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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 앞에 절규한 에드바르트 뭉크>p.12~29
[알게 된 것들]
- 5살 어머니 폐결핵 사망 p.15
- 15살 한 살 위 누나 소피에 폐결핵 사망 (8년 후 누나의 죽음을 떠올리며 <병든 아이> 그림) p.17
- 가족들의 죽음으로 아버지 우울증 앓으면서 폭력적으로 변함 p.16
- 20살에 팜프파탈 헤이베르크부인과 불륜. 6년의 사랑 이루어 지지 않음 2년 후 <흡혈귀>1885년 라는 작품으로 표현 p.18
- 30살이던 1893년 어릴 적 친구 다그니 유을을 만나 사랑을 느끼나 절친들과 사각관계. 또 한번의 사랑 실패 . 이 때의 고통은 1894년 작품 <마돈나>로 표현함 p.20
- 1898년 35살 뭉크의 세번째 사랑 툴라 라르센과의 사랑도 실패. 그녀는 결혼을 원했고 권총으로 자살소동을 벌이다 뭉크의 왼손가락 중지를 쏨. 사랑이 죽음을 줄 수 도 있다는 자각을 하게 함. 이 때를 1907년 <마라의 죽음>으로 표현.p.23
- 더 이상 사랑을 원하지 않고 1909년 노르웨이 크라게뢰에 정착 p.26
- 81세까지 장수. 죽기 4년전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 1940~1943 그림.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표현주의 화가 p.26
[발췌]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 뭉크 p.13
'예술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개인과 그의 삶이며, 우리는 죽어버린 자연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 뭉크 p.16
'보고 있는 것이 아닌 본적이 있는 것을 그리는 남자, 자신의 삶을 관통해 피 흘리게 한 사건을 숙성시킨 후 심장에서 끄집어내어 예술로 표현하는 남자, 누나가 죽은 지 9년 후에 그 기억을 꺼내 <병든 아이>를 그린 남자 뭉크 p.23
[단상]
화가 뭉크는 그림으로 자신을 치유했던 것 같다. 유리멘탈이었던 그에게 그림이 없었다면 그는 81세의 장수가 아닌 단명한 화가였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현실의 고통을 피해 그림 속 세상으로 숨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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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미술계 여성 혁명가 프리다 칼로>
[알게 된 것들]
바람둥이였던 디에고와 그 바람에 복수하기(?) 위해 바람을 핀 프리다. 그녀의 진정한 복수는 예술가로서의 성공이었다. p.50
[발췌]
'나는 원래 의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안에 흘러넘치는 에너지를 느끼고는 무언가 다른 걸 한다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느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림을 시작했다. 18살 경전철 사고로 큰 부상을 입은 프리다 칼로' p.35
'프리다는 기존의 어떤 예술사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개성 넘치는 걸작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진실을 직시하고, 잔인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고통을 감내하는 프리다의 힘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들이었다. 두번의 유산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가 그린 작품을 보고 디에고 칼로' p.43
'프리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백발의 50대 혁명가와 비밀스런 연예를 시작합니다. 심지어 레온 트로츠기를 위한 자화상까지 그려주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 둘의 관계 역시 지속되지 못합니다. 레온이 공적인 일에 개인 감정을 개입해 디에고를 차별했기 때문인데요.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리다는 레온을 늙은이'라고 욕하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복수를 하면서도 디에고를 향한 애정이 남아 있음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p.46
[단상]
고통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부분을 읽으면서 내 동생 나는 괴롭혀도 되지만 남이 그러는 건 못 봐주는 언니가 생각났고, 요즘 화제의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지선우가 떠오른다. 그런데 이 파트에서 '프리다와 디에고, 그래도 만났어야 했다.'는 사족 느낌이다. 저자는 나는 프리다 칼로를 쓰면서 편파적인 이야기를 쓰겠다는 전제를 하고 '막장 복수극의 결말'로 끝냈으면 더 좋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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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풀나풀 발레리나의 화가 에드가 드가>
[알게 된 것들]
- 드가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p.p.58
- 1870년 36살의 드가는 시력이 나빠지는데 이 무렵부터 발레리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p.62
- 1869년~1870년에 그린 <오폐라좌의 관현악단>의 발레리나들에 대한 평이 좋자 1872년 <관현악단의 연주자들>에서 발레리나를 주연으로 그리기 시작했다.p.64
- 당시 발레리나는 주로 빈민층의 소녀들의 자신과 가족의 성공을 위해 활동했다. p.66
- <무대 위 발레 리허설> 그림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두 남자는 스폰서! p.68
- 드가는 사진도 좋아했다. p.74
[발췌]
세 거장 (앵그르, 들라크루아, 쿠르베)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사랑하지 말라! 결혼하지 말라! 오직 예술과 사랑하라! 인생의 목적을 오로지 예술에만 두고 그 외의 열정은 모두 버리라는 동시대 거장들의 뼈저리는 조언입니다. p.60
[단상]
저자는 드가를 소개하면서 그가 '발레리나는 나와 같다'는 마음으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을 그렸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그의 애정은 발레리나들과 같은 마음이었을까? 내가 그들보다 조금 더 낫다는 우월의식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저자가 발레리나를 바라보고 그리던 드가의 시선을 너무 좋게만 보는 것 같아 조금 삐딱선을 탄다. 드가가 아름다운 발레리나를 그린 것이지만 그 곳이 '성범죄 현장'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보니 그의 그림들이 아름답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쁜 것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너무 많은 것들이 있어서 아름답기 보다는 우울감이 찾아오는 것도 있다. 드가를 만나 그가 발레리나들을 그린 마음을 직접 듣고 싶다. 어디 숨겨둔 일기장에라도 왜 발레리나들을 그렇게 그렸는지 좀 적어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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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 세곅 사랑한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알게 된 것들]
- 33세에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상경한 반 고흐는 독주 압생트에 중독되었다. p. 79
- 반 고흐가 <노란 집>과 <아를의 밤의 카페>를 남긴 아를은 압생트 산지였다. p.84
- 고흐는 압생트에 들어있는 산토닌에 중독되는데 이로 인해 황시증에 걸린다. p.84
- 고흐의 1888년작 <해바라기>는 고갱을 기다리는 반 고흐의 기쁨과 설렘이 담긴 작품이다. p. 87
- 압생트는 고흐를 알코올 중독자로 만든다. 압생트에 들어 있는 튜존은 뇌 세포를 파괴하고 정신착란과 간질발작을 일으킨다. p.88
- 고흐의 마지막 작품은 1890년작 <까마귀가 있는 밀밭>이다. p.93
[발췌]
'이미 삶과 육체 모두 극단까지 끌고 간 반 고흐. 그는 색이 이끄는 예술의 극단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압생트 산지인 아를에서 말이죠.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요? 여하튼 색의 최고음을 화폭에 담아내려는 반 고흐의 대역 없는 액션은 우리가 기억하는 불멸의 명작을 쏟아내기에 이릅니다. p.84
[단상]
압생트로 황시증을 앓아서 자신만의 노란색을 탄생시킨 고흐를 보면서 창작의 노력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러니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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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그림 '키스'의 구스타프 클림트>
[알게 된 것들]
- 1862년 태어난 클림트는 어린 시절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성공에 대한 끈기와 열정 그리고 귀금속 세공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을 천부적인 예술적 재능이 있었다. p.98
- 그림에 재능이 있던 그는 14세에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문 빈 미술공예 학교에 입학한다. p.98
- <구 부르크 극장의 내부>1888년작품에는 당시 빈을 주름잡던 유명인 250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p101
- 클림트 나이 서른살에 친동생 에른스트가 사망하고 아버지도 동생과 같은 뇌출혈로 사망하자 예술적 회의를 느끼며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본다. p102
- 1897년 서른다섯의 클림트는 빈 미술 권력과의 투쟁으로 새로운 미술 그룹인 '분리주의' 그룹을 만든다. p.103
- 1898년작 <팔라스 아테나>는 분리주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담은 작품이다. p.107
- 1899년작 <누라 베리타스>는 벌거벗은 진실이라는 뜻으로 이브를 에로틱하게 표현하였다. p.108
- 클림트는 빈 대학교의 천장화로 철학, 의학, 법학을 주제로 그렸는데, 1945년 히틀러가 퇴폐미술로 낙인찍어 모두 불태워버렸다. P.116
- 클림트 그림에서 여성이 관능미와 성적 욕구가 강조되는 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영향이 컸고, 곡선, 황금빛의 장식성은 당시 유럽 전역에 유행했던 아르누보 양식을 적극 반영한 결과이다. P.120
[발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가족과 예술 모두 절망의 수렁으로 빠진 그때, 어쩌며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존재의 밑바닥으 만났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렇게 갑자기 죽고 마는 것이라면 왜 살아야 하는지,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 앞에서 이런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과 더불어 자신의 예술 또한 돌아보기 시작합니다.'p.102
[단상]
평안한 일상에 돌이 하나 던져질 때 우리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클림트가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의 충격에서 좌절하면서 새로움을 찾아갔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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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금 드로잉의 대가 에곤 실레
[알게 된 것들]
- 에곤 실레는 역장이던 아버지를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매독을 앓고 있었고, 그 매독이 어머니 마리에게까지 감염되고 실레가 세살이던 1893년 열살이던 누이 엘비라가 선천성 매독으로 사망했다. p.125
- 1905년 아버지는 고통 속에서 사망했다.
- 이런 경험들이 그의 '죽음을 부르는 性에 대한 두려움과 괴로움을 일깨워 주었다. p.125
- 1907년 45세의 클림트를 만난 실레는 클림트의 <다나에>를 보고 자신만의 <다나에>를 그린다. p.126
- 실레는 오스카 코코슈가의 누드 드로잉에 영향을 받는다. p.128
- 1909년 빈 미술 아카데미를 자퇴하고 동료들과 '신예술가 그룹'을 결성한다. p.129
- 에곤실레는 평생 100점 이상의 자화상을 썼다. p.133
- 20살이 된 실레는 누드모델이 필요했고 클림트의 소개로 17살의 발레리에 노이칠을 만나 4년간 동거하며 도움을 받는다. p.135
- 실레는 노골적인 성적묘사의 그림으로 풍기문란 혐의를 받아서 23일간 감옥살이를 하는데 이것이 그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그림에 이성이라는 필터가 들어가게 되었다. p.137, 139
- 1918년 스페인독감으로 28살의 실레 사망하다. p.142
[발췌]
'죽음을 부르는 性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 그렇게 실레는 어린 나이에 성에 대한 트라우마를 겪게 됩니다. 이는 아마 의식 깊숙한 곳에 숨어 젊은 날의 그를 마구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레는 이로 인한 고통과 불안을 자신만의 예술을 꽃피우는 영감의 원천으로 승화시킵니다. ' p.125
[단상]
실레는 자신의 그림때문에 풍기문란죄로 23일간 감옥살이를 한다. 그 후 그의 그림은 19금에서 15금 정도로 변화한다.이건 순수의 변화일까? 세상과의 타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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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연의 삶을 동경했던 폴 고갱>
[알게 된 것들]
- 진보주의 정치부 기자였던 고갱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루이나폴레옹이 공화국 대표로 당선되자 아내인 고향인 페루로 떠나는데 가던 도중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이 때 고갱은 한 살이었다. p.148
- 1854년 6살의 페루소년 고갱은 친할아버지의 사망으로 유산을 물러받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온다. p.149
- 1865년 선원이 된 고갱은 5년 동안 바다를 누빈다. p.149
- 1871년 어머니의 사망으로 인도에 있던 고갱은 프랑스로 돌아와서 어머니 친구이자 후견인인 귀스타브 아로사의 소개로 증권거래소에서 일한다. p.149
- 증권사에서 일하며 취미로 그림을 배우던 고갱에게 아로사는 카미유 피사로를 소개해 주는데 그는 점묘법의 선구자인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 폴 세잔의 스승이다. p.151
- 1882년 프랑스의 경기 불황에 해고된 고갱은 본격적으로 그림에 뛰어든다. p154
- 고갱은 평생 자신만의 회화, 자신만의 공간을 찾아다녔다. 그래서 그는 퐁타방, 파나마 타보가, 마르티니크섬, 타히티로 떠돕니다.
[발췌]
'고갱은 타인의 이해를 떠나 오직 자신의 예술에 침잠했고, 결국 이제껏 보지 못했던 독창적이 화면을 만들어냅니다. <마리아를 경배하며>입니다. (중략) 자신이 '원시와 야생' 속에 있는 타히티 사람임을 강조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그림에 타히티와 유럽이 반반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인물, 풍경은 분명 타히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빨간 옷의 여인과 어깨에 올라탄 아이의 모습은 마치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태초를 꿈꾸지만, 여전히 문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고갱의 처절한 몸부림이 느껴집니다. p.164
[단상]
고갱을 모델로 한 소설 <달과 6펜스>가 떠오른다. 소설 못지 않게 버라이어티한 삶을 산 고갱이 느껴진다
함께 읽기 5/13
8. <그림은 아는데 이름은 모르는 에두아르 마네>
[알게 된 것들]
- 마네도 처음에는 전통방식으로 그림을 배웠다. p.175
- 마네의 전통을 파괴한 것은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14~19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 꽃피운 채색 목판화 '우키요에'였다. p.177, 179
- 1863년 살롱전에 출품한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낙선했고, 낙선전에 출품된 작품도 사람들을 경악시킨다.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에서 영감을 얻고, 마르칸도니오 라이몬디의 <파리스의 심판> 일부를 재해석한 것이다. 관람객을 경악시킨 것은 신화 속 인물을 너무도 평범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실제 모델들은 마네의 동생과 매제였고, 누드 여인은 빅토린 뫼랑이라는 모델이었다고 한다. p.183
-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오마주한 것이다. p.186
[발췌]
'우리의 모든 르네상스는 <올랭피아>에서 시작되었다. 세잔'p.174
[단상]
누구나 삶의 변화를 맞을 '램프'를 보게 된다. 하지만 누구나 그 '램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 한다. 하지만 마네는 보들레르의 감성도 도자기포장지에 불과했던 '우키요에'도 자신의 미래를 변화시키는 램프로 사용했다.
함께 읽기 5/14
9. 로맨틱 풍경화의 대명사 클로드 모네
[알게 된 것들]
- 1858년 18살이 된 캐리커처 화가 모네는 해변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 '외젠 부댕'을 첫 스승으로 모신다. p.201
- 모네에게 자연을 사랑하라고 가르쳐 준 외젠 부댕이 있다면, 자연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그리라고 일깨워준 화가는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이다. p.203
- 마네의 집에서 모이는 바티뇰 그룹에서 모네는 마네를 배운다. p.206
[발췌]
'장님이 막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바라볼 수 있는 장면을 그리고 싶다.
모네는 어떤 선입견 없이, 마치 카메라처럼 자연을 본 그대로 순수하게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바람은 적의 심자이 즉 광학을 훔쳐오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p.210
[단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수 많은 빛을 만났을 모네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그의 그림 <건초더미>들은 같은 풍경이 빛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함께 읽기 5/15
10.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접수한 폴 세잔
[알게 된 것들]
- 모네식 인상주의를 거부한 것이 후기인상주의이다. p.222
- 후기인상주의자에는 쇠라, 고갱, 반 고흐, 툴루즈 로트레크, 세잔이 있다. p.223
- 그림 공부를 위해 세잔을 박물관을 가서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기술적 노하우를 습득했다. p.224
-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면서 자연과 빛의 주제를 보게 되었다. p.226
- 세잔을 이해 할 두 개는 '자연의 본질'과 '조화와 균형'이다
[발췌]
전시만 했다 하면 평단과 대중에게 비웃음과 욕만 얻어먹던 세잔은 1877년 서른 여덟에 파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이자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엑상프로방스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사망하는 1906년까지 약 29년간 홀로 은둔하며, '세잔식 인상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자연을 탐구하며 그림을 그립니다. p.230
[단상]
세잔의 대표작 <생트 빅투아르산>을 조금은 다르게 보게 되었따. 멋진 자연 풍경을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속에 '색과 형태의 엑기스'만 취한 세잔식 인상주의를 만날 수 있었다.
함께 읽기 5/18
11. 20세기가 낳은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알게 된 것들]
- 1905년 33살의 마티스는 인생의 걸작 <모자를 쓴 여인>을 그린다. p.247
- 마티스는 자신보다 12살이나 어린 후배 피카소를 잘 대해 주었고, 그에게 아프리카 조각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통해서 시점의 개수를 무한대로 늘렸다. p.253
- 20세기 미술에서 마티스는 색채를 해방시켰고, 피카소는 형태를 해방시켰다. p.264
[발췌]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이들을 혐오한다. 회화는 탐구이며 실험일 뿐이다. p.255
[단상]
선의의 경쟁? 경쟁자가 있다는 것은 삶을 좀 더 긴장감 있게 살 수 있게 해 준다.
함께 읽기 5/19
12.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색채의 마술사
[알게 된 것들]
- 샤갈은 1887년 러시아의 작은 마을 비테프스크에서 태어났다. p.268
- 샤갈은 유대인으로 본래 이름은 모이세 하츠켈레프이다. p.268
- 당시 유대인이 처한 상황은 포그롬(러시아어. 파괴, 학살)이었다. p.269
- 샤갈은 19살에 무작정 러시아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가 1910년 23살에 파리로 간다. p.270. 271
- 프랑스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 쉽게 큰걸음이란 뜻을 가진 마르크 샤갈로 개명한다. p.271
- 파리의 수많은 미술관과 전시를 통해 영감을 얻던 샤갈은 루브르박물관에서 영원한 스승 렘브란트를 만난다. p.272
- 샤갈의 그림에서 만나는 둥둥 떠다니는 인물은 샤갈의 신앙인 유대교의 하시디즘과 관련 있다. p.276
- 1940년 전쟁과 유대인 박해를 피해 샤갈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피신합니다. p.284
- 1930년 43살의 샤갈은 <구약성경> 이야기를 105 장면으로 추려 동판에 옮기는 작업을 합니다. p285
[발췌]
삶에서처럼 예술에서도 사랑에 뿌리를 두면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p.288
[단상]
어디서나 자신의 뿌리인 유대인을 사랑한 남자 샤갈. 그의 그림에서 느끼는 따뜻함의 근원일 것이다.
함께 읽기 5/20
13. 최초의 추상미술을 창조한 바실리 칸딘스키
[알게 된 것들]
- 1896년 서른살의 엄친아 칸딘스키는 모네의 <건초더미> 연작을 운명적으로 마주한다. p. 294
- 1901년 35명의 신인화가와 팔랑크스 전시협회를 만든 칸딘스키는 팔랑크스 미술학교를 세우고 이 곳에서 가블리엘레 뮌터를 만나 열렬히 사랑하지만 13년의 연애를 찌질하게 끝낸다.
[발췌]
화실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말할 수 없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림 한 폭을 대하게 되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것에 매료되어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 그림에는 주제가 없으며 유추할 만한 어떤 오브제도 묘사되어 있지 않았다. 화면은 색채의 찬란한 얼룩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이젤 옆에 비스듬히 세워둔 나의 그림이었다. 그 때 한 가지 생각이 뚜렷해졌다. 사물의 객관성과 묘사는 나의 그림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고, 그것들은 나의 그림에서 해롭기까지 하다는 점이었다. p.305
[단상]
칸딘스키의 예술보다는 그의 찌질한 연애사가 더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의 추진력 하나만은 인정해 주어야 겠다. 그의 근자감은 대단하다.
함께 읽기 5/21
14. 현대미술의 신세게를 연 마르셀 뒤샹
[알게 된 것들]
- 그는 체스를 사랑한 남자였다. p.316
- 뒤샹에게 예술가의 길을 걷게 한 사람은 할아버지 에밀 니콜이었다. 사업에 성공한 후 그는 예술가로 전향했다 뒤샹의 두 형들도 법학과 의학 대신 예술을 선택했다. p.317
- 1904년 17살의 뒤샹으 파리로 와서 형 가스통과 풍자만화가로 생계를 이어간다. p.317
- 1912년 25살의 뒤샹은 '살롱 데 쟁데팡당'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2>를 출품했으나 전시에서 제외된다. 이로 인해 그는 안티미술을 생각하게 된다. p.321
- 뒤샹의 미술은 1915년 그에 의해 '레디메이드'라 이름붙여진다.
- 뒤샹은 작품 '샘'을 위해 <눈 먼 사람>이라는 잡지를 창간해서 익명으로 '샘'에 대한 사설을 실는다. p.329
[발췌]
이제 회화는 끝났어. 누가 이 플로펠러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을까? p.323
[단상]
뒤샹의 미술은 미술의 틀을 깨는 작품이다. 그는 '내가 만든거야?' '기성품으로 만들었다고?' '그래서 뭐?'라고 말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