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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영성
다산 심학에 나타난 영명성의 문제
이향만(가톨릭대학교)
1. 서론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영성’이란 개념은 일반적으로 Spirituality의 번역어로 이성이나 감성을 넘어서 존재하는 인간의 종교적인 의식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 개념은 'spirare'에 어원을 두고 있지만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nous나 noesis같이 지성적인 작용과는 다른 실상에 대한 직관적인 파악을 의미하고 있다. 페스뛰에지에 따르면 “이 앎은 직접적인 접촉으로 감성으로 느껴지고 만져지고 눈에 보이는 것이다. 영혼이 추구하는 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결합, 두 생명이 서로 스미어 하나로 되는 융합이다.” 여기서 영성의 주체는 영혼이다. 감성과 같이 직관적인 것이기에 영적인 감수성이라고 한다. 영적인 직관을 통한 인식은 절대자와의 내적인 일치를 의미한다. 이 일체감은 영적인 체험과도 같은 것이며 인격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동양에 전래되기 전에는 이러한 종교적 체험에 대해서 유교 전통에서 철학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물론 이와 유사한 개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주자가 『대학장구』에서 사용한 ‘활연관통’(豁然貫通)과 같은 직관적인 인식에 대한 개념이 있지만 이 개념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비체험이 아니라 수행을 통한 도에 대한 깨달음을 통한 일체감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개념에서는 초월적 존재와의 인격적인 일치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교의를 전달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은 성령(spiritus sanctus), 영성(spirituality)과 같은 번역어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에 주재자인 천주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영성’ 개념을 사용하였다. 영성이란 개념을 처음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면, “셋째, 동물은 본래 지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이 없습니다. 만일 영적인 동작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영이 있는 어떤 것이 그의 동작을 인도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동물이 영성이 없음에도 그들의 삶이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영을 갖고 있는 주재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다. 그는 사람의 경우 “우리 사람은 능히 자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일을 하는데 있어서 모두 본래 ‘영지’(靈志)를 사용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리치는 영적인 것은 천주의 존재를 의미하며, 영성은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고, 영지는 천주로부터 품부 받은 것으로 사람에게만 있는 것으로 자율성의 근거가 됨을 밝히고 있다. 또한 사람의 혼백과 관련된 언급에서 리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품의 혼을 영혼이라고 합니다. 바로 사람의 혼입니다 이 혼은 생혼과 각혼을 겸하고 있는데 사람을 생장하고 발육하게 합니다. 또 물정을 지각할 수 있고 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물을 추론할 수 있고 의리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합니다. 영존하고 불멸하기 때문입니다.” 이 언급으로부터 ‘영혼’의 ‘영’은 영성을 의미하며 영적인 존재로부터 품부받은 인간의 특별한 속성임을 인간의 인식능력과 영혼의 불멸성을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어원적으로 살펴볼 때 중국인들에게 영(靈)이란 일반적으로 초사(楚辭)에서 팔방(八方)의 신(神)을 가리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리치는 『천주실의』에서 문왕의 백성들이 임금의 은덕에 감탄하여 “그대를 일러 영대라고하고, 못을 일컬어 영소”라고 하였고 걸왕과 주왕에 이르러서도 그 용어를 계속 쓰면서 사물에 영성을 부여한 것을 비판하며 신기하게 생각하였다. 실제로 영대와 영소는 역사적으로 문왕이 백성들과 함께 만들고 더불어 즐거워했던 곳이다. 이것이 보여주듯 중국인들은 선왕이 베푼 선정의 특별한 경험을 대상에 부여하여 간직하고자 하였다. 위고문상서(僞古文尙書)에 따르면, “천지는 만물의 어버이요, 사람은 만물의 영이다” 하였다. 여기서 ‘영’은 다음 말에 이어져 나오는 정신의 ‘총명’을 의미한다. 장자에게서도 정신의 의미로 쓰인 ‘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자연의 변화에] 순응할 뿐 그것이 우리의 본성을 어지럽히거나 우리들의 정신적인 집(靈府)에 침입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밖에도 영은 앞에서 나타난 신(神), 정신(精神), 혼(魂)외에도 마음(心), 선(善), 진실(眞實), 밝음(曉, 明), 무(巫), 복(福),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문자를 형상적으로 살펴보면 무당이 신명이 난 상태에서 하늘로부터 말씀을 받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학적으로 ‘영성’이란 개념은 하늘에서 품부받은 분별능력으로 한유(韓愈)의 작약가(芍藥歌)에 처음 나타난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 볼 때 이 개념이 중국인들에게 철학적인 개념보다는 인간의 삶에서 경험하는 일반적 기대와 또 한계를 넘어서는 특별한 체험이나 능력 그리고 인식과 관련하여 폭넓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넒은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체험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바탕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개념적인 교섭은 우리나라에서는 일련의 친서파(親西派) 실학자들에 의해서 일어났는데 수용과정과 의미가 현대 그리스도교 영성에 미치는 문화적인 영향력을 생각할 때 충분히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논문에서는 다산의 영명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그 연원과 의미를 살펴보는데 한정을 짓고자 한다.
2. ‘영성’ 개념의 철학적 연원
영(靈)과 성(性) 각각의 개념은 중국 철학자에게 심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심의 문제는 유학에서 중요한 철학적 주제인데 공자에게서 연유하고 맹자에게서 유학의 철학적 개념으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본성은 서로 가깝고 습관은 서로 다르다”라는 간단한 언급으로 보편적인 심의 문제를 다루었다. 공자는 심의 성향 가운데 수치심(恥)을 도덕심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언급하였는데 예를 통한 도덕적 관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도덕의식으로 삼았다:
“금령으로 이끌고 형벌로 규제하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없게 되고 덕으로 이끌고 예로 규제하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도 갖게 되고 또한 사려함에 이르게 된다.” ;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 좋지 못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와는 말할 수 없다.”; “옛날에 사람들이 말을 경솔히 하지 않은 것은 실천이 말을 따를 수 없음을 부끄러워하였던 까닭이다.”; “[공문자는] 기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아랫사람들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문이라 불렀다.”; “교묘하게 꾸며낸 말 좋게 꾸민 얼굴, 지나친 공손을 좌구명이 부끄러워했는데 나도 또한 부끄러워한다. 원한을 감추고 그 사람과 교우하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러워하였는데 나도 또한 부끄러워한다.”; “나라에 정도가 행해져 평화로울 때에는 가난하고 미천한 것이 부끄럽지만 나라에 정도가 행해지지 않아 혼란할 때에는 부하고 귀한 것이 부끄럽다.”; “헌이 부끄러움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라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 녹을 먹을 것이지만 도가 없는데 나아가 녹을 먹는 것이 부끄러움이다.”
『논어』에 나타난 수치심과 관련된 이러한 언급은 핑가레트가 잘 지적하였듯이 “치(恥)가 비록 도덕적 개념이며 어떤 도덕적 조건 또는 반응을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감당하는 도덕적 관계란 개개인이 바로 예에 의해 규정되는 자신의 공적인 지위와 역할에 대해 가지는 도덕적 관계이다. 치는 따라서 ‘내면적’이기보다는 ‘외면적’이다.” 하지만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의식은 개인적으로 부단한 내적인 성찰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점에서 치는 외물과의 관계에 대한 반응이며 도덕적 자각이다. 이 자각은 공적인 일에서 획인된다.
맹자 역시 부끄러움을 인간의 근원적인 도덕심으로 보았으며 나아가 정치도덕적인 의미로 해석하였다: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안 되니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부끄러움이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기만하는 짓을 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갖는 바가 없다. 부끄러워하지 않음이 남과 같지 않다면 무엇이 남과 같을 수 있겠는가?”; “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하민을 내려주시고 그들을 위해 임금을 나오게 하고 스승을 나오게 하니 오로지 그들이 상제를 도와 은총이 있었다. 죄가 있고 죄가 없음은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천하 사람들이 어찌 감히 그 뜻을 지나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한사람이 천하를 횡행하는 것을 무왕은 부끄럽게 여겼으니 이것은 무왕의 용기이니 무왕이 또 한 번 노하셔서 천하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셨습니다.”
맹자는 부끄러움 자체에 대한 성찰을 중시하였다. 또한 부끄러움을 통한 성찰을 하늘에 대한 부끄러움(愧於天)과 인간에 대한 부끄러움(怍於人)으로 좀더 세분하였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능동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인 보편적인 도덕심으로 발전시켜나갔다. 맹자는 다른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이 마음을 네 가지로 설명하였는데 바로 측은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 사양지심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마음의 실마리는 윤리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심이며 ‘인의예지’의 덕으로 나아가는 발단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심이 나타나는 능력을 덕으로 표현하였다. 이를 살펴볼 때 맹자에게 비로소 심, 성의 철학적 개념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맹자는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을 알고,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맹자에게 “마음이란 사람의 신명이다.”
맹자의 심의 철학을 이어 주자는 “마음은 신명의 집이요 한 몸의 주재가 된다”고 하였으며 나아가 “마음은 기의 밝은 면(기지정상)이다.”하였다. 이렇듯 심을 이기론으로 설명해 낸 것이 주자학의 특징이다. 주자는 신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마음의 본체는 깊고 고요하고 허명하다.”고 하였다. 『대학장구』에서 명덕(明德)을 주석하며 “명덕이란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허령불매하여 모든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 단 기품이 구하는바, 인욕(사욕)이 가리는 바가 되면 곧 때로 어두워진다. 그러나 그 본체의 밝음(明)은 쉬지 않는다. 그러므로 학자는 의당 그 발하는 곳에 따라 마침내 그것(명덕)을 밝힘으로써 그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허령불매’(虛靈不昧)가 마음의 덕성을 나타내는 말로 심학의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허령불매’란 비워져있어 영험하며 어둡지 않고 밝다는 뜻이다. 심의 허령은 비워져있고 영묘하다는 뜻인데 “역은 사려함이 없고 작위 함이 없다. 고요하다고 부동하여, 감응하면 천하의 이치를 통한다.”는 데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주자는 “정명도가 ‘그 체는 역이고, 그 리는 도이며, 그 용은 신이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역은 천지의 마음(心)이고 도는 천지의 성(性)이고 신은 천지의 정(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천지의 심, 성, 정이다.”하며 심, 성, 정의 위계를 분석적으로 세웠다. 실로 주자는 ‘허령불매’를 심의 덕으로, ‘구중리’(具衆理)를 성의 작용으로, ‘응만사’(應萬事)를 정의 기능으로 나누었다. 또한 장횡거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을 이어받아 마음이 성과 정을 위계적으로 통섭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심의 인식의 주체성와 사유와 소여의 작용을 말해주고 있다.
3. 도심과 인심
조선에서 전통적인 주자의 심학에 새로운 전회를 가져와 철학적인 체계를 세운 사람은 다산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은 주자의 『심경』을 주석한 『심경밀험』에서 신과 형이 오묘하게 합하여진 “허령지각”의 마음을 사람이 태어날 때 갖게 됨을 밝히면서 단순히 말하기 어려우므로 심(心)이라 하기도 하고 신(神)이라 하기도하고 영(靈)이라고 하기도 하며 혼(魂)이라고 하며 다른 글자를 빌어서 썼다고 하였다. 다산은 허령불매를 심의 덕으로 본 주자의 입장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규장각 직제학 김 희(金 熹)와의 대담에서 마음을 허령불매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희: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용: 유형의 마음은 우리의 내장이며 무형의 마음은 우리의 본체이니 이른바 허령불매이다.
희: 허령불매란 어떤 것인가?
용: 이는 무형의 본체로서 혈육에 영속되지 않는다. 이는 만상을 포괄하고 만리를 묘오하여 능히 사랑하거나 능히 증오하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해준 것이다.“
다산은 『중용강의보』와 『중용자잠』에서는 주자의 ‘허령불매’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영명’(靈明)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조어하였다. 하지만 ‘영명’은 ‘허령불매’개념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영’은 ‘허령’, ‘명’은 ‘불매’의 개념을 더 명료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개념의 변화는 본래 고경(古經)의 의미에 더 가깝게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마음의 영묘함과 뚜렷한 인식작용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다산은 “인간은 영명스러운 마음을 받아 만물을 초월해서 만물을 향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영명’은 마치 종차(種差)와도 같이 인간이 금수와 분별되는 근거로 삼았다.
신과 형은 바로 맹자가 말한 ‘대체’(大體)와 ‘소체’(小體)이다. 대체는 하늘로부터 받은 영명무형의 신(神)이고 소체는 부모로부터 받은 형구(形軀)이다. 대체의 기호(嗜好)는 선을 즐기고 악을 싫어하며 덕을 좋아하고 더러움을 부끄럽게 여긴다. 대체의 기호가 도의라면 소체의 기호는 식(食), 색(色)과 같은 생존의 욕구라 할 수 있다. 다산은 대체와 소체의 자연스러운 기호가 있다고 보고 이를 ‘성’이라 하였다. ‘성’에 대한 자해(字解)를 “성은 심에서 나온 것이므로 ‘心’자에다 ‘生’자를 붙인 것이다”하여 성을 “형상도 본질도 없는” 기호라고 하며 도심(道心)은 영명무형의 대체가 발한 것이고, 인심(人心)은 기질의 소체가 발한 것이다.하였다. 따라서 사람은 두 가지의 마음을 갖고 있으며 도의가 발한 바를 도심이라 하였고 소체인 기질이 발한 바를 인심이라 하였다. 도심이 인심을 이기면 대체가 소체를 이긴 것이며 이때 사람은 비로소 덕을 실행하게 된다고 보았다. 다산은 “상지인(上智人)이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으며 하우인(下愚人)이라도 도심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며 「중용서문」에 나오는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두 마음이 사람의 마음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필연적인 요소임을 밝혔다.
다산은 대체와 소체는 오묘하게 결합되어 있어 분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은 신형(神形) 묘합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묘합이란 인간 마음의 신묘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자, 심에 대한 인식의 한계를 고백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인간은 대체와 소체가 결합하는 단계에서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을 갖게 된다. 그것은 덕성과 기질의 결합이다. 인성은 도의와 기질이 합하여 하나의 성이 된 것이고 금수의 성은 순수한 기질지성만으로 하나의 성을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다산은 인간에게 기질지성만이 밖으로 드러난다는 것을 인정치 않았다: “만일 성이 기질에 우거한다고 하면 가능하거니와 천명밖에 별도의 기질성을 내세워 말한다면 옛적의 말로도 이를 증험할 수 없으니 신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밖으로 드러난 인성은 순선한 천명성이거나 인욕으로 가리어져 천성이 드러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형구가 도심을 따를 때 덕이 나타날 수 있고 형구가 도심의 제어를 받지 않아 단순히 그 욕구만을 따를 때 악으로 쉽게 빠져든다고 보았다. 다산은 인성과 인욕으로 도심과 인심의 두 가지 성향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성을 도심의 기호로 한정되게 사용하였다. 무릇 천성의 윤리적 기호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고유한 것이며 인격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다산은 사람들이 잘못을 범하는데도 인성을 선하다고 하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의 일을 행하면 반드시 유쾌하게 되는데 이는 적성에 맞아 유쾌한 것이 아닐까? 사람이란 언제나 하나의 악한 일만 행하여도 반드시 굶주려 허전한 듯 스스로 움츠려드는데 이는 성을 거스르므로 허전해하는 것이 아닌가?”
다산의 심론은 주자를 계승하면서도 성론은 공자의 ‘성상근’과 맹자의 ‘성선’을 따르고자 하였다. 따라서 주자학자들 처럼 성을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누는 것을 수용하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성이 있을 수 없다. ... 옛날 유학자들은 두개의 성을 말하였는데 하나는 본연성, 또 다른 하나는 기질성이라 하여 본연성은 순전히 선하여 악이 전혀 없는 것이며 기질성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는 것이라 하여 ‘맹자는 단지 본연성에 근거하여 기질성을 말하였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다’고 까지 이른 것이다. ... 그런데 맹자의 성선론은 맹자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시경에 ‘ 백성은 타고난 착한 성품이 있으니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네’(民之秉彛 好是懿德)라 하였으니 이는 분명히 성선설이다. 공자 또한 여기에 이를 단정지어 말하였다. ‘이 시를 지은이는 시를 아는 사람이구나.’ 성선은 성현의 근본 말씀인 것이며 어느 한사람의 사사로운 믿음이 아니다 맹자 말씀에 어찌 미비점이 있겠는가?”
다산은 『서경』 「대우모」에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한 심법(心法)인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다. 정일하게 하여 진정 그 중을 잡아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을 주석하면서 서경의 ‘인심은 위태롭다’는 말은 아직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 하였다. 다산에 따르면 ‘위’(危)라는 것은 형구의 욕구에 치우침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형구가 필요하지만 치우쳐서는 안된다. 인간의 선택에 가치가 부여된다. 인간의 마음은 도심과 인심이 갈등하는 관계로 되어 있다. 천명과 인욕은 내부에서 서로 다툰다. 다산은 이 갈등을 ‘송사’와 ‘교전’으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이 갈등은 필연적이고 처절하다는 의미이다. 도심을 따르는 것은 의지적이고 인심을 따르는 것은 인심과 같이 “거칠고 거짓이 없다.” 인간이 도의를 행하는 것은 이렇듯 자율적인 결단을 요구한다. 따라서 형구가 선을 구체화할 때 그 형구는 단순한 형구라 할 수 없다. 도가 깃든 형구이다.
다산은 심에 있어서 염려하는 두 가지 병에 대하여 다름과 같이 말하였다: “마음에 두 가지 병이 있다. 그 하나는 유심의 병이고 다른 하나는 무심의 병이다. 유심의 병은 인심이 주가 된 것이고 무심의 병은 도심이 주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가지는 다른 것 같은데 그 생긴 병의 원천은 사실 같은 것이다. 경으로 안을 직관하고 살펴 공사를 구분하면 이같은 병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도심은 방임하지 말아야할 도덕적 반성으로 나타난다. 도덕적 반성은 금수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도덕적 반성에 따라 덕을 행함에 있어 형구는 본래의 기능을 갖게 된다. 덕을 행위의 결과로 이해했을 때 도심은 형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심의 도덕적 반성의 내용으로 부터 인심의 구체적인 성향이 밝혀질 것이다. 영명성에서 비롯한 도덕적 의지와 형구의 자연스런 욕구의 묘합은 결국 도심이 인심을 제어하는 가운데 그 지속성을 구체화하게 되며 인간을 하늘과 합일시키는 지향성을 유지하게 되는 근거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무형 신명한 정신과 유형한 육체가 묘합하는 중추가 되는 곳인데, 이름을 빌려 심이라고 하였다
4. 영명성과 천명
다산은 심을 인간의 영명이 사는 집이라 하여 신명을 마음을 집으로 삼아 마치 인이 “사람의 마음”인 것을 인이 “사람의 집”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표현이라고 설명하였다. 영명성은 심의 본질이자 지향성을 뜻한다. 영명성이란 영명한 본체, 즉 도심의 기호라 할 수있다. 『심경밀험』에 도심인 영명체에 대한 명료한 분석이 있다:
“총괄해 보면 영체 내에는 3가지의 이치가 있다. 성으로 말하자면 선을 좋아하고 악을 수치로 여기니 이는 맹자가 말하는 성선이며, 권형으로 말하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으니, 이는 [물은 터주는 쪽으로 흐르기 마련이라는] 고자의 단수(湍水)의 비유와 양웅의 선악혼설이 발생될 수 있는 까닭이 되며, 행사로 말한다면 선하기는 어렵고 악하기는 쉬우니 이는 순경 성악설이 있는 까닭이 된다. 순자와 양자가 ‘성’자에 대한 인식이 본래 잘못되어 그 말이 그릇되어 있지마는 사람의 영체 내에 본래 이러한 이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산은 고자와 순자와 양자의 성설을 변증적으로 종합하여 하나의 성론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러한 다산의 분석에 따르면 영명성은 세 가지 이치로 나타난다. 도덕적인 기호, 도덕적 판단, 도덕적 실천의지가 그것이다. 다산은 고자와 순경의 성론이 맹자의 성론을 단편적으로 이해한데서 나타난 결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이러한 이론들의 이치가 갖고 있는 개별적 타당성을 파악하였고 그의 영명성의 이론에서 종합하였다. 영명의 도덕적인 기호가 도덕적인 판단을 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영명한 마음은 모든 사물의 원리를 탐구하여 깨달을 수 있는 능력과 천체운행과 자연변화, 요원한 곳과 아득한 옛일까지 알 수 있는 객관적 판단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형의 도덕적 판단은 이러한 개별적인 대상적 판단에서 더 나아가 상황판단을 기초로 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도덕적 판단은 실존적인 수행판단이다. 도덕적 판단은 단순히 판단에 머무르지 않고 인격적 행위를 수반하거나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권형은 의지적이다. 의지적인 상황판단은 선천적 기질의 제약을 넘어서 인간이 자율적으로 선을 선택하는 능력을 불러 일으키며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진다. 다산은 이 자율적 판단을 ‘자주지권’(自主之權)이라 하였다: “하늘이 사람에게 자주지권을 부여해주어 선을 하고자 하면 선을 하고 악을 하고자 하면 악을 하게 하였으니 유동적이고 정해지지 않아 그 권능이 자기에게 있어서 금수의 정해진 마음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선을 하면 실로 자신의 공이 되고 악을 하면 실로 자신의 죄가 된다. 이것은 마음의 권능이지 성품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천명을 품부 받았지만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함은 자율적인 판단에 달려있다. 이는 도심이 요구하는 필연성과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이 만나는 곳이다. 이 권형이 다산 심학의 특징이 드러나는 핵심처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이러한 도덕적 판단과 책임을 하늘이 맡긴 신권묘지(神權妙旨)로서 사람이 두려워하여야할 바로 생각했다. 이것은 천이 인간에게 신뢰감을 드러내는 방식이자 심의 영명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영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기호와 판단과 의지적 실천력은 단계적으로 일어나기 보다는 직관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산의 영명성은 기호에서 비롯되지만 판단과 의지까지 함의하고 있는 포괄적인 직관 성향이다. 이 영명한 마음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 다산이 추구하는 마음의 수행이다. 다산은 영명지성을 유지하는 방식을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진기성(盡其性)은 몸을 닦아 지선(至善)의 경지에 이른 것이며 진인성(盡人性)은 사람을 다스려 지선의 경지에 이른 것이며 진물성(盡物性)은 상하 초목이 모두 무성하다는 것이다. ...진기성은 그가 하늘에서 받은 본분을 극진히 하는 것이다. 자수하면서 지선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나의 본분을 극진히 한 셈이며 치인하면서 지선의 경지에 이른다면 사람들이 각각 그들의 본분을 극진히 한 것이지만 그 공은 나에게 있다. ... 동식물들로 하여금 각각 그들이 지닌 생육의 성을 극진히 하게 한다면 물이 각각 그의 본분을 극진히 하되 그의 공은 내게 있는 것이다.”
다산은 마음의 수행을 통하여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초목에 이르기까지 그 고유한 성을 다하게 하였다. 마음의 수행은 자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대상에 까지 이르고 그것을 지선으로 완성시켜준다. 이 완성의 시발점은 자신에게 있지만 그 효과를 만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만물을 통해 자신의 수행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다산의 생태적 심성론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므로 일의 결과는 자성의 계기를 준다: “일이 선하지 아니할 때 도심은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 솟아나는 것은 천명이 차근차근 타이르는 그것이며 행실이 선하지 아니할 때 이를 후회하는 마음을 솟아나게 하는 것은 천명이 차근차근 타이르는 것이다.” 이 ‘부끄러움’은 공자에게서 비롯되고 맹자에게서 발전된 심의 본질적인 성향이다. 다산은 부끄럽고 후회하는 마음을 상제와의 인격적인 대화로 설명한다. 즉 도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정녕 자세히 들으면 희미하게 들리지 않으니 모름지기 이 말을 알아들어야 하며 이것이 밝고 밝은 천명이다.”
천명이란 무엇인가? 다산은 “천명이란 생을 부여한 처음에 이 성을 내려준 것이 아니라 우 원래 형태가 없는 체와 묘용의 신이 같은 류로서 함께 들어가 그것이 감응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경고(儆告) 또한 형태가 있는 이목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항상 형태가 없는 묘용의 도심이 그를 유도하고 그를 가르침이니 그것을 일러 ‘하늘이 그의 마음을 유도한다’는 것이다.” 천명이란 도심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감응이다. 이 감응은 경고의 형태를 띠고 있다. 경고란 영적인 언어이다. 하지만 이 경고는 늘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명이란 은미(隱微)하여 자연과 같으므로 소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 성인이 말하는 상서로움과 재앙의 경계는 반드시 시간이 흐른 다음 이를 증험할 수 있으니 소인은 이를 업신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 경고를 인식하기 위해 계신공구(戒愼恐懼)의 수양이 요구된다. 계신공구는 신독하는 자세이며 희노애락이 아직 미발된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상제를 삼가 섬기면서 혹시라도 잘못이 있을까, 또는 과격한 행동이 있을까, 또는 편벽된 감정이 싹틀까 두려워하여 마음을 공평하게 가지고 마음을 지극히 공정하게 지녀 외물이 다다르기를 기다리는 중정(中正)한 마음이다. 마음이 중의 상태에 있을 때 기뻐해야 할 것을 기뻐할 줄을 알고, 성내야 할 것에 성낼 줄을 알며, 즐거워해야 할 것이 즐거워 할 줄을 알아 사물에 발하여 중절되지 않음이 없는 화(化)가 된다. 이 중화는 신독 공부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며 정성스럽고 밝게 깨인 상태에서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신독군자는 그 지각이 영명하다. 이 중이 바로 앞에서 인용한『서경』 「대우모」의 ‘진정 그 중을 잡으라.’는 ‘윤집궐중’의 중으로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중이다. 따라서 치중화(致中和)는 신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다산은 도심과 천명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보지 않는다. “하늘의 경고는 은근하고 마음에서 간절하게 경계하는 고함이니 만일 일각이라도 별안간 사람에게 손상을 끼치고 만물을 해치려는 마음이 싹트게 되면 문득 한편에서 온화한 말로 저지한다. 그리고 ‘잘못은 모두 너 때문 인데 어떻게 그 사람을 원망할 수 있겠는가? 만일 네가 말끔히 잊는다면 너의 덕이 아니겠는가?’하여 깊이 자성하게 하는 경고이다. 이 말이 바로 뚜렷하며 빛나고 빛나는 천명이다. 이 말을 따라 순종하면 선이 되고 상서로움이 되나 태만하게 여기게 되면 악이 되고 재앙이 되기 마련이다. 군자의 계신공구는 오로지 천명을 듣는 데에 있게 된다.”
도덕적 판단과 실천은 보편적 기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매 순간 인간은 전인적인 사태파악과 그에 따른 수행을 요구받고 있다. 하지만 인식은 절대적인 자율성 가운데 놓여있지는 않다. 천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자기 확신성의 근거를 마련하게 된다. 사람은 이미 천명을 수용하는 천과의 만남 안에서 인격적 존재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므로 영명성은 인간 안에서 독립된 것으로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인간 삶의 통일적인 근거와 근원으로서 본질을 규정하는 윤리적이며 형이상학적 원리로 작용하는 도덕적 성향을 의미한다. 다산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가치와 도덕적 근거를 하늘에 두고 있다.
5. 지천(知天)과 징험(徵驗)
사람의 영명은 하늘이 품부해준 것이다. 따라서 영명은 하늘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영명성의 중요한 인식작용인 지천은 중용에서 말하는 수신의 근본이다. 지천은 바로 홀로 신실한 것이고 성(誠)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인이 사람이 사람다운 바를 아는 것이라면 『중용』 첫머리의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가 바로 지인이다. 그런데 지인하기 위해서는 지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용』에 “감추어진 것 보다 더 드러나는 것은 없고, 은미한 것보다 더 뚜렷한 것이 없다”고 함이나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할 바가 없다”는 문장을 살펴볼 때 지천은 바로 은미함을 아는 것이고, 귀신을 아는 것이다. 지천이란 바로 상제의 명을 아는 것이다. 즉, 공자가 말하는 “지천명”이다. 지인과 지천은 대상적 인식이 아니다. 사람의 사람됨, 귀신의 은미함을 앎은 일체감을 통한 인격적인 인식이자 영적 인식이다. 여기가 다산의 인간학과 상제천학이 만나는 묘처이다. 다산은 지천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상천이 멀리 있으나 나날이 굽어봄을 바로 가까운 여기에서부터 아는 지원지근(知遠之近), 조화의 발자취로 바람이 부는 근원을 아는 지풍지자(知風之自), 천도의 은미함이 자연 속에서 지극히 나타남을 아는 지미지현(知微之顯)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인식은 대상과 사태를 궁구하는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와는 대조를 이룬다. 지천의 궁극적 이유는 개인의 윤리적 행위로 나아가는 택선(擇善)에 있기 때문이다. 지천하지 못하면 택선할 수 없기 때문에 다산은 지천을 명선(明善)과 동일하게 생각하였다. 다산이 이해하는 격물은 ‘물이 본말을 가지고 있다’는 대상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일에 선후가 있음을 아는’ 앎을 극진히 하는 보편적인 정치윤리의 바탕이 되는 수양적 인식이다. 이점은 또한 주자의 격치론과도 대조를 보인다. 주자는 “격물은 물건 하나하나 위에서 그 지극한 이치를 캐물어가는 것이며 치지는 내 마음이 알지 못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하였다. 그리고 “격물은 마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었다.” 주자가 사물의 보편적 이치와 마음을 일치시키는 인문적이고 자발적인 보편적인 윤리를 추구했다면 다산은 지천의 인식 안에서 자주지권을 통한 윤리적 당위성을 확보하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인식의 차이는 완전한 합리적 인식에 이름과 불완전한 인식을 하늘의 영명성을 통하여 해결함으로 나타난다. 다산에게 새로운 것은 이 한계를 극복하는 종교적 체험의 차원이다. 이 체험은 다산에 의하면 이미 경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별적 인식의 차원이다. 다산은 다음과 같이 중용의 ‘구즉징’(久則徵)을 해석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일치할 때 반드시 자기 마음속에 묵묵히 험할 수 있으니 이를 ‘징’(徵)이라한다. ‘징’하면 도를 믿는 마음이 돈독하게 되어 그만 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는 까닭에 더욱 오래되고 더욱 진실하게 되어 아득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 용(庸)의 극치이다.” 『논어』에서 공자가 ‘징’(徵)자를 문화 계승적인 의미에서 사용한 문화적 체험의 증거와 고증의 의미로 사용한 바가 있지만 여기서 다산은 종교적인 체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징험의 대상은 다름 아닌 상제천이다. 다산에게 상제천은 영명성을 품부받은 원천이자 영명성의 귀결점이다.
인간이 모든 현상의 소이연을 아는 것은 아니다. “일월 운행의 소이연을 그 누가 알 수 있는 것이며 허공에 떠있는 대지를 안정시키는 법을 그 누가 알 수 있는 것이며 성신(星辰)이 나열된 그 시용(施用)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 점을 성인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7년간의 한발은 탕임금으로서도 비를 내리지 못하였고 안연의 죽음은 공자로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니 그것이 성인으로서 능하지 못하는 바이다.” 다산은 여기서 인간 인식과 수행의 한계를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의 한계이고 다른 하나는 인사(人事)에서 우연히 닥치는 불가항력적인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한 인과의 법칙성을 떠나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인간의 영명함이 드러난다. 인간이 모두 알 수 없는 천지의 운행과 인간의 기대와 예측을 벗어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실존하고 있음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무지’와 ‘현존성’은 반성적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이 무지와 현존성이야말로 초월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단서가 된다. 도에는 일반적인 인식을 초월하는 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천도이며 인간이 수행을 통하여 깨달아야할 삶의 배후이다.
다산은 이렇게 인간이 모두 알 수 없는 천도를 『중용』의 비은(費隱)으로 보았다: “비은 두 글자는 곧 도를 떠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비’란 천하 어느 것으로도 능히 실을 수 없을 만큼 워낙 큰 것이다. 그것은 워낙 커서 밖이 없으며 ‘은’이란 어느 것으로도 능히 쪼갤 수 없을 만큼 작은 것이다. 그것은 워낙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이다. 크기로는 밖이 없고 작게는 안이 없는 것은 상천 조화의 범주가 아닌 것이 없다. 그 점이 조화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상천 조화의 범주는 논리적 추론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을 넘어서 있다. 여기에 ‘징험’이라는 인식체계가 자리 잡게 된다. 중용하는 자는 비은을 징험할 수 있는 것이다. 징험은 천도와 인도가 일치하는 곳이다. 단순한 인식의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혼연일치되어 인도가 천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중화(中和)의 내적인 일치이고 중용(中庸)의 외적인 일치라 할 수 있다. 또한 다산은 은미한 형이상학적 대상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으로 ‘찰’(察)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제 살펴보니 찰이란 은미한 이치를 살피는 것이다. 천도는 지극히 은미하여 보고들을 수 없으니 반듯이 우러러 살펴 보아야만이 조화의 자취를 볼 수 있으며 뚜렷이 나타난 천도의 이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찰은 은미한 것을 살피는 것이며 어느 사물도 살피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우러러 살피는’ 태도가 바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不愧於天) 사천(事天)이다.
6. 결론
유교의 영성을 다산의 중용주석인 『중용강의보』와 『중용자잠』을 중심으로 접근해 보았다. 다산에게 『중용』은 ‘천명’을 바로 ‘성’이라고 밝힌 중요한 유교 경전이다. 다산은 서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심을 인격적 존재인 상제와의 일치를 가능케 하는 요처로 봄으로써 유학 안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영성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다산의 상제천이 본원유학적인 해석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따른 해석의 일단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점에서 다산의 영명성이 유교적 영성을 포괄하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주자 성리학을 극복하기위해 소위 실학적, 친서학적 인성과 영성론을 피력하는 가운데 실천적으로 서학을 이해하려고 하였고, 유교 안에서 서학과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다산의 영성론은 정통 주자학적인 심성론의 사변성을 극복하고 본원 유학에 기반하여 상제론을 정립하며, 실존적인 차원에서 영성을 새롭게 이해하는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다산이 심의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주자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스스로 개념의 의미를 지나치게 제한시킨 점이 있다. 예를 들면 ‘성’(性)을 기호에 한정시켰을 때 ‘영명’을 해석하는데 한계가 있게 된다. 필자는 본론에서 다산의 성의 의미를 판단과 실천의지까지 폭넓게 이해하여 보려고 하였다. 기호가 발하기 전에 천명을 듣고 이해하는 내재화 과정을 성과 분리시키는 것은 의식을 개념에 제한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된다. 이런점에서 다산의 개념 분석이 때로는 성리학자들과 같이 분석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성리학을 극복하는 한 방안이지만 그 자체의 한계로도 작용한다. 개념의 모호성은 중국 철학적 개념의 특징이고 개념이해를 위해 수행적인 해석을 요청한다. 보편을 넘어서 개인의 영성을 발견할 여지가 여기에 남아있다.
주자 성리학과 같은 도식적이고, 위계적이며, 명료한 심의 이해 속에서는 심의 신비로운 영역을 위해 남겨진 자리가 없다. 이는 불교 교리의 분석적인 이론체계에 대응하는 측면에서 빚어진 과도한 도식화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이점에서 다산의 영명개념으로의 복귀는 맹자 철학의 근대적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으로부터 천과의 관계, 인격성의 문제, 불가항력적인 삶의 문제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심의 작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산의 유신론적인 심의 해석을 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산의 해석은 심이 철학적으로 인간의 가장 신비하고 미묘한 영역으로 남아있음을 재인식하게 하였다. 심의 이해는 바로 유교적인 인간이해이다. 이점에서 다산 심학이 근대적 인간이해에 새로운 길을 터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산의 영명성이 갖고 있는 인식체계는 중세의 관념적 세계관에서 근대의 체험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다. 다산의 입장에서는 선진 시대의 인식체계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 나타내는 개념이 지천과 징험이다. 이 개념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영성에서 체험하는 것과 유사한 종교적 체험을 발견하게 된다. 다산의 상제징험은 서학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으나 독창적인 도덕적 판단과 행위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 점이 현대적인 영성의 이해에서 바라볼 때 다산의 유교적 영성은 심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갖게 한다. 현대적 영성을 필자는 직관에 대한 새로운 발견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양영성은 전통적으로 이성 지향적이다. 반면에 동양전통의 영성은 감성 지향적이다. 맹자가 도덕적 감수성으로부터 자신의 심성철학을 열어갔듯이 감수성은 동양인에게 인식과 행위의 중요한 시발점이다. 이점에서 도덕적 감수성을 다른 사람과 사물로부터 연유하는 외적인 감수성으로 본다면 영성은 하늘을 우러러 나타나는 내적 감수성이라 할 수 있다. 영적 감수성은 외부의 변화에 반응할 뿐 아니라 그러한 상황을 스스로 내면화할 수 있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감수성이다. 이점에서 영적 감수성은 관조적이다. 현실에 깨어 있으며 상황과 그것이 주는 의미를 관조하는 영성이다. 이러한 감수성을 수행을 통하여 닦는 사람들은 대상을 대상으로 보는데서 머물지 않고 대상들 사이의 깊은 상관성과 배후를 볼 수 있는 시각을 갖게 된다. 그들의 시각은 보이는 것 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들리는 것 가운데서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감수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영적인 감수성은 지혜의 감수성으로 이 안에서 미적 감수성과 도덕적 감수성은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된다고 할 수 있다.
영적인 감수성은 신을 부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성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고 미적 세계를 고양시키고 도덕적인 심성을 열어놓게 한다. 영성은 합리적 이성과 미적 감수성 그리고 도덕적 감수성을 고양시키고 결합해 낼 수 있는 마음의 신비처이다. 다산의 영명성은 이러한 고유 영성을 반성하는 계기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성과 감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조화시켜나가는데 있어서 영성이 종교철학적으로 중요한 개념임을 일깨웠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영성이 어디에 터하여 발전할 수 있는 지를, 비 그리스도인에게는 영명성을 통한 내재적 직관이 어떻게 지혜로운 사유로 나아갈 수 있는지 모색하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