이라는 뜻이고, 벗은 상태는 일상적 상태로 돌아온다고 할 수 있다. 위에 예를 든 굿의 거리의 형식을 간략히 설명하였으나 모든 거리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일한 구조 안에서 삽입과 생략 등에 의해서 다양한 특징을 가진다. 즉 구조적 형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거리가 보통 20~30개 합쳐져 전체의 의례인 ‘굿’이 성립된다. 이 거리의 구조를 단순화 하면, ①노래는 없고 춤만 있음, ②노래와 춤이 교차적으로 행해짐, ③앞의 것이 템포의 단계적 변화가 있음, ④단순한 가사의 반복과 괴성 그리고 춤의 형태의 파괴적 작태, ⑤성스러운 신의 축복-노래와 축원, 춤의 회복, ⑥신을 보냄의 순서로 단순화 할 수 있다.
다시 구송‧노래‧춤의 관계를 고찰하여 보자.
춤(무악)과 노래가 일상적 차원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의 code로서 행해진다. 이때는 춤의 아름다움과 구송 및 노래가사의 분명한 전달력이 있다. 다음 단계에서는 춤은 격렬하거나 연극적 요소를 짙게 띤다. 노래나 구송의 전달력은 약해지고 행동이 주가 된다. 무언극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첫단계의 언어적 행연(verbal performance)에서 두번째 단계의 비언어적 행연으로의 변화하는 구조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일상적 차원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한국문화와의 관계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의식구조이다. 극히 슬픈 일을 당했을 때 “무어라 할말을 잃었다”고 표현하고, 또는 말을 버리고 울어버린다., 아주 기쁠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말을 잃고 웃음의 구조에서 우는 현상이 벌어진다. 즉, 전달 context에서 code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구조는 반드시 한국문화나 사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닌 인류의 보편적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5절 무속과 강신무의(ecstacy)
강신무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나탄난다. 첫째는, 입무과정에서 나타난다. 일상적인 인간이 변하여 신의 사제적 기능인으로 된다. 말할 것도 없이 무병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신이 된다. 어떤 학습이나 수도의 결과로서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신의 일방적 선택에 의해 병적 현상으로 인하여 자기 의식을 잃는 신비스러운 과정을 거쳐 자격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상성에서 질서의 혼란을 상징하는 병적 현상을 통해서 신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둘째는, 굿에서 나타난다. 굿의 과정의 첫단계에서는 일상적인 구송노래(때로는 서사적인 것)와 춤이 점점 템포를 빨리하고 드디어는 격렬한 음과 도무의 상태에 이르러 노래도 가사도 없는 극단적인 도취상태에 이른다. 무녀는 이러한 어느 순간에 자기 의식을 잃고 신의 자격을 획득하여 신의 말을 전한다. 이 두 단계를 의도적으로 구분한다면 서사시‧서정시, 스토리‧단편적 축원, 춤‧도무, 음악‧소음, 의식‧무의식 등의 대조를 보일 수 있다. 둘째 단계를 종합적으로 말하면, 거의 무의식적 도취상태에서 신의 자격으로 서정적이고 단편적인 무가만이 행해지면서 격한 춤을 추는 소음적 장면을 상기하게 된다. 강신무에 있어서는 이러한 둘째의 장면이 보다 중요한 요건이기 때문에 굿의 형식이 아무리 간소화되었다고 하여도 그 과정은 생략되지 않고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단한 의례에서는 노래와 神語, 춤과 도무의 뚜렷한 대조가 돋보인다.
제6절 한(恨)의 상징으로서의 무속신앙
무속 신앙은 개인의 원한뿐만 아니라 사회적, 특히 민중의 원한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살아서 원한이 많은 사람은 죽어서 그 원한이 종교적 신벌(神罰)로서 ‘탈’의 형식으로 인간에게 작용한다. 누구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죽어서 원혼이 되어 복수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민중의 입장에서 더욱 상징화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우리나라 무속에서 신앙되고 있는 인물 중에는 최영(崔瑩) 장군과 장보고를 들 수 있다. 중부이북 무속에서는 최영 장군을 신화하여 모시고 있다. 개성의 덕물산에는 최영사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원혼의 탈을 막고자 하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또 전남 완도에서는 장섬에 장보고를 부락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마을에서는 이 신을 위한 부락제를 지내고 있다. 전자는 고려 말, 후자는 신라 말에 있었던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시대를 초월하여 민중의 신앙으로 경배되고 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우리들에게 무엇을 알리고자 하는 상징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장보고는 자신이 충성을 다한 왕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최영은 뜻을 같이하던 사람으로부터 배신되어 죽음을 당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민중의 원한이 투영되고 있다는 살아 있는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동일시를 느낄 수 있다. 억울하게 죽은 것을 위로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고 살아 있는 민중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생활에서 항상 모순을 느끼면서 산다. 이것을 추상화한다면 한(恨)이라는 말로 표현될 것이다. 위의 두 인물신의 경우를 들어 분석적으로 생각한다면 다음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이다. 최영은 위기에 있는 국란을 평정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 개인의 차원을 넘은 것은 물론 가족의 차원을 훨씬 넘은 것이다. 흔히 큰일이기도 해도 사회를 위한 것이라 하기보다는 자신이나 가족을 위한 수단으로 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역사적으로 긴 세월 동안에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 국가적이라는 것이 판단될 때 위대한 사람이라는 결정이 내려진다. 둘째, 위와 같이 위대한 일을 한 것만으로는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은 원칙적으로 인간적인 공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공적은 인간적인 역사책에는 기록될 수 있지만 신앙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다. 그것이 신앙화되기 위해서는 억울하다는 것이 조건이다. 자기가 하자는 일이 크면 클수록 넓으면 넓을수록 한은 크고 넓다. 개인간의 원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간의 폭이 너무 좁다. 어떤 여인이 시집살이가 심해서 우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자. 그런 경우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부계제도에서 생긴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개인에 한하는 것이 아니고 여성이 남성에게 가지는, 여성의 부계제에 대한 한으로 추상화된다. 따라서 여성의 죽음은 남성의 죽음보다 원한이 많은 것이 되고 ‘한 많은 이 세상’으로 불려지게 된다. 이와같이 한이 깊이와 폭을 가질 때 신앙의 대상이 된다. 셋째는, 혈연관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억울하게 죽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의 삼족(三族)을 멸하는 법에 따라 후손이 존재하기 어렵게 된다. 또 혈족이 있다고 해도 조상으로 받들기 어려울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사람이 시조신으로 받들어진 사례는 보지 못했다. 만일 조상으로 받들어 모시게 되면 사회적 신으로 되기보다는 가족신에 머물러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그들은 집에서 임종(臨終)하면서 죽은 것이 아니고, 객사, 타살 등에 의한 불행한 죽음을 당했다. 그들의 가족환경이나 죽을 당시의 세세한 상황은 모두 원사라는 개념 안에 매몰되어 버려 한(恨)으로밖에는 표현되지 않는다.
이상 3가지를 요약하고 좀더 추상화하면 가족을 떠나서 큰 일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무속에서 모신다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것이 보다 깊은 구조적 의미가 있음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가정을 벗어나서 큰일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는 것이 한의 상징이고 한을 푸는 메커니즘이라 보는 것이 현상적인 설명이라면, 억울하게 죽는 것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무속신앙의 근본구조인 동시에 우리 문화의 한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큰일, 위대한 일을 소신대로 밀고 나가다가 억울하게 죽어도 민중의 마음속에 살 수 있다는, 즉 종교적‧문화적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속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심성이라 할 수 있다.
본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구병제(救病祭:푸닥거리)나 사령제(死靈祭)는 맺힌 病과 恨을 풀어 주는 치료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푸닥’(pudak)은 원래 장애물을 의미한다. 현실 속에서 민중의 삶을 차단하고 있는 것들, 그리고 죽은 영혼까지를 붙들고 있는 말못할 억울한 사실들을 풀어 헤치는 것이 무속의 본래적인 기능이다. 그리하여 무속은 민중의 한을 해체하려는 희망의식에서 출발한다.
또 민중은 굿을 통하여 삶에서 충족되지 않은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령과 자유롭게 교제하는 원초적인 신화 속에서 무제한의 창조와 생산능력을 가지게 되므로, 굿의 제전을 통하여 현실적인 모든 제약을 넘어서서 고향상태인 혼돈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므로 굿은 현실과 이상을 매개하고 민중의 희망의식을 반영할 수 있는 창조적인 생산력과 실천의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사령제(死靈祭)에서의 굿은 죽은 자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당한 그 영혼을 불러 억울한 사정을 ‘넋두리’하게 한다. 이 ‘넋두리’는 바로 맺힌 한이 일시에 풀어지게 하는 해한작용(解恨作用)이다. 그것은 말못할 사정을 발설하는 고발행위이다. 그리고 이 ‘넋두리’는 한맺힌 죽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상승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이 죽음은 이제 삶의 끝과 마지막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삶의 창조로 이어지게 된다.
무속의례(푸닥거리, 살풀이, 고사, 굿 따위)들을 보면 죽은 이의 한을 풀거나 잡귀를 몰아내어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누구나 세상을 사는 동안에 적든 많든 한을 가지고 살게 되고 그 중에서도 죽게 된 한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을 가지고 죽으면 그것이 신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붙거나 그것이 신이 될 힘이 되는 것이다.
무당 자신들의 생활을 보더라도 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거의 전부가 어릴 때부터 불행하고 고통에 찬 생활을 해왔다. 부모의 적절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으며 가정 자체도 파탄되고 사회적으로 천한 위치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안전감은 상실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경우는 남존여비 사상에 젖은 부모들로부터 천대받기 일쑤였고 이런 경향은 커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제적 여건이 좋지 못해서 혹은 부모의 인식이 모자라서 그들은 배움의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간혹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경우도 있으나 부모의 성격 문제로 인해 심리적으로는 불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다. 심리적으로 불행했던 그들은 불안과 갈등, 그리고 열등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다. 이런 여건 때문에 어릴 때부터 혹은 인생의 어느 시기에서부터 히스테리, 정신분열증, 혹은 심인성 신체장애를 앓고 있었던 경우가 태반이다.
그들의 생활사에 있어서 둘째로 문제되는 것은 부모에 대한 감정관계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부모에 대한 불만으로 부모에 대한 지나친 의존적 태도를 가지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부모가 핍박자로 무의식계에 존재하기도 한다. 특히 동성의 부모에 대한 적개심은 문제가 된다. 무당들의 강신몽이나 종교체험에서 동성의 부모를 상징하는 존재로부터 핍박을 받는 내용이 많은 것도 어린 시절부터 적개심이 문제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특징을 지닌 무당들의 생활사는 한마디로 ‘아픔’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고통스런 정신과적 질환은 이 ‘아픔’의 표현에 불과하다. 그런데 무당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문화조직인 무속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아픔’을 무속의 가치관에 투사해서 ‘아픔’의 의미를 찾게 된다. 이렇게 될 때 그들의 ‘아픔’은 곧 신병(무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김광일은 무당들이 바로 이러한 신병이란 해리를 통해서 자기의 고통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즉 무병의 의미 중에는 열등의식을 보상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부모로부터의 천대, 여성으로서의 무력감, 낮은 사회계급 이런 여건들은 유아기부터 열등의식을 불어 넣어주는 충분한 요인이 된다. 그 결과 여러 형태의 정신질환까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神과의 결혼이란 상징적 과정을 통하여 신과 동격이 되면서 스스로가 자기열등을 보상하고 있다. 그들의 입신과정은 신과의 상징적 결혼을 말하며, 이것은 그들 자신이 신의 부인이 되는 것이고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신의 사자’ 혹은 인간과 신의 중개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굿할 때만은 무당의 지시를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고통, 질병, 재난을 구해주는 구세자의 입장에서 서게 되는 것이다.
보통 무속의례의 주술성이나 신앙을 식재초복(息災招福)이라하여 현세이익만을 추구하는 미신으로 생각한다. 물론 의례 자체만을 보면 그러한 인상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무속이 침전되기를 되풀이하여 가면서 남긴 무속신앙의 사상으로서는 어떤 경험철학적 삶의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병을 극복하는 상징처럼 위기나 큰일로 인해 비록 억울하게 희생되곤 하여도 그 억울함이 신력으로 극복, 전환되어 비로소 민중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속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제7절 마을 공동체의 주재자로서의 ‘무당’
무속의 기능 가운데 중요한 것은 공동체적인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이 땅 위의 수많은 신령에게 벽사초복(壁邪招福)의 기원을 담았던 계절마다의 풍요 제의는, 그런 제사를 드리는 제의 공동체의 간절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 제사에는 그것을 받아 잡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는 여러 초월적 존재자가, 사람처럼 술과 고기를 즐기며 춤과 노래에 흥겨워하고 신화적 사건을 되풀이하는 의례를 즐거워하리라는 확신이 있다. 그리하여 신에게 바쳐졌던 춤과 노래, 그리고 육식들은 신을 즐겁게 한다는 제의 공동체의 믿음과 확신 아래 마을 공동체의 잔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성한 즐거움에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이가 ‘무당’이다. 이 거룩한 축제는 무속적 ‘굿’이거나 ‘굿놀이’, 그리고 잔치라거나 향연이며 동제나 별신굿의 대표적인 형태로 전승되어 왔다.
‘굿놀이’는 마을 공동체가 원초적인 면에서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을 삶 속에 일치시켰던 기층적인 이해를 틀로 삼는다. 단순히 놀이가 소비적이며 낭비적인 것으로 푸대접받는 것이 아니고, 놀이가 무질서나 장난으로 천대받는 것이 아닌 놀이와 일이 합류하는 생산성의 재현이 ‘굿놀이’에서 표현되었던 것이다.
무속은 주술적이며 제의적인 의미와 함께 공동체 구성원들의 유흥적이며 오락적인 기능을 함께 엮어 갔다는 면에서 기층 문화 속에 살아 있는 전통으로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속에서 우주적 산(Cosmic Mountain)이나 세계 목(World Tree)은 이러한 종교적 상징의 공동체성을 표현해 주는 하나의 징표이며, 이는 종교학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모두는 우주의 중심을 통하여 마을 공동체의 존재 구조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 상징주의는 무당의 기능과 맞물려서 신성의 우주축(宇宙軸)이라는 신비한 세계관을 유지해 왔다.
마을 공동체와 무당은 종교적 전승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단골 제도가 발생한다. 단골 제도란 한장의 당골이 한 마을 또 수개의 마을과 일정한 종교적 독점 관계에 있는 것을 말한다. 무당인 당골은 마을 안의 가정이나 부락 차원의 모든 의레를 행할 의무를 지고 있는 반면, 마을은 당골의 생활과 생계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당은 마을의 여러 가지 통과 의례나 생사 화복에 관한 의례, 건강에 대한 종교적 책임을 맡아, 넓은 의미에서 마을 공동체의 주재자인 것을 볼 수 있다.
무속의 기능은 여러 면에서 집단적인 공동체 의식의 수용과 표출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제4장 무속신앙이 한국재래종교에 끼친 영향
제1절 무속이 불교에 미친 영향
중국에서 불교‧유교‧도교가 전래된 연대는 문헌상으로는 기원 4세기 이후의 일이다. 무속신앙은 전통종교로서 이들 외래종교와 접촉하게 되었다. 이들 종교 중 가장 먼저 전래되어 강성한 것은 불교였다. 고구려에는 372년에, 백제에는 384년에 전래되어 왕가와 귀족층에서 佛法으로 복을 얻기 위하여 신봉하게 되었다. 신라에도 불교가 450년 경부터 들어가기 시작하였으나 오랫동안 배척당하였는데,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이 순교한 뒤의 일이다. 이렇듯 신라에 전래된 불교가 처음에 토착신앙과 크게 충돌하였으나 차츰 무속신앙과 습합(習合)함으로써 그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불교는 원래 마음을 닦음으로써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윤리적인 종교이다. 불교는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도 심오한 이론으로 발전된 철학적인 세계종교이다. 원시불교가 후대에 대승불교로 전개되면서 創敎者인 석가가 초인격으로 승화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고행의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의 해탈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대승불교는 각자의 각성으로 해탈을 얻는 자력신앙(自力神仰)에서 불타나 보살의 은덕에 의존하는 타력신앙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은 대승불교가 중국에서 한국에 들어와서 불교의 주류를 이루면서 민중 사이에 퍼져들어 갔다. 이리하여 불교는 점차 그 본래의 철학적인 연구보다는 현실적인 행복과 국가의 태평을 기원하는 신앙운동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같은 불교의 기복적 신앙운동은 天神을 비롯하여 여러 신령들에게 질병을 물리치고 집안의 행복과 평안을 비는 재래의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쉽게 손잡을 수 있게 되었다. 신라에서는 법흥왕 때(573)부터 國祭로서 팔관회를 불교사찰에서 거행하여 天神과 戰死者에게 제사를 지내었다. 팔관회는 불교의 의례와 무속의 天神‧山川神 등의 신령을 제사하던 제의를 합친 祭典으로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가 망할 때까지 지켜졌다. 이는 불교와 무속의 습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증이다.
불교를 대중 속에 심어 그 토착화에 크게 공헌한 신라의 승려는 惠宿‧大安‧元曉 등이다. 이들은 토착화의 방편으로서 전래의 무속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明郞法師로부터 유래된 주술적이 密敎는 “병을 고치고”, “복을 비는”비법으로서 민간에 유포되었는데, 이는 주술적인 무속의 기복사상과 더욱더 밀착할 수가 있었다. 한편 아미타신앙(阿彌陀信仰)도 크게 성행하였는데,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기복신앙으로 대중에게 침투하였다. 이러한 기복적인 신앙 경향은 원래의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불교를 기복적 의례 중심적인 종교로 변용케 하였다. 이같은 불교와 무속의 혼합주의는 그후 신라 말의 道詵國師, 고려의 태조 王建과 조선조의 西山大師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불교와 무속의 습합과정은 그후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오늘날 불교사찰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山神信仰, 龍王信仰, 神將信仰, 非神信仰, 神衆信仰 등은 오랜 습합과정을 통하여 불교에 스며들어간 무속적 요소들이다. 오늘날의 한국불교는 의식면에서만이 아니라 교단 자체마저도 무속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무속화되어 있는 실정이다.
한국불교는 오늘날 근대화를 위하여 왜곡된 체질개선에 몸부림치고 있다. 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사원 안에 스며든 샤머니즘의 해소작업(解消作業)을 결의한 바 있다. 그러나 불교사원 안에서 아직도 무속적 展閣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산신불공”이나 “고사”를 지내는 절이 적지 아니한 실정이고, 절간을 찾아서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 중에 불교와 무속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불교신도 중에는 무속도 함께 신봉하는 이른바 “二重信者”가 많이 있다. 한국불교는 수용과정에서 특성도 나타났고, 무속신앙과의 습합과정을 통하여 민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로 인하여 불교는 그 본래적인 신앙본질에 변질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윤리적인 종교가 무속신앙을 수용기반으로하여 수용됨으로써 무속적인 기복신앙으로 변용하여 드디어 “무속불교”로 토착화되었다. 무속신앙은 불교를 기복화함으로써 불교의 윤리를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제2절 무속이 유교에 미친 영향
유교는 일찍이 이 땅에 수용되어, 오랜 역사과정을 통하여 토착화하면서 조선조시대에 이르러서야 國敎가 되어, 유교문화의 창조와 특히 한국인의 윤리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교는 한문자와 문화의 수입과 함께 들어왔을 것이므로 그 경전의 전래는 불교보다도 앞섰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 지식층의 학문적인 관심의 대상이었지, 신앙으로서 일반 민중에게 보급 신봉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소수림왕 2년(372)에 오늘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太學을 세워 인재를 등용하게 되었다. 또한 고구려 방방곡곡에 局堂을 세워 청년들에게 五經과 三史를 공부하게 하였다. 백제에는 經學에 관한 博士制度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유교의 교육기관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에서는 화랑을 선출하여 그들에게 孝悌思想을 가르치는 것이 또한 국가를 치리하는 대요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國字監이라고 하는 일종의 국립대학이 있었고, 유교의 사립교육기기관으로서는 문종 때(1082)에 유학자들이 각자 사숙을 설립하여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고려의 유교는 그 기풍이 文章學的 유학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러나 여말에 이르러 충렬왕 때에 安珦이 元으로부터 주자학을 도입하여 합리적 정신과 윤리도덕을 고취함으로써 새로운 기풍이 조성되었다.
조선조는 유교를 국가이념으로하여 排佛崇儒政策을 강행함으로써 중국에서도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유교문화를 창조하였다. 태조의 건국이념은 주자학적 유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건국 후 곧 정도전은 주자학에 의하여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고 유교의 본질을 천명하였다. 후일 성리학은 철학화되어 큰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후대에 성리학이 너무 사변적으로 기울어지자, 淸朝의 實學이 들어와서 새 학풍이 일어나 서구문물을 수용할 수 있는 개화사상의 선구가 되었다. 조선조 5백년간 유교는 한국인의 정신과 생활을 인도하는 지배종교가 되어 문화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렇듯 유교는 권력층에 의하여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졌고, 지식층은 유교의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오히려 유교의 祭祀制度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 대중이 받아들인 것은 유교의 치국이념이나 철학사상이 아니라 제사적인 종교로서의 유교였던 것이다. 유교의 제사행사는 천지에 대한 제사와 조상에 대한 제사와 성현에 대한 제사로 나눌 수가 있다.
이같은 유교의 敬天信仰과 조상숭배의 제사는 上古로부터 전하여온 조상제사와 쉽게 습합하여 무속신앙을 통하여 일반 대중에게 널리 수용되었다. 中宗의 家廟장려로 인하여 사대부들은 누구나 조상의 사당을 짓게 되었다. 그후 사당 짓는 일이 일반화되어 드디어 일반 대중까지도 짓게 되었다. 그리고 빈곤한 士人이나 서민은 집안 한 모퉁이에 神主를 위한 사당을 부설할 정도로 유교는 제사종교로서 보편화 되었다. 곳곳에 交廟와 사원을 짓고 제사를 지내게 되니, 유교는 윤리도덕이나 경세의 이론으로보다는 제사종교로서 대중에게 수용되었다. 유교의 조상제사는 원래 효도의 표현이었지만, 대중의 제사동기는 祖靈의 가호나 축복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유교의 조상제사는 기복신앙에 있어서 무속의 家神信仰과 일체화되어 대중 속에 뿌리를 깊이 내리게 되었다.
또한 「주역」(周易)만 보더라도 원래 주역은 천하만물과 인사(人事)와의 여러 현상을 음양팔괘(陰陽八卦)를 기본으로 보는 것이요 동양철학의 극으로서 경전의 수위(首位)가 되는 것이요, 수양의 서요 경륜의 서요. 입명의 서인 것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오히려 점서(占筮)의 서로 화하다시피 하였다. 중국에서 내려온 오행설은 음양오행의 이치를 가지고 천문, 의학, 누각(漏刻)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국에 들어와서는 오행설이 계통적인 교리보다도 관상, 사주, 신수 등으로 신봉된 점이 많았다.
실제로 유교와 무속은 그 신관‧영혼관‧제의 등에 있어서 공통점이 큰 것이므로 유교의 대중화는 무속을 통해서 쉽게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교는 전통적으로 무속신앙을 천시하고 억압하였으나 언제나 양자가 공존하였던 것은 양자간에 사회적으로 相補的인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교는 상류층의 종교로, 무속은 하류층의 종교로서, 유교는 남성들의 종교로서, 무속은 여성들의 종교로서, 또는 유교가 지식층의 종교로서, 무속이 배우지 못한 서민층의 종교로서 공존하게 되었다. 유교의 윤리적 합리주의는 무속의 주술적 비합리주의를 배척 억압하여 왔으나, 유교의 조상제사적 의례주의는 무속의 가신신앙과 습합되어 대중 속에 기복신앙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하여 양자는 형식적으로는 늘 충돌하는 듯하였으나 실제로는 상보하며 공존하여 왔다. 무속과 공존한 대중의 유교는 윤리적 합리주의로서의 본래적 유교가 아니고 의례 중심의 기복적 유교였던 것이다.
제3절 무속이 도교에 미친 영향
불교와 유교의 뒤를 이어 이 땅에 들어온 종교는 도교였다. 도교는 중국에서 발생한 주술적인 민간신앙으로서 불로장생을 목적으로하여 服食과 秘法으로 질병과 재앙을 물리치고, 선약(仙藥)과 방술(方術)로 양생‧양기를 희구하는 아주 현실주의적인 종교이다.
도교가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고구려 영류왕 7년(624)에 唐高祖가 天尊像과 道士를 보내어 「道德經」을 독한 것이 그 효시라고 한다. 唐高祖가 도사를 파견하게 된 것은 당시 고구려 사회에서 백성이 五斗米敎(道敎)를 다투어 믿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 미루어 도교는 그 이전부터 이미 민간에 들어와서 유포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도교의 가르침이 고구려의 토속적인 신선사상이나 전통적인 무속신앙과 비슷한 점이 많았으므로 도교는 쉽게 퍼져 한 때 매우 성행하였다. 그러나 보장왕 2년(643)에 淵蓋蘇文이 당시 중국의 3대 종교들 중 유교와 불교의 두 종교는 들어왔으나 도교만이 없다하여 당태종에게 사신을 보내어 진숙달(陳叔達) 등 도사 8명을 초청하여, 불교사원을 道館으로 삼고 도사를 儒士의 위에 앉히는 등의 일을 하여 국가의 종교에서 유교나 불교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도교행사와 함께 국가를 진호(鎭護)하는 제초(齊醮)를 행하였다.
이렇듯 도교가 국가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진 이 종교가 국가를 진호할 것이라는 현실주의적인 종교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도교는 불교와 충돌을 일으켜 고구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도교를 받아들인 보장왕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으므로,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교단적 발전을 보지 못한 채 침식되고 말았다. 도교가 백제와 신라에 전래된 기록은 없으나 도교사상 또는 도가사상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 유학생들은 그곳에서 祭詞를 짓기도 하였고, “修鍊的 道敎”를 수입하였다. 金可紀(~859), 崔承裕(~890) 등은 유화등선(羽化登仙)의 仙藥인 丹의 폐단을 지양하고 본격적인 丹學을 발전시켜 신라의 도맥을 형성하면서 奇人들의 단학설화를 산출하였다.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에서는 國祭인 팔관회가 도교적인 초제(醮祭)로 변모하였고, 西京에 설치한 八聖堂이 半佛半道的인 혼합현상으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각종 도교의례가 국가적 행사로서 성행하였으며, 적지 않은 초제의 축원문인 靑詞가 전하여지고 있다. 이렇듯 도교의 의례가 국가적 행사로서 거행되었으나, 도교가 고려에서 교단의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은 제16대 예종 때의 일이다. 宋의 휘종이 1107년에 도사 2명을 보내어 福源宮이라는 도관을 세우고 제자들을 선택하여 도교를 수련케 하였던 것이다. 이 복원궁은 고려 도교의 본산이었다. 차츰 도교는 조정에서만이 아니라 일반 민간에까지도 널리 유포되었고, 복원궁 이외로 대청관(大淸觀) ‧신격전(神格殿)‧정사읍(淨事邑)‧태정청계배시소(太政淸溪拜是所) 및 구요당(九曜堂) 등의 도관이 건립되었고, 도사들로 하여금 도교의 科儀를 행하게 하며 수도케 하였으므로, 姜邯贊을 비롯하여 이영간(李靈幹)‧권청(權淸) 등 도사들을 배출하였던 것이다. 도교는 기복양재(祈福禳災)를 희구하는 현세주의적인 종교로서 도참(道讖)과 풍수사상과도 밀착하게 되었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조에서는 조상의 사당을 세워 그 제사만은 지내야 한다고 가르친 주자학을 국교로 삼는 한편 불교를 몹시 탄압하였으나, 도교의 신령을 모신 조격전만은 그대로 두어 복을 빌고 왕이 병들면 왕자를 그곳에 보내어 기도를 드리게 하였다. 조격전은 후에 조격서로 개편되었는데, 그 초제의 대상은 칠성제백(七星諸宿)‧옥황상제(玉皇上帝)‧태산노군(太山老君)‧보화천도(普化天導)‧염라대왕(閻羅大王)‧사해용왕(四海龍王)‧신장(神將)‧수부제신(水府諸神) 등의 신령들이다. 도교에서는 노자를 太山老君‧太上道君‧玉淸元始天導 등으로 존칭하여 최고신으로 숭배하므로 유교의 성리학자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복양재를 위한 제의 중심의 국가적인 행사로서의 도교는 임진란(1592~1597)이 지나고서야 겨우 종식하게 되었다.그런데 임란 중에 關帝信仰이 도입되었고, 도교적인 행사가 궁중과 민간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행하여졌다. 한편 수련적 도교는 두드러진 도맥을 형성하였고, 무속신앙과 습합하게 되어 각종 민간신앙과 신흥종교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특히 도교의 盲卜‧讀經‧家宅行事 등은 무속신앙에 완전히 흡수되어 오늘날에도 전해 오고 있다.
이리하여 조선조에서는 조상의 제사가 유교식으로 지내지고, 옥황상제를 비롯한 도교적 신령의 제사가 도교식으로 지내져 왔으나, 실제로 이러한 신령을 맡아서 섬긴 사람은 무속의 사제인 무당들이었다. 왕궁에서조차도 왕족들이 병들면 무당을 불러다가 제사를 지내게 하였고, 기우제와 성황제도 무당으로 지내게 되었다. 오늘날 佛寺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칠성각‧명부전‧십왕신앙 등은 무속신앙을 통하여 불교에 수용된 도교의 흔적이다. 원래 기복신앙에서 출발한 도교는 그후 老莊의 철학, 불교의 의례와 조직(敎團), 유교의 윤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종교적 체제를 갖추어 크게 융성하였으나, 한국에 들어와서는 무속신앙과 쉽게 습합하여 이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림으로써 이제는 도교적 형태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제4절 무속이 한국인의 심성에 미친 영향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무속신앙은 대종교들이 전래될 때에는 언제나 그 수용기반이 되어 이들 외래종교를 이 땅에 토착화시켜 왔다. 그 결과 외래종교들은 무속적으로 변용하여 기복종교로서 대중에게 신봉되어 왔다. 외래종교들의 성행으로 무속신앙은 차츰 밀려나게 되었으나, 어느 종교도 무속신앙을 완전히 제압했던 일이 없었다. 무속신앙은 오늘날까지도 끈질기게 존속하여, 사회 하층민의 생활과 정신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무속신앙은 무속적 정신풍토를 형성하면서 서민층의 의식구조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렇듯 무속신앙은 한국의 고대문화의 전승과 기층문화의 형성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미쳐 왔는데, 무속신앙이 한국인의 정신과 행동에 있어서 작용하는 무속적 심성이 무엇인가를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1 의타심(依他心)
무속신앙은 인간의 생활화복을 좌우하는 무수한 신령을 신앙대상으로 하고 있는 원시적 신앙체계이다. 신령의 도움으로 길복의 소원을 성취하고 악령의 재앙을 물리침으로써 생활의 안전을 얻는 데 온갖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무속신앙에 의하면 인간만사는 신령과 악귀의 소행으로 그 길흉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귀신신앙은 인간의 한계성을 의식하게 하는 작용도 없지 않으나, 그 신봉자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함으로써 주체성을 상실케 한다. 현실에서 부딪히는 자기의 문제를 귀신의 탓으로 투사하고 굿만 하면 만사가 해결되는 것으로 믿게 한다. 이같은 안일한 생각에서는 정신적‧인격적 성숙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무속신앙은 아무 신령이든 가지 않고 받아들인다. 유일신교(monotheism)에서처럼 “창조신”이외의 모든 신들을 우상시하여 그 실제성을 부정하는 일이 무속신앙에는 전혀 없다. 무속의 萬神展에는 외국의 신령들도 수없이 수용되고 있다. 이같은 무속의 귀신신앙은 귀신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고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불안하게 함으로써 이성의 힘을 마비시킨다. 다신론적인 귀신신앙의 극복은 무당에게서 기대할 수는 없고, 귀신을 섬기는 무당의 영역과 그 권위에 대한 맹신 맹종은 사람들에게 의타심을 조장한다.
신령이나 무당에 대한 의타심은 자기에 대한 성찰의 자세를 등한시함으로써 주체성을 약화시키고 자아의 상실을 초래하여 모든 인간문제를 밖에 투사하는 나약한 인간으로 만든다.
2. 보수성(保守性)
전통적 보수성이 주술신앙의 통폐(通廢)려니와 의타성이 강하였던 한국인에게는 진취성이 없었다. 현실에 태한 책임과 윤리적인 결단이 없는 한국인에게는 자기변혁과 환경의 개혁에 무관심하였다.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책임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神明에게 근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문화발전의 요인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수천 년을 변화 발전 없이 전승되어 내려오는 무교 자체가 이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한국 샤머니즘의 종교 영합(迎合)에 있어서 화랑도의 경우와도 같이 어느 정도의 창의성을 발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통례적인 외래 종교와의 혼합개념을 볼 것 같으면 한국 무교의 보수성은 그대로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즉 타종교를 받아들여서 자기 발전을 위한 자기 혁신을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다만 타종교의 제요소(諸要素)중에서 자기의 口味에 맞는 것만을 융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와의 公分母的인 것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한국의 샤머니즘이 불교나 도교와 융합한 것은 그 祈禱祭祀法이나 神仙 靈交法에 있어서이다. 무교적인 특성과 일치되는 한에 있어서만 쉽게 융합하는 것이요, 결코 타종교의 본질적인 것과 同化되어 자신을 변혁 발전시키는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의 샤머니즘은 그 강한 보수성으로 말미암아 종교 절충주의(折衷主義:Syncretism)를 형성하지 못했다. 신크리티즘이란 종교혼합 속에 자신의 특이성을 잃고 변질하는 현상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수성이 李朝 以來의 강한 정치적, 문화적 쇄국주의(鎖國主義)를 이 땅에 형성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固陋한 형식주의와 폐쇄적인 제반(諸般) 生理는 바로 이러한 保守性의 發露라 해야 할 것이다.
3. 운명신앙
인간의 삶은 변화무상한 것이므로, 현실생활에는 불안이 있게 마련이다. 생활에 대한 불안은 생활 자체를 위축시킨다. 불안의 해소는 인간의 강렬한 본능적인 욕구의 표현이다. 무속신앙은 인간의 생사화복이 신령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믿고, 기도와 제의로 그 소원을 성취코자 한다. 그러나 이같은 무속행사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에는 오히려 이것을 신령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렇듯 자기의 목적 달성을 체념하고 神意를 받아들이는 것이 무속의 운명론이다. 運命信仰은 인생을 숙명적인 인과관계로 믿는 무속의 불안 해소법이다. 이것은 변화의 원인을 운명에 돌리는 무속적 인생관이다.
이같은 운명관에서 출발하여 운명적 변화의 근거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를 구명하는 방법으로서 각종 占卜術과 巫卜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같은 운명신앙은 인생만사를 팔자소관으로 맹신하고, 신세타령이나 일삼는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인간이 되게 만든다. 이같은 결정론적인 운명사상에서는 혁신적인 기상이나 개탁정신(開拓精神)이 움터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이같은 운명론적인 신앙자세에서는 문제해결을 위한 냉철한 비판정신과 용기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속의 운명신앙은 역사적‧사회적 현실의 도피를 합리화하는 퇴행적인 사고양식이다.
4. 역사의식의 결여(현실주의)
무속신앙에는 창조신관이나 역사를 섭리하는 이른바 “歷史의 主”의 기능을 지닌 신령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지나온 과거를 뒤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적 존재이다. 인간의 실존은 바로 이 역사성에 있는 것이다.
무속신앙에는 이같은 인간의 역사성에 대한 의식이 없다. 무속현상이 이를 산출케 한 시대적‧사회적 배경을 다소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속신앙에서 뚜렷한 역사의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 있는 것은 다만 동일한 일을 천편일률적으로 되풀이하는 巫事의 순환적인 機械的 反復만이 있을 따름이다. 역사의 방향‧목적‧의미에 대한 의식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순환적으로 과거를 반복하는 것은 역사라기보다는 차라리 그것은 “自然”이다. 역사는 자연으로부터 의식의 세계로 떨어져 나올 때에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무속에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되풀이하는 자연 곧 “비역사적인 역사”가 있을 따름이다. 이렇듯 역사의식이 없는 곳에서 역사의 문제해결을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무속사회에서는 역사의 문제에 대하여 아랑곳없이 인간은 그저 재앙만 면하고 복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한다. 現金主義的인 福을 비는 것은 물론이요, 미래를 점치는 것이 다 현재를 어떻게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가에 있다. 삶의 뿌리를 캐려 들지 않는다. 현실적인 행복만이 무속의 궁극적인 관심사다. 이러한 것이 모든 역사적인 환난을 어물어물 넘겨 버리는 성격이 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심오한 철학도 종교도 발전할 수는 없었다.
5. 오락성(娛樂性)
운명론에 등을 대고 있는 현실주의가 娛樂을 낳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한국 巫覡의 職能 속에는 外國과는 달리 가무의 기능이 있었다는 것이 단적으로 이것을 표시하고 있다. 한국의 가무예술(歌舞藝術)의 발전과 花郞道의 형성은 바로 이러한 한국인의 오락성에 근거가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가무가 풍기문란의 상징처럼 만연되고 있어서 정부당국에 의해 단속되는 일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결코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많은 관광버스 안에서 노래와 춤으로 ‘달리는 캬바레’적인 현상은 교통안전이라는 점에서도 문제로 지적되고, 혹은 춤바람이라하여 가정문제화되어 있기도 하지만 춤의 세력은 좀처럼 사라지지를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멋’도 바로 이러한 오락성을 중심으로 발전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6. 주술신앙
무속신앙은 종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주술(magic)에 더 가까운 원시적 종교현상이다. 그래서 샤머니즘을 주술의 하나로 다루는 학자도 있고, 주술에서 종교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는 현상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주술은 비과학적인 인과율을 전제로 하고 있다. 주술은 유사(類似)의 법칙에 의한 모방주술(homeopathic magic)과 접촉의 법칙에 의한 감염주술(contagious magic)로 크게 나뉜다. 모방주술(또는 동종요법적 주술)은 실행하는 행위와 기대되는 결과 사이의 유사성의 원리인데 예를 들면, 일본의 아이누족의 경우에 한 쪽 편 사람들은 채로 물을 뿌리고 다른 편 사람들은 배처럼 사방에 돛과 노를 달고서 마을과 밭 주변을 돌아 다니는 방법으로 비를 내리게 한다. 즉, 비를 오게 하려면, 비처럼 보이거나 비를 연상시키는 것을 행하기만 하면 된다. 또 감염주술은 한 번 접촉한 일이 있는 사물은 아무리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그 사물에 행해진 모든 것은 반드시 그 다른 하나에 꼭 영향을 미친다는 원리다. 고대인들은 자식에게 덧니가 나는 것은 부모가 아이의 배냇니를 뽑아 돼지우리에 던지거나 잘못 취급한 데서 온 결과라고 믿었다. 이빨이 튼튼해지기를 바라면, 배냇니를 뽑아 쥐가 들끓는 장소에 두고 그 아이의 이빨이 튼튼한 쥐의 이빨에 감염되면 새롭고 튼튼한 이빨이 새로 돋아난다고 믿었다. 우리 시골 풍습에도 이빨을 뽑아 지붕에 던지면서 “네 샛니를 다오. 내 헌니를 주마”라고 주문을 외는 속신이 있다. 초가지붕에는 쥐들이 살고 있는데, 짐승 가운데 쥐의 이빨이 가장 튼튼하다니까 사람과 쥐 두 사물이 결합하여 빠진 이빨이 쥐의 튼튼한 이빨에 감염됨으로 튼튼해진다는 주술적 원리가 작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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