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정부 쪽에서 발원하여 청계천을 만나 남쪽 한강으로 흐르고 있는 중랑천(中浪川)이다.
도봉구 창동 부근에서는 한내 한천(漢川)으로 불렀다.
이 강의 상류인 도봉동 부근에 도봉서원이 있다.그래서 서원천(書院川)이라고 했다.
상계동 부근에서는 '한강의 새끼개'라는 뜻의 '샛개' 또는 '샛강'으로도 불렀다.
<여지도서> 양주편에서는 '송계천(松溪川)'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 '속계' 중랑천' 중랑개'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살곶이다리 부근에서는 '견항(犬項)'이라고도 했다.
견항(犬項)은 서울시 살곶이다리의 상류인 성동구 송정동과 동대문구 장안동을 잇는 한천의 나루를 말한다.
한천의 물목인 개목[犬項]을 일컫는 이름 견항이다.
중랑천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도봉산의 산줄기와 봉화산이 만나는 부근에 대나무의 잎과 가지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물결에 비유한 죽랑(竹浪)을 소리 나는 대로 적다가 중랑(中浪)으로 변음된 것으로 물결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랑천이 새내 또는 샛강으로 불린 것은 봉황이 새의 일종임을 의미하는 말이 되어 ‘새가 있는 냇물’이란 뜻이 되며,
도봉산 아래의 중랑천 지천을 서원천(書院川)이라고 부르는 것도 새의 둥지가 있는 동산이라는 소원천(巢園川)의 발음이
변화한 것이라고 전한다. 서원천이란 이름은 조선말에 나온 지도 등에 보이며, 『한국지명총람』(1966년)에는
「중량포를 중랑개(中浪-)로도 부른다.」고 되어 있다.

‘중랑’이라는 지명과 관련된 설화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 중랑천에는 현재 월릉교 부근에 송계교(松溪橋)가 있었다.이를 나무다리에서 돌다리로 개축할 때
인근 마을의 장정이 모두 부역으로 동원되었다. 이 부근에 살던 중이(仲伊)라는 사람은 눈이 먼데다가 열여섯 살 되는 딸 하나를
데리고 사는 홀아비였다. 국가의 명령이라 부역을 거역할 수도 없는 처지이고, 양주군 관아에서 이미 수차례나 인원 점검을
해왔기 때문에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를 알게 된 그의 딸 중이는 자신이 아버지 대신 부역을 하겠노라며 양주 관아를 찾아갔으나 처녀의 몸으로 석축 쌓는 일을
할 수 없다 하여 거절당했다. 중이의 딸은 이에 굴하지 않고 관아 앞에서 여러 날을 지키며 아버지 대신 부역시켜 줄 것을
간청하여 양주군 관아로부터 부역을 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반드시 남장(男裝)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녀는 관아에서 시키는 대로 남장을 하고 참여했지만 문제는 생리현상이었다.
동료들과 일하다가도 용변 때마다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는데 배변 시는 앉아서 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지만
배뇨 시에는 남자들과 달리 앉아서 해야 하므로 금방 여자임이 탄로 나게 되어 있었다. 전전긍긍하던 그녀는 대나무를 잘라서
옷 속에 넣어 관을 통해 서서 배뇨할 수 있게 하고, 가능한 한 수분섭취를 줄여서 배뇨 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하였다.
이런 눈물겨운 사연을 전해들은 양주군 관아에서는 마침내 중이의 부역을 해제시킴으로써 중이를 대신해서 부역하던 그녀의 딸도
눈먼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자인 줄만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를 중낭자(仲郎子)라고 불렀으나 그가 사실은
남장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 그녀를 중랑(仲郞)이라 불렀고, 언제부터인가 다시 중랑(中浪)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해 온다.

중랑천 이름의 또다른 유래는 이렇다.
하천의 지류인 우이천(牛耳川)과 묵동천(墨洞川)이 합류되는 지점이
마치 큰바다 같아서 이를 '중량포(中梁浦) 또는 '충랑포(忠浪浦)' 혹은 '중랑포(中浪浦)'라고 불렀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을 지나는 하천을 중량천 또는 중랑천으로 부른 것이 현재의 중랑구 지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