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직 해상자위관의 대한민국 국립 시설 야간 기습 작전
2017년 3월 20일 오후 9시쯤.
이른 봄.
일제 강점기, 나라를 잃고 땅과 사람이 이름을 빼앗겼던 그 시기에
이 땅에서 끌려나가 일본을 비롯
한 외국에서 죽어간 조상들을 기리기 위해 재일동포와 국민, 정부가 힘을
합해 만든 천안 국립 망향
의 동산.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여의고 17세에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
노릇을 했다고 발표,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으로 알린 김학순님의 비석도 구름 낀 밤 하늘 아래 조용히
서 있었다.
그 시각.
망향의 동산에서 멀지 않은 도로에 주차한 택시 안에 있던 오쿠 시게하루는 작전을 개시했다.
나이 68세인 오쿠 시케하루는 전직 해상자위관이었다.
오쿠 시게하루 자신이 ‘정정작전(訂正作戰)’이라고 붙인 행동의 첫번째 관문은 가로등이었다.
오쿠는 조심스레 택시 문을 열고 나와 망향의 동산 쪽을 바라봤다. 예상했던
대로 모든 가로등이
꺼져 있었다. 더욱이 날씨도 흐려 달빛은 물론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쿠는 그동안 4개월여에 동안 한국을 세번 방문해 무려 여덟번이나
망향의 동산에 대한 사전조사
를 거쳐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오쿠는 택시에서 무게 35kg인 대리석판 한장을 꺼냈다. 그리고 약 700미터 떨어진 목표지점까지
날랐다. 그렇게 전직 일본 해상자위대 자위관의 정정작전은 시작됐다.
오쿠는 3장의 석판을 날랐다. 그리고
나서 접착제등의 부자재도 날랐다.
석판을 모두 나른 뒤 오쿠는 ‘일본인의 사죄비’에 접착제를 발랐다.
망향의 동산에 있는 사죄비는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가 1983년 12월 15일에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
고 세운 것이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일본인의
사죄비
귀하들께서는 일본의 침략 전쟁시 징용과 강제연행으로 강제노동의 굴욕과 고난 중에 가족과 고향
땅을 그리워하다가
귀중한 목숨을 빼앗겼습니다.
나는 징용과 강제연행을 실행 지휘한 일본인의 한사함으로서 비인도적인 그 행위와 정신을 깊이 반
성하여 이곳에 사죄하는
바입니다.
늙은 이 몸이 숨진 다음도 귀하들의 영혼 앞에서 두손 모아 용서를 바랄뿐입니다.
1983년12월15일 요시다 세이지’
오쿠는 사죄비를 몽땅 파내고 싶었지만 폭 120cm, 세로 80cm, 두께 10cm 인 비석의 무게가 약 2
톤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때문에 중장비를 동원 공식적인 작업이어야
해서 교체는 포기했다.
대신 사죄비의 글씨를 다른 석판으로 덮어버리기로 했다.
‘위령비’, ‘일본국’, ‘후쿠오카현ᆞ요시다 유우토’ 등 세부분으로
나눠진 위령비를 사죄비 위에 차례
로 얹자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왔다.
접착제가 굳지 않아 생긴 문제였다.
하는 수 없이 주변의 돌을 찾아 밑에 괴고 다시 모양을 잡았다.
이로써 일본인들이 저지른 성노예와 강제노역의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사죄비는 죽은 영혼을 위
로하는 위령비로
바뀌었다. 그것도 대한민국 국립 망향의 동산에 ‘일본국’이라는 국가명을 가운데
박아놓은 채로.
오쿠는 호텔로 돌아와 요시다 유우토에게 ‘임무완료’를 보고했다.
요시다 유우토는 요시다 세이지의 장남으로 자신의 부친이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해 성노예와 강제
노역을 시켰다고 쓴
책과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
그 뒤 오쿠 시게하루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한국 경찰의 출두 요청에 따라 2017년
6월24일
입국해 체포됐다.
오쿠의 체포 뒤 일본정부의 스가 관방장관은 “일본인 보호의 관점에서 필요한
경우 재외공관을
통해 적절한 지원을 해나갈 것.”이라고 밝혔으며, 실제 주한일본대사관
관계자가
오쿠 시게하루와 접촉, 도울 방법을 논의했다.
한편 한국 정부는 오쿠 시게하루를 ‘공용물건 손상죄’와 ‘불법침입죄’로 기소했으며, 2018년 1월
11일
대전지법 대전지법 천안지원 형사3단독 김상훈 판사는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에 오쿠 시게하루는 1월16일
1심 판결에 불복 항소했다.
이 사건으로 오쿠 시게하루는 산케이신문을 비롯한 일본의 우익언론들로부터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
한편 이 사건과 관련 생각해볼 문제가 몇가지 있다.
◆ 오쿠 시게하루를 태워다준 한국인 택시기사는 오쿠가 밤
늦게 국립 망향의동산에 들어가는 것
을 보고도 ‘불법 행위’라는
것을 몰랐는가, 하는 점이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비석을
깜깜한 한밤
중에 설치하는 것이 - 그것도 일본인이 한국의 국립시설에
-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더욱이 오쿠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오쿠가 한국에 올
때마다 동행했다고 한다. 이 문제는
철저하게 따져볼 문제이다.
◆ 2015년11월23일 야스쿠니신사 화장실에서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 정부에
경각심을 주
기 위해’ 폭발물을 터뜨린 전씨에 대해 우리 정부와 언론도,
일본이 오쿠에게 그러하듯 좀 더
관심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 오쿠는 국립시설을 훼손했는데 불구속 수사를 했고 집행유예가 나왔다. 반면 전씨는
야스쿠니라는 종교시설을 훼손했는데 일본에 도착하자 수사를 거쳐 바로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또한 전씨는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으며, 어찌된 일인지 독방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등 혹독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고 한다.
우리, 최소한 양국의 공평한 처벌을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전씨를 집행유예로 풀어주든지,
아니면 오쿠를 구속시키든지.
최소한 주권이 있는 독립 국가라면!
◆ 오쿠의 인터뷰에 따르면 출국금지 상태에서 일본의 정서와는
달리 한국에 머무는 동안 어떠한
항의나 위협도 없어서 자유스럽고, 평화로웠다고 한다. 그 인터뷰 매체는 일본언론이다.
일본인들이 그 인터뷰를 보고 상상할 우리 이미지를 생각하면 기가 막히다. 오쿠가 이 땅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오쿠에
대한 글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