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씨(宣氏)의 연원(淵源)은 고대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손인 선왕(宣王ㆍ姬靜), 문왕의 넷째 아들 주공(周公ㆍ姬旦)의 후손인 노(魯)나라 환공(桓公)의 5세손 선백(宣伯: 叔孫僑如), 송나라 선공(宣公: 商(殷)나라 子太乙의 후손으로 이름은 子力)의 후손들이 시(諡) ‘선(宣)’으로 씨(氏)를 삼았으니 BC800~600년대의 일이다. 이들은 모두 제곡(帝喾)의 직계이며, 황제[黃帝ㆍ姬姓]의 후손들이다.
《한서(漢書)》의 기록에 의하면 한(漢)나라 말에 많은 선씨(宣氏)들이 해동(海東)으로 피난한 것으로 나타나 있고, 예로부터 복호촌(伏虎村; 현재의 전라남도보성군)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집안들이 각각 세를 이루다가, 족보를 편찬하던 17세기에 들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 최초의 인물 증 우의정 선형의 고조부인 선윤지(宣允祉)를 시조로 삼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선(宣)씨는 전라도 보성의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발간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기록이 있는 성본으로 시조와 연원이 알려지지 않은 광주 선씨(光州宣氏)와 밀양 선씨(密陽宣氏)가 있지만 모두 동원(同源)으로 본다.
시조 선윤지(宣允祉)는 우왕 때 황명(皇明) 문연각학사로 고려에 와서 전라도 관찰사 겸 안렴사(按廉使)로서 전라도 해안에 넘나드는 왜구를 소탕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웠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보성에 정착하였다. 이에 도민들이 한식동(寒食洞)에 생사우(生祠宇)를 세워 선생을 추앙하였고, 1831년(순조31년) 오충사(五忠祠)로 사액되어 후손 형(炯), 거이(居怡), 세강(世綱), 약해(若海)와 함께 오충사에 배향(配享)하여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임술년에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오위도충관(知義禁府事五衛都摠管)에 증직되었다.
신유초고 : 신유년(1681년)에 시작하였으나 초고만 남기고 완성되지 못함. 초고에서 선복주는 오선개조안렴공(吾宣皆祖按廉公)이라는 시를 남겼다. 1738년(무오년)에 보성의 개흥사에서 다시 만나 수보를 시작하였고, 신유초고와 옛 문적을 참고하여 선윤지 후손들의 파를 순서대로 나열한 후에 뒤편에 세계가 확인되지 않은 선씨를 기록하였다.
기사보 : 1749년 보성선씨 최초로 완성된 족보
정축년(1757년) 조성과 도촌에 사는 낭장공계열은 선용신(宣用臣)을 시조로 별보를 하였다.
을사보 : 1785년 보성선씨 기사보를 수정, 보완하여 발간(문송영제 수록, 문송영제란 보성선씨간 시조 논쟁에 대한 1768년의 송사결과 판결문)
정미보 : 1847년
정미보 : 1847년 수정발간
신해보 : 1851년
을묘보 : 1855년
을해보 : 1875년
계사보 : 1893년
정사보 : 1917년
경오보(참의공파보) : 1930년
임오보(옥암공파보) : 1942년
정해보(선전공파보) : 1947년
을미보 : 1955년
무오보 : 1978년 (선윤지 후손과 선원지 후손이 합보하였으나, 선원지 후손이 다시 분파하여 별보를 함)
선형(宣炯, 1434년 ∼ 1479년) : 선윤지의 5세손.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광유(光裕)이고, 아버지는 증 우찬성 화(和)이다. 1451년(문종 1) 무과에 급제하였다. 1456년(세조 1) 12월 경흥부사로서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1457년 3월 경상좌도수군처치사(慶尙左道水軍處置使)를 거쳐 안주목사·한성부윤·판종성부사(判鐘城府事)를 역임하였다. 그 해 8월에는 상호군(上護軍)으로서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를 수행하였다. 10월에는 회령절제사에 임명되었으며 한명회의 추천으로 증질(增秩)되었다. 1463년 4월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이듬해 정월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4월에는 다시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1465년 정월에 경상도제언순찰사(慶尙道堤堰巡察使)가 되어 경주 북천(北川)의 제언 수축에 공을 세웠다. 1467년 무장이지만 성품이 염간(廉簡)하다고 하여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선군(船軍) 동원을 적극 주장하였다. 같은 해 7월 형조참판으로서 1,000인의 군졸을 이끌고 오자경(吳子慶)·한계미(韓繼美) 등과 1진을 이루어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녹훈되고 황해도병마사·수군절도사에 임명되는 동시에 유성군(楡城君)에 봉해졌다. 1470년(성종 1) 6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3월에는 성종 즉위에 공이 있어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녹훈되었다. 1477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전라도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양(平襄)이다.
선거이(宣居怡, 1550년 ∼ 1598년) : 선윤지의 8세손. 자는 사신(思愼), 호는 친친재(親親齋). 판서 형(炯)의 증손이며, 아버지는 도사(都事) 상(祥)이다. 1569년(선조 2)에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다음 해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의 계청군관(啓請軍官)이 되었다. 1587년 조산만호(造山萬戶)이었던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녹둔도(鹿屯島)에서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막아 공을 세웠다. 1588년 거제현령·진도군수를 역임하고 이어 청백(淸白)으로 성주목사를 거쳐 1591년에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7월에 한산도해전에 참가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도와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1592년 12월 독산산성(禿山山城) 전투에서는 전라도병사로서 전라순찰사 권율(權慄)과 함께 승첩을 올렸는데 이 때 크게 부상당하였다.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권율이 적을 대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9월에는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약탈을 일삼고 있었으므로 이를 공격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그 뒤 충청병사에 올랐다. 한산도에 내려와서는 이순신을 도와 둔전(屯田)을 일으켜 많은 군곡(軍穀)을 비축하여 공을 세웠다. 1594년 9월에는 이순신과 함께 장문포(長門浦) 해전에서 또 공을 세웠다. 그 뒤 충청수사가 되고 다음해 황해병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남해·상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598년에는 울산 전투에 참가, 명장 양호(楊鎬)를 도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순신과 절친한 사이로 전투에서도 서로 도와 이름이 높았다.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봉되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
선여경(宣餘慶, 1551년 ∼ ?) : 조도계열 선용신의 후손. 자는 경숙(敬叔)·응원(應遠), 호는 도암(道庵)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전관(宣傳官)‧주부(主簿)‧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의 관직을 수행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시묘를 하던 중이었으나 두 아들과 종형제들에게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뜻을 말하였고, 어가를 호종(扈從)하였다. 평양성 전투를 전후하여 공을 세우고 이들은 모두 순절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되었고, 전라남도 보성군 정흥리에 ‘선씨육충유장비(宣氏六忠遺庄碑)’를 세웠다. 사후 숭모재(崇慕齋)에 제향(祭享) 되었다.
선극례(宣克禮, 1556년 ~ 1597년) : 선윤지의 9세손. 자는 예중(禮中), 호는 의재(義齋). 임진왜란 당시 경상좌수사로 재임하다가 1598년(선조 31)에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전공으로 대호군(大護軍)이 되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옥배(玉杯)와 녹권(錄券)을 은사 받았다.[4]
선세강(宣世綱, 1576년 ∼ 1636년) : 선윤지의 9세손. 자는 사거(士擧), 호는 매곡(梅谷). 아버지는 참의 봉장(鳳章)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여 1618년(광해군 10) 평안도 벽단진첨사(碧團鎭僉使)를 제수받았다. 그 뒤 경기중군(京畿中軍)이 되어 영평산성(永平山城)의 축조를 감독하였다. 당상관이 된 뒤에 홍주영장(洪州營將)·안동영장(安東營將)을 역임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경상좌도병마절도사 허완(許完)과 함께 경기도 쌍령(雙嶺)에서 우세한 적과 접전하여 많은 적을 죽였으나 끝내 패전, 전사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전라남도 장흥의 포충사(褒忠祠),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5]
선약해(宣若海, 1579년 ∼ 1643년) : 선윤지의 10세손. 자는 백종(伯宗). 아버지는 부사(府使) 의문(義問)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31년(인조 9)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으로 있을 때,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였다고 추천되어 경상좌수사를 제수받아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심양(瀋陽)에 사행(使行)하였다. 이때 숭명배청(崇明排淸)의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일을 처리하고 외국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하여 돌아와서 품계가 승진되었다. 이와 함께, 금편(金鞭)·초구(貂裘)·옥배(玉盃) 등을 하사받았다. 뒤에 평산부사·경상좌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철종 임술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의금부 훈련원도사에 추증되었다. 보성의 오충사(五忠祠)에 제향되었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