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보다가 문득 멕시코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가 떠올랐다. 그녀들의
그림은 어딘가 많이 닮아 있었는데, 프리다 칼로가 천 화백보다는 17살이 위이니 화단의 선배라
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둘의 화풍이 어찌도 이렇게 비슷한지 보면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그녀들은 작품 외 생애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유사점이 있는데, 우선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
했었다는 것과 시대에 앞서간 의식과 행동으로 강한 개성을 보여주었고, 그러한 그녀들의 삶이
고스란히 그녀들의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그녀들을 보면서 작가든 음악가든 화가든 연기자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의(특히나 여성들의) 작
품 세계는 그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 밖에 없고, 고뇌와 슬픔과 장애, 또는 실패가 그들
에게 원초적인 의지로 작용하는 배경이 되는 것 같단 생각을 해 봤다. 또한 모성애를 동반한 무
한한 사랑이 더욱 여성 예술가들에게 창작의욕을 불태우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란 생각도 해
봤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두 화가의 선명하고도 강렬한 색감의 그림들을 감상
하고픈 소망으로 그녀들의 그림 사진을 올려본다. 우리의 천경자 화백에 관한 소개는 인터넷에서
쉽사리 찾을 수 있기에 생략했고, 프리다 칼로에 관해서는 그림과 원글의 출처가 되는 “올가즈 갤
러리”의 내용을 번역했다. 그리고 긴 내용을 내 임의로 줄여 올린다는 걸 밝힌다.
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 헝가리 후손, 독일 유태계인 윌헴 칼로와 스페인과 인디언
의 혼혈아인 멕시컨 마틸드 칼데론 사이의 네 딸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곳은
그녀의 부모들이 직접 1904년에 지은 멕시코 시티 근교의 코요아칸이라는 곳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사진작가였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그 기술을 가르쳤는데 그녀의 아버지인
윌헴은 멕시코 시민이 되면서 자신의 이름을 길레르모로 바꿔 사업가로 성공했고, 멕시코 정
부로부터 위탁업무를 위임 받아 운영했다. 하지만 1910년에 시작된 멕시코 혁명이 수십 년
지속되면서 그의 사업을 어렵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프리다는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생활
을 하게 되면서 일찍 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1913년 프리다는 소아마비에 걸렸고, 그녀의 오른쪽 발을 절게 되어 그로부터 “절뚝거리는
다리 프리다”라는 놀림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적 결함에 민감해 그 후로 바지만
입다가 나중에는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긴 이국풍의 스커트를 입게 되었다.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프리다는 일찍 그림 그리기를 시작하진 않았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딸인 프리다는 특별히 그림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그걸 자
신의 직업으로 삼으려는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었다.
그녀는 대신 학창시절 훌륭한 성적으로 학업을 계속하면서 의사가 되기를 원하기도 했지만,
국립예비학교 재학 시절 사회주의 사상을 알게 되고, “카츄샤스”라는 그룹에 가입하게 된다.
이것으로 그녀의 삶은 예술가로서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남자친구와 함께 큰 교통사고를 당
해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부모님이 준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 시
작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의 레파토리인 수 많은 초상화가 탄생하게 된다.
1928년 몸을 회복한 프리다는 한 모임에 참석했다가 이미 명성을 얻고 있었던 화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되고, 이 만남은 결국 둘의 결혼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는 무려 프리다
보다 21살이나 연상이었지만 그녀가 화가로서의 전문적 길을 나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도
와주었다.
둘은 1930년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그 이유는 리베라가 자신의 예술품을 내다 팔 수 있는 더
좋은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라는 이유 하나와 멕시코 정부로터 받을 수 있는 박해를 피해서
라는 이유 그 두 가지 때문이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 뉴욕, 디트로이트에서 지냈고, 그
동안 리베라는 몇 개의 벽화를 완성했다.
1930년 프리다는 임신을 했지만 이전의 사고로 인해 아이를 낳을 수 없어 결국 유산을 택할
수 밖에 없었고, 1932년에 또 임신을 했지만 역시 유산으로 아이를 잃게 된다. 이 일로 인해
그녀는 상심하면서 동시에 많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1934년 프리다와 리베라는 멕시코로 돌아왔지만 자신의 여동생과 바람을 핀 남편 리베라를
용서할 수 없어 가출을 결행하고, 결국에는 이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둘은 1935년에 다
시 재결합을 하게 되고, 여전히 바뀌지 않은 리베라를 보면서 프리다 자신도 맞바람을 피는
등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 밖에도 프리다는 자신만의 강렬한 그림으로 마침내 명성을 얻고, 자신의 내면의 고통을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계속하다가 1950년대에 건강을 잃어가면서 척추수술을 하는 등
또 다시 고통을 받고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 진통제에 의지한 삶을 지내다, 1954년 폐렴으로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운명하게 된다.
*** 출처가 달라 그림 크기가 다른 점 이해해 주시기 바라며, 천경자 그림은 저도 사실 출처를
모른다는 말씀 드립니다. 지인으로부터 얻은 사진이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