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문학》 제5호 원고
내가 법주사
절하러 가는 친구 따라
주기도문 굳은 입 나도
청화산 법주사 간다
비구니 예불 양껏 드신 들머리 마애석불
화안열색시和顔悅色施다
마당 가 정좌한 조선팔도 유일 왕맷돌
네 개 입 합장하고 내가 법주사라 한다
버리고 비우고 간다는 절에
세속 무게 차곡차곡 쟁여 든 나
벌떡 일어난 불심 유전자를
부처님 전 엉거주춤 세워둔다
그 옛날 어머니 숱한 기도에 뒤따르던
원족 길 재잘거렸던 내 기도
부처님 모조리 기억하시려는가
넙죽 자비 청한다
*군위 청화산 법주사: 신라 소지왕 15년(493년) 창건,
속리산 법주사보다 60년 빠른 당시 거대 사찰(유일 4구 왕맷돌 보유)
파꽃
인각사麟角寺 뒤란
기린 뿔 다시 돋았다
잘난 것 못 난 것
가진 것 못 가진 것
같은 하나이고
희열 탐하는 고통
삶 기웃거리는 죽음
생명의 길이라는
보각국사普覺國師 법문 결렸다
덕지덕지 허물 덮어쓴 채
석탑 돌꽃 닮으려는 듯
모가지 하늘로 쳐든 파꽃
독경 따라 몸 흔든다
반전(反轉)
여남은 평, 한 뙈기 텃밭농사가 일상의 에너지를 샘솟게 한다. 씨앗을 심고, 물을 길러다 주고, 싹이 나는 것을 보면서 설렘을 키워간다. 새 생명이 발아하고, 자라고, 결실을 맺는 텃밭의 경이로움과 쏠쏠한 수확의 재미, 이것이 아내의 한결 같은 텃밭 사랑의 변이다. 거름주기, 밭갈이, 파종하기, 정식하기, 솎아주기, 물주기, 김매기, 울타리 돌보기 등 넘치는 일거리도 그저 즐길 거리쯤으로 여긴다.
아내가 장만한 텃밭이어서 아내가 주인이고 나는 일꾼이다. 일머리 트는 것은 아내 몫이고, 힘쓰는 일이나 심부름은 나의 차지다. 종묘상회에 가서 상추씨를 사온 것도, 텃밭을 갈아엎어서 두둑을 만든 것도, 파종을 한 것까지도 일꾼인 나의 몫이었다. 너무 깊게 묻어서 발아가 늦다는 아내의 지청구까지도.
봄비가 그친 아침녘, 마음이 부추겨서 찾아간 텃밭에선 상추 새싹들이 부신 눈을 부비며 싱그러운 새 세상으로 얼굴들을 치올리고 있다. 흙을 밀어 올리는 소리에 두 귀를 두둑에 걸어본다. 자기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의 무게를 떠밀어 젖히고서 나온 여린 싹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뒷날 파릇파릇하게 자란 상추 무더기에서 솎기 작업을 했다. 어린 싹을 솎아 참기름을 넣고 된장찌개에 비벼 먹는 식도락을 떠올리면서. 솎기는 촘촘히 있는 것을 군데군데 뽑아 성기게 하는 것이다. 솎아주어야 먹음직스럽게 자란다. 그냥 내버려두면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같은 환경에서도 어떤 것은 웃자라고 다른 어떤 것은 생육조차 부실하다. 끊어질세라 망가질세라 연한 상추 줄기를 잡고 조심스럽게 솎기를 하려다가 문득 움찔대는 손끝을 느꼈다. 순서가 뒤바뀐 생과 사의 현실 앞에서다. 잘 자란 것은 뽑혀나가고 시원찮은 것은 남아서 끝까지 살다가 어떤 것은 꽃피워 씨앗까지 품어낸다. 상추 입장에서 나의 손은 그저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저승사자의 올가미일 뿐이라는 생각에서다.
상추 솎기는 언제나 튼실하게 자란 것부터다. 부실한 것은 뽑아본들 먹을 것이 없으니 의당 밭에서 가장 잘 자란 것부터 솎는다. 생사의 뒤바뀜이다. 적자생존이 아닌 반적자생존이고, 자연선택이 아닌 반자연선택이다. 적자 입장에서는 인위적 처사가 그저 부당하고 부당할 것이다. 천부당만부당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기심이 작동하는 세상사이고 보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친구 S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더니 정말 모를 일이더구나!” 하면서 들려준 그의 직장동료 K의 이야기다. 민간 기업에 근무하면서, 내부 경쟁자들은 경영간부나 임원진에 뽑혀 임기를 마치고 회사를 떠났지만, 뽑히지 못해 후배들에게까지 밀리고 치이면서 구박덩이로 남아 있었던 K였다. IMF 때 막차로 승진되었다. ‘마른 걸레도 짜기’ 경영으로 사장에까지 올랐다. 훗날 공기업 사장으로까지 발탁되었다. 자리를 옮겨서도 공기업 고유의 가치경영보다 긴축경영이 자신의 소명이자 앞서는 가치라며 주특기인 ‘마른 걸레도 짜기’로 명성을 드높였던 인물이다.
그 K 사장도 끝까지 남아서 이룬 대기만성이었다. 반전의 쾌거였다. 부실한 상추여서 미리 솎기지 않고 남아서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맺듯이. 일희일비,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기 경영으로 인고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는 생각 때문에 그의 기억에 밑줄이 그어졌던 모양이다.
상추밭에서 전화를 받는다. 아들보다 더 사랑스런 손자 녀석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유학을 그 녀석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유학을 갔다. “많은 동기생들 가운데 공부 잘 했던 동기생은 크게 성공을 하지 못했단다.”라는 나의 격려에도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못다 한 공부 대학에서 다 할래요.”라며 물 받은 상추처럼 싱그럽게 웃는다. 그렇다. 실패는 곧 기회라고 했다. 반전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니까.
잘 자란, 웃자란 상추만 뽑혀나간다. 붉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그득하게 쌓인다. 뽑히지 않은 비실비실한 상추들이 내일로 가는 푸른 끈은 야무지게 붙들고 있었다.
문학의 무용지용(無用之用)
인문학과 기술의 융·복합시대가 열리면서부터 온 나라에 인문학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십여 년이나 이어졌지만 결과는 거꾸로다. 현실은 취업이 어려운 학문, 배부른 자의 학문이라며 점점 더 기피당하고 홀대당하고 있다.
이공(理工)이 널리 쓰이는 실용의 지식이라면, 인문(人文)은 실용성 측면에서 쓰임이 없는 학문이다. 쓸모 있음은 물질적이고 보이는 것이지만, 쓸모없음은 비물질적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볼 수 있는 것에만 가치와 무게를 두려 한다. 공리주의 세계에서는 시보다 칼에, 음악보다 망치에, 그림보다 스패너에 더 가치를 둔다. 쓸모가 지배적인 지식의 유용성과 쓸모없는 지식의 유용성이 대립하고 있는 세상이다.
키케로는 ‘인간 정신을 가장 존귀하고 완전하게 해 주는 학문이 인문학’이라고 하였고, 누치오 오르디네는 ‘인문학은 비록 실용적인 가치는 없지만 인간의 정신과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학문’이라고 하였다. 인문학의 근본이 인간 정신에 있다는 갈파였다. 문·사·철(文·史·哲)로 대표되는 인문학의 홀대는 필시 인문학이 지니고 있는 본연의 권능이나 학문적 비중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학의 홀대 현상에서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을 본다. 무용지용은 『장자(莊子)』의 「인간세(人間世)」 편에서의 장자의 가르침이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쓸모가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쓸모 있음으로 인해 오히려 스스로 망하는 경우가 있으며, 쓸모없음으로 인해 자기를 지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활자언어의 디지털언어시대로의 진화는 삶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책의 문자를 통해 사유하는 세계보다 TV, 인터넷이 제공하는 이미지 세계가 훨씬 감질나고 달콤하다. 책맹사회를 유인하는 ‘이미지 세계’라는 새로운 환경은 인류의 지식과 문화를 견인해 온 사고력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고 있다고 걱정들이다.
인문학의 중심인 문학 활동을 하노라면 ‘문학의 위기’, ‘문학의 기능’, ‘문학의 가치’가 화두가 되곤 한다. 합리적 목적성과 실용적 유용성의 충돌 때문이리라. 그럴 때면 ‘써먹을 수 없다’는 실용적 유용성의 한계는 무용지용에서 그 해답을 찾게 한다. 앙드레 지드가 『콩고기행』에서 탄식했듯이 문학은 배고픈 사람에게 빵 하나 주지 못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가혹한 현실을 폭로함으로써 선의의 양심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김병익 평론가는 ‘문학은 그 쓸모없음이 마련해 준 자유를 통해 실용주의에 매인 욕망에 수치심을 느끼게 하며 그 실용성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고 하였다.
지금 세상은 ‘쓸모없다’고 여기는 것의 쓸모를 빨리 발견하는 자의 것이다. 기술혁신은 시대마다 문학적 상상력이 과학자, 기술자들에게 영감을 준 결과다. 인문학의 중심인 문학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를 풀 수 있는 과학기술의 창조 근원이 되는 많은 이야기를 내놓아야 한다. 그 많은 이야기들로 무용의 유용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미래에도 현재진행형인 문학의 무용지용일 터이다. 문학, 써먹을 수 없는 것에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찾는 일이다.
은종일 eunji4513@hanmail.net
『한국수필』 수필, 『창작에세이』 평론, 『문학시대』 시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대구문인협회 감사. 대구교육대학교 문예창작아카데미 운영위원장. 달구벌수필문학회장,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군위문인협회장 역임. 수필집 『거리』, 『재미와 의미 사이』, 『춘화의 춘화』. 시집 『사소한 자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한전전우회 대경예술상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