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소풍길은 한남대를 경유하여 부여로 향합니다.
오늘부터 15주간 한남대학교 공기업관리자과정에서
다문화가정복지상담사 과정을 운영합니다..
OT겸 첫 시간을 마치고 부여의 수업을 위해 go go ~~~
부여평생학습관의 수업이 7시 부터 이기 때문에
부여의 곳곳의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 먼저 출발합니다.
부소산성길 안내도 입니다.
오늘은 그 두번째로 찾은 부소산성 입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부소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제5호인 부소산성은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으며,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둘레는 2,200m이고, 지정 면적은 98만3900㎡이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성은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이다. 성내에는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부소산성 안내도를 보면서 대충 지리를 읽힌 후 에 출발합니다.
2015년에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백제역사유적지구 기념탑이 부소산문 우측에 놓여져 있습니다
부여 부여산성은 1963년 1월 대한민국 국가사적 제5호로
지정된바 있습니다.
부소산성 내부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합니다.
다행이도 카드도 가능하네요 ㅎㅎ
부소산성을 들어가기 위해 이곳 부소산문을 통과한다
부소산문은 제작년도는 알수 없으나 사비문 준공시기에
신축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방사방 사비길을 걸으며 일단 삼충사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삼충사 입구에 있는 의열문 입니다..
이 의열문을 들어서야 삼충사가 있습니다.
삼충사는 3명의 충신을 모신 사당입니다.
위기로 치닫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백제의 세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 이렇게 세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 삼충사 사당 건물의 용마루 끝에서는 백제 건축의 상징인
치미(망새)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복제한 것이고
진품은 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삼충사를 지나 영일루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부여산성 안내도.
부여산성은 백제와 통일신라, 그리고 조선시대까지 축조하면서
성의 기능을 하였다고 합니다.
영일루는 부소산성의 맨 동쪽 산봉우리에 세워져 백제왕과 귀족들이
멀리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국정을 계획하고,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기원했던 영일대에 세운 누각이다.
군창지로 갈까하다가 그냥 태자골 숲길을 걸어봅니다.
태자골 숲길로 가면 태자천과 궁녀사를 볼수가 있습니다.
| 태자골 숲 길은 백제 왕자들이 거닐던 산책로로, 태자천까지 이어져있습니다. 숲길 주변으로 고목이 된 참나무와 부소산 소나무들이, 봄여름 내내 짙푸름을 뽐내고, 가을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 단풍터널이 압권입니다 부드러운 흙길을 걸어보며 백제의 지혜와 기를 받을 수도 있는 숲 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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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자들이 드셨던 태자천에 도착..
시원한 태자천의 약수를 한모금 마시고 발길을 옮깁니다.
궁녀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작은 창고 같은데...
1965년에 세워진 사당으로 660년(의자왕 20)에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적군에 붙잡혀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 삼천궁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궁녀도(宮女圖)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10월 백제문화제 때 제향하고 있다.
궁녀사 내부의 모습입니다..
궁녀사를 좌측으로 하여 숲길을 오르면
사자루가 나옵니다.
부소산 가장 높은 곳(해발 106m)에 위치한 사자루는
동쪽 영일루와 더불어 일월 음양을 뜻하며 달이 밝은 밤 누각에 오르면
아름다운 경치가 눈앞에 펼져지고 시흥이 절로 일어난다는 곳입니다.
사자루 건립 당시 터를 파다가 광배 뒷면에 명문이 새겨진(정지원명)
금동석가여래입상(보물 제196호)이 발견되었다.
사자루 현판 글씨는 의친왕 이강의 친필이고, 뒤쪽에 붙은 白馬長江은
서예가 해강 김규진의 작품이다.
사자루를 내려와 우측으로 향하면 고란사와 낙화암으로 향합니다..
아님 궁녀사에서 게속해서 우측으로 이동하여 사자루를 거쳐 낙화암으로
향할수도 있고요..
부소산(扶蘇山) 북쪽 백마강변에 있는 절로서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절 뒤 바위 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皐蘭草)가 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의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었다고도 전한다.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落花岩)에서 사라져간 삼천궁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028년(고려 현종 19)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고란약수가 나오는 고란정은 고란사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 고란약수와 고란초의 전설 *
백제시대에 임금님은 항상 고란사 뒤편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애용하여,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 약수를 떠오게 하였다. 마침 고란약수터 주변에서만
자라는 기이한 풀이 있어 이름을 '고란초'라 불렀다. 약수를 떠오는 사람들이
고란초의 잎을 하나씩 물동이에 띄워 옴으로써 그것이 고란약수라는 것을
증명하였던 것이다. 백제의 임금님이 약수를 즐겨 마셔, 원기가 왕성하고
위장병은 물론 감기도 안 걸리고 사셨다 한다.
또한, 고란약수를 한 잔 마시면 3년씩 젊어진다는 전설도 있다.
약수는 깊은곳에 있어 길다란 국자를 이용하여
담아 마셔야 한다..
고란약수에 얽힌 전설 입니다..
고란사에서 백마강 유람선 탑승장 옆에 위치한 조룡대
낙화암(落花岩) 가까이에 있는 작은 섬 모양의 바위인 조룡대[釣龍臺].
옛날 당(唐)나라 군사가 백제의 왕성을 공격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오던 중
갑자기 풍랑이 일어 진군할 수 없게 되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수소문하여 그 연유를 알아내고는, 수중암에 걸터앉아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강물 속에서 백제 무왕(武王:선왕)의 화신인 청룡을 낚아 올림으로써
용의 조화를 막고 풍랑을 멎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백마강 낙화암과 일몰의 풍경도 담을수 있었다.
미세먼지 때문에 제대로 담을순 없었지만...
해넘어 비추는 백마강의 고즈녁함과
좌측의 낙화암의 조합이 조금은 을씨년 스러운듯 하다.
다시 가파른 계단을 올라 백화정과 낙화암으로 향한다.
백마강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는 낙화암 정상 바위 위에
육각 지붕으로 세원진 백화정.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의 여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 '부풍시사'라는 시모임에서 건립했다고 한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백마강변의 부소산에 있는 바위로 바
위 위에는 백화정(百花亭)이라는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의하면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있어 아래로는 강물에 임하는데, 모든 후궁들이 굴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고 하고,
서로 이끌고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으므로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巖)이라 하였다고 한다.
백마강(白馬江)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扶蘇山) 남쪽 마루에 있으며
부여 시가지(市街地) 전경(全景)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인 반월루
1972년 세운 이층 누각으로 특별한 내력은 없다.
반월루에 올라 석양이 지는 부여전경과 백마강이
미세먼지 때문에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하동정씨인 정득열과 정택뢰, 정택래의 처 동래정씨, 정천세 등 4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각.
정득열(鄭得說)은 조선 중기의 인물로 임진왜란 때 민병 300여 명을 모아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결국 순절(殉節)하였다.
사천현감(泗川縣監)을 역임하였으며, 1592년(선조 25년) 훈정(訓正)에 추증되고
1806년(순조 6) 승지로 증직되었다.
정택뢰(鄭澤雷)는 광해군의 폐모에 항소를 올렸다가 남해 절도로 귀양을 갔을 때
어머니 강씨가 따라왔다가 병이 나 위독하게 되었다. 이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 드리는 등 노력했으나 결국 돌아가시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눈이 멀어 그곳에서 죽었다. 이러한 사연이 전해지면서 1623년(인조 1) 지평에,
1806년(순조 6)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정택뢰의 부인 동래정씨는 남편이 죽자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년상을 마친 후 죽어 순조가 열(烈)로서 명정하였다.
아들 천세는 11살에 아버지를 여위자 밤낮으로 슬퍼하다가 열흘이 못되어 죽었다.
이에 1806년(순조 6)에 효로서 함께 명정하였다.
숙종 때 마천마을(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마천)에 정득열, 정택뢰의 충효정려가
먼저 세워지고 이어서 도래정씨와 정천세의 정려가 세워졌다.
이후 정려가 허물어지자 명정 현판만 보관하고 있다가
1960년 4월에 부소산 남쪽에 다시 세웠졌다고 한다.
부여 관북리 유적[ 扶餘 官北里 遺蹟 ]
1983년 9월 29일 충청남도기념물 제43호(傳百濟王宮址)로 지정되었다가
관북리 725번지 일대를 포함하여 184필지 9만 5048㎡를
2001년 2월 5일 사적 제428호로 변경하였다.
관북리 일대는 백제의 왕궁터와 고려·조선시대의 관아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왕궁터는 부여 부소산성(사적 5) 남쪽 기슭에 위치하며
부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입지조건으로 보아 백제왕궁지로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궁터의 범위는, 동쪽은 부여여자고등학교 앞 동쪽의 쌍북리 와요지,
서쪽은 부여문화재연구소, 남쪽은 논산 방면의 길가,
북쪽은 부소산 남쪽 기슭을 한계선으로 추정된다.
왕궁터에서는 건물터·도로·하수구·연못·석축시설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고
현재 부여여자고등학교에는 임금이 마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백제의 어정(御井)인 팔각정(八角井:충남문화재자료 103)이 있다.
연못은 직사각형의 활석으로 쌓았으며 남북길이 약 6m, 깊이 약 1m이고
이곳에서 연꽃무늬 수막새, 토기, 금동제 귀고리, 등잔, 개원통보, 대바구니,
목간(木簡) 등의 다양한 유물이 대량 출토되었다. 특히 나무패에 글씨를 쓴 목간은
백제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다.
먼지털이개는 옥의 티...
주변의 고목이 오래된 역사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렇게 해서 또하나의 여정의 획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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