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감국사(圓鑑國師)
원감국사는 장흥이 낳은 고려시대의 명승의 한 분이다. 그는 장흥군 장흥읍 동동리 지금 법원과 검찰청 자리에 있던 집에서 1226년 11월 17일 아버지 첨의정승(僉議政丞․ 족보에는 戶部員外郞) 諱 위소(魏紹), 어머니 원방대부인(原邦大夫人) 송씨(宋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속명(俗名)은 원개(元凱)이며 법휘(法諱)는 충지(冲止), 자호는 복암(宓庵), 시호(諡號)는 원감국사, 탑호(塔號)는 보명(寶明)이다.
17세 때 사원시(司院試), 19세 때 춘위(春闈)에 장원, 영가서기(永嘉書記)로 관직에 봉직하면서 일본에 봉사(奉使)로 다녀왔다. 관직생활 10년 만에 출가해서 강화도 선원사(禪源社) 법주(法主) 원오국사(圓悟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266년 경남 김해 감로사(甘露社) 주지, 1269년 삼중대사에 오르고 1272년 정혜사(定慧社)로 옮겼다. 1275년 원도(元都)에 가서 세조(世祖)를 만나고, 원오국사를 이어 1286년(忠烈王 12년) 송광사 6세주가 된 후 7년만인 1293년에 1월 10일 입적했다.
어록(語錄)은 현존한 것이 동문선(東文選) 권84에 서(序)만 있다. 결국 가송(歌頌)과 잡저(雜著)만 남아 있는 셈이다. 가송은 정통(正統) 12년(1447년 丁卯) 나주목(羅州牧)에서 간행한 중간본과 필사본으로 동국대에 소장돼 있었다. 그 가송은 1680년(延寶 8년)에 복간된 것으로 1916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사료(史料)를 수집하러 일본에 갔다가 지인인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峯)에게 책을 빌려와 매일신보에 게재했다. 소호는 한․일 합방 이후 조선의 진귀한 고문서를 전문적으로 챙겨간 인물이다.
2년 뒤인 1918년에 송광사 김해은(金海隱) 승려가 육당에게 책을 빌려 1부를 등사하는 한편 1920년 주지 설월선사(雪月禪師)가 국사의 유작을 모으는 한편 동문선 등에 수록된 소(疏)․표(表)․시(詩)․문(文) 등 잡문을 촬록(撮錄)하여 원감록(圓鑑錄)을 간행한 것이다. 이 송광사본(松廣寺本)은 한국불교전서(pp.370~411)에 수록돼 있다. 지금까지 있는해동조계복암화상잡저(海東曹溪宓庵和尙雜著)1권은 간행년도를 알 수 없는 판본이다. 이 책에는 표(表)와 소(疏)가 52편, 서답(書答)이 12편이 있다.
1. 원감국사(圓鑑國師)의 행장(行狀)
국사에 관해서는 후손인 위씨의 족보나 기타 기록보다 송광사 등 불교계가 몇 갑절 소상하다. 다음 국사의 행장은 송광사가 2002년 9월 29일 경내 사자루(獅子樓)에서 ‘원감국사 충지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로 가을 학술대회를 개최할 때 고경(高鏡)스님(성보박물관장)이 정리한 행장을 간추린다.
1226년(丙戌․高宗 13) 11월 17일 장흥군(遂寧縣) 출생
1234년(甲午․高宗 21) 취학(경서와 사서를 읽고 속문에 출중)
1242년(壬寅․高宗 29) 사마시 합격
1244년(甲辰․高宗 31) 춘위(春闈)에서 장원급제, 영가서기로 출사, 봉사(奉使)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10년간 봉직
1254년(甲寅․高宗 41) 출가하여 강화 선원사(禪源寺) 법주 원오국사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승려의 길 봉행
1266년(丙寅․元宗 7) 원오국사의 교유(敎諭)와 조지(朝旨)를 받아 김해 신어산(神魚山) 감로사(甘露社) 주지로 부임
1269년(己巳․元宗 10) 삼중대사(三重大師)
1272년(壬申․元宗 13) 순천(順天) 서면(西面) 定慧社로 이주
1273년(癸酉․元宗 14) 원제(元帝)에게 청전표(請田表)를 올림
1275년(乙亥․忠烈王 1) 원조(元朝)로부터 징조(徵詔)를 받음
1276년(丙子․忠烈王 2) 대선사(大禪師) 제가(制可)를 받음
1277년(丁丑․忠烈王 3) 청주 진각사(眞覺寺)를 순유(巡遊)
1278년(戊寅․忠烈王 4) 수선한 丹本藏經을 수선사로 移運
1284년(甲申․忠烈王 10)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선정(禪定)
1286년(丙戌․忠烈王 12) 수선사 제6세가 됨
1291년(辛卯․忠烈王 17) 고흥 불대사(佛臺寺)로 이주
1292년(壬辰․忠烈王 18) 수선사(修禪社)에서 미질(微疾)로 앓음
1293년(癸巳․忠烈王 19) 입적(入寂)
1314년(甲寅․忠肅王 1) 감로암에 입비(立碑)
1701년(辛巳․朝鮮肅宗 27) 파괴된 비를 중건
2. 출가동기(出家動機)와 승려생활(僧侶生活)
원개는 10년간 부모를 조르고 설득해서 29세 때 허락을 받고 출가했다고 한다. 불교계와 학계에서는 그가 강화도 선원사(禪源社) 법주 대원부(大原浮․圓悟國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출가의 동기를 밝힌「甘露入院祝法壽疏」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전략) “마침 우리 송령화상(松嶺和尙)은 화산도장(花山道場)에 계셨는데 평소의 뜻을 펴고자 무릎걸음(膝行)으로 달려가 고하니 지난날의 인연이 맞았는지 턱을 끄덕여 허락하였습니다.” 라며 탈속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松嶺和尙은 누구이며 花山道場은 어디를 일컫는지가 관건이다. 원감집의 역자(譯者)인 진성규(秦星圭)교수는 송령화상을 원오국사로 본다. 그리고 화산도장은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에는 23곳,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20곳이 나온다. 전국적으로 화산이라는 지명이 너무 많아 어딘지 특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으나 호남지방 사찰일 것으로 여겨 여산(廬山)․옥구(沃溝)․함열(咸悅)․무장(茂長)지역의 어느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원감국사집 p.205)
그러나 김영태(金煐泰) 동국대 명예교수는 花山道場을 강화도 선원사(禪源社)로 본다. 즉 “圓悟國師가 花山 곧 禪源社의 法主…”로 단정한다.(세미나자료p.38) 승려의 첫 관문인 삭발식과 구족계를 받은 곳이 달라지면 국사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혼란이 생긴다. 기왕에 알려진 대로 선원사라면 왜 거주지 주변의 대찰이 있는데 그곳까지 갔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아마 19세 때 과거보러 갔다가 그곳 사찰을 들러보다 원오국사를 만나서 그에게 출가하고 싶다는 말을 했기에 이루어진 인연이 아닌가 싶다.
이를 뒷받침할 대목은 앞의 감로축수소(甘露祝壽疏)에 부모의 허락이다. 그는 강화도로 과거를 보러 갔을 때부터 출가를 하고 싶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별로 내키지 않은 공직에 머물러 있었다는 얘기이다. 간신히 허락을 받은 연후에 화산도장의 원오국사 천영(天英)을 찾아간 것이다. 이 말은 원개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말이다. 불가에의 귀의(歸依)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 진 것이다. 따라서 원개는 세속의 인연을 끊고 본격적으로 구도의 여정에 들어가 39년 동안 도를 닦다 1293년 1월 타계하게 된다.
원개는 1254년(고종41) 선원사 법주로부터 수계한 이후 12년 만인 1266년(원종7) 41세 때 경상도 김해현 신어산 감로사(甘露社) 주지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는 몽고의 7차 침략전쟁이 끝난 후 9년째가 되는 해였다. 전쟁이 끝났다 해서 주권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몽고의 철저한 간접지배를 받았다. 출가해서 줄곧 선원사에서 지냈는지 아니면 다른 사찰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속세의 떼를 벗기는 듯 법휘(法諱)는 법환(法桓)이었으나 뒤에 충지(冲止)로 개명했으며 호는 복암(宓庵)이다.
그때는 승려의 인사권도 왕에게 있었다. 원개의 감로사 주지 발령도 역시 원종(元宗)의 조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강화도에 임시수도가 있었고 선원사 또한 섬 안에 함께 있었기에 원개의 인물됨을 알고서 하는 인사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원개는 12년 전 춘위예부시(春闈禮部試)에 장원급제한 비상한 인물임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대 승려사회의 지도자인 천영(天英)의 제자이니 조정과 승려사회에 그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속세의 풍습처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원개는 감로사에 부임했다. 아마 부임하기 전부터 주지되는 사람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과거에 장원급제했고, 영가서기 때 사신으로 日本을 다녀왔으며, 관료생활을 하다 출가해 승려가 된 사람이라는 얘기들이 부임 전에 파다하게 퍼져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때는 지방관도 부임하면 토박이 선비들과 시를 지으며 상대의 지적(知的) 능력을 시험해 보는 일이 있었고, 그런 풍속은 후대에도 전해졌다. 그가 도착하자 어느 선덕(禪德)이 감로사에 부임한 소회를 물음에 다음과 같이 응수(應酬)했다.
春日花開桂苑中 = 봄날의 꽃은 계수나무정원에 피었는데
暗香不動小林風 = 그윽한 향기는 작은 숲 바람에도 움직이지 않네
今朝果熟沾甘露 = 오늘 아침 익은 과일 감로에 젖었고
無限人天一味同 = 한없는 인천은 한 가지 맛이구나
이 시는 삽시간에 퍼지면서 대중들에게 회자(膾炙)됐다. 그러자 납자(衲子)들이 운집하기 시작했다. 고요하기만 했던 사찰이 젊은 중 충지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갑자기 붐비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들 장원급제한 충지스님의 설법을 들으러 모여든 것이다. 사찰측은 운집한 납자들을 위해 법석(法席)을 마련하는 일이 잦았다. 그는 감로사 주지로 부임한지 3년만인 1269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승려들에게 보통 일어나는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한다.(圓鑑國師碑銘 幷書참조)
송광사 성보박물관장 古鏡스님은 2002년 9월 29일 베풀어진「원감국사 冲止의 生涯와 思想」학술세미나의 行狀에서 국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師의 입원으로부터 종고(鐘鼓)가 일신되고 불사가 연속하여, 동로(洞盧)가 빛을 내고 임학(林壑)의 값이 솟았었다. 이리하여 감로사에 나아가 道를 묻는 숙덕(宿德)과 법을 구하는 도반(道伴)이 발굼치를 이어 폭주함으로, 법석이 매우 은성(殷盛)하여 大法의 동류기래(同流己來)로 의학(義學)의 세위(勢威)가 師로부터 크게 떨침 직하였다.”고 적고 있다.
충지는 감로사에서 6년째인 1272년(1270년說도 있음) 승주 정혜사(定慧社)로 발령을 받았다. 정혜사는 순천 서면 청소리 계족산(鷄足山․682m)에 있다. 절은 신라 46대 문성왕 2년(840)에 창건됐다 하나 확실치 않다. 그나마 1907년 화재로 소실됐으나 이듬해인 1908년 월파(月坡)스님이 재건했다고 한다. 1984년 대웅전이 보물 제 804호로 지정됐으나 주지로 있었을 당시의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승려가 된 후 두 번째 사찰인 정혜사로 발령받아 이주한 후 보다 활발한 활동했다.
그가 정혜사로 이주하던 해의 시국은 변화가 많았다. 특별한 대목은 수도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다. 몽고의 침략으로 1232년 임시로 천도한 이후 무려 38년 만에 이루어진다. 그것도 무인정권의 마지막 실력자 최이(崔怡)를 1258년(高宗 45)유경(柳璥)과 김준(金俊)이 죽인 후에야 이루어진다. 수도가 원상회복됐다고 해서 몽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고종의 세자(원종)를 인질로 몽고에 보내서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때부터 고려는 몽고의 부마국으로 전락, 허수아비 노릇을 해야 했다.
몽고는 진도와 남해에서 저항한 삼별초(三別抄)가 탐라도로 이동하자 고려와 연합해 소탕작전에 나섰다. 고려 장수 김방경(金方慶)과 원나라 장수 흔도(忻都)가 토평의 장수로 나섰다. 원나라는 탐라에 달로화적(達魯花赤)과 관구병량좌사(管句兵糧左使)를 두고 병량을 준비하게 했다. 그 때 정부로부터 획하(劃下) 받아 사찰의 식량을 조달하는 토전을 징발당한 것이다. 즉 다시 빼앗아 관적에 올려 전세(田稅)를 징발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수선사 승려들은 식량을 조달할 수 없어 초근목피로 생명을 이어갔다.
이 참상을 보다 못해 충지는 1273년(원종14) 원나라 世祖에게 청전표문을 올렸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청전표를 올릴 당시 그의 소속사찰이다. 원감집에는 정혜사 입주시기를 1270년(p.10)으로 기록한 반면 세미나 자료에는 1272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원감집 역자 진성규교수는 계제(季弟) 신개(信凱)가 양주(梁州)군수로 있을 때의 시를 1273년의 작품으로 해석하기도 했다.(원감집 p.27) 그렇다면 그의 소속은 정혜사 주지인데 무슨 자격으로 수선사의 토전(土田)문제를 그가 해결하려 나섰는가?
정혜사와 수선사는 어떻게 다른가? 송광면 신평리에 있는 수선사의 전신 길상사(吉祥寺)는 신라 말 혜린(慧璘)이 창건했다. 1197년 수우(守愚)가 확장하다 1200년 보조국사 지눌(知訥․1158~1210)이 정혜사를 이곳으로 옮기고 정혜결사(定慧結社)운동을 펴면서 수선사(修禪社)라 했다. 다른 설은 1205년 중수공사를 마치자 熙宗이 송광산(松廣山)을 조계산(曹溪山)이라 하고 수선사를 송광사(松廣社)로 개칭토록 명했다 한다. 그러면 송광사라야 하는데 정혜사이고 청전표의 대상은 수선사니 이해하기 어렵다.
1273년 충지는 황제에게 수선사의 사정을 알리고 사찰의 토전을 돌려달라는 표문을 올렸다. 고려를 간접지배하고 있는 상국(上國) 원나라(1271년 수도北京이전) 황제에게 올린 것이다. 세조는 청전표(請田表)를 보고 수선사의 토전을 원래대로 사찰에 돌려줬다. 즉 토전의 세금을 수선사 몫으로 돌려준 것이리라. 그의 청전표문은 황제 마음을 움직이게 해서 양식이 없어 굶주림에 허덕이던 승려들의 주린 배를 달래게 했다. 당시 된장의 맛을 보지 못한지가 10년이 넘었다고 승려생활의 고달픔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