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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 항쟁
1). 자료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 1980년대>
-(김정남의 증언) “ 전두환 신군부는 5월초, 시국수습 방안을 모색할 당시부터 이미 국민들이 크게 반발, 저항할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하여 ‘강력한 탄압’의 방법으로 시위진압을 하도록 평소에 공수부대를 투입할 것을 계획하였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 전에 미리 전국의 대학과 주요 보안목표에 계엄군을 투입하였음이 밝혀졌다. 17일 밤에 이미 특전사 7공수여단 소속 장교 94명, 사병 680명이 M16소총 등을 휴대하고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점거, 당시 학교 잔류 학생들에 대한 구타행위를 자행하였다. 더구나 지역정서상 커다란 반발이 예상되는 김대중을 계엄확대와 동시에 체포한 것 등에 비추어볼 때, 이들은 처음부터 광주시민들의 저항이 있을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계엄군의 조기투입과 강경진압을 획책하였음이 명백한 것이다.”(<한국현대사 산책 : 1980년대> 1권 122쪽)
-(황석영) “ 공수부대의 폭력의 잔인성은 잠재된 민중들의 투쟁의 역량을 폭력적인 방향으로 대응, 분출시키게 하는 자극적인 기폭제로 작용하게 만들었다. 공포가 사라지고 치열한 연대감과 증오만이 남게 되었다. 민중은 자신의 심연에 들어 있는 생존에 대한 가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뢰에 의하여 등장하게 되는 자신들의 근원적 폭력성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 싸움은 곧 공세적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1권 131쪽)
-(전남대학교 교수들의 <대한민국 모든 지성인들에게 고함>) “내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비인간적인 상황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관망만 하고 있다면, 도대체 학문이, 교육·양심이 지식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나라의 운명이, 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 지성인다운 태도와 민주시민으로서의 행동이 전격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 고립된 우리 광수시민들에게는 무엇보다 한시가 절박합니다. 민주시민이여! 민주화를 위해, 우리의 삶을 위해 일어섭시다.”(1권 150쪽)
2). 개인적 기억
- 1980년 일어난 ‘광주항쟁’은 철저하게 숨겨진 정치적 코드이자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80년대 몰래 상영된 ‘광주의 비극’과 관련된 비디오는 결코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만약 그것을 본다면 일종의 ‘결단’을 요구할 것만 같은 압박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광주’도 방문하지 못했다. 풍문으로만 들었지만 그토록 참혹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의 표정을 직면하고 쉽지 않았던 것이다. ‘광주’에 관한 어떤 자세한 내용도 추적하지 않았다. ‘광주’는 어쩌면 의도적인 회피의 대상이었다.
- ‘광주항쟁’의 전면적인 실체에 직면한 것은 30년도 더 지난 2017년 임철우의 5권의 소설 <봄날>을 통해서였다. 임철우 또한 ‘광주항쟁’의 부채감에 한동안 시달리다 1997년에야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 <봄날>을 완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임철우는 ‘광주항쟁’에 관한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말하고 싶다. 80년대의 엄혹한 시절, 그는 보통의 사람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광주’의 비극을 다양한 형식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봄날>을 보게 된 이유도 80년대 임철우의 작품을 통한 인연이었다.
2. 7.30 교육개혁
1). 자료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 1980년대>
-(국보위가 단행한 교육조치/‘이규호 교육정책’) “① 본고사 폐지와 고교내신성적 반영을 통한 대학입시 개혁 ② 졸업정원제 실시 ③ 대학입학정원 확대 ④ 전일수업대학 운영 ⑤ 교육대학 4년제 개편 ⑥ 교육방송 실시 ⑦ 방송통신대학 확충 ⑧ 초·중등 교육과정 축소 ⑨ 과열과외 추방”
-(구체적 방안)“재학생의 과외 및 대학생, 현직 교사의 과외지도를 금지하고/8월 1일부터 문교부, 내무부, 국세청으로 과외단속반을 편성하여 단속에 나서며/81학년도부터 대입본고사를 폐지하고 고교 내신성적과 예비고사 성적만으로 신입생을 선발토록 했으며/81학년도 신입생부터 졸업정원제를 실시, 대학입학 인원을 최고 130%로 늘리도록 했다.”(1권 218쪽)
- “7.30 교육조치 가운데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졸업정원제였다. 졸업정원제 실시로 정부는 세 마리의 토끼를 한 번에 잡고자 했다. 이는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기업이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던 고급인력을 양성하고, 대학정원보다 입학생 수를 많이 늘림으로써 고등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했으며, 마지막으로 입학 후 경쟁을 통해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이루겠다는 것이었다. 명분은 그럴듯했지만 신군부가 정작 노린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신군부는 졸업정원제를 통해 대학생들의 정치적 저항을 무력화시키고자 했다./신군부의 교육정책은 그 어떤 화려한 수사를 내걸었건 기본목표는 시종일관 저항의 무력화와 더불어 체제 순응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었다.”(1권 220쪽)
2). 개인적 기억
- 7.30 교육개혁은 현재의 나를 있게 한 ‘사회적 사건’이었다. 81학년도부터 4년제로 전환되는 ‘교육대’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교육대’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면서 당시 상황에는 최적의 선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렴한 수업료와 일정한 지원금, 가장 큰 매력은 교사생활을 통해 군복무가 면제된다는 사실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하는 입장과 적절한 사회적 지위 획득의 문제를 고려할 때 ‘교육대’는 당시에는 다른 선택지를 능가하였다. 더구나 새롭게 적용되는 ‘졸업정원제’에서 자유롭다는 점도 솔깃하였다. 최소한 학점의 불안에 시달릴 염려는 없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바뀐 81학년도 대입제도는 그동안 괴롭혔던 ‘수학’의 불안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본고사’가 남아있는 한, 수학에 대한 절대적인 부족은 입시에 치명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시는 ‘예비고사’ 성적으로 단일화되었다. ‘내신성적’을 적용하라는 지침이 있었지만 새로운 입시에 대한 부담으로 대학들은 대부분 ‘예비고사’ 성적으로만 입시사정을 대치하였다. 오로지 한 번의 시험으로 대학이 결정되는 지극히 단순한 방식이 이루어졌다. 현재의 기묘할 정도로 복잡해진 입시제도와 비교할 때, 이러한 ‘단순성’은 시대가 만들어낸 일종의 아이러니일 수도 있었지만 성적 이외에는 어떤 요소도 개입될 수 없었던 ‘투명한’(?) 방식이었음은 분명했다.
3. 삼청교육대
1). 자료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 1980년대>
-“삼청교육은 80년 8월 4일에 발표된 계엄포고 제13호(불량배 일제 검거)를 근거로 한 것인데, 이는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 간사 허삼수의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 삼청교육대는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약 20개 사단에서 무장군인의 혹독한 탄압과 감시 아래 81년 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들 가운데 7578명은 80년 12월 제정된 사회보호법에 의해 보호감호처분을 받고 계속 군부대에 수용되기도 했다.”(1권 239/241쪽)
-“국보위는 표면적으론 ‘사회악 일소’를 내세웠지만 확실한 정권장악을 위한 ‘공포분위기’ 조성과 정치적 보복의 목적이 더 컸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경찰서별 강제할당제였다. (.....) 그래서 동네 사람들의 평판과 사적 감정에 따른 고발에 의존하거나 단지 외모가 불량하거나 술을 많이 먹었다는 이유로 멀쩡한 시민들을 잡아들여 삼청교육대로 보내는 어이없는 일이 숱하게 벌어졌다.”(1권 241쪽)
-“2002년 10월 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삼청교육대에 대한 통계에 따르면 모두 합해 6만 755명이 검거되었고 이 중 4만 347명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삼청교육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발생한 사망자는 339명이었고 나중에 불구가 된 부상자는 2천 7백 명이었다. 삼청교육 과정에서는 구금, 강제노역, 구타 등으로 사망한 사람이 52명에 이를 뿐이라는 국방부 발표와는 천양지차였다.”(1권 249쪽)
-(박노해의 <삼청교육대> 중 일부) “김형은 체불임금 요구하며 농성 중에/사장놈 멱살 흔들다 고발되어 잡혀오고/열다섯 난 송군은 노가다 일나간 어머니 마중길에 불량배로 몰려 끌려오고/딸라빚 밀려 잡혀온 놈/시장 좌판터에서 말다툼하다 잡혀온 놈/술 한잔 하고 고함치다 잡혀온 놈/춤추던 파트너가 고관부인이라 잡혀온 놈/우리는 피로와 아픔 속에서도/미칠듯한 외로움과 공포를 휘저으며/살아야 한다고 꼭 다시/살아 나가야 한다고/얼어터진 손과 손을 힘없이 맞잡는다.”
2). 개인적 기억
-‘삼청교육대’가 처음 시행되었을 때, 분명 호의를 갖고 보았을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것은 노태우 정부때 ‘범죄와의 전쟁’과 유사한 메시지를 던져 준다. 사회의 악과 부정을 공권력을 이용하여 확실하게 제거해준다는 선언은 일상의 폭력과 시비 그리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여전히 ‘법 보다는 주먹’이 가까운 세상을 ‘정의’을 앞세워 정화하겠다는 국가의 선언은 구체적 현실에서 실제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있는 선언이었다. 극우적 정부는 이러한 ‘국가적 폭력’을 이용하여 표면의 목적을 홍보하면서 내면의 의도를 달성한다. 결국 ‘삼청교육대’는 일상의 폭력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의 폭력을 강조하면서 앞으로 예상되는 시민적 저항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던 ‘깡패’들이 사라진 것을 사람들은 분명 좋아했다. 삼청교육대의 비극이 후에 밝혀지기 전까지 ‘삼청교육대’가 한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지지도 나름 역할을 했을 것이다.
4. 컬러 TV 방송
1). 자료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 1980년대>
- 1980년 11월 10일 문공부 장관 이광표는 12월 1일부터 컬러 TV 시험방송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12월 1일 이광표가 KBS청사에서 컬러TV 방송 스위치를 누름으로써 한국에서의 컬러TV 방송시대가 개막되었다.(1권 272쪽)
- 컬러수상기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방송의 영향력이 더욱 증대된 만큼 전두환 정권은 TV를 박정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정권홍보에 이용하였으며, 그 결과 ‘뚜뚜전 뉴스’ 또는 ‘땡전 뉴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상식을 초월하는 TV의 전두환 찬양과 정권홍보는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으며 이는 나중에 TV시청료 거부운동으로 나타났다. TV의 컬러화 실시로 기왕의 ‘바보상자’ ‘판도라의 상자’ 이외에 ‘유해색소’까지 첨가된 격이었다는 말까지 나왔다.(1권 273쪽)
- 전두환의 복장에서부터 화장품 광고에 이르기까지 컬러TV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색의 혁명’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인 소비자자본주의체제로의 편입을 가속화시키게 되었다. 컬러TV가 선도한 ‘컬러화 선풍은 모든 분야에서 소비패턴의 고급화와 다양화로 이어졌다.’ 그러나, 소비문화는 화려하게 변화되어갔지만 정치적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점점 더 질식사의 길로 치닫고 있었다.(1권 281쪽)
-(영화평론가 이정하) “1970년대의 막바지, 하길종은 ‘한국영화는 세계 속의 어디쯤 있는가? 아무 곳에도 없다. 싹도 없고 잔해도 없다. 설익은 모방과 지저분한 상흔만이 있다.’고 절규하며 울분에 찬 술잔을 달랑 들고 저 세상으로 갔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80년은 봄과 함께 찾아왔다. 어느해인들 봄이 먼저 오지 않는 것은 아니련만, 이 해의 봄은 그 의미가 달랐다. 그러나 한국영화계는 여전히 70년대의 찬바람 부는 겨울엣 헤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남은 것이라고는 외화수입을 본업으로 하는 스무 개 정도의 독과점 영화사들과,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자행되는 이중삼중의 검열의 벽, 영화인은 굶고 있는데 곳간만 늘어가는 영화진흥공사, 그리고 창작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굴종의 뒷골목을 헤메는 영화인들이 전부였다. 이 빈약한 재산의 한국영화는 더욱이 컬러텔레비전과 영화시장 개방과 그 자신의 구조적 모순이라는 삼면의 벽 앞에 서 있었다.”(1권 279쪽)
2). 개인적 기억
흑백으로만 보여 지던 세상이 ‘색깔’을 띠었을 때 분명 특별한 경험이었다. 새롭게 방영되는 ‘컬러’ 화면을 거리에 전시된 TV에서 보면서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촉발된 정치적 변화가 생활의 근본적 변화로까지 전환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색은 다양한 컬러로 바뀌었지만 처음 만나는 ‘색’은 선명하기 보다는 번져버린 물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과장되고 정돈되지 않은 술집 작부의 화장처럼 컬러 TV에 대한 첫 인상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어쩌면 소유하지 못할 것에 대한 일종의 질투였을까? 경제적 어려움은 컬러 TV를 소유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요구했다. 컬러 TV가 등장했지만 이후 4-5년간은 거의 TV를 보지 않았던 것 같다.
5. 국풍 81
1). 자료 :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 1980년대>
-‘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조작 이벤트였다. 일본의 극우에 심취한 허문도가 일본의 카미카제(神風) 정신을 본따 이름을 붙이고 적극 밀어붙인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국풍(國風)이었다./‘전국대학생 민속국악 큰잔치’라는 부제 아래 열린 ‘국풍 81’은 개막행사, 민속제, 전통예술제, 젊은이 가요제, 연극제, 국풍장사 씨름판, 팔도굿, 남사당놀이 등의 본행사와 함께 ‘팔도 명물장’을 열어 엄청난 구경꾼을 끌어들였다.(2권 48/49쪽)
-(김형진 <대학가요제의 돌연변이 국풍 81>)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3S(스포츠, 스크린, 섹스) 정책의 일환으로 ‘국풍 81’이라는 대학가요제를 개최한다. 이용이 <바람이려오>로 2위에 해당하는 금상을 받으며 기성가수 반열에 올라섰던 이 가요제에서 1위에 해당하는 대상은 공교롭게도 서울대 그룹사운드 ‘갤럭시’에게 돌아갔다. 갤럭시의 <학>이라는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부족한 곡이었지만 국풍 81의 심사위원들은 이들에게 대상의 영예를 안겨준다.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서울대 학생들도 새정부 건설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는 상징 조작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2권 52쪽)
-(문화평론가 신현준) “ 70년대의 문화정책이 원칙적으로 외래 퇴폐문화를 금지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문화에 대한 규제를 단행했던 반면, 80년대는 ‘퇴폐문화’에 대한 선별적 해금을 실시하면서 이런 조치가 체제와 그리 불편하지 않게 어울리도록 관리하는 양상을 취했다. 즉, 정책담당자가 보기에 ‘퇴폐적’이지만 별달리 ‘위협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는 방치한다는 것이 당시의 문화정책의 이데올로기로 보인다. 70년대와 비교한다면 정책의 지배적 원리가 금지의 논리에서 방치의 논리로 전화한 것이다.”(2권 54쪽)
2). 개인적 기억
여의도에서 요란스런 우리 문화 잔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의 문화적 감각은 매우 어설펐다. 초, 중고교 12년 동안 특별한 ‘문화 교육’을 받은 경험도 부재했으며, 우리의 문화는 오히려 외국의 문화보다도 어색하고 낯설은 영역이었다. 우리가 가장 쉽게 접했던 것은 소위 ‘백과사전류’의 지식과 ‘세계문학전집’으로 소개된 외국의 문학이었다. 우리의 문화는 숨어있는 것을 찾고, 모르는 것을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5공 신군부는 일종의 국민 기만책으로 이러한 프로그램을 기획했지만, ‘국풍 81’이 반드시 부정적 영향만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난장판처럼 우리 문화를 시장 좌판대에 올려놓고 떠들썩하게 벌인 한바탕의 무대는 우리 문화의 세계를 종합적으로 알려주는 정보의 광장이었다. 인터넷 같은 정보 제공처가 없던 시절 우리 문화의 소개는 그들의 의도와는 별개로 80년대를 전통적인 문화를 탐구하는 시간으로 만들었다. 일종의 ‘한국 전통문화’의 르네상스가 열린 것이다. ‘국풍 81’과 80년대 대학 문화 속 ‘전통문화’와의 연관은 무척이나 어색한 조합임에도 ‘국풍 81’은 시대의 전조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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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난 대학 시절 시간 속 흐름이 과거로서 잊혀져간다. 지금의 시간이 또다시 과거로 흘러가는 것처럼....