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지 <시사인>에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코로나 1차 대유행 이후 지금까지 이뤄진 방역과 이후 전망을 다룬 글인데 제목부터 내용까지 마음에 들었다. 기사의 제목처럼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그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또한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 상이한 판단들의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계속 대립과 반복을 지속한다면 우리는 나아갈 수 있을 만큼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발목을 잡혀 주저앉게 될 것이다. 물을 깨끗이 만들기는 어려워도 더럽히기는 쉽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피로감이 누적되고 초기의 경각심도 많이 약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수도권을 중심으로 시작된 2차 대유행은 대구에서 시작된 1차 대유행보다 확진 규모도 크고 속도도 빠를 것이라 예상되기 때문에 경각심을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인구 250만 명 규모의 대구에 비해 수도권은 총인구가 2700만명이고 인구밀도와 교통망, 하루 평균 대중교통 이용 건수 등 모든 통계치가 10배 이상이기 때문에 감염전파율이나 규모 역시 그에 준할 수 있다고 예상되는 상황이다. 청정지역이라 안심했던 순천과 인근 지역까지 확진자가 급증하는 현재 상황이 그에 대한 반증일 수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그와 정반대의 모습이 자꾸 돌출되어 민망하기 짝이 없다. 지난 7월 정부가 종교계의 주말 종교행사를 온라인으로 전환하고 집회를 자제해달라는 종교시설 관련 지침을 발표했을 때 개신교를 대표한다는 단체들이 '종교 탄압' 운운하며 반발했던 모습은 참으로 부끄러운 개신교의 민낯을 드러낸 추태였다. 종교인이기 이전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소양과 덕목을 망각한 이런 태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은커녕 근심거리로 전락하는 어리석은 모습이어서 사회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8월 중순부터 전광훈이 담임하는 서울 ‘사랑제일교회’와 용인 ‘우리제일교회’에서 대규모의 확진자가 발생했고,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와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라는 금란교회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하는 사태에 이르자 교회가 1차 대유행의 진원지였던 신천지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는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이처럼 정부의 ‘방역 강화 조치’에 반발하던 교회에서 확진자가 다수 발생하자 보수 기독교단체 중 하나인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는 “교회를 고리로 한 코로나19 재확산과 관련해 국민에게 사과”하며 코로나19 방역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만사지탄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뒤늦게나마 다행인 결정이라 생각한다. 자발적인 결정에 의해서든 행정 명령이나 규제에 의해서든 기독교 신앙 행위의 근본인 예배를 예배당에 모여 드리지 못하고 예배 후에 애찬을 나누거나 성경공부 등을 위해 모이지 못하는 일은 분명 익숙하지 않고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불편을 감수하기 싫다고 지역사회가 우려하고 근심하는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교회의 존재 근거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전염병이 돌 때 로마제국 치하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탄압하던 로마인들까지 돌봄으로써 신뢰를 얻고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닮고 본받아야 할 모습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데 지금 한국 개신교의 모습은 어떤가? 입장을 바꾼 한교총과 달리 ‘한기총’은 물론 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교연’이라는 단체 등이 여전히 “예배 강행”을 외치며 정부 방역 대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의 우려를 무시하고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지 의문이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진리와 복음을 전파해야 할 교회가 가짜뉴스도 모자라 바이러스 전파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 현실과 그에 대해 아무 사과나 반성도 없는 일부 극우기독교의 자가당착적인 모습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런 극단적이고 반사회적인 무리들로 인해 건강한 다수의 교회들까지 싸잡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교회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며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깨달으며 그런 깨달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종교적 행위이다. 그동안 한국 개신교는 감사와 경배는 열심히 했을지 몰라도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 당연히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노력도 마찬가지다. 그런 토대에서 전광훈으로 대표되는 극우기독교가 생겨나고 성장했다.
오늘 교회의 위기를 넘어 교회의 종말까지 언급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상실한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었던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에서도 하나님을 만났던 경험은 천재개벽과도 같은 거대한 전환의 시발점이었다. 주일예배 성수를 절대시해오던 한국 개신교에게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사고의 전환이다. ‘종교 없는 기독교’를 주장했던 본 회퍼처럼 교리와 신조의 늪에서 벗어나 예수의 뜻과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는 일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럴 때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이 예배당이든 가정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