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에 오르다
2015년 6월 23일 백두산에 올랐다. 천지의 물빛은 날카로웠다. 잔설이 남아있는 백두의 검은 바위와 수직의 구름을 저미어 그대로 수면에 옮겨놓았다. 천지는 거대한 거울이었다. 천지와 하늘이 뒤바뀐 듯 했다. 하늘은 천지물의 은총을 받아 찬란했다. 그 투명성이 그대로 시원의 자연이었다. 백두의 천지는 주변의 장엄한 산세가 어우러진 웅장한 천연의 위풍이었다. 땅을 뚫고 천지에서 발원한 그 엄청난 기운이 반도 아래로 아래로 전달되고도 남아돌아 주변의 봉우리는 번쩍였다. 그 풍경에 취해 사진기에 천지와 천지를 배경으로 한 나를 카메라에 담는데 정신이 팔렸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마다 전율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전 7시에 이도백하에 있는 숙소를 떠나 한 시간쯤 달리자 백두산 산문이 나왔다. 중국 영토내에 있어 모든 표지판은 장백산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백두산은 금나라를 세운 누루하치의 탄생 신화가 있는 곳이어서 청나라 때부터 신성시했다고 했다. 왕지라는 연못에서 목욕을 한 뒤 누루하치를 임신했다는 것이다. 일산양숭. 하나의 산을 두 개의 민족이 숭상하는 셈이었다. 오전 8시에 산문에서 입장권을 사서, 백두산 관리소가 운용하는 셔틀버스에 올랐다. 산 정상에는 아직도 녹지 않은 얼음이 커다란 구멍처럼 산을 덮고 있는 것이 보였다. 버스를 타고 30분쯤 간 뒤, 다시 백두산 정상에 오르는 승합차로 갈아탔다. 이곳부터 천지까지는 15분 정도 걸렸다. 산허리를 굽이굽이 돌아 낸 길을 하얀 승합차들은 흰개미떼처럼 부지런히 움직였다. 급커브길의 산길을 빠른 속도로 휙휙 올라갔다. 차에서 내리니 천지를 볼 수 있는 길은 좁고 사람이 많아 장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렇게 맑은 날이 별로 없다는 게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실제로 3번 백두산을 찾았지만 날씨때문에 다 보지 못했다는 일행도 있었다. 천지를 보느냐 못보느냐는 그야말로 하늘의 뜻이라는 것이다. 1시간을 그렇게 천지에서 머물다, 장백폭포를 보기 위해 승합차에 올랐다. 승합차에서 다시 초록버스로 갈아탄 뒤 목적지에 이르자 비가 내렸다. 사방은 어두워졌다. 먹구름이 하늘을 다 가리지 못하고 군데군데 하늘을 구멍처럼 뚫어놓았다. 두 시간만 늦게 출발했어도 천지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에 백두의 향기가 묻어 있었다. 거대한 산은 인간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고 변화무상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폭포 자체보다는 주변 산세와 어울린 물줄기의 풍경이 더 멋있었다. 백두는 반도 남쪽의 산들이 가지지 못한 풍광을 내뿜고 있었다.
청산리 승전 기념비
백두산 구경을 마치고 찾은 곳은 화룡시 청산리 승전기념비였다.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21일부터 6일간 걸쳐 전개된 전투였다. 홍범도와 김좌진 장군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140여 계단을 올랐다. 일반적으로 김좌진 장군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있으나 주요 전투는 모두 ‘무패의 맹장’ 홍범도 장군이 더 큰 역할을 했다고 김춘선 연변대 교수는 설명했다. 홍범도의 독립군은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가졌다. 홍범도는 사회주의자가 되고 러시아에서 죽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것이다.김좌진 장군은 후퇴하다 전투를 치릅니다. 주력부대인 홍범도 장군의 부대 쪽이 안전할 거라 생각해 밤새 600리를 걸어갑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일본군 주력부대가 홍범도 부대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적진에 들어간 셈이 된 거죠. 김 장군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려고 선제공격을 합니다. 이게 어랑촌 전투입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전멸위기에 빠집니다. 그때 홍범도 부대가 이를 알고 뛰어들어 대승을 거둡니다.” (경향신문 7월11일 기사) 답사 일정의 마지막 장소인 대종교 3종사 묘역에 찾았다. 화룡시에 자리잡은 이 묘는 백포 서일과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의 묘이다. 나철은 1911년 8월 연길현 삼도구 청파향으로 이주하여 교도를 모집하는 한편, 대종교 소속의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 진흥에 힘썼다. 2대 교주 김교헌은 1917년 간도로 들어와 교세를 확장했고, 중광단을 개편하여 북로군정서로 확대 발전시켜 청산리대첩을 이끈 서일은 1921년 자유시 참변을 한탄하며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대종교는 겉은 종교이지만, 속은 독립운동 단체였다.
러시아와 중국 국경…변방과 변방의 갈림길
백두산과 청산리 승전 기념비를 찾기 위해 6월22일 크라스키노에서 국경을 넘어 중국 연변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당초에는 러시아에서 2박3일하고 어제 중국으로 넘어가려던 여정이었지만, 일요일에는 국경을 폐쇄한다고 해 하루 일정을 미뤘다.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8시30분 국경을 넘는 일종의 노선버스를 탔다. 1시간쯤 달리니 국경선이 나왔다. 러시아쪽 국경에서 출국신고와 물품검사를 하고 중국쪽 국경에서 입국신고와 메르스 관련 검역신고서를 작성한 뒤 중국에 들어갔다. 러시아 극동지방과 중국의 연변자치주 훈춘은 시설이나 출입국 절차가 상당히 대비됐다. 러시아는 극동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최근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서인지 1900년대에 와 있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반면 러시아 국경사무소를 넘어 들어선 중국은 건물부터 상당히 현대식이었다. 경제발전 구호로 보이는 중국어 문구들과 선전판도 우람했다. 중국 국경사무소를 나와 버스를 탔다. 훈춘, 연길, 용정, 도문 등 8개시로 이뤄진 연변에는 처음 방문했지만 낮설지는 않았다. 한글 간판과 표지판이 반가웠다. 서울처럼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넓은 땅에 인구는 적은 나라들의 특성처럼 ‘놀리는’ 땅이 많다는 느낌만 들었을뿐 생각했던 것보다 낙후된 모습은 아니었다.
봉오동 전적지와 명동촌
오전 11시10분 도문시에 위치한 봉오동 전적지를 찾았다. 이곳은 1920년 6월 6~7일 홍범도와 최진동의 독립군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을 위해 두만강을 넘어 봉오동으로 침입해왔지만 홍범도 등은 산속으로 유인해 매복한 군사로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혔다. 이 전투는 무장독립운동의 첫 시작을 알리는 곳이다.
이어 북한과의 두만강 국경선 지역으로 갔다. 도문 건너편은 함경도 남양이다. 북한은 가까웠다. 걸어가면 5분이나 걸릴까. 쏟아지는 하얀 햇빛은 누추한 건물이 이룬 강건너 북쪽 마을에 한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쉽게 발길을 돌렸지만 버스는 북한과의 국경을 계속 스쳤다. 국경은 버스에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국경은 생명 앞에서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명동촌에 도착했다.19세기 중엽이후 조선의 삼정문란과 연속된 가뭄, 그리고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함경도 지역 주민들은 ‘월강죄’를 무릎쓰고 두만강을 넘어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명동촌은 동쪽을 밝힌다는 뜻은 담고 있다. 1910~1920년대 중국 북간도 일대의 대표적 한인촌으로 이주민이 개척한 삶의 터전이자 항일운동의 중요한 기지였다. 명동촌에는 윤동주의 생가와 명동학교가 자리잡고 있었다. 윤동주 생가에는 이리저리 치장한 흔적들이 역력했다. 명동학교는 서전서숙의 민족정신을 이어받아 1908년 세운 근대적 민족교육기관이다. 용정에 1906년 최초의 근대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이 생겼지만 1907년 일본의 파출소가 인근에 생기면서 1년만에 폐고됐다. 자료사진에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나란히 기념사진을 찍었다. 정 교수는 사진을 가르키며 “독립운동을 항일로만 인식하지말고 제국주의 퇴치라는 평화운동으로 보면 우리의 근대화에 기여한 사건”며 “실제로 독립운동을 통해 여권이 신장됐고 공화주의 정신이 자라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친일의 시각으로 독립운동을 바라보니 전투사만 나열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별 성과가 없어지는 한계에 부딪쳤다는 게 정 교수의 진단이다.
용정 대성중학교와 이상설 기념관
용정 시내로 가서 대성중학교와 이상설 기념관으로 갔다. 저항시인 윤동주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대성중학교는 1921년 건립됐다. 안내원은 이곳에서 김일성도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대성중학교 바로 옆에 이상설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1908년 국외로 망명한 선생은 북간도 용정촌에 근대민족교육기관인 서선서숙을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듬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선생은 이준, 이위종 열사와 함께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어 을사늑약의 무효와와 일제의 침략을 폭하였다. 유럽순방을 마친 선생은 미국에 1년 남짓 머물면서한인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여 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되는데 기여했다. 1909년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간 선생은 신한촌 등 항일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을쏟았다. 이를 토대도 1914년 국외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했다.독립이라는 ‘혁명’을 위해 자신의 안온함을 기꺼이 던져버리던 투사의 삶을 접하고 싶어 떠났던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 5박6일의 일정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크리스키노를 거쳐 중국 연변자치주 일대를 답사했다. 수탈과 탈출, 번민과 희망, 적의 칼날에 스러지는 죽음으로 덤벅된 그들의 삶을 무엇이 결정지었을지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단지 식민지 조국의 독립만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될 것으로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독립 이후에도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의 삶은 여전히 피곤과 체념과 불안으로 점철돼 있다. 이 단단한 멍애를 던져버리려면 무엇부터 해야할 것인가. 가슴이 답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