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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52. [역경의 열매] 최공열 (1-14) ‘역지사지’의 긍휼심에서 출발한 장애인 사역
나는 충남 부여에서 1948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7남매의 맏이로 몸이 불편하셨던 아버지 대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20대인 70년대부터 옥외광고물 사업을 시작했고 성공을 위해 바쁘게 살았다.
이런 내가 장애인을 돕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에서다. 92년 나는 유학 중인 아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 시카고를 방문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이 아는 목사님께 신세를 지고 있었기에, 그 옆집에 집을 얻어 지냈다. 장애인 사역을 하던 김동식 목사님을 만났던 것도 그때쯤이다. 김 목사님은 내게 찬양테이프를 하나 줬는데, 받아만 놓고 듣지는 않았다. 그러다 김 목사와 옆집 목사님과 함께 차를 타고 시내에 나갈 때 이 테이프를 틀어 그때 찬양을 듣게 됐다. 전신이 뇌성마비였던 장애인 가수 백일의 ‘벙어리가 되어도’란 찬양이었는데 이를 듣고 마음에 큰 감명을 받았다. “만약 내가 저런 환경 속에 처했다면 어떤 방법이든 자살하고 싶었을 텐데….” 평소에 장애인에게 관심도 없던 나는 그때부터 장애인을 돕는 일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마침 서울 서초동 집 근처에 ‘장애인전도협회’가 있었다. ㈔국제장애인문화교류협회의 전신인 이 단체에 몸을 담게 되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장애인 자활에 힘을 쏟았다. 당시 이벤트시설전문업체 대표였던 나는 92년부터 사업과 장애인 사역을 동시에 감당했다. 2003년부터는 아예 동생에게 사업을 맡겼고 협회에서 5대 이사장직을 맡아 장애인을 섬기고 있다.
협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들고 이사장으로 장애인 자활, 국제교류행사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내 인생이 항상 순항했던 것은 아니다. 회사를 경영했던 나는 93년 함께 선교를 다녀온 지인에게 30억원대 보증을 섰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됐다. 그해도 제주에서 장애인 문화캠프를 진행했는데 돌아와 보니 억대의 빚이 생겨 있었다. 집, 상가를 비롯한 전 재산이 담보로 잡혀 있었기에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느라 잠시 장애인 사역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숨을 돌릴 만하니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97년 외환위기로 나와 우리 가족은 다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겪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내가 흔들림 없이 장애인 사역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긍휼’에 대한 마음 때문이다. 평소 나는 ‘역지사지’의 원칙을 품고 산다. ‘내가 저 사람 입장이라면 어땠을까’란 생각을 하면 긍휼의 마음이 생기곤 한다. 인생의 부침을 여러 번 겪었던 내가 이런 마음을 갖고 살게 된 데는 신앙의 역할이 컸다.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기 때문이다.
독실한 신앙의 가정에서 자란 내가 평소 외우면서 깊이 묵상하는 말씀이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어릴 때부터 부모님을 따라 구역예배와 가정예배를 드렸던 나는 전도가 친숙했고 또 이에 대한 열정도 남달랐다. 이는 나의 모든 사업과 행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일까. 지금도 나는 장애인 문화 캠프와 문화학교를 진행할 때 자연스럽게 복음을 증거하며 이들에게 미칠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한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 [역경의 열매] 최공열 (1) '역지사지'의 긍휼심에서 출발한 장애인 사역
* [역경의 열매] 최공열 (2) 치유 은사를 경험하고 병든 이와 나누셨던 아버지
* [역경의 열매] 최공열 (3) 주일학교 사랑 독차지에 10리 교회 길을 단숨에…
* [역경의 열매] 최공열 (4) 최저임금 수준의 첫 직장… 그러나 꿈·신앙만은
* [역경의 열매] 최공열 (5) 타지서 만난 고향 목사님 “좋은 처자가 있는데…”
* [역경의 열매] 최공열 (6) “가난한 집 장남과 왜 결혼?” “자신감에 반했죠”
* [역경의 열매] 최공열 (7) 절망 속 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
* [역경의 열매] 최공열 (8) 잇단 시설공사 수주에 “아니, 당신 빽은 누구요?”
* [역경의 열매] 최공열 (9) 농담도 응답해주신 기적… ‘원통 화평교회’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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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최공열 (13) 우리 모두 예비 장애인… 그들 돌봄은 일 아닌 선물
* [역경의 열매] 최공열 (14·끝) 장애인사역 19년… 늘 응답해주신 주님께 감사
◇약력=1948년 충남 부여 출생. ㈔2002월드컵기독시민운동협의회 사무총장, 전국장로회연합회 부회장 역임. 현 ㈔국제장애인문화교류협회 이사장,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상임부회장,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총무. 서울 서초동 늘푸른교회 장로.
***[역경의 열매] 최공열 (2) 치유 은사를 경험하고 병든 이와 나누셨던 아버지
내 아버지는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고 치유은사를 받은 분이다. 나는 아버지께 기도를 받은 사람들이 병이 낫고 인생이 변화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비록 아버지는 집사셨지만 치유은사로 목회자 못지않은 왕성한 사역을 했고 이는 내 신앙과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4살 때였다. 주일날 아버지께서 교회를 가시던 중 말 뒷발에 앞가슴을 차이는 사고를 당했다. 마침 장날이라 짐을 실은 말이 뛰어와 아버지를 찬 것이었다. 말 주인은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아버지는 괜찮다며 일어나 교회에 가셨다.
하지만 1년 뒤 병세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늑막염으로 시작한 병은 폐렴으로, 폐병으로 번져갔다. 몸이 약해지신 아버지는 일을 하지 못했고 집에 누워계시는 날이 많았다. 이 때문에 나는 8살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정일을 돌보고 일하며 공부했다. 아버지가 일을 못하니 장남으로서 뭔가 해야겠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나는 가사는 물론 벼·과일 농사를 지었고 지게로 나뭇짐과 쇠똥 등을 날랐다. 그동안 아버지는 신앙으로 병마와 싸웠다. 성경을 목침삼아 읽고 매일 새벽마다 가정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쇠약해진 아버지는 때때로 헛것을 보셨다. 이미 약값으로 논도 팔았지만 치료엔 차도가 없어 보였다. 경제적인 것은 자녀에게 의탁하고 아버지 자신은 기도에만 매달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아버지를 원망할 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께서 산 기도를 위해 샘을 파야겠다며 나를 집 뒷산으로 데리고 가셨다. 어린 나조차 어른이 한 삽 퍼낼 정도의 땅을 쉽게 팔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정도의 일도 못할 만큼 병약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매일 오후 3시 산에 올라가서 밤새 기도하시다 다음 날 오전 10시쯤 돌아오셨다. 산 기도는 악천후에도 상관없이 3년간 계속됐다.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었을까. 아버지의 병세는 호전됐고 거기에 병 고치는 은사까지 받으셨다.
건강이 안 좋았을 때에도 아버지는 동네에서 몸이 안 좋은 사람들에게 약을 나눠 주고 기도해주곤 하셨다. 워낙 시골이라 한두 시간 걸어가야 보건소가 있었기 때문에 상비약을 갖춰놓은 우리 집에 아픈 사람들이 찾아왔던 것이다. 아버지가 치유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은 집에 환자들을 데려왔다. 온갖 방법을 다 써도 치유가 안 돼 교회로 가보니 목사님이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아버지가 기도하면 아픈 분들이 낫고 쇠사슬을 끊던 귀신들린 사람도 벌벌 떨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예수를 믿게 됐고 교회가 없는 마을엔 아버지의 도움으로 교회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병 고침을 받자 그 가족 모두가 결신하는 일도 생겼다. 은산 합무내교회 지교회를 세웠을 때, 집에 한 할머니가 찾아왔다. 아들의 딸이 아프니 집에 와서 고쳐 달라고 했다. 한 시간을 걸려 우리 집에 왔다는 그는 아이만 낫는다면 형네 부부와 함께 예수를 믿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약속을 받은 아버지는 그 집에 찾아가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 다음 날 아이는 나았고 그 청년은 다시 아버지를 찾아왔다. 하나님이 있는 것을 알았으니 성경을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 청년은 현 부여동남교회를 담임하는 정하천 목사다. 이후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가족들도 예수를 믿게 됐고 나중엔 형도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이 사람이 오늘날 대전에서 목회하는 정하둔 목사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버지의 은사를 이용해 교회를 세우고 사람들을 복음의 길로 인도하셨다.
***[역경의 열매] 최공열 (3) 주일학교 사랑 독차지에 10리 교회 길을 단숨에…
어린시절 가정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 했던 내게 교회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매일 새벽에 드리는 가정예배로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을 외우고 있던 나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곤 했다. 추석이나 성탄절에는 아버지께 배운 찬양으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연극을 했다. 지금도 내가 주연을 맡았던 연극을 기억한다. 제목이 ‘삼천리 금수강산’으로 교회에서 선보였을 때 사람들이 참 좋아해 여러 번 공연했다. 이렇듯 형·누나들이나 선생님에게 칭찬 받는 게 좋았던 나는 10리길이나 떨어진 교회를 즐겁게 다녔다.
중등부 예배 때 교사들만 할 수 있는 대표기도를 자처하고 나설 만큼 교회에선 적극적인 학생이었지만 실제 성격은 내성적이고 소심한 측면이 더 많았다. 어른들 앞에서 인사를 잘 못하는 것은 물론 행여 여학생이라도 지나가면 얼굴이 빨개졌다. 겁도 많았다. 당시 면소재지에 있는 교회에 가기 위해 옆 동네인 가죽리를 거쳐야 했는데 종종 그 마을 아이들이 싸움을 걸어오곤 했다. 그래서 이들을 피하느라 교회 갈 때마다 2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시골의 칠흑 같은 어둠도 나를 두렵게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매주 금요일 저녁에 아버지와 함께 구역예배를 다녔는데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산과 개울을 넘어 다녔다. 어둠 속에서 어림짐작해 길을 찾다보니 때론 미끄러져 눈구덩이에 파묻히기도 하고 물웅덩이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사고를 당하면서도 계속 구역예배를 드렸던 것은 아버지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산기도를 다녀오신 후 치유은사를 받았던 아버지와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신앙에 담대함이 생겼던 것이다.
내가 중·고교 시절에도 아버지는 집사의 직분으로 교회와 기도원을 개척하고 기도로 치료하는 일을 계속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병이 나은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했다. 그러한 인연으로 만난 사람 가운데 이강천 목사가 있다. 당시 학생이었던 그는 아버지의 기도로 건강을 회복해 다시 학업을 지속하게 됐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이 목사의 작은아버지는 내게 서울행을 권했다. 시골에서 힘겹게 일하며 공부하지 말고 서울에서 일하며 포부를 펼쳐보라는 것이었다. 당시 17살이었던 나는 그의 배려에 감사한 마음만 갖고 회사가 무슨 일을 하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제기동 성동역 근처에 있는 옥외광고물 회사. 그곳이 나의 첫 직장이 됐다. 이곳에서 나는 네온사인 광고물을 제작했다. 살 집이 따로 없어 작업현장에서 일도 하고 주거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양쪽 집 사이 공간 추녀 밑에 양철로 만들어진 회사 건물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심지어 겨울엔 이불이 얼고 물이 안 나와 얼음을 녹여 세수해야 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됐다. 타지생활이 힘들고 일은 고됐지만 신앙으로 인내하며 최선을 다해 일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 직장에서 배운 옥외광고물 사업을 계속해 왔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딱히 적성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 맡겨진 일은 충실히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계속 한 우물을 파게 된 것이다. 인내로 다져진 책임감과 열정은 훗날 목사님들이 내게 대형 연합사업을 맡기게 된 밑거름이 됐다.
***[역경의 열매] 최공열 (4) 최저임금 수준의 첫 직장… 그러나 꿈·신앙만은
첫 직장 ‘태양네온사’는 옥외 광고물을 취급하는 회사였다. 당시 나는 정규 직원이 되기까지 약 1년간 월급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서울에 올라올 때 가져온 지참금을 쓰면서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 1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월급을 받았는데 최저 임금 수준이었다. 월급만으론 생활이 안 됐기에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길거리 네온사인을 고쳐주면서 따로 돈을 벌어야 했다.
7남매의 맏이로 가족을 부양했던 나는 적은 돈이지만 월급의 대부분을 부여에 계시는 부모님께 송금했다. 그 당시엔 십일조를 생각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부모님께서 돈 받으시면 거기에서 떼겠지’라며 스스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때만 해도 신앙엔 변함이 없었다. 타지에 나왔지만 생활방식은 변하지 않아 술이나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당시엔 서부성결교회를 다녔었는데 공장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매일 새벽예배에 가곤 했다.
2년 후 나는 동종업계에서 더 큰 규모로 사업을 하는 ‘국도네온사’로 이직했다. 이전 직장의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나는 개인사업체를 운영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최대한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를 위해 나는 동료나 상사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남들보다 체구도 작고 나이도 어렸지만 내게 맡겨진 일을 충직하게 해 나갔다.
나는 상사가 일을 지시할 때 단순히 시키는 일만 하지 않았다. 일을 할 때 효율성을 따져봐서 개선할 사항이 있는지 늘 고민했다. 나는 그렇게 얻은 아이디어를 사장에게 제안해 실제 제품에 반영토록 하는 등 적극적으로 업무에 임했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는지 나는 동료들 가운데 가장 높은 급여를 받게 됐다.
사소한 오해(?)로 회사의 신뢰를 얻은 일도 있었다. 당시 회사는 호남정유(현 GS칼텍스)에 폴 사인을 수주해 직원들에게 현장에서 시공을 감리토록 했다. 전국 각지의 호남정유 주유소 가운데 직원들에게 가장 인기 없던 출장지는 호남이었다. 고속도로도 없는데다 경남지역에 비해 낙후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히려 호남지역 출장을 가겠다고 자원했다. 이 때문에 동기와 선배들은 성실하다면서 나를 칭찬했다. 사실 나는 고향이 부여였기에 출장 시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것인데 말이다.
서울 상경 이후 고향집은 내게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직장에 취업하고 개인사업이란 목표를 위해 열심히 뛰어왔기에 힘든 일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이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가족을 만나러 첫 직장생활 도중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것도 잠시, 나는 다시 직장으로 복귀했다. 어머니와 어린 동생이 가족을 부양하도록 놔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오래하진 않았다. 당시 나는 사업만이 가난을 지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총각이 사업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며 말렸지만 나는 틈틈이 모아둔 종자돈으로 1970년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최공열 (5) 타지서 만난 고향 목사님 “좋은 처자가 있는데…”
내게는 육신의 부모 외에 또 다른 부모가 있다. 어린 시절 교회를 다니기 위해 은산면에 매일 왕래하던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이익종 부면장 부부가 그분들이다. 교회를 가려면 부면장댁을 지나야 했는데 그때마다 그분들은 ‘몸이 아픈 아버지를 모시느라 고생한다’며 따뜻한 시선으로 안부를 묻곤 했다. 부면장은 우리집 경제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혹시 굶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주기도 했다. 그분은 내게 ‘공열이를 양아들 삼겠다’고 말해 농담처럼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아버지께서 ‘부면장이 너를 양아들 삼겠다고 하더라’고 해 놀란 적도 있다. 이렇듯 부면장 내외는 내 처지를 걱정하며 친부모처럼 돌봤고 나도 이분들과 한 식구처럼 지냈다.
서울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도 그분은 내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부면장 부부가 틈틈이 내가 보낸 돈에 이자를 불리고 퇴직금까지 얹혀 사업자금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이 자금은 내가 사업을 시작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70년 나는 드디어 꿈꾸던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공간은 지인의 사무실을 함께 쓰기로 했지만 전화기가 문제였다. 당시만 해도 백색전화기는 전화권을 함께 구입해 사용했는데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되팔 수 있어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화 없이는 사업이 진행될 수 없기에 사업자금에 맞먹는 전화기를 구매했다. 그렇게 내 사업은 다른 사람의 사무실 한쪽에서 책상과 전화기 한 대를 전부로 조촐하게 시작됐다.
그러나 사업은 내가 꿈꾸던 만큼 장밋빛만은 아니었다. 납품을 했지만 수금을 못하는 일이 잦았고 수금했더라도 그 돈을 직원이 횡령하는 등 역경이 하나둘씩 몰려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업에 타격을 주는 일이 일어났다. 73년 당시 정부는 전력량 부족을 이유로 밤에 네온사인을 일절 켜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일반 가정도 오후 9시 이후는 불을 끄라고 할 정도였다. 옥외광고물 사업을 하는 나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들이 생기자 나는 주변 어른들 말씀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총각은 책임감이 없어 사업에 실패하기 쉽다.” 정말 그래서 안 되는가 싶어 결혼을 생각하게 됐다. 물론 이것만 갖고 결혼 결심을 한 것은 아니다.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생각뿐이었다. 사업을 할 당시 나는 서부성결교회에서 총각 집사이자 청년회장으로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전도 집회를 인도하는 등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고향 교회인 은산성결교회 이병돈 목사가 부흥집회 차 서부성결교회로 오셨다. 타지에서 고향 교회 목사님을 만난 나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아 목사님을 모시고 작은 중국요리집에 가서 식사를 함께 했다. 좋은 대접을 못해 드려 멋쩍은 마음에 목사님께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아이고, 목사님 제가 결혼을 했으면 집에서 모셨을 텐데, 결혼 안 해서 이런 집에서 모시게 됐네요. 죄송합니다.” 이 목사님 일행은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대답하셨다. “마침 우리에게 좋은 사람이 있는데….”
나는 이 말을 가볍게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날 목사님 일행이 내 손을 잡고 누군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오는 처자가 우리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야!”
***[역경의 열매] 최공열 (6) “가난한 집 장남과 왜 결혼?” “자신감에 반했죠”
우리 부부가 지난 4월 둘째아들 내외의 두 번째 손녀 출산으로 시카고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둘째며느리가 우리 부부를 시카고의 근사한 프랑스 식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뜬금없이 종업원이 케이크와 샴페인을 가져다주고 주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축하할 대상은 우리 둘째손녀인데 왜 나와 아내 주변에서 박수를 치느냐고 며느리에게 물었다. 그러자 며느리와 아내는 웃으면서 “오늘 4월 18일이 결혼기념일이에요”라고 알려줬다. 아내가 나와 동고동락을 한 지 벌써 38년임에도 정확한 결혼 날짜를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내심 미안한 마음에 그날 나는 아내를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내 아내 전영순 권사는 9남매의 막내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막내딸이었기에 장인어른에게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자랐다고 한다. 그러던 아내는 병든 시아버지와 소작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시어머니가 있는 집안으로 23세에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아내와 나는 같은 교회를 다녔음에도 서로 알지 못했다. 당시 아내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주일날 대예배만 드리고 있었고, 나는 청년부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랬던 우리 사이를 이어준 것이 이병돈 목사님 일행과 함께 있었던 주길남 권사님이다. 권사님은 예배당에 들어오는 지금의 아내를 가리키며 내게 ‘저기 어머니와 함께 오는 자매가 어떠냐’고 물어왔다.
그때 본 아내 모습은 내 이상형에 가까웠다.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업이 어려워 망설이던 내게 권사님은 아내를 소개해줬다.
아내를 처음 만난 날, 나는 그에게 내 모든 상황을 다 이야기했다. 나보다 세살 어린데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아가씨가 시골 출신에 가진 것 없는 7남매의 맏이를 어떻게 볼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는 이런 내 배경을 싫다는 내색 없이 긍정적으로 이해해줬다. 아마도 가진 것 없는 나를 긍휼히 봐 준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아내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처갓집 식구들의 반대에도 장모님은 가진 것 없는 나를 신앙이 좋다는 이유로 지지해 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짧은 연애를 하고 1973년 결혼식을 올렸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그때까지 이렇다 할 수주 없이 실패만을 거듭했기에 시장에서 파는 반지로 결혼 예물을 대신했다. 신접살림도 아내의 결혼 지참금으로 마련했다. 결혼한 이듬해 첫아들이 태어나고 그로부터 2년 후 둘째아들이 태어났지만 형편은 개선되지 않았다. 이때부터 아내의 고생은 시작됐다. 내가 수금을 못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아내는 친정집에 가서 쌀을 얻어와 밥을 하곤 했다. 아내는 동생들의 어머니 역할도 했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어린 동생들은 아내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아내는 나와 결혼했을까. 얼마 전 첫째가 뜬금없이 ‘가난한 집 맏이에게 왜 시집왔느냐’고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에게서 ‘첫 만남에서 내가 너무 자신에 차 있는 모습에 반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던 내가 아내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당장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이대로 놔두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역경의 열매] 최공열 (7) 절망 속 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
매년 5월엔 전국소년체육대회가, 10월엔 전국체육대회가 개최된다. 그래서 봄과 가을이 되면 나는 1980년대에 이들 대회의 의전홍보물 설치 사업을 수주하러 동분서주했던 날들을 자연스럽게 회상하게 된다. 경기장 주변을 빼곡히 둘러쌓고 있는 홍보물들…. 76년부터 80년쯤, 나는 그 의전홍보물들로 인해 울고 웃었다.
내가 의전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처음으로 비중 있게 진행한 대회는 강원도 춘천시와 원주시에서 개최됐던 제9회 전국소년체육대회다. 대회의 모든 옥외홍보물을 수주하진 않았고 부분적으로 참여한 대회지만, 잊을 수 없는 대회로 남아있다. 일의 양이 가장 많았을 뿐 아니라 참여업체 가운데 가장 우수하게 일을 해 냈기 때문이다.
도청주관으로 개최됐던 의전사업은 당시 기업의 지원에 의존해 진행됐다. 대회 홍보를 위한 예산이 풍족하지 않아서 탑, 플래카드, 아치 등 옥외홍보물은 기업체로부터 현물 기증을 받는 식으로 충당했기 때문이다, 대신 도청은 기업을 위해 자그마한 광고를 양 기둥에 표현할 수 있도록 해줬다.
제9회 전국소년체육대회는 결혼 이후 6년간 빚에 시달리던 내게 가족을 부양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준 대회였다. 하지만 그 희망도 잠시, 5·18 광주민주화 항쟁이 발발해 대회는 여지없이 무기한 연기됐다. 5월초쯤 개막을 앞둔 터라 나는 대회준비위원회에 약속한 물량을 맞추기 위해 이미 이곳저곳에서 4000만원의 자금을 끌어 모았고, 광고물의 제작 및 설치도 완료한 상태였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아름드리 나무를 뽑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태풍 셀마로 설치된 광고물 하나가 쓰러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원주역 근처에 있던 가로수가 태풍으로 뿌리째 뽑히면서 설치한 5단 아치형 광고물을 덮친 게 화근이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이는 내가 설치한 가장 크고 웅장한 홍보물이었기에 당시 400만원 정도의 금전적 피해를 입었다.
대회 시작 전에 이러한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조금씩 자신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것만 성공하면 될 것 같은데’란 생각으로 애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는 일 뿐이었다.
‘하나님! 제가 이 세상에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엔 아직도 덜 빚어진 진흙입니까? 혹시 아직도 내 자신을 낮추지 못해 인간의 꾀로 해결하려고만 한 것은 아닌지요.’ 나는 교회 새벽예배와 철야예배에 나가 이 같은 내용으로 오랜 시간 울며 기도했다. 그렇게 며칠을 기도하니 나를 짓누르던 조급함은 사라지고 사업결과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마음에 평안함이 깃들었다.
그런데 한 달 뒤, 태풍이 지나가고 광주 민주화항쟁으로 무기한 연기됐던 대회가 기적적으로 개최됐다. 이로써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의지할 곳은 오직 주님뿐이라는 확신을 다시 한번 갖게 됐다. 나는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업을 수주할 때도 상황과 결과에 관계없이 주님께 감사하며 일할 수 있었다. 같은 해 10월에도 나는 전북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의 옥외홍보물 설치를 맡게 됐다. 도청에서 5월 광주 전국소년체육대회의 결과를 보고 내게 맡겨준 것이다. 지금도 나는 5월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낙담하고 절망했다면 제2, 제3의 기회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주님께서 절망 속에서 당신을 찾는 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큰 뜻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빚으실 것이라는 믿음은 차후에도 내게 큰 의지가 되고 힘이 됐다.
***[역경의 열매] 최공열 (8) 잇단 시설공사 수주에 “아니, 당신 빽은 누구요?”
1977년부터 하나님께서는 내게 의전시설 사업기회를 열어주셨다. 당시엔 인맥으로 사업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았기에 나처럼 관공서에 지인 없이 전국적인 행사의 시설공사를 수주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내게 주님은 제9회 강원도 소년체육대회를 시작으로 그해 전북에서 개최된 제61회 전국체육대회 관련 공사를 연이어 수주하게 해 주셨다. 수주는 했지만 당장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기업 스폰서 유치 여부, 당일 날씨 등에 따라 오히려 적자가 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지난 대회의 경험을 통해 ‘그분만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며, 최선을 다하면 마무리는 하나님이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기에 두려움이 없었다.
종종 공무원들은 나를 보며 “누구를 믿고 그렇게 당당하게 잘 될 것이라 확신하느냐?”라고 물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저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확신합니다”라고 대답해줬다. 나는 항상 관공서를 상대로 사업을 할 때마다 공무원들에게 기독교인임을 공표하고 다녔다. 그랬기에 나는 주님의 자녀로 모든 행사에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고 성공적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나의 자신있는 모습과 깔끔한 업무처리를 보고 감명을 받은 공무원 가운데 주님의 자녀가 된 분들도 있을 정도다. 이렇듯 나는 주님으로 인해 편하게 사업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단의 과정도 거쳤다. 80년 제61회 전북 전국체육대회는 좋은 날씨 속에 성공적으로 치러지면서 사업은 점차 정상궤도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로지 사업에 몰두하던 나는 세무신고를 잘 몰라 자진신고에 의한 소득세 납부를 누락하는 실수를 범했다. 세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기에 세무 담당공무원만 믿고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 결과 나는 이듬해 2000만원의 세금추징을 받게 됐다. 이는 당시 내가 거주하던 관할 구에서 가장 높은 세금이었다. 당시 소득세 만기일은 8월말이었는데 이를 넘기면 10%의 가산세가 붙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만기일에 마음이 급박해진 나는 결국 사채를 얻어 세금을 납부했는데 이는 체육대회로 벌어들인 수익보다 더 큰 액수였다.
어려움은 연이어 찾아왔다. 세금문제로 고심하던 나를 납세의무 불성실자로 고발하겠다며 영업담당자 3명이 집에 찾아와 협박을 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국세청에 신고불성실자를 고발하면 추징액의 10%를 포상하는 제도가 있었다. 아마 직원들은 내가 추징세액으로 고심하고 있는지 몰랐으리라.
고발한다던 사원들이 찾아와 다시금 재기할 것을 요청했지만 이러한 사건들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나는 사업과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러나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실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사람은 실망시킬 수 있으나, 주님은 자녀를 실망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다시금 일어서려는 내게 주님은 체육대회뿐 아니라 고양시 꽃 박람회, 광주 비엔날레 등 다양한 의전시설 사업을 맡을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해주셨다.
하나님은 어려움을 통해 모든 것이 그분께 속했고 나는 온전히 이끄시는 대로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주님의 이끄심은 현재 진행하는 장애인 사역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당시 알게 된 고마운 분들과 사업경험이 소중한 자산이 돼 업무에 큰 도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최공열 (9) 농담도 응답해주신 기적… ‘원통 화평교회’ 개척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도를 해왔던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 전국남전도회연합회(남전도회)에서 18년간 활동했다. 2회기부터는 조직국장을 맡았는데, 당시 나는 경북 의성, 안동, 경남 진주, 강원 정선 등 전국 지역노회를 방문, 순회예배를 드리며 지역노회 남전도회가 활발히 활동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했다.
조직국장 이외에도 총무, 부회장, 준비위원장 등 다양한 역할을 맡으면서 여러 행사를 준비했는데 1996년 ‘나라와 민족을 위한 대각성 기도성회’가 그중 하나다. 이틀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기도 성회는 남전도회 역사상 가장 큰 대회였다. 이 대회는 전국 각 노회로부터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4000∼5000명이 모일 정도로 성황리에 치러졌다.
98년부터는 1년간 회장으로 봉사할 기회를 얻게 됐다. 꼭 한번 회장이 되고 싶었기에 내심 기쁘긴 했지만 당시 외환위기로 IMF의 지원을 받는 상황이었기에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특히 나는 지인들의 보증을 섰다가 30억원의 빚까지 떠안게 된 터라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여기에다 회원들의 사업에도 IMF의 여파가 미치고 있어 남전도회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어두웠다.
하지만 나는 어려움을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기로 다짐했다. 전도는 내게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전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다. ‘외환위기는 곧 기도할 때’란 생각으로 98년 8월부터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에서 ‘전 회원 지도자 교육사업’을 실시했다. 전도훈련을 통해 회원들이 각 교회에서 전도지도자로서 위기 극복에 앞장서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나는 그 이듬해인 99년에도 전국 회원 1000여명을 대상으로 경남 부곡에서 ‘국가를 위한 기도회 및 전도훈련대회’를 실시했다.
남전도회에서 활동하면서 많이 했던 사업으로는 진중세례를 꼽을 수 있다. 나는 10여 차례 진중세례 행사를 진행했는데, 그중에서도 12사단 훈련병 진중세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98년 12사단에서 진중세례를 하던 북강원노회 임정웅 목사님은 내게 농담처럼 말했다.
“최 장로님, 강원도 인제군 원통에 우리 교단 교회가 없습니다. 이게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누가 땅을 사주면 내가 교회를 개척할 텐데요.”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이렇게 답했다. “목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땅을 사 놓으시고 누군가 교회를 개척해주면 좋겠다고 하셔야죠.”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그럼 전국남전도회 최 장로가 교회를 건축해 줄 것이냐”고 되물었고 나는 무심결에 “그렇게 해 보자”고 말했다. 이때만 해도 나는 목사님이 농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쳤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농담도 다 듣고 응답하시는 것 같다. 1년 뒤 임 목사님은 정말 330.6㎡(100평)의 땅을 매입하시고 교회를 건축해 달라고 내게 연락을 해 왔다. 무심코 한 말에 교회를 건축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개척교회 설립을 위한 서울지역 전도대회’를 열었고 모금한 특별헌금으로 그 해 7월 231.4㎡(70평)의 교회를 세웠다.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 화평교회는 이렇게 탄생됐다.
***[역경의 열매] 최공열 (10) 외환위기에도 ‘땅끝까지 전하라’ 軍선교 매진
전국남전도회연합회는 ‘전도의 황금어장’이라 불리는 군선교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내가 회장으로 활동하던 1998년에도 논산 제2훈련소의 훈련장병 6000여명을 대상으로 진중세례식을 진행했다. 그런데 특별한 일이 생겼다. 불교 신자인 훈련소장이 훈련병들에게 ‘세례를 받고 성경을 읽으라’는 말을 전한 것이다. 나는 그저 ‘훈련소장이 인사말씀을 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목사님 설교하듯 훈련병들에게 전도하는 말을 한 것이다.
“훈련생 여러분! 이 소장과 만날 기회가 자주 없지만, 오늘은 내가 여러분께 부탁 하나 하겠다. 알겠나! 오늘은 여러분이 스스로 결정해 세례를 받았다. 이제 세례를 받았으니 부모님께 편지해서 세례교인임을 알리고 자대배치 받을 때 기록카드를 받으면 세례교인이라고 기재하라.”
소장의 메시지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옆에 계신 목사님께 물어보니 성경이 66권이라고 한다. 오늘 마침 십자가 목걸이와 성경을 한 개씩 나눠준다고 한다. 군 생활을 하다 보면 시간이 나는 경우가 있으니 이 성경을 읽어봐라. 하루에 한 장씩 읽으면 일독을 하고 제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경엔 여러분들이 중·고교 때 배운 좋은 말들이 다 들어 있다.”
그간 남전도회에서 활동하며 많은 목사님의 말씀과 축사 등으로 은혜를 받아왔지만 이날만큼은 비기독교인인 훈련소장의 인사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다. 훈련생들도 감명을 받았는지 소장이 말을 맺기도 전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육군훈련소장을 통해 군선교 사역을 이뤄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그것을 이룩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다시금 갖게 됐다.
나는 1년간 회장으로서 10여회의 진중세례식을 진행했고 3개 지역노회에 전도연합회 조직, 수재민 돕기, 북한이탈주민 방문 및 장학금전달, 교회개척, 전국순회예배 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사업들에 참여했다.
남전도회 활동 가운데 한 가지 더 회고하고 싶은 것은 십자가탑과 성탄트리 점등식이다. 나는 동서울노회 충현교회의 지원으로 98년 남전도회 임원들과 1300고지에 위치한 백두OP에 60m 높이의 최신형 십자탑을 세웠다. 이 십자탑은 북한동포들도 볼 수 있도록 설치했는데 이는 남한의 신앙의 자유를 보여줄 수 있는 한 단면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제작한 것이었다. 우리는 매년 11월 24일쯤에 십자가와 성탄트리에 불을 밝히는 점등식을 가졌는데 그때마다 축제 분위기였다. 작지만 이러한 일들로 장병들을 위로한다는 사실에 나는 매번 감격스러웠다.
이 밖에도 해외 교회 설립, 전국 교도소 전도 집회 및 위문공연 등의 전도 활동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인 ‘땅 끝까지 복음 전하라’는 말씀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모자란 사람을 쓰셔서 이런 일을 감당케 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주님께서는 내게 경제적으로도 복을 주셨다.
억대의 빚과 IMF로 인해 어려웠던 사업과 재산이 일부 회복된 것이 그 증거다. 주님께서는 전국체전 등의 행사를 통해 내 의전홍보물 사업이 잘 될 수 있도록 이끄셨고 그 덕분에 나는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그 당시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특별히 배려하셨던 것 같다.
***[역경의 열매] 최공열 (11) 1984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 단상 직접 꾸며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150만명을 동원한 1984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선교대회’는 내게 잊지 못할 대회다. 이 대회 단상을 제작하면서 좋은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후로도 많은 대회 단상을 제작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당시 옥외광고물 업체 대표이사이자 초년병 장로였던 나는 한경직 이영수 강병훈 목사님과 김경래 신홍균 장로님께 100주년대회 무대단상을 제작·시공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다른 업체도 많이 있었겠지만 전국체전과 국가행사를 많이 치른 데다 누구보다도 기독교 100주년 의미를 잘 이해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당시 옥외광고물 업계에는 기독교인이 거의 없어 교회행사에 걸맞은 디자인을 제시할 회사가 많지 않았기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제의를 받고 나서 한국교회 역사상 단 한번밖에 없는 대회에 나 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 쓰인다는 사실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대회 단상의 제작 및 시공을 맡은 나는 철골조를 세우고 모형을 설치한 뒤 그래픽 그림을 그려 단상을 완성했다. 특별히 단상 중앙에 올린 십자가에는 색채와 모양에 신경을 많이 썼다. 십자가는 예수님과 기독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대형 집회에 걸맞게 단상 중앙에는 설교자 50석, 찬양대 1만석, 목사님들이 앉을 자리 1만석이 필요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단상에 올랐기 때문에 안전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때마침 그해 10월 같은 장소에서 국군의 날 행사가 있어 나는 군 당국의 협조를 얻어 철골조를 사전 설치했고 덕분에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이 단상 위에 빌리 그레이엄, 김장환 목사 등 수많은 강사들이 올라 2박3일간 청중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대회를 무사히 마치고 나니 한국교회 연합예배의 무대단상 문의가 물밀 듯이 들어왔다. 86, 88, 98성회, 부활절 연합예배 단상설치 등 다양한 무대를 서울 여의도, 남산, 장충체육관에 설치했다. 부활절 연합예배의 경우는 한 20여년 정도 관여했다. 한 목사님께서는 “대회장은 매번 바뀌지만 계속 무대를 설치하는 최 장로는 그야말로 ‘한국교회 연합예배 무대의 산증인’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무대설치 이외에도 한국교회에 내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가 또 있다. 평신도 선교사역이 바로 그것이다. 90년부터 알고 지내던 장로님들과 함께 평신도 단체에 가입하게 된 것이 내 선교사역의 첫 출발이다. 나는 평소 선교와 전도가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해외선교도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90년도부터 중국, 인도, 몽골 등 17∼18회 정도 해외선교를 다녀왔다. 회사와 교회단체 사역 등으로 현지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진 않았지만, ‘보내는 선교사’로서 선교지의 기틀을 세우는 역할에 주력했다. 인도의 이기섭 선교사를 지원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기섭 선교사는 내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에서 전국남전도회 회장을 지내 나와도 잘 알고 있는 사이다. 그는 평신도 선교사 1호로 인도에 파송됐는데 그곳에서 많은 일을 해냈다. 이 선교사는 인도에 콜인신학교와 유치원을 세웠고 150여개의 교회를 개척했다. 나는 그를 도와 선교지에서 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데 인적·물적 지원을 했는데 올해도 유치원 건축비를 지원하는 등 계속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인연은 현재 활동하는 장애인 사역 가운데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내가 각국 장애인단체와 함께 진행하는 공연들이 현지 선교사님들에게 사역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해당국가와의 장애인 문화교류로 한국문화를 알릴 뿐 아니라 지역 전도 및 선교에 기여할 때면 지금 하는 일도 또 다른 선교가 아닐까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최공열 (12) 2002 월드컵 ‘4강 신화’ 밑거름을 자원하다
1999년 4월, 한국기독교지도자회에 참석한 나는 최해일 신신묵 박태희 목사님 등 임원진의 걱정과 한숨 소리를 들었다. 한숨을 내쉰 이들은 일본에 다녀온 목사님들이었다.
“일본에 가서 보니 2002 한·일월드컵 준비가 우리에 비해 매우 잘 되고 있습니다. 운동장도 잘 시공되고 있고요. 대한민국은 아직 운동장 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무엇 하나 준비된 게 없어 보이니 큰일입니다.”
최 목사님의 제안으로 참석한 목사님들은 걱정을 넘어 ‘월드컵 성공을 위해 기독교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놓고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정이 넉넉지 않았던 한국교회가 국가 행사인 월드컵 준비를 위해 나설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논의 끝에 월드컵 준비는 ‘믿는 사람들이 먼저 친절하게 손님을 맞고, 먼저 질서를 지키며, 청결하고 정직한 시민이 되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청소운동을 벌이고 교회나 개인주택을 해외관광객 및 선수들을 위한 민박집으로 개방해 섬겨보자, 이번 대회로 관광객들이 다시 찾고 싶은 한국을 만들자는 등의 제안이 나왔다.
하지만 한국교회를 대신해 누가 이 운동을 앞장서야 할지 가장 큰 문제였다. 선뜻 아무도 나서지 않는 가운데 내가 자원해 손을 들었다. 월드컵 기독시민운동에 나선 이유는 간단하지만 명확하다. 2002월드컵은 선교의 좋은 기회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회와 남전도회 활동을 거쳐 많은 조직을 만들었고 법인도 세운 바 있다 보니 거칠 것이 없었다. 여기엔 웬만한 일은 두려워하지 않는 내 성격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내가 나서자 그 자리에 있던 목사님들은 두 손을 들고 반기며 ‘모든 일은 최공열 장로에게 위임한다’고 동의해줬다. 나는 그 즉시 개인 사무실로 돌아와 ‘2002월드컵기독시민운동협의회’의 조직규칙을 정하고 발기인 승낙 서류를 만들어 박세직 장로를 찾아갔다. 박 장로는 88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지낸 경험이 있었다. 그분께 운동 취지를 설명하고 발기인 위촉장을 드리니 흔쾌히 서명해 주셨다. 감사할 일은 연이어 일어났다. 당시 2002월드컵문화운동시민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던 이영덕 전 총리 역시 기꺼이 우리 조직의 발기위원이 돼 주시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이 전 총리는 “최 장로가 ‘언제쯤 뜻 있는 일을 가지고 오려나’ 기다렸는데 정말 참 좋은 일을 갖고 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남전도회와 100주년 단상을 꾸미며 만났던 인연들이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월드컵 기독시민운동은 99년 9월 서울 장충동에서 대표회장 김준곤, 공동회장 조용기, 상임회장 신신묵 목사님 등과 함께 힘차게 출발했다. 사무총장을 맡은 나는 2000년 경기가 치러지는 국내 10개 도시와 일본 10개 도시와의 자매결연식 및 기독교 선교세미나를 개최하며 한·일 양국의 월드컵 성공과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나부터, 크리스천부터 친절(Kind), 봉사(Service), 청결(Clean), 정직(Honest), 질서(Orderly)를 실천하자는 의미를 담아 각 단어의 첫 자를 딴 ‘KS.CHO’ 캠페인도 활발히 진행했다.
2002년 3월 부활주일엔 월드컵 성공을 기원하는 한국교회의 뜻을 모으자는 취지로 전국 10개 개최도시 월드컵 경기장에서 부활절 연합예배와 월드컵 성공다짐예배를 드렸다. 당시 상암벌을 가득 채운 6만5000명의 함성과 염원은 몇 달 뒤 월드컵 4강 신화를 비롯한 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밑거름이 됐다.
***[역경의 열매] 최공열 (13) 우리 모두 예비 장애인… 그들 돌봄은 일 아닌 선물
“저는 장애인입니다. ‘예비 장애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비장애인들은 모두 예비 장애인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입버릇처럼 나 자신을 예비 장애인이라 부르곤 한다. 장애인들은 일반인과 다르거나 부족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1992년부터 ㈔국제장애인문화교류협회에 관여하여 현재 이사장을 맡으면서 느끼는 것은 내게 장애인 사역은 ‘일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이다. 나는 항상 장애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받고 있다.
첫 회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내가 장애인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히 받은 찬양테이프에서 시작됐다. 뇌성마비를 가진 찬양사역자 백일의 ‘벙어리가 되어도’란 찬양을 듣고부터 나는 장애인과 장애인 문화사역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장애인 문화교류활동을 하며 다시금 느끼는 것은 이들이 불편한 몸에서도 언제나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이다. 나는 종종 일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불평하고 짜증을 내지만 장애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그 마음은 항상 신실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그들이 천사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점차 감소세이긴 하나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비율은 25%쯤 된다고 한다. 하지만 장애인 가운데 기독교인의 비율은 2∼3%에 불과하다. 이는 장애인 입장에서 한국교회의 턱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교회에 장애인들이 드나들기 힘든 이유로는 이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적으며, 비신자들과 다를 바 없는 성도들의 시선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장애인들에게 심적으로 큰 부담을 줘 자연스럽게 교회를 멀리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나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구분의 대상이 아닌 서로 협력해야 하는 형제라 생각한다.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장애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시고 그들을 사랑하시며 감싸 안으셨다. 나는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들 이야기가 나오는 마가복음 2장 말씀을 장애인 사역의 푯대로 삼으며 이 일을 감당하고 있다. 말씀에서 중풍병자가 네 친구들의 사랑으로 인해 예수님께 치유 받고 일어선 것처럼 장애인과 일반인들이 더불어 살아간다면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확신으로 문화교류를 통해 아무 거리낌 없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평등사회가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국내외 장애인들을 위한 각종 콘서트와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체험하는 여름 수련회 등을 진행할 때마다 관계의 벽을 허무는 일에 일조한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낀다.
1987년에 창립된 이 단체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92년이지만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한·중 수교기념 국제장애인문화예술제에서 준비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다. 이를 기점으로 러시아, 몽골 등 장애인문화예술의 국내외 교류를 추진해 이들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참여를 촉진하는 일에 기여했다. 최근 장애인들에게 제주탐방의 기회를 제공하고 해외장애인과의 교류를 추진해 타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행사를 추진하면서 우리 사회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음을 느낀다. 하지만 아직도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이를 위해 교회가 장애인과 비장애인 연합의 장이 되도록 앞장서야 한다. 앞으로도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일반인 청·장년 성도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장애인 사역에 참여해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경의 열매] 최공열 (14·끝) 장애인사역 19년… 늘 응답해주신 주님께 감사
신체적 장애가 있음에도 하나님께 감사로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모습에서 감명을 받아 시작한 장애인 사역이 올해로 벌써 19년째다. 장애인문화교류 행사에 참가해 행복해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금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문화사업에 참여한 많은 장애인이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미력한 일임에도 내게 고마움을 표시할 때 나도 덩달아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국제장애인문화교류협회는 2004년부터 장애인 문화예술제를 진행해 왔다. 또한 한국장애인선교엑스포, 합동결혼식, 장애를 가진 독거노인 칠순 잔치 등과 다양한 국제교류활동을 개최한 바 있다. 나는 이 가운데 2009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기념해 추진했던 합동결혼식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날 우리 협회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그릴에서 장애인 35쌍을 대상으로 결혼식을 거행하고 신혼여행은 제주도로 보냈는데 나도 이들과 동행했다. 신혼여행 중 한 부부가 내게 감사인사를 했다.
“나는 기도밖에 한 일이 없는데, 목사님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까지 올 줄 몰랐어요. 이렇게 감사할 일이 많을 줄이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사장님 고맙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오히려 내가 더 감사했다. 나를 통해 결혼식이나 생일, 문화행사 등을 제대로 치러보지 못한 소외된 이웃의 기도가 이뤄진다는 사실이 기뻤고 한편으론 과분하게 주어진 은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 단체는 서울, 경기도, 인천 등 5개 지역에 장애인 문화예술학교를 세워 100여명의 장애학생들에게 무용, 악기, 합창, 비누공예 등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이들이 문화예술을 배워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장애인 예술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19년 전부터 이 일을 진행했는데 이들이 공연활동을 펼칠 수 있는 장도 3년 전부터 마련했다. 매년 개최하는 ‘전국장애인합창대회’가 그것이다. 올해는 유엔에서 정한 세계 장애인의 날(12월 3일)을 기념해 ‘제3회 전국장애인합창대회’를 28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키로 했다. 전국에서 750여명이 출전하는 이번 대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큰 화합의 장이 될 것이다. 또한 그간 문화예술학교에서 전문가들의 가르침을 받고 자신감을 가진 장애인들은 이번에도 비장애인 예술가 못지않은 실력을 뽐낼 것이다.
2012년은 ‘세계장애인의 날’ 제정 20주년이다. 또한 국제장애인문화교류협회 설립 25주년과 법인 설립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년엔 모든 사업을 한층 더 발전된 수준으로 진행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로 준비 중이다. 내년 8월엔 세계박람회 개최지인 여수에서 국제장애인 문화엑스포를 개최할 계획을 갖고 있다.
장애인들의 문화적 시야를 넓히는 우리의 일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도록 나는 하나님 앞에서 매일 기도한다. 장애인 문화사업을 연속적으로 하기 위해선 장애인 예술가를 많이 발굴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장애인들을 제대로 교육할 수 있는 문화예술학교 및 문화예술회관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본다.
학교 부지와 예산이 허락된다면 장애인들이 편리하게 다닐 수 있는 건물을 건축해 이들이 정상적인 교육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각계각층의 관심과 협조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이들이 전문예술가로서 세계 정상의 경지에 올라 또 다른 한류열풍을 일으키는 주역이 될 수 있도록. 또한 이들을 도울 자를 세워주시도록. 세계 최고의 장애인 예술가를 세우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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