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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교하는 도읍지로도 손색이 없는 천하의 명당으로 주목을 받는 곳이다.
조선 광해군 4년 (1612) 임진왜란으로 전국토가 황폐화된 상황에서 광해군이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전후 복구사업을 통해 민심을 진정시키고, 또 어렵게 왕위에 오른 만큼
왕권강화를 위한 대대적인 건설사업을 벌여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한양도성의 왕기가 쇠했으니 도성을 교하현에 세워 순행을 대비해야 한다!"
그해 11월 5일 풍수가 이의신이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렸다.광해군은 예조에서 이 문제를 의논하라고 명한다.
예조판서 이정귀가 이의신의 상소 내용이 부당함을 통박하고 나섰다.
"이의신의 상소를 보니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이 사람을 현혹시킬 뿐 무슨 뜻인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풍수의 설을 경전에 나타나지 않는 말로, 괴상하고 아득하여 본래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참위와 방술의
근거없는 말을 주워모아 까닭도 없이 나라의 도성을 옮기자니 괴이합니다. 한양의 도읍은 화악을 의거하여
한강에 임했으며 지세는 평탄하고 도로의 거리는 균일하여 주거가 모두 모이는 중심지입니다. 비옥한 토지와 굳건한
성곽 등 형세의 우수함은 나라에서 제일이니 중국 사신들도 모두 칭찬한 바 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려고
터를 마련하면서 여러 곳을 살펴보고 여러 해를 경영했으나 끝내는 이곳에 정했으니 깊고 먼 계략을 어찌 미미한
일개 술관과 비교해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이른바 교하는 복지이고 한양은 흉하다는 말에 대해 세상에 알 만한 자가 없으니
누가 능히 가리겠습니까. 당당한 국가가 어찌 일개 필부의 허망한 말을 선뜻 믿어 2백 년의 굳건한 터전과 수많은 백성들을
일거에 떠돌이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 상소문이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현혹되어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고려 말엽에 요승 묘청이 음양의 설로 임금을 현혹하기를 '송경은 왕업이 쇠퇴했고 서경에 왕기가 있으므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하여 드디어 새 궁궐을 서경 임원역에 지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광해군은 이에 대한 답변을 아래와 같이 내린다.
"예로부터 새로 도성을 세운 왕이 많았으나 예전의 도성을 아주 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이의신의 방술이 경미하다고
내가 지나치게 믿는지의 여부를 어떻게 아는가. 새 궁궐로 곧 옮기려고 했으나 내전이 상을 당했고 역옥이 계속 일어나므로
나라에 일이 많아 여기까지 미칠 틈이 없었다. 그런데 터무니없고 근거도 없는 말을 믿는다고 임금을 지적하니 앞으로
는 이러한 발언을 경솔하게 하지 말라."
그리고 세월은 많이 흘렀다. 파주 교하는 천하의 명당이라는 말만 남긴채 말이다.
2001년 1월 1일 다시 파주 교하가 수도의 명당 터로 급 부상한다.
풍수지리학자 최창조 교수가 이날 한국경제신문의 연재 칼럼 [최창조의 風水산책] (6) "2001년의 시작, 대통합의 길로"에서
교하의 땅을 한양도읍지 후보지로 거론하면서 교하를 세상 사람들이 주목한다.그 신문의 칼럼 일부 내용을 옮겨 살핀다.
"새해,유일하게 남북의 큰 강이 만나는 장소,한강과 임진강이 몸을 맞대며 김포반도를 거쳐 강화로 빠져 나가는 시발점,그곳에
통일공원과 오두산 전망대가 있다. 오란 커다란 자라를 뜻한다. 자라 머리 모양의 이 산은 바로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점을 바라보며 남쪽을 향하고 있다. 남과 북의 강물이 만나는 이 지점에서 맞는 새해는 새로운 감회에 젖을 수 밖에 없다.
분단 50년이 넘어서고 있지만 작년만큼 교류가 빈번했던 적은 없다.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그 상징성의 정상을 차지한다.
전망대에서는 난감했던 지난해를 보내고 새 희망을 기대하는 양,"통일기원 미술축제"가 열리고 있다. 우두커니 북서쪽을 바라보며
재작년 돌아보았던 장단,개풍,개성 쪽을 바라보지만,예전처럼 아득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곧 갈 수 있는 땅처럼 여겨져 낯이 덜 설다.
"퍼주기만 한 대북 정책"이란 혹평도 없지 않았으나,그 전에는 또 어떤 만들을 했었나. 통일 비용이 어떻다고들 하지 않았던가.
북한의 경제 사정이 호전된다면 그것은 결코 남측에 손해날 일은 아닐 것이다. 이곳은 행정구역상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지만 예전에는 교하 땅이었던 곳이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교하 천도설로 이어진다. 내가 통일 수도로서 교하를 거론한 것은 1989년 당시 국통개발연구원 학술지인"국토연구"에 논문을 발표하면서이다. 이 논문에는 그 적지로 개성을 꼽았다.
그러다가 정신문화연구원의 논문집인 "정신문화연구"에 발표한 논문에서 교하 천도론을 거론한 것이 시발이 되어 동아일보가
같은 해 11월 그 주장을 좀 과장해서 기사화했고 그 뒤 여러 신문에서 그것이 언급됨으로 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다.
사실 교하 천도론은 광해군 때 이의신이란 지리학자에 의하여 제기된 바 있다.
근거로 서울의 땅 기운이 다하였다는 점,임진왜란이라는 미중유의 대란을 겪었기에 민심이 크게 이반되었다는 점,역적들의 변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는 점,신하들이 당파 싸움을 한다는 점,사방의 신들이 벌겋게 벗어지고 있다는 점 등을 꼽았다.
이의신의 주장은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그는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광해군의 국가 계책을 올린 자를 벌할 수 없다는 명분론에
기대어 죽음은 면한다. 하지만 광해군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생각하여 은근히 천도를 생각하지만 물론 허사가 되고 반정으로 임금자리마저 쫓겨나고 만다. 당시 천도가 과연 가능했겠느냐 하는 문제는 내 전공이 아니므로 일단 접어두고,만약 단행했다면 광해군의 입지는 나아졌을 것이란 생각은 든다. 국력을 기울여 행해야 할 천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기에 다른 모든 문제들이 덮여질 가능성이 있기에 해 본 소리다. 오두산을 뒤로 하고 교하를 향한다. 교하를 수도로 했을 때 정치의 중심지로 꼽은 혈처인 교하중학교로 가는 길에 잠깐 "묏버들 갈해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데/자시는 창밧긔/심거두고 보쇼셔/밤비에 새닙곳 나거든 나린가도 너기쇼셔"라는 시조의 지은이인 기생 출신 홍랑의 묘소를 잠깐 들린다. 홍랑의 산소는 그의 애인이자 남편인 고죽 최경창의 무덤 바로 아래 있다. 최경창은 이조판서로 추중된 인물로 당대의 문객이자 시인이면서 등소를 잘 붙었다는 기록이 있다.
가히 풍류가인이었던 모양인데 홍랑 또한 그에 못지 않아 서로 주고 받은 연애의 시는 지금도 절창이라 평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최경창이 세상을 뜨자 홍랑은 3년의 시묘살이를 하고 수절을 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본향인 해주최씨 문중에서 그녀를 받아들이고 신위를 받들고 있다고 한다.
아,참으로 애절한 사랑이다. 통일수도 터를 보러가며 사랑을 떠올리는 일은 땅의 조화일 수 밖에.
남북은 화해를 넘어 사랑으로 결합해야 할 시점이 곧 닥쳐오리니. 오도리,나의 도를 깨닫는다는 지명의 마을 뒤에 있는 장명산의
기운은 가늘게 홀로 교하중학교로 내려와 혈을 이루니 이곳에 통일 대통령과 정부 요인이 거처를 정하고 집무를 한다면 그
아니 좋을쏜가.
남동쪽으로는 황룡산이,남서쪽으로는 심학산이 자리를 잡았으니 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학의 절개와 용의 기상으로 통일 조국을 빛낼 수 있음을 이미 땅이름이 에고하지 않는가.
문득 박완서선생의 소설"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중 교하를 표현하고 있는 대목이 떠오른다.
"이 근처선 교하가 예로부터 양민들 피난 고장이라우.두 강이 만나는 평지라 몸 숨길 데는 만만찮고 도망가기는 어려워서
전쟁터론 마땅치가 않아 그럴거요. 논이 많아서 먹을 것도 많고 인심도 후하다오."
이에 대해서 평론가 이남호씨는 작품해설에서 "교하라는 마을은 두 줄기 큰 강이 만나는 곳으로 넓고 비옥한 고장이었다.
더구나 그곳은 참으로 이상하리만큼 전쟁의 냄새가 나지 않고 살림의 냄새가 남아있는 포근한 곳이었다. (중략)
언젠가 최창조가 통일수도의 자리로 교하면을 지적했을때 여러가지 지세나 입지조건으로 보아 그럴듯한 정도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박완서의 교하면 피난체험을 읽고 나니,교하면이란 곳이 정말 신비한 기운을 간직한 땅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
그곳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런 땅이다. 동행한 사진작가 정동헌차장이 불평 비슷하게"도무지 이곳은 산이 밋밋해서 좋은 사진을
얻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이 신비하다는 것이다. 아무 내세울 것도 없는 우리네 평범한 어머니같은 땅이기에 풍경이 밋밋할 수 밖에 없지만,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곳에서 어머님의 품 속과 같은 안온함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교하중학교 교사 뒤에는 잔솔밭이 있고 가녘에 정지가 하나 서있다.
도로에서 정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딘가 짙은 향수를 느끼게 하는 특이한 명당구 구조이다.
정문에 걸려 있는 이 학교 졸업 예정자들의 다른 고교 수석,차석 입학생들의 현수막이 인정을 더한다.
눈쌓인 운동장은 고즈넉하다. 통합,교류,사람,어머니,신비함,인정이 쌓인 교하 땅이 우리를 물질이 아닌 인간적 희망의 땅으로 이끄는 기폭제가 되기를 신사년 원단을 맞아 간절히 바란다. "
지금의 파주시 옛 지명은 교하(交河)다. 땅의 내력은 물길과 연관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조선조 광해군 4년(1612)에 궁궐에서 신임받던 풍수학자 통례원(종6품) 이의신(李懿信)이 한양의 지기가 쇠하여 왕기(旺氣)가
서린 교하로 천도해야 한다며 ‘교하천도론’을 주장했던 곳이다. 당시 이 교하천도론은 풍수의 지기쇠왕설을 이용해 왕에게 환심을
사기 위한 간언에 불과하다면서 중신들이 반대하고 나섰고, 결국 정치적인 사건으로 무산됐다.기득권의 심한 반발로 죄절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광해군은 서인세력과는 전혀 소통하지 않은 채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독단으로 밀어붙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의도는 당장 승정원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승지들은 이의신의 상소문을 허무맹랑하다고 하여 접수하지 않았다.
9월에 이의신은 다시 상소해 같은 요청을 했다. 이번에도 승정원에서 제동을 걸었다.
승지들은 허무맹랑한 주장을 계속하는 이의신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광해군은 이의신을 처벌하지 않았고,
11월에 이의신은 또다시 상소문을 올렸다. 승정원에서는 같은 상소문이 세 번이나 올라왔으므로 부득이 광해군에게 보고했다.
광해군은 그 상소문을 예조에 내려 검토하게 했다. 천도문제를 공론화하려는 의도였다. 당연히 서인들은 천도를 반대했다.
그들은 천도문제를 공론화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그들은 천도문제를 제기한 이의신을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를 유포한 죄목으로
엄벌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천도문제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인물은 서인의 지도자 이항복이었다.
이항복은 광해군에게 올린 반대 상소문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파주에 부(府)를 설치하거나 또는 서울을 설치하는 것이 편리한지 아닌지를 의논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요사이 술사 이의신이라는 자가 천도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상소문을 올렸기 때문에 내리셨습니까?
옛날에 천도는 아무 이유 없이 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나라에서 기산(岐山) 아래로 천도하고, 위나라에서 상구(商丘)로 천도한
이유는 오랑캐의 난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진나라가 신전(新田)으로 천도하고, 형나라가 역(繹)으로 천도한 이유는 백성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반경이 상(商) 지역에서 은(殷) 지역으로 옮긴 이유는 홍수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주공이 낙읍으로 옮긴 이유는
제후들이 조공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삼대 이후 천도한 때가 있었지만 이유 없이 천도한 적은 없었습니다.
…신은 지리에 관한 일은 모르고 오직 사람에 관한 일은 이해하는데, 나라 일과 집안 일이 일체이며 길하고 흉한 법이 같습니다.
일찍이 세상사람들을 보건대 가장 좋은 것은 덕을 심고 복을 심는 것이고, 그 다음은 약을 먹어 수명을 늘리는 것이며,
그 다음은 재물을 모아 후손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대책이 없는 것은 100가지 방법을 다 써도 질병과 재앙을 없애지
못해 부득이 집을 옮기고 장소를 옮기는 계책을 써서 아득한 가운데 만에 하나의 요행을 바라며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다 솥은
깨지고 표주박도 없어지며 집은 더욱 쓸쓸해지고 곤궁함이 더욱 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연려실기술> 폐주 광해주 고사본말, 의천도교하(議遷都交河))
광해군은 서인들의 반발이 격심하자 “부(府)를 설치하는 일은 천도와 다르다”거나 “역대에 모두 두 도읍이 있었다”고 하여
파주에 천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작은 서울을 설치하려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서 파주에 작은 서울을
설치한다는 해명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서인은 광해군이 풍수지리에 현혹되었거나 정치적 음모를 가지고 천도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결국 광해군은 천도하지 못했다.파주 천도는 취소됐지만 크나큰 부작용을 남겼다.
천도를 주장하던 광해군의 체면이 달려 있었기에 천도 대신 뭔가를 해야만 했다. 광해군을 지지하던 당시 대북의 지도자 이이첨은
절충안을 찾아냈다. 파주 천도 대신 한양 안에 이궁을 짓는 절충안이었다.
그렇게 하면 파주로 천도하지 않아도 되었고, 또 광해군의 체면도 살 수 있었다. 그 결과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과 경덕궁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정작 인경궁과 경덕궁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파주 천도 문제는 광해군을 몰락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1612년에 이의신이 파주 천도를 요구한 때로부터 정확히 290년 후인 1902년 특진관 김규홍이 고종 황제에게 비슷한 요구를 했다.
평양에 이궁을 건설하고 서경(西京)으로 승격시키자는 요구였다. 겉으로는 평양을 작은 서울로 만들자는 요구였지만 실제는
평양으로 천도하자는 요구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