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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작년 10월말에 대구에서 재은심리상담센터를 개원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재주를 은혜롭게'라는 뜻을 지닌 '재은'심리상담센터는 조현병, 조울증, 우울증 전문상담기관입니다. 주소는 대구 남구 대명로 67 (프라임빌딩) 4층, 전화는 053-626-6666 입니다. 제 메일은 mailto:bae9190@daum.net, 핸드폰은 010-4084-6365 입니다.
아래의 글은 제가 이전에, 카페 개설 초기에 올렸던 글입니다(2014. 8. 9. 고백/소통 게시판). 그동안 세월이 3년 반이나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입회하신 분들과 신입회원분들께 제 소개를 드리고자 이 글을 재차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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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명암
촛불 배 정규 입니다. 오늘은 제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네요. 좋은 날도 있었고 힘든 날도 있었죠. 누구나의 삶이 다 그렇겠죠. 제 삶의 명암을 말씀드릴게요. 다소 긴 글입니다. 이해해 주세요.
명(light)
저는 1958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어요. 공부를 잘 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3학년 때부터 늘 전교 1등을 했죠. 저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남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공부 잘하면 인기가 있었으니까. 늘 반장 또는 부반장을 했죠. 특히 여학생들이 저를 좋아했어요. 그리고 뭐 조용하고 평범한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냈죠. 미팅 한 번 못해보고. 범생이었죠. 그리고 1977년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입학.
대학 입학하자마자 야학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대학 1, 2학년 때는 심리학과가 아니라, 야학 동아리 “운화회(雲火會)를 다녔죠. 그러다가 복학해서 동아리 회장하고, 새로운 야학을 또 하나 만들기도 했죠. 아버님께서 국가유공자여서 대학은 등록금 면제 받고 학생회비만 내고 다녔어요. 그리고 1984년 대학원 입학.
신났죠. 대학원 입학과 동시에 결혼하고 아들 낳고(적금 탔죠), 상담실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대학원 다녔기에, 학비 걱정 없이, 공부는 공짜로 했죠. 2년 만에 석사학위 따고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과 임상심리연수원(3년 기한의 레지던트 과정, 월급 및 모든 직급과 대우가 의사 레지던트와 동일한 수련과정) 들어가서 1989년 2월에 마쳤죠. 그러고는 3월에 바로 대구대학교 심리학과 교수가 됐어요. 그때 제 나이 만 30세였죠.
교수생활 신나게 했어요.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인기 폭발이었죠. 1993년부터 정신재활 분야에 뛰어들었어요. 거의 국내 최초로(현재의 동아대학교의과대학 김 철권 교수와 거의 동 시기에) 정신장애인 가족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그때부터 10년간 매주 토요일 3시간씩 가족교육을 했어요. 1995년 9월에 대구재활센터 설립(정신보건법이 1995년 12월에 통과되고, 1997년 4월부터 시행되었기에, 정신보건법도 없던 험악한 시절이었죠.),
1997년부터 4년간 초대 “보건복지부 정신보건센터 기술지원단 위원” 역임, 2000년 “대구대학교 정신건강상담센터” 설립(10년간 소장 역임), 대구경북상담학회 회장(3대, 2005~2006), 한국임상심리학회 회장(44대, 2007~2008), 한국정신보건전문요원협회 회장(4대, 2008~2009), 그리고 2013년에 25년간의 교직생활을 퇴직.
사회적으로는 동년배들에 비해서 대체로 5년 정도는 앞서가는 삶을 살았죠. 주변 친구들이며, 선후배들이 늘 부러워했죠.
가정적으로는 아들 둘. 큰 아들은 공인회계사, 작은 아들은 법학전문대학원 졸업반(이번 겨울에 변호사 시험). 그리고 예쁘고 착하고 헌신적인 아내. 아버님은 강남소방서장으로 퇴직하시고, 6·25 전쟁 때 입었던 부상으로 국가유공자, 돌아가신 뒤에 대전현충원에 모심. 어머님은 올해 86세로 서울에 거주. 동생이 모시고 있음. 이 정도면 괜찮죠. 나름 폼 나는 인생이잖아요?
이제는 화제를 바꿔서, 제 삶의 이면으로 가보죠.
암(dark)
저는 양극성장애 환자입니다. 어릴 때는 몰랐죠. 대학 심리학과를 들어간 것도 아마 제 문제 때문에 고민이 심해서였을 거예요. 아무튼 대학 때, 제가 남들과 좀 다르다는 걸 알았죠. 그리고 서울대학교병원 레지던트 때 스스로 진단을 내렸죠. 양극성장애. 하지만 다행히도 그 중에서는 가장 경미한 순환성장애(cyclothymia)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렸어요.
양극성장애라는 면에서의 저를 얘기해 보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많이 우울했어요. 학교만 갔다 오면, 가방만 던져놓고 집의 지붕(1층 한옥의 기와지붕, 장독대를 통해 올라갈 수 있었음)에 올라가서 깜깜해질 때까지 누워 있었죠. 햇볕에 적당히 데워진 기와 위에 누워서, 파란 하늘을 보노라면, 집 앞의 수양버들 그늘이 적당히 드리워줬죠. 그 느낌이 참 좋았어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네요. 따뜻하게 햇살이 잘 쬐는 날에 나무 그늘 밑에 누워보세요. 눈을 감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자면, 꼭 감은 눈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어른 어른거리는 게 느껴져요. 그 느낌이 얼마나 좋은지. 점차 황홀해지는 느낌을 느끼게 되죠.
그리고 방 안에서는 늘 지도그리기(세계지도, 한국지도 그리기)를 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부터요. 그러다가 중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취미가 바뀌었어요. 건축설계를 하기 시작했죠. 혼자서. 매일처럼. 전문건축 잡지를 사서 읽으면서, 매일처럼 스스로 목표를 정했어요. “오늘은 30평집을 설계해보자. 그러고는 평면도, 입면도를 그리죠. 그러자면 어느새 모든 게 다 상상이 되더군요. 1층 계단 사이로 창문너머로부터 햇살이 쫙 비치죠. 계단 사이사이를 통해 비쳐지는 햇살을 상상할 때의 그 느낌. 황홀하죠.
중학교 때부터 성적이 널뛰기를 했어요. 1년 기간 사이에도 전교 10등 이내와 하위 70% 이하를 왔다 갔다 했죠. 조금 공부하면 성적이 확 오르고, 그러다가 마음이 심란해서 매일 빈둥거리면서 지내다보면 성적이 점점 떨어지다가 어느 날 급락하죠. 그러면 놀라서 또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이렇게 널뛰는 성적이 고 3때까지, 그런 일은 대학교 때에도, 대학원 때에도 계속됐죠. 당시에는 몰랐죠. 내가 왜 마음을 못 잡는지. 왜 아무 것도 하기 싫고, 매일처럼 철학책만 읽어대는지. 왜 늘 외로워하고, 공허해 하는지.
중학교, 고등학교 때 개똥철학을 많이 했어요. 니체, 쇼펜하우어, 헤겔 등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죠. 그러다가 중 3때 우연히 프로이드의 책을 보게 되었어요. 그때부터는 프로이드의 책은 닥치는 대로 다 읽었어요. 대학은 간신히 들어갔어요. 고3 올라가서 1년 내내 마음을 못 잡고 방황했더니, 급기야 입학시험 3달을 남겨놓고는 어떤 대학도 합격불능인 성적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정신을 번쩍 차리고 3달을 죽어라고 공부했어요. 다행히 대학에 합격했죠.
대학에서도 1, 2학년 때 학사경고를 두 번 맞았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저거 인간 안 된다.”하시면서, 군대 가라, 학비 못 대준다, 하셨죠. 그래서 억지로 군대를 갔어요. 그 시기에 지금의 아내를 사귀었어요. 그때부터 마음이 잡히기 시작하더군요. 제대하고 복학했는데, 마음이 안정되고 목표가 생기니까(빨리 졸업해서 좋은 회사 취직해야겠다), 공부가 엄청 잘되데요. 그전에는 평점 2.0도 넘기기 힘들었었는데, 매학기 거의 평점 4.0 내외를 왔다 갔다 했죠. 당시에는 학점을 짜게 주던 시절이라 그 점수면 거의 과톱 내지는 단과대학 톱이었죠.
대학원 시절도 좋았어요. 결혼하고 아들 낳고... 서울대병원 레지던트 3년차 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아내와의 사이가 틀어진 거죠. 표면적으로는 괜찮았지만, 제 마음속에 조금씩 생기기 시작한 불만이... 꽉 차 버린 거죠. 그때부터 방황이 다시 시작되데요.
그렇게 방황한 세월이 어언 27~28년 됐네요. 대학교수생활도 늘 방황 속에서 보냈죠. 방황하는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사람이 점차 망가지고(내면적으로는), 그럴수록 오기를 부려서 잘난 척하는(외면적으로) 모습으로 바뀌더군요. 그러다가 급기야는 엄청난 사고들을 치기 시작했죠. 마음이 안정이 안 되니... 별의별 사고를 다 치게 되더군요. 그런데 그게 내 의지로 통제가 안 되는 거예요.
결국 대학교수도 잘리고... 다행히 집에서는 안 쫓겨나고... 이제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네요.
아직도 제가 양극성장애라는 게 왜? 의아하시죠?
결정적 증거는 기복이 심하다는 거예요. 시기적으로. 잘할 때는 엄청 잘하는데, 헤맬 때는 한없이 헤맨다는 거예요. 그게 양극성장애의 가장 큰 특징이죠. 이제 제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그리고 어떤 증상들이 있었는지 말씀드릴게요.
처음... 누군가가 저를 이상하다고 진단했던 사건이 있는데요. 우연히... 였죠. 대학에 들어갔더니, 학생생활연구소에 가면 모든 심리검사가 다 공짜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능검사, 성격검사, 로르샤흐검사, 아무튼 받을 수 있는 검사는 다 받았죠. 검사해석을 해주는 날 갔더니... 상담선생님이 한참을 가만 계시더군요. 그러고는 말씀하셨어요. “아무래도 전문상담기관에 가서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우울증이 심한 것 같아.” 제가 깜짝 놀랐죠. 그때까지 저는 제가 우울증일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선생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지능검사 결과가... 언어성 지능지수(IQ)에 비해서 동작성 지능지수(IQ) 점수가 30점 이상 떨어지네요. 이건... 정상적이 아닌... 아주 이상한... 우울할 때... 그것도 아주 많이 우울할 때...”
그래서 한국행동과학연구소라는... 당시에는 상담 쪽으로 가장 권위 있다는... 기관에 한 네댓 번 상담을 받으러 다녔어요. 그런데 문제는 상담료가 장난이 아니라는 거였죠. 부모님께 말씀도 못 드리고 몰래 상담 받으러 다니는데, 이건 대학생 용돈으로... 감당이 불감당이더라고요. 그래서 때려치웠죠. 그래도 별 문제 없었어요. 동아리 활동에 전념하다보니, 좋은 친구들 있죠... 술 먹고 사고 쳐도 다 이해해주고 뒷수습해주죠...
두 번째 사건은 서울대학교병원 레지던트 3년차 때였어요. 지도교수님께서 저보고 “자네! 심리치료 받아, 아니면 나는 자네를 지도할 수 없어.” 하시면서, 너무나 정색을 하시는 거예요. 그 무렵에는 이미 스스로도 저 자신이 양극성장애라고 진단을 내리고 있던 터라...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했죠. 3~4개월 매주 1번 50분씩 심리치료 받았어요. 그러다가... 별로 신통치도 않은 것 같고... 돈도 엄청 비싸고 해서 때려치웠죠.
세 번째 사건은 대구대학교 교수생활 3년째 제 자신이 너무나 슬프고 우울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제 발로 심리치료를 받으러 갔어요. 경북대학교 의대 교수를 정년퇴임하신 정신과전문의가 제 주치의였죠. 1년 반을 매주 1번 50분씩 심리치료를 받았어요. 그 교수님이 “이제 그만해도 되겠어.” 해서 그만뒀죠. 그게 1993년도 일이에요.
그러다가 2007년도에 불면증이 찾아 왔어요. 무리하게 뭔 사업에 투자했다가 빚을 왕창 지니까 잠이 안 오더라고요. 6개월을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항복했어요. 거의 매일을 날밤 꼬박새우고, 다음날 학교 가서 강의하려니... 정신도 혼미하고... 체력적으로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잘 아는 정신과전문의에게 찾아갔죠. “제가 불면증이어서요... 수면제를 처방해주시면 해서요...” 그랬더니 두 말도 않고 처방전을 쓰시는 거예요. 제가 말을 덧붙였죠. “그런데... 이왕 처방하시는 김에... 조울증 약도 처방해 주시면 싶은데요. 제 생각에 제가 조울증이거든요.” 그 주치의 선생님이 저를 보고 웃으며 말씀하시더군요. “예... 제가 보기에도 배교수님은 조울증이에요. 잘 생각하셨어요.”
그때부터 5년을 항조증제와 수면제를 복용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꿈을 꾸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이 점은 사람들마다 달라요. 약을 먹어도 꿈을 잘 꾸는 사람들도 많은데, 제 경우에는 약을 먹고 자면 꿈을 꾸지 않는 거예요. 꿈이 뭐 대수냐고요? 저는 꿈이 복잡한 감정을 정리해주는 기능이 있다고 생각해요. 또한 꿈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주죠. 그런데... 꿈 없는 잠을 5년을 잤더니, 더 이상 못 버티겠더라고요. 제 감정의 찝찝함을. 그래서... 어느 날 생각했죠. 그리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단약했어요. 물론 주치의도 늘 이렇게 말했죠. “배교수님은 증상이 심하지 않으니, 본인이 판단해서 약을 복용하시면 됩니다. 조금 힘드시다 싶으면 복용하고... 괜찮다 견딜만하다 싶으면 때로는 복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약한 지 이제 2년 좀 넘었네요. 그래도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잘 지내고 있다고 자부해요. 그만큼 제가 강해진 거지요. 저 스스로를 컨트롤하는 힘이.
아직도 제가 조울증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나시지요? 이제 제 증상을 말씀드릴게요.
저는 요즈음에도 간혹 환청을 듣고 있어요. 제 환청은 심하지 않아요. 그냥... 노크소리... 전화벨 소리... 간혹 이름 부르는 소리... 그 이상의 심한 환청은 없었어요. 제일 심한 게 이름 부르는 소리 정도였죠. 저는 제가 처신을 잘 한 것 같아요. 노크소리가 들리거나,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방문을 열고 확인해 봤죠. 그러다가 아무도 없으면... “내가 환청을 들었나 보네. 요즈음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나 보네.” 그렇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죠. 지금도 간혹 환청을 들을 때면 그렇게 하고 있어요.
망상. 심하지는 않지만 두세 번... 망상이 있었죠. 한 번에 보름 정도씩. 첫 번째는 의처증 같은 거였고... 그게 한 번 생각이 돌아가니까 보름을 계속 잠시도 쉬지 않고 돌아가더군요. 중간에 잠시 제 정신이 들어서 “아니야. 이건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5분도 안 돼서 또 망상 속에 빠져들었죠. 또 한 번은 “내 기분에 따라서 날씨, 기상이변이 일어난다.”는 망상이었죠. 그 망상이 있을 때는 기분이 좋았죠. 내가 무슨 신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으니까요. 내 기분이 좋은 날은 날씨가 화창하고 좋고... 내 기분이 우울하면, 비가 오고 천둥이 치고 그러더군요. 그때는 날씨가 나 때문에 변하는지 알았어요. 보름동안. 또 한 번은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고 한다는 망상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 앞에 가서 무릎 꿇고 빌었지요. 죄송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살려달라고...
그리고 충동조절장애... 이건 너무나 많고 흔해서... 날마다, 시기에 따라서, 기복이 엄청 심했죠. 다른 사람의 입장... 상황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어요. 매우 즉흥적이었죠. 새벽 3~4시에 전화해서 자는 사람 깨워놓고 횡설수설한 건... 아마도 몇 백 번이라는 말로는 부족하죠. 몇 천 번쯤 되려나? 그리고 사람들 만나서 상대방 얘기는 듣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제 얘기만 한 것도... 거의 그렇게 살았죠. 한 번 말 꺼내면 기본이 2시간 정도 됐죠. 좀 뜬 시기에는 그랬어요. 그리고 우울할 때, 잠수타면... 일들을 얼마나 많이 펑크 내는지... 주변사람들이 모두 다 학을 뗄 정도였죠.
그래도 그나마 생존 가능했던 건, 제가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깡도 있었고요. 그래서 게길 땐 엄청 게기고, 사고 칠 땐 상상 이상의 사고를 쳤지만... 한 번 마음먹고 잘할 땐 다들 입을 딱 벌릴 정도로 일처리를 잘했죠. 그래서 웬만한 건 용서가 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문제는 나이가 드니까... 젊은 시절에는 용서되던 일들도 용서가 안 되고, 사고를 쳐도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게 사고의 규모가 커진다는 점이었죠.
아무튼 그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조용히 돌아와 (돌아오고 싶어 돌아온 게 아니라, 사고를 많이 치다 보니 사회 속에서 거의 잘려서...), 몸으로 치는 사고말고... 자리에 앉아서 치는 사고를... 슬슬 컴으로 사고를 치기 시작하고 있네요. (돈이 없어서 돌아다니지를 못해서... 잘난 척 할 수가 없어서...)
한참 글을 썼더니 조금씩 지치기 시작하네요.
원래는 해설(interpretation)을 붙일 생각이었는데요... 즉 제가 생각하는 제 문제에 대한 분석을 붙일 생각이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아요. 다만 한 마디만 덧붙일게요. 제가 느낄 때는 제 양극성장애를 잘 잡아주는 요인이 있고 악화시키는 요인이 있다고 생각해요.
잡아주는 요인은 두 가지예요. 첫째는 주변 누군가이죠. 누군가가 저를 좋아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대단하게 생각해주면 마음이 안정되고, 그게 제 기분의 기복을 가라앉혀 주더군요. 그러한 시기에는 제 조울증 경향이 마이너스가 아니라 오히려 플러스가 되었어요. 즉 남들보다 엄청 생산적으로 일을 잘해요. 즉 보통사람들로서는 애초에 상상도 못하는 방식으로, 상상도 못할 정도의 엄청난 양의 일을 질적으로 대단하게 해내요. 또 한 가지는 제 스스로의 목표의식이에요. 제게 뭔가 엄청 의미 있고 중요한 목표가 있을 때는 제 스스로가 저를 비교적 잘 컨트롤해요.
악화시키는 요인은 첫 번째는 술이에요. 속상하다고 술을 너무 많이 마시면, 그 순간에도, 다음날에도 기분이 증폭되더군요. 그래서 뜻하지 않은 사고도 치고, 너무나 심한 불안감이 들어서 6시간 정도를 꼼짝도 못하고 소파에 웅크리고 있기도 했죠. 또 한 가지는 수면부족이죠. 잠을 푹 자야 하는데 몇 날 며칠 잠을 못자면 기분의 증폭이 상당히 심해지더군요. 그런데 이 부분이 아직도 딜레마예요. 왜냐하면 술을 마시면, 또는 잠을 안 자면 그 때에는 잠시 기분이 붕 뜨거든요.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생산적인 일들을 하기도 해요. 그래서 사실 스스로는 자제가 잘 안돼요. 그런데 문제는 주변에서 제지하면 기분이 잡쳐지고, 그러면 제 스스로의 컨트롤능력을 너무나 쉽게 상실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상황은 더더욱 악화되고...
지금까지 제 얘기를 했지만, 저는 여전히 제 자신이 나이롱환자인 것 같아서 주뼛거려요. 한 번도 입원 안 해봤죠, 사회생활 (겉보기에는) 멀쩡하게 잘했죠, 지금은 약도 안 먹고 있죠, 증상이라고 해봐야 가벼운 정도로... 경험했으니 (참 비현실감(derealization) 증상도 있었네요. 한 3달 정도 모든 게 낯설고... 이상한 느낌... 길을 걸어도 발을 헛디뎌서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느낌... 그런 것도 느껴봤죠. 내가 현실세계에 사는 게 아니라, 아주 낯선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어요. 제 생각에는 저도 아마 종류로는 거의 모든 증상을 거의 다 골고루 경험해본 것 같아요. 강도가 많이 약해서 그렇지...)
그래서 다른 당사자들 앞에 차마 “나도 환자다.” 하기가 좀 그랬죠. 주변사람들은 저를 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엄청 특이하다.”, “이해할 수 없다.” 했죠. 제 아내가 어느 날 애들에게 묻더라고요. “아빠 좀 많이 특이하지? 한 1% 안에 들겠지?” 애들이 하는 말. “엥? 1%라고?”
비겁해서가 아니라, 애매해서... 지금껏 “나도 환자다.”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오늘은 외국 당사자의 수기를 번역하고 있었네요. 아마도 내일 아니면 모레쯤? 수기번역본을 카페에 올릴 수 있을 듯해요. 기대해 주세요. 그 사람은 조현병 환자인데도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과 임상조교수”이고, 동시에 “정신장애인단체 지역책임자”로 일하는 사람이에요. 외국에는 조현병 환자이면서, 대학교수인 사람들이 엄청 많답니다.
저처럼 양극성장애이면서 대학교수인 사람, 정치인, 수상, 대통령은... 외국에서는 부지기수죠. 저는 가끔 이렇게 말해요. 정상인과 비정상인은 역할이 다르다. “정상인은 세상을 지키지만, 비정상인은 세상을 바꾼다.” 그런데 불행히도 저는 그 틈새에 끼인 박쥐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탄 기대해 주세요. 제가 생각하는 제 문제에 대한 해설을 조만간 올릴 생각입니다.
2014년 8월 9일
"사라의 열쇠(http://cafe.daum.net/saraskey)" 카페지기(촛불) 배 정 규 드림
첫댓글 자녀들도 잘됐네요 마음이 홀가분하겠네요
최근에 어려움을 잘 견뎌 내시길
바랩니다.~~~
진심 감동입니다. 한국 문화의 큰 문제 중 하나가 자기 약점을 솔직히 드러내는 자서전을 볼
수 없다는 것인데 (그래서 전 한국에서 발간된 어떤 자서전도 평전도 믿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으로 자서전을 접한 느낌입니다.
깜냥은 안되지만 감히 교수님의 솔직함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교수님이 자주 당사자
수기를 언급한 이유도 이제 잘 알 것 같네요.
당사자의 여정으로서의 삶, 고통을 극복하면서 생기는 관점의 변화, 치료나 재활보다는
재기의 관점... 이런 입장에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동감입니다 고맙습니다
촛불님 애쓰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댓글 보고 글 남깁니다.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촛불님이 진짜 전문가 이십니다.. 경도가 약해도 당사자 이시면서 전문가 이시니 그야말로 무언가를 안다고 할수 있겠지요--,정상인은 뭐고 비정상인은 뭔지? 비정상을 통해 정상을 알면 된다 생각 합니다 정상이라고 하는분들은 그런 개념이 있을수가 없기에 그들은 진정 정상이 아니라고 예가 하고 싶어요 감동적인 스토리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야 이 댓글을 봤네요. 더운 여름 날씨 잘 견뎌내시고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다 읽다보니까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너무 감동적인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디세이님도 어쩌면 지금쯤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계시는 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힘드시더라도 잘 견뎌내십사고 그러다 보면 터널의 끝이 보일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힘내시길 응원합니다.~~
교수님 정말 대단하시고요 이러한 인생역경을 많이 배우고 싶네요
늘 타오르는 촛불님 영원하라~~~!!!!
ㅎ~ 감사합니다.~~
마음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데, 나름 중심을 잘 잡고
사회생활, 가정생활 잘 해오신 모습에
존경과 찬사를 표합니다.
제 딸은 고1 중퇴 후 계속 집에만 박혀 있으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하니 앉아서 지내는 데...
증상이 가벼우셔서 다행입니다.
네... 제 경우는 무척 다행이고 행복한 경우입니다.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이 이렇듯 댓글을 남겨 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솔직한 고백에 마음이 뭉클합니다. 폼나는 인생의 뒤에는 엄청난 사건들이, 공개하신 것 말고도 수없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교수님를 뵐 때마다 여유있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질곡 많은 인생을 잘 넘긴 상장이 여유이라고 여겨집니다. 앞으로 종종 뵐께요.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보따리 잘 보았습니다.
제가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다 보니 이해가 많이 됩니다.
감사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인간 배정규님의 자기 글을 읽으니 수정같이 맑은 심연의 바다에서 혼자 헤엄치는 인어를 보는듯한 느낌입니다
상처와 아픔이 많아 치유가 필요한 저같은 사람에게 어떤 치료자의 처방보다도 가장 강력한 치 료제로써 명약입니다
오늘로 두번 읽었는데 읽고나니 저자신 큰 위로가 됩니다
여러측면에서 순결남 인간 배정규님은 어둔밤을 밝히는 등대 같은님 이십니다
더욱 건강하셔서 세상의 닽힌벽을 뚫는 개척자의님으로도 우뚝 서시는 님이 되시길 기대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박사님께서 이런 아픔과 격정이 많으셨다니 놀라고 헤쳐나오신게 경의롭습니다.
겉으론 행복하게 보인 사람도 내면을 알고나면 그렇지않는 거라는 것도 생각해봅니다
저는 남편이 중증 조현병이라 매일 환청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앞으로 등대같은 교수님의 가르침에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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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스럽네요. 오늘 가입했어요.잘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