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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鄭昌)
?∼1463(세조 9).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호는 죽계(竹溪). 효순(孝恂)의 아들이다.
1432년(세종 14)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438년 식년시에 정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을 거쳐 집현전교리가 되어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과 더불어 일세에 그 이름을 떨쳤다.
단종초 시사(時事)의 어려움을 예견하고 일찍이 물러설 것을 결심하고 외직을 자청하여 진천군수가 되었다. 지방의 수령으로 청렴하고 처사가 공명정대하였다.
세조가 왕위를 선양받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성균관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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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겸(鄭允謙)
1463(세조 9)∼1536(중종 31).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익부(益夫). 첨지중추부사 온(溫)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병법을 익혔고, 1491년(성종 22) 변경을 시끄럽게 하는 야인을 토벌할 때 원수 허종(許琮)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 훈련원에 보직되고 이어 사헌부감찰·군자시주부·사복시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1506년의 중종반정에 참여 그 공으로 삼등공신인 병충분의정국공신(秉忠奮義靖國功臣)에 녹훈되고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공신에게 특별히 품계를 주는 예에 따라 통정대부로 당상관에 오르고, 간성군수에 임명되었으며, 4년 뒤 웅천부사로 옮겨 삼포왜란 이후의 민심수습과 복구에 힘썼다.
다시 충청도수군절도사를 거쳐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자 북청에 성을 쌓아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고, 1518년(중종 13) 첨지중추부사로 전보되었다가 이듬해 가선(嘉善)으로 승진, 청계군(淸溪君)에 봉하여지고 특별히 회령부사에 제수되었다.
1522년 전라도수군절도사로 기용됨에 병선과 무기를 수리하여 유사시에 대비하다가 명나라를 약탈하고 돌아가는 왜구를 격멸, 그 공로로 품계가 더하여지고 조정으로부터는 궁시(弓矢)와 의대(衣帶)가, 그리고 명나라로부터도 백금이 하사되었다.
이어 훈련원도정이 되었다가 1525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평안도병마사가 되고, 상호군을 거쳐 충청도병마사로 있을 때 무고로 인하여 횡성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죄가 풀려 부총관에 서용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삼척부사가 되었다. 청렴하며 장재(將材)로 손꼽혀 30여년간 남북 변경의 장수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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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鄭俊){1}
?∼1467(세조 13).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초계(草溪). 어릴 때부터 지조가 굳고 무예에 뛰어났다.
1460년(세조 6) 신숙주(申叔舟)의 모련위(毛憐衛)정벌에 공이 있어 훈도(訓導)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훈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온성절제사로서 잠입하여 온 야인을 추격, 사살하는 등 북방에서 무위를 떨쳤으나, 1466년 8월 영흥부사로 있으면서 조정 명령을 거역하였다고 하여 추국당하였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구성군 준(龜城君浚)의 비장(裨將)으로 출전하여 총통군(銃筒軍)을 이끌고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3등에 책훈되고, 자선대부(資善大夫)로서 호분위대호군(虎賁衛大護軍)에 임명되고, 풍성군(豊城君)으로 봉하여졌다가 초계군(草溪君)으로 개봉되었다.
그해 10월 건주위(建州衛)정벌 후 포로된 야인을 요동(遼東)으로 압거(押去)하는 호송군의 책임장수로 호송도중 가산군(嘉山郡)에 이르러 병으로 죽었다. 시호는 장양(莊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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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편(鄭遍)
1475(성종 6)∼1552(명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대수(大受).
옥량(玉良)의 손자로, 생원 희길(熙吉)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유경(金惟慶)의 딸이다.
성품이 정직하고 심지가 깊었다. 학문을 깊이 연마하였으나, 연산군의 횡포에 반대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중종반정으로 사림에게 기회가 부여되면서 1519년(중종 14)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호조좌랑·형조좌랑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옮겨 고성군수·김제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조광조(趙光祖)가 몰려나고 김안로(金安老)가 집권하면서 그에게도 핍박이 가하여져, 1535년 사간원에 의하여 탐폭하고 비리가 많다고 탄핵되어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이는 무고였던 것 같다.
군민들이 그의 파직을 애석해하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뒤 그의 억울함이 밝혀져 다시 복직되었는데, 외직으로 청송부사·서흥부사를 지내고, 내직으로 옮겨 1548년(명종 3)에는 73세로 성균관사성에 이르렀다.
그뒤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초계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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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영(鄭宗榮)
1513(중종 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인길(仁吉), 호는 항재(恒齋).
아버지는 현감 숙(淑)이며,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김계훈(金季勳)의 딸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30년(중종 25) 사마시를 거쳐, 154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검열이 되고, 1547년(명종 2) 호조정랑·헌납 등을 거쳐 뒤에 부수찬·교리 등을 지냈다.
1552년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공조참판이 되었으며 강원도관찰사 때는 도민들을 안무(安撫)하고,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여서는 서북지방인이 무예를 좋아하고 문교(文敎)를 싫어하는 지방이라는 형세를 감안하여 평양에 서원과 서적포를 설립하여 학문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뒤 팔계군(八溪君)에 습봉(襲封)되었다.
1562년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윤원형(尹元衡)에게 아부하여 부정행위를 자행하는 수령들을 응징하고, 내전의 힘을 빌려 발호하는 요승(妖僧)을 제거하였다.
1567년 한성부판윤으로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육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우찬성으로 사직하였다.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항재집》이 있다.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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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정(鄭蘭貞)
?∼1565(명종 20). 조선 명종 때 척신(戚臣) 윤원형(尹元衡)의 첩. 본관은 초계(草溪). 아버지는 부총관 윤겸(允謙)이며, 어머니는 관비(官婢)출신이다.
스스로 미천한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윤원형에게 접근, 그의 첩이 되었다.
1545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였으나 나이가 어려 모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그의 동생 윤원형의 사주(使嗾)에 따라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尹任)이 그의 조카 봉성군(鳳城君:중종의 8남)을 왕위에 세습시키려 한다고 무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과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영의정 유관(柳灌) 등을 제거하게 하였다.
그뒤 문정왕후의 환심을 얻어 궁중에 무상출입하는 한편, 1551년(명종 6)정실 김씨(金氏:安遂의 딸)를 축출, 적처(嫡妻)가 되었으며, 이어 김씨를 독살하고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작호를 받았다.
봉은사(奉恩寺)의 승려 보우(普雨)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 불교진흥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 모리행위를 하기도 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사림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강음(江陰)에 유배되자 함께 배소에 퇴거하였다.
이때 김씨부인의 계모 강씨(姜氏)의 고발로 김씨독살사건이 탄로나자 사사(賜死)될 것으로 판단, 가노(家奴)에게 금부도사가 오면 알려달라고 하였는데, 금부도사가 평안도를 향하여 금교역(金郊驛)을 지날 때 이를 알리자 윤원형과 함께 음독, 자살하였다.
죽은 뒤 본래의 신분으로 환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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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鄭浚){2}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대원(大源).
윤성(允誠)의 아들이며, 윤원형(尹元衡)의 첩인 난정(蘭貞)의 사촌오빠이다.
1533년(중종 28) 음보(蔭補)로 검열이 되고,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3년 검열로서 포쇄관(曝#쇄04官)의 중임을 맡고 있으면서 사사로이 취처(娶妻)하였다는 이유로 대간의 논박을 받았다.
1544년 이조정랑을 거쳐 1546년(명종 1) 병조정랑으로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지평·정언·검상·장령 등을 거쳐 1552년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이듬해 우부승지·부제학을 지내고, 1554년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원주가 그의 가향(家鄕)임을 빙자하여 민전(民田)을 늑탈하고 그 지역의 세염(稅鹽)을 포탈하여 축재하기도 하였다.
이어 호조참의·광주목사(廣州牧使)·병조참지를 거쳐 155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고, 1559년 충무위행상호군(忠武衛行上護軍)이 되었다.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은 뒤 윤원형이 축출되자 그 세력에 아부하여 탐학을 자행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변방에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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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엽(鄭曄)
1563(명종 18)∼1625(인조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 진사 유성(惟誠)의 아들이다.
3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4세 때에 벌써 시를 지어 이이(李珥)와 정유길(鄭惟吉)로부터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지함(李之#함15)의 주선으로 송익필(宋翼弼)에게서 수업하고, 성혼(成渾)·이이의 문하에 출입하여 당시의 명류들과 교유하였다.
1583년(선조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을 거쳐 홍문관의 문한직(文翰職)을 맡았다.
1587년 감찰·형조좌랑이 되었으며, 1593년 황주판관으로 왜군을 격퇴, 그 공으로 중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장령을 거쳐 서천군수를 역임하였다.
1597년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귀국 후 성균관사성을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삼남대로에 있는 수원은 당시 난을 치르면서 큰 피해를 입고 있었으나, 군민을 잘 다스려 서천군수 때와 마찬가지로 주민들로부터 크게 칭송을 받았다.
1598년에 응교·집의로서 시강원필선을 겸하고,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참의로 있을 때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나주목사를 거쳐, 병조참지·대사간·예조참의를 역임하였고, 영위사(迎慰使)로서 관서지방에 다녀왔다. 이 무렵 척속 기자헌(奇自獻)이 이조좌랑의 추천을 받았으나 끝까지 반대하였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권력을 잡아 성혼을 배척하자, 성혼의 문인이었던 그도 종성부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학교교육을 크게 일으키고, 때마침 오랑캐 수만명이 침입하자 계교로써 적을 물리쳤다.
이때 피해는 피로자(被擄者)한명뿐이었으나, 기자헌의 농간으로 동래에 유배되었다.
1605년에 풀려나 이듬해에 성주·홍주의 외직을 차례로 맡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예조참의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대사성을 거쳐, 1610년에는 충청감사가 되었다.
그뒤 예조참의·승지·판결사·도승지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도승지로 있을 때 광해군이 경연을 소홀히 여기는 것을 보고 직언하다가 호조참의로 강등되었으나 곧 참판에 오르고 1613년에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이때 계축옥사가 일어나 사실을 밝히고자 하였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상소를 포기하고 스스로 도승지를 사직하였다.
1617년에 폐모론이 제기되자 외직을 구하여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에 폐모의 조처가 단행되자 관직을 버리고 여주에 돌아와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나 며칠 뒤에 조정에 나와 강화도에 위리안치키로 된 광해군을 전날에 북면(北面)한 군주이므로 곡송(哭送)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펴 주위로부터 크게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반정초에 비변사의 합사(合辭)로 대사성에 동지경연(同知經筵)·원자사부(元子師傅)를 겸하는 중책이 맡겨져, 학제를 상정하여 성균관을 다시 크게 일으키는 공적을 남기고, 곧 대사간에 제수되어 대사성을 그만두어야 하였으나, 국왕의 특명으로 그대로 겸하게 되었으니, 대사성으로서 타직을 겸하는 예가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한다.
인조반정 이후 친명정책의 표방과 함께 후금에 대한 적극정책으로 적의 침입이 있으면 국왕이 삼군을 이끌고 송도에 진주한다는 친정(親政)의 계책이 공식적으로 택하여졌는데, 이 안이 그로부터 나왔으며,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파천의 안을 과감히 제기한 것도 그였다.
공주에 있을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고, 환도 후에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대사헌에 제수되고, 또 우참찬이 되었다. 대사헌을 다섯번 겸하고, 한꺼번에 네가지 직임을 겸하기까지하여 격무로 병을 얻어 63세에 죽었다.
저서로는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와 《수몽집》이 있다.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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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익(鄭大益)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언겸(彦謙). 천성이 순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왜적이 지경을 침범하자 동생 대유(大有)와 함께 어머니를 업고 피란길에 올랐다. 피란가는 도중 길에서 왜적을 만나 도망치지 못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어머니를 숨겨놓고 물을 길러 간 사이에 어머니가 적병에게 들키고 말았다. 적병이 칼로 어머니의 등을 내리치려는 순간 동생 대유와 함께 몸으로 막아 형제는 한 칼에 죽고 어머니는 무사하였다.
극악무도한 왜적도 형제의 효심에 감동하여 어머니를 무사히 돌려보내어 천명을 누리도록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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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온(鄭蘊)
1569(선조 2)∼1641(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진사 유명(惟明)의 아들이다.
1601년(선조 39)에 진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시강원겸설서·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임해군옥사에 대해서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였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하여 이원익(李元翼)·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문할 것을 명하고 이어서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였다.
그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서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 德辨錄》을 지어 이것으로 자신을 반성하였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으면서 반정공신들의 비리와 병권장악을 공격하였고, 폐세자(廢世子:광해군의 아들 祗)와 선조의 서자 인성군 공(仁城君珙)의 옥사에 대해서 전은설을 주장하여 공신들을 견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하였으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그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다. 숙종 때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려서부터 당시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정인홍(鄭仁弘)을 사사하여 그의 강개한 기질과 학통을 전수받았다.
1607년 정인홍이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의혹을 일으키는 유영경(柳永慶) 등 소북파를 탄핵하다가 처벌을 받자 정인홍을 위하여 변호상소를 올렸다.
광해군 때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옥사를 두고 비록 의견이 달랐지만 정인홍에 대한 의리는 변하지 않아 인조반정 후 정인홍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 격화된 당쟁 속에서 그와 그의 후손들이 남인으로 처신하였고, 정인홍이 역적으로 심하게 몰리면서 정구(鄭逑)를 사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의 현실대응자세는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그것은 영창대군옥사 때의 상소나 대청관계에서의 척화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조선 후기 숭명배청사상이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김상헌(金尙憲)보다 크게 추앙받지 못한 것은 색목(色目)이 노론이 아니었는 데 연유한다.
허목(許穆)·조경(趙絅)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李滉)―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생가는 중요민속자료 제205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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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익(鄭文翼)
1571(선조 4)∼1639(인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위도(衛道), 호는 송죽당(松竹堂). 첨정 응탁(應鐸)의 아들이다.
1606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이조좌랑을 거쳐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612년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무고하여 강화로 몰아냈던 대북의 영수 이이첨(李爾瞻)으로부터 박승종(朴承宗)과 유희분(柳希奮)의 심복이라 하여 미움을 받았다.
1616년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한찬남(韓纘男)의 상변사건(上變事件, 海州獄事)에 연루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죽산부사로 있던 중 이괄(李适)의 난 평정에 공이 컸으며, 1628년(인조 6) 회답사(回答使)로 심양(瀋陽)에 다녀와 충청감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송죽당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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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주(鄭昌胄)
1606(선조 3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사흥(士興), 호는 만사(晩沙)·만주(晩洲)·묵헌(默軒). 시망(時望)의 아들이다.
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637년(인조 1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1642년 지평이 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1646년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헌납이 되었으며, 1653년(효종 4) 승지로 승진하였다가 뒤에 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문장이 뛰어나 당대의 제일인자로 일컬어졌다.
저서로 《만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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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주(鄭宇柱)
1666(현종 7)∼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대경(大卿), 호는 삼구당(三苟堂).
수만(洙晩)의 아들이며, 수성(洙性)에게 입양되었다.
1691년(숙종 1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10년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장령을 거쳐 1715년 세자시강원필선이 되었고, 같은해 12월 다시 장령으로 옮겼다.
1725년(영조 1) 안동부사로 재직할 때 향리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727년 남양부사로 재직할 때에는 임금의 능행(陵幸)을 당하여 밤에 횃불을 세우려고 백성들에게 돈을 거두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다시 파직되고 의금부에서 고초를 겪었다.
같은해 3월 의금부에서 풀려났으며, 11월에는 승정원승지에 서용되었다. 다음해 여주목사를 거쳐 1729년 승지로 천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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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량(鄭希亮){2}
?∼1728(영조 4). 조선 후기의 역신. 본명은 준유(遵儒). 본관은 초계(草溪). 참봉 중원(重元)의 아들이다. 명문의 자손으로 안음(安陰)에 거주하면서 부귀를 누리다가 순흥으로 이사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박필현(朴弼顯) 등과 공모하여, 영조 즉위 후 벼슬에서 밀려난 소론일파의 호응을 얻어 밀풍군 탄(密豊君坦)을 추대, 왕통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인좌를 도원수로, 스스로는 원수가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청주를 습격하고 한때 안음·거창·합천·삼가 등의 여러 고을을 제압하였으나, 도순문사 오명항(吳命恒)이 이끄는 관군에 패배하였다. 거창에서 선산부사 박필건(朴弼建)과 곤양군수 우하형(禹夏亨) 등에게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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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보(鄭熙普)
1683(숙종 9)∼1763(영조 39).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중욱(仲旭), 호는 퇴성헌(退省軒).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하주(廈柱)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사헌부감찰 윤중(胤重)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백종조(伯從祖)인 수석(洙碩)에게 수학하였다.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주위로부터 큰 기대를 모았으며, 영의정 이여(李#여11)에게 학문이 높다는 칭찬을 받은 일도 있었다.
1715년(숙종 41)진사시에, 1725년(영조 1)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고, 내섬시직장(內贍寺直長)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전적으로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으로 옮겼으며, 1727년 평강현령에 나가 3년 동안 치적을 쌓았다.
1729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갔다가 3년상을 마친 뒤 1732년에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이해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었는데, 정부의 구황정책(救荒政策)이 삼남에만 치우치고 강원도와 경기도 일원에는 아무런 조처가 없음을 지적, 이의 시정을 간하는 상소문을 올려 왕의 비답을 얻었다.
1733년 사간원정언이 되고, 병조정랑을 거쳐 평안도도사로 부임하여 청나라를 내왕하는 사람들에 대한 검색을 맡아보았다.
1734년 사간원사간, 이듬해 사헌부집의, 1739년 시강원보덕 등을 역임하였다.
1741년 다시 사간이 되었는데, 당시 왕실의 외손이었던 원경하(元景夏)와 의견충돌이 생겨 권귀(權貴)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후 여러 한직을 거치다가 1747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다시 원경하의 무고를 받아 사직하였다.
1750년 황주문안사에 임명되고,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병조참지 등을 거쳐 해미현감으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였다.
1755년 의주문안사에 다시 임명되었으나, 원경하 일당의 모함을 받아 삼척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사장(詞章)에 뛰어나 조하망(曺夏望)·강박(姜樸) 등과 함께 교우관계를 맺고 문명을 크게 떨쳤다.
저서로는 《퇴성헌유고》 12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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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직(鄭汝稷)
1713(숙종 39)∼1776(영조 52).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순필(舜弼).
수군통제사 홍좌(弘佐)의 손자로, 진사 도흥(道興)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무과에 급제한 뒤 부령부사로 있을 때 어사 홍계희(洪啓禧)의 복명에 의하여 선치수령(善治守令)으로 뽑혀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1743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승진한 뒤 함경도남병사·경기도수군절도사·함경도북병사 등을 거쳐 1758년 비변사의 추천으로 어영대장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어영청순라군이 금주령을 어긴 사실이 적발되어 일시 파직되었으나 오위의 사직으로 복직된 뒤 춘당대(春塘臺) 시사(試射)에서 탁월한 성적을 내어 가자(加資)되었다.
그뒤 어영대장에 재기용되었으며 이어 좌포도대장 재직중 다시 금주령 위배와 관련, 경기도 남양에 유배된 일이 있었다.
1765년 이후 총융사·훈련대장·한성부우윤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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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화(鄭琦和)
1786(정조 10)∼1840(헌종 6).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남중(南仲), 호는 헐오재(歇五齋).
고려 현종 때에 십이공도(十二公徒)의 하나였던 배걸(倍傑)의 26대손으로 청은군(淸隱君) 진로(鎭魯)의 손자이고, 첨지중추 홍진(鴻晋)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기만(淇萬)의 딸이다. 숙부 홍관(鴻觀)에게 입양되었다.
41세가 되던 1827년(순조 27)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와 사간원·홍문관 등 삼사의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으며 세자시강원필선에 이르렀다.
그는 사서(史書)의 체재를 충실하게 본뜬 〈천군본기 天君本紀〉를 지어 일명 〈심사 心史〉라 하였다. 이 작품은 인간의 성정(性情)을 의인화하여, 사람이 태어나서 30세가 될 때까지의 심상의 변화과정을 기년식(紀年式)으로 그린 우화소설(寓話小說)이다.
작품의 총론과 내용으로 보아 그는 당시 유학사상, 특히 심성론에 대하여 달관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남인계열의 학자로 재질과 인품을 갖추었으나 당파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일생을 시문과 학문에 헌신 하였다. 이조참판·홍문관제학이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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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영(鄭胤永)
1833(순조 33)∼1898. 조선 말기의 유학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군조(君祚), 호는 석화(石華)·후산(后山). 경기도 화성출신. 아버지는 현풍(鉉豊)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시면(時冕)의 딸이다. 큰아버지 현택(鉉澤)에게 입양되었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이다.
전우(田愚)·신두선(申斗善)·심의윤(沈宜允)·윤치중(尹致中)·서정순(徐政淳)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항로학파(李恒老學派)의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유시수(柳始秀)·홍대심(洪大心)과도 교유하면서 심성이기론(心性理氣論)을 주기(主氣)의 처지에서 피력하였다.
1881년(고종 18) 유생들의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때 경기도에서는 유기영(柳冀榮)과 신섭(申緘)이 소수(疏首)로 활동하였는데, 정윤영은 <斥邪萬人疏>를 작성하여 경기유생들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에 연루되어 이원현(利原縣)에 정배되었다가 3년 만에 풀려났다.
1893년의 금부도사, 성균관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학행으로 특지(特旨)에 의하여 사간원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처의(處義)에 있어 신하들은 마땅히 나가서 죽어야 하고 선비들은 자정(自靖)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단발령이 내리자 <자정명 自靖銘>을 지어 맹세하였다.
저서로는 《후산집》·《위방집략 爲邦輯略》·《화동연표 華東年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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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규(鄭載圭)
1843(헌종 9)∼1911. 조선 말기의 유학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영오(英五)·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艾山). 방훈(邦勳)의 아들이다.
1864년(고종 1)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남도 장성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입하였는데, 이러한 생활은 1879년에 스승이 죽기까지 15년간 계속되었다.
당시는 국권이 서서히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시기였던 만큼, 벼슬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저술과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1860년 김홍집(金弘集)이 청나라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정부에 제출하고 개화를 주장하자, 이에 대하여 조선은 아직 약한 상태이므로 일시적인 고식책에 불과하다 하여 척사위정론을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친일파의 개혁에 거의통문을 내기도 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호남·영남에 포고문을 내어 세계 여러 나라에 호소하여 일본과 담판하기를 촉구하는 한편, 노성(魯城:지금의 논산) 궐리사(闕里祠)에서 최익현(崔益鉉)과 거의하기로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강점 후 일제가 저명인사에게 주는 은사금을 물리쳤다.
1911년 오랑캐의 침략이 서서히 이루어져 빠져 들어가면서도 깨닫지 못하니 삼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학문적으로는 1903년 〈납량사의기의변 納凉私議記疑辨〉·〈외필변변 猥筆辨辨〉 등을 지어 전우(田愚)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제자로는 정면규(鄭冕圭)·권운환(權雲煥) 등이 있으며, 합천 경덕사(景德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노백헌집》 49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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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철(鄭顯哲)
1859(철종 10)∼1945.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도여(道汝), 호는 혜전(惠田). 강원도 횡성출신. 첨지중추부사 책화(策和)의 아들이다.
1885년(고종 22) 음직(蔭職)으로 기용되어 원산감리서서기관(元山監理署書記官)에 임명되었다.
서기관 재직 때 개항장의 방파제공사에 국고금 10만냥을 절약하여 총세무사(總稅務司)의 신임을 받았고, 그뒤 부산항에 근무할 때는 일본인의 횡포를 막고 조선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 노력하였다.
1896년 경흥구지사(慶興口知事)에 임명되고 주임관 5등이 주어졌으며 러시아와의 교역항인 경흥의 지리적 위치를 이용, 러시아와 외교활동에 노력하였다.
1897년에는 삼화부윤으로서 다시 삼화감리를 겸하였으며, 이해 진전(眞殿)영건과 선희궁(宣禧宮) 이건시 감동(監#동48) 궁내대신 이하 공로에 따라 시상할 때 가자(加資)되었다.
1899년 성진감리 겸 성진부윤이 되고 주임관 4등이 주어졌다.
그뒤 안악군수를 역임하고 안산에 낙향하여 있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독립운동의 자금을 조달하였으며, 일본경찰의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다가 광복 직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