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전원생활 연재/문학의 산실 4쪽 분 24매씩.//매월 5일 마감.
질마재 신화 혹은 선운사 동구
-미당 서정주 문학관을 찾아서/ 고창
표성흠(시인)
-올레길이니 둘레길이니 하는 말은
장보러 가던 길이나 이웃집 재 넘는 길에서 나온 말-
<질마재 신화>는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의 한 사람이었던 미당 서정주 선생이 고향 선운리를 소재로 해서 쓴 시집이다. 동네 생긴 지형이 길마와 같은 형국으로 구부정하게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의 유래부터 시작해 동네 역사와 거기 사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쓴 시다.
질마재 신화가 간행된 1975년은 한국사회가 한창 산업화로 치닫던 때다. 모두들 고향을 등지고 돈 벌러 도시로 떠나버리는 시기에 이 시인은 오히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염원을 담은 시를 썼다. 더 할 수없이 맛깔 나는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 쓴 이 시집은 토속적이고 주술적이기 까지 하다.
이 시집의 시 한편을 보자.
땅위에 살 자격이 있다는 뜻으로 재곤이라는 이름을 가진 앉은뱅이 사내가 있었습니다. 성한 두 손으로 멍석도 절고 광주리도 절었지만은 그것으론 제 입 하나도 먹지를 못해 질마재 마을 사람들은 할 수없이 그에게 마을을 돌며 밥을 빌어먹고 살 권리 하나를 특별히 주었습니다.
‘재곤이가 만일에 목숨대로 다 살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 마을 안정은 바닥난 것이니 하늘의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두루 이러하여서 그의 새끼 끼니의 밥과 추위를 견딜 옷과 불을 늘 뒤대어 돌보아 주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갑술년이라든가 을해년의 새 무궁화 피기 시작하는 어느 아침 끼니부터는 재곤이의 모양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일절 보이지 않게 되고 한 마리 거북이가 기어다니듯 하던, 살았을 때의 그 무겁디 무거운 모습만이 산 채로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마다 남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준 천벌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가 거듭 바뀌어도 천벌은 이 마을에 내리지 않고, 농사도 딴 마을만큼은 되어, 신선도에 약간 믿음이 있다는 좋은 흰수염의 조선달 영감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재곤이는 생긴 게 꼭 거북이같이 안 생겼던가. 거북이도 학이나 마찬가지로 목숨이 천년은 된다고 하네. 그러니 그 긴 목숨을 여기서 다 견디기는 너무나 답답하여서 날개 돋아나 하늘로 신선살이를 하러 간 거여….’
그래 ‘재곤이는 우리들이 미안해서 모가지에 연자 맷돌을 단단히 매어 달고 아마 어디 깊은 바다에 잠겨 나오지 않는 거라.’마을 사람들도 ‘하여간 죽은 모양을 우리한테 보인 일이 없으니 조선달 영감님 말씀이 마음 적으로야 불가불 옳기사 옳다.’고 하게는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두루 그들의 마음속에 살아서만 있는 그 재곤이의 거북이 모양 양쪽 겨드랑에 두 개씩의 날개들을 안 달아줄 수는 없었습니다. -신선 재곤이 (전문)
이는 우리 민족이 지니고 있는 착한 심성을 그대로 말하는 시다. 이러한 이야기는 비단 고창의 선운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어디에도 마찬가지 현상이었기 때문에 국민적 사랑을 받는 시가 되었다. 이게 바로 한국적인 원형이기 때문이다.
-바람처럼 일어나
안개처럼 바람을 피우고 -
미당은 일찍이 그의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로 시작되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시인이 스물세 살이었던 1937년에 지은 시다. 이 시에서 그는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하여 고단한 삶을 벗어나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은 꿈을 노래한다. 많은 시인들이 방황을 할 때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라는 이 한 마디 말로 변명을 대신하는 명구다.
미당의 아버지는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 선생 집안의 마름이었다고 한다. 그런 집안에서 자란 미당이었지만 한학과 신학을 두루 공부 하고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 돼 시를 쓰기 시작한 후 2000년 타계하기까지 한평생 대한민국 시인 중에 가장 윗자리를 지키는 영광을 누리다 갔다. 말년에 친일시비에 말려들긴 했지만 시인으로서는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
나는 그에게서 십수 년을 통해 시 공부를 했다. 대학을 제 때 졸업하지 못하고 지지부진 12년이나 다녔기 때문이었는데, 그동안 선생님과 얽힌 에피소드가 수없이 많다. 처음 미당 선생님을 만났을 때는 우리는 그를 ‘말당’이라고 불렀다. 미당(未堂)의 ‘미’자를 잘 못 읽은 한 학생이 ‘미’자를 말(末)자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도 선생은 그 학생에게 후한 학점을 주었다.
그 무렵 선생은 공덕동에 살았는데 그 옛날 궤도전차가 마지막 멈춰 서던 마포 종점에서 조금 더 한강 쪽으로 내려간 한길 가 기와집이었다.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드나들었는데 선생은 ‘술을 가져오라’ ‘안주를 내와라’하는 의사를 목탁소리로 부엌에 있는 사모님과 무전 치듯 주고받았다. 그러면 사모님은 칼질하는 도마소리로 그에 응답했다. 도마소리가 ‘타다다닥’하고 거칠어지면 술도 안주도 떨어졌으니 ‘이제 그만 하라’는 신호라는 것을 아는 단골들은 자리를 틀고 일어섰지만 처음 가는 손님들은 무턱대고 앉았다가 멸치 똥만 주워 먹고 나와야했다.
그러한 사모님을 함께 모시고 진주 개천예술제 심사 하는 데 따라 간 적이 있었는데 사모님은 여관방에 홀로 두시고 기생집에 앉아 술을 마시던 선생님이 느닷없이 ‘표군 가서 우리 방여사 감 홍시 좀 사주고 오게’하는 분부를 내리시는 것이었다. 나와 보니 벌써 새벽녘인데 천지분간도 못 할 만큼 안개가 끼어 감 홍시는커녕 길을 잃고 말았다. 길 가에 앉아 한참을 생각해보니 감 홍시가 목적이 아니라 이 철없는 제자가 자리를 비켜주기를 바랐던 것 같아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 선생은 마누라보다도 장모를 더 좋아해 늘 장모님과 함께 화투를 쳤다 했는데, 이날은 아마도 기생을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선생은 정말로 가난한 시인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회갑잔치에 시를 하나 써주고 원고료 십만 원을 받았다며 자랑한 기억이 난다. 그러한 선생님이 공덕동에서 사당동 문화예술인 마을로 이사를 갔는데 그 보다 더 가난한 애송이 시인이었던 나는 맥주 한 병을 딱 사들고 이사 간 집을 찾아갔다.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한 이야기다. 동네 구멍가게에 가 물으니 선생이 요즘은 독한 술은 안마시고 맥주만 마신다기에 나는 맥주가 무슨 포도주나 매실주 같은 약술인줄로만 알았었다. 가 보니 먼저 와 있던 손님들이 맥주를 박스 채 갖다놓고 따고 있었던 게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창은 선운사로 유명해졌고
선운사는 시인으로 하여금 더욱 유명해진다.-
그가 쓴 시로 고창을 고창이게 하고 선운사를 선운사로 만든 시가 있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삶의 애한에 젖은 애절한 음조/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선운사 동구 (전문)
선생은 선운사 입구에 있던 동백장 여관을 자주 찾으셨다. 지금은 호텔로 바뀌었지만 옛날에는 절집을 뜯어서 만든 조그만 여관이었다. 얼른 보기에는 암자인지 여관인지 잘 알 수 없는 집이었다. 거기 선생님을 좋아하던 문학소녀 같은 愛제자가 있어 선생님이 선운사에 들릴 때마다 지극정성이었다. 이 시는 동백장을 모티브로 해서 쓴 시다. 강의 시간마다 그 이야기를 해 우리도 언제 한번 그 묘령의 여인을 만나보러 가자, 해 간적이 있을 정도였었다.
보들레르의 시<악의 꽃>을 원어로 감상하고 싶어 프랑스어를 공부하시던 선생님은 언젠가 미국에 있는 아들 댁에 들렸다가 남미 여행을 하고 와서 삼바춤과 안데스 산맥에서 고산병으로 쓰러진 이야기를 하셨고, 이후 온 세상 강 이름 산 이름들을 외며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한 선생님의 흔적을 찾아 선운사를 다시 찾아본다. 선운사를 지금처럼 거창하게 키운 시비 <선운사 동구>는 아무도 읽는 이 없이 그냥 한쪽 귀퉁이로 몰려나 있고 동백장 여관 역시 거대한 주차 공간 옆에 선 어마어마한 호텔로 변한 모습이다. 다만 시인이 노래한 동백나무 숲만은 여전히 이를 알고 찾아오는 이들과 눈을 맞춘다. 그러나 꽃은 아직 피지 않은 채로다. 선운사 동백은 오뉴월이나 되어야 피는 늦동백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 선운사를 들르자면 모름지기 이 시를 먼저 읽어보고 일주문을 통과해야할 것이다.
선운사를 봤으니 선운리로 가본다. 선생의 생가가 복원돼 있고 살아생전에 남긴 몇 가지 유품들을 볼 수 있는 <미당시문학관>을 만들어놓아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전망대에 오르니 생가가 바로 눈앞이고 내외분의 무덤도 아스라이 보인다. 읍내 나갈 때 마다 넘나들었을 질마재도 지호지간이다. 방명록에다 ‘오랜만에 뵙고 갑니다.’한 자 적어놓고, 선생이 어린시절 고무신 끌고 오르내렸을 질마재를 들렀다가 산소를 향한다. 산소 주변과 선운리 온 마을에 마른 국화향이 가득한 날. //
첫댓글 고창에 며칠 묵을 만한 빈집이 있어 날 잡아 근방을 다녀볼까 합니다. 선운사, 내소사, 곰소염전, 고창읍성이랑 볼 것이 넘치고 넘친다니.. 선운사 동백 보려면 오뉴월에 찾아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